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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관용 (미 07:18-20, 롬 12: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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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 유엔사무총장과 유네스코 사무총장은 지난 2월 21일 유엔본부 에서 기자 회견을 갖고 올해를 `세계 관용의 해'로 공식 선포했습니다.

유엔은 지난 48차 총회에서 유네스코의 제안에 따라 결의안 126호를 통해 올해를 세계 관용의 해로 결정했었습니다. 이 결정의 배경에는 2 차대전 이후 세계 정치질서를 지배했던 냉전 구도가 붕괴되고 나서 인 종문화종교적 차이로 인한 지역 분쟁이 급증하는 현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스웨덴 웁살라대학 평화 및 분쟁연구소의 집계에 따르면, 지난 89년 부터 94년까지 지구상에서는 모두 90건의 무력 분쟁이 발생했습니다.

이 가운데 국가간의 전쟁은 단지 4건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인종, 종 교, 정치체제, 영토를 둘러싸고 벌어진 국가 내부의 싸움이었다고 합니 다. 관용하지 않고 화해하지 못하는 인간의 욕망 때문에 이웃으로 지 내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적으로 변하는 원시적 상황이 21세기를 목전에 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간의 차이나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정신은 21세 기를 눈앞에 앞둔 인류의 가장 엄중한 과제라는 것이 유네스코의 관용 의 해 제안 설명입니다. 유엔이 관용의 해를 통해 막으려는 것은 특정 민족과 인종이 우월하다는 인종주의, 자민족 중심주의, 극단적 민족주 의, 외국인 혐오증, 종교적 적대 등입니다.

유네스코는 관용을 '편견과 독단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해석하고 있 으며 '타인에 대한 선입견 없는 긍정적 태도'라고 풀이하였습니다. 또 개인적 차이와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며, 남의 권리와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결의문은 모든 인간은 똑같이 존엄하지만, 재능이나 신념 또는 신앙 등은 다를 수 있 다. 이러한 개인적 차이야말로 개인과 고유의 문명을 풍성하게 하는 요인이라고 규정하면서 누군가를 배제하려는 행동 규범을 피하는 것 이 관용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다양성을 거부하는 사람들 하나님께서는 이 세계를 다양하게 만드셨습니다. 인간을 만드실 때 도 다양한 인종, 다양한 언어, 다양한 민족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하 나님께서는 이런 다양한 세계가 서로 협력하고 서로 이해하며 서로 사 랑함으로 조화를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바로 이런 하나 님의 다양한 세계를 파괴하고자 인간 속에 욕심을 불어넣고, 그 욕심 을 통하여 나와 다른 생각이나 피부 색깔을 가진 사람을 미워하고 배 척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나와 다른 사람을 용납하고 함께 지낼 수 없는 인간의 배타적인 태도는 바로 다양하게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 님을 거부하고 대적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에 보면, 처음에는 인간이 한 언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바벨탑을 쌓아 하 나님을 대적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들의 언어를 다 양하게 만들어 버리셨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언어가 획일화 될 때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여 인간의 왕국을 세울 가능성이 있음을 뜻하 는 것입니다.

다양성을 거부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 니다. 백인들은 백인 우월주의를 주장하면서 다른 인종들을 멸시하였 고, 서양 문명의 탁월함을 내 세웠으나, 요즈음 와서는 그 문명이 자연 을 파괴하고 인간을 더욱 타락케 하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서 서양 문명과 다른 동양 문명에 대하여 눈뜨기 시작하였고, 오히려 그 동양 문명 속에 아주 높은 정신적인 문화가 깃들여 있음을 발견하 게 된 것입니다.

단일 민족으로 오천년의 역사를 살아온 우리는 타민족에 대하여 아 주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 와 있는 중국 화교 에 대하여 배타적이었고, 요즈음 동남아에서 들어온 외국 근로자들에 대하여 관용적이지 못하여서, 저들에게 아주 나쁜 인상을 심어 주고 있습니다. 이런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모습은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자기 교파나 교단만이 '정통'이요, '복음주의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교파나 교단들을 정죄하고 연합이나 일치를 거부하여 온 것이 대 체적인 한국 교회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정통'이나 '순수'를 주장한 교단일수록 순수하지 못하였고, 복음주의를 내세우는 교회일수록 비복 음적이었고, 에큐메니칼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교단의 이익만을 앞세 우는 비에큐메니칼 교회도 있습니다. 여기에다 우리의 분단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하여 극단적인 반공주의가 철저하게 교육되면서, 한국 교 회는 대체로 지극히 폐쇄적이고 독선적이며 배타적인 교회가 되었습니 다.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개신교끼리도 이러하였으니 하물며 불교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카톨릭 교회에 대해서도 지극히 배타적이요 폐쇄적이었습니다. 이런 한국 교회의 폐쇄성은 한국 사회의 변화에 아 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였고,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여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을 뿐입니다. 결과적으로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다양성을 파괴하는 마귀에 동조하여 행동한 꼴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라 오늘 읽은 로마서 12장 말씀에 보면, 관용의 정신이 잘 드러나 있습 니다. 14절에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하고 저 주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나와 다른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교 회를 핍박할 때 그 사람들을 미워하고 저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 복하라는 권면입니다. 핍박하는 사람이 다른 종교인일 수 있고, 혹은 공권력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지만, 어느 경우든 그를 미워하고 저주 하는 대신 축복하여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타 종교에 대해 서나 사회에 대해서 열린 마음을 가지라는 권면입니다. 미워하는 마음 이 폐쇄적이라면, 축복하는 마음은 열린 마음입니다. 우리가 타종교에 대해서 열린 마음을 갖는다고 하여 그 종교의 신앙이나 교리를 수용한 다는 것은 아닙니다. 함께 진리를 찾아가는 구도자요, 순례자로 인정하 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관용의 정신입니다.

15절에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 라고 하였습니다. 이 역시 관용의 정신을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뻐하는 사람들과만 함께 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갖습니 다. 우리는 끼리끼리 모여 동아리를 만들고, 다른 동아리들과는 연대 (連帶)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뻐하는 사람들은 기뻐하는 사람들끼 리 모이고, 우는 사람들은 우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교회라면 그것은 진정한 교회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폭넓은 신앙을 가졌다면 나와 다른 생각이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용납하고, 그들과 대화할 수 있으며,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다른 사람의 개성과 생활 습성을 이해 하면서 서로 대화하고 협력하고 연대하여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 는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서로 한 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 한 사람들과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습 니다. '교만한 마음'이란 다른 사람과 나를 구별짓는 마음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마음이 바로 교만입니다. 이런 교만한 마음을 가질 때 '비천한 사람'과 사귈 수 없고, 자기보다 월등한 사람에 대해서는 비굴한 마음을 갖게 되므 로 그들과도 사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 스스로 지 혜 있는 체하지 말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잘난 체하지 말라는 말씀이라 고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잘난 체하는 사람을 좋아할 사람 은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그는 고립될 것이고 그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고 말 것입니다. 잘난 체하는 사람들이 많은 공동체는 결국은 깨 어지고 말 것입니다.

18절에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 하게 지내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보면 여러분 쪽에서라고 하였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먼저 관용의 정신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상대방이 관용의 정신을 갖고 나를 받아 주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가지고 상대방을 용납하고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라는 말씀 입니다. 여기에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라고 하였습니다. 나와 같 은 생각을 가진 사람만 아니라,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도 화평하라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그와 더불어 화 평하게 지내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 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라는 잠언서 말씀 인 용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관용의 정신이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를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용에 근거하여 우리가 이런 관용의 마음을 가져야 할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우 리를 관용하여 우리의 죄악을 모두 소멸하시고, 우리를 새로운 하나님 의 자녀로 받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미가서에 보면, 주 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살아 남은 주의 백성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진노하시되, 그 노여움을 언제까지나 품고 계시지는 않고, 기꺼이 한결 같은 사랑을 베푸십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사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그의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 하시고 보내어 십자가를 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용은 결코 죄악 을 그대로 두신 채 우리를 용납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죄악을 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그 근거에 의하여 우리를 받아 주 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주의 발로 밟아서, 저 바다 밑 깊은 곳으로 던지십니다(미가 7:19).

오늘 우리가 관용의 정신을 가지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고자 할 때 결코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불의나 죄악을 그대로 용서하고 받 아 드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의 희생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관용을 베푸신 것처럼, 우리가 모든 사람과 화평하기 위해서 는 우리 자신의 희생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희생 없이는 진 정한 관용이란 불가능한 것입니다. 나의 옳음만을 주장하고 희생이 동 반되지 않을 때, 그것은 오히려 상대방을 정죄하고 몰아내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요, 상대방이 나를 볼 때 교만한 자로 인식할 뿐입니다. 바 리새인들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자기 의만 주장하였기에 상대적으로 자기와 같지 않은 사람은 죄인으로 몰아붙여, 거기에 연대나 화해나 하나 됨이 발붙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역사가 오랜 교회에 텃세가 있는 것은 거기에 바로 바리새파 교인 이 있음을 뜻합니다. 자기 의만 주장할 뿐 그 의를 뒷받침할 희생과 봉사가 없기에 거기에 사랑이 없고, 관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 는 결국 폐쇄적인 교회요 결코 발전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실 현하는 일에 오히려 장애가 될 뿐입니다. 교회는 항상 자기를 희생하 고 믿음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열린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 다. 관용이란 너그러움이요 열린 마음입니다. 누구나 받아 드리되 그가 안고 들어온 죄악은 하나님께 사함을 받도록 인도하며, 그가 가진 나 쁜 습성에 대해서는 인내와 겸손으로 고쳐 가도록 이끌어 주는 자세가 바로 관용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이런 관용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결국은 자기 희생이 따 르고, 인내와 겸손, 절제와 온유가 필요한 것입니다. 관용은 자기 욕심 을 버리지 않고는 결코 가질 수 없는 마음입니다. 나의 마음의 자리를 비우지 않고는 결코 상대방을 내 속에 받아 드릴 수 없습니다. 오른편 뺨을 때리는 사람에게 왼편도 돌려 댈 수 있는 인내심과 용기가 없이 는 관용이 불가능합니다.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는 사람에게 십 리 를 같이 가 주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억지를 부리는 사람에게 화를 내지 말고 그 억지를 받아 주고 그보다 더 양보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자기의 억지를 깨닫게 되고 회 개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관용이란 억지와 문제를 가진 상대방까지도 받아 드리면서 그 억지와 문제를 소 멸시키는 힘인 것입니다.

세계는 지금 급격한 변화를 이룩하고 있습니다. 세계무역기구(WTO) 의 출범으로 무역의 장벽을 헐고 세계를 하나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 다. 뿐만 아니라 컴퓨터와 통신의 혁명으로 세계는 아주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과거에 닫혀 있던 모든 세계가 이제는 모두 열리고 있는 때 입니다. 우리가 뒤늦게 세계화를 부르짖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세계는 지금 활짝 열려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계가 모두 열어 놓고 있는 때 에 내 것만을 고집하고 내 나라, 내 민족만의 이익을 주장하게 되면 결국 그 세계에서 고립되어 마침내는 도태되고 말 것입니다. 북한이나 그 비슷한 미안마가 지금 그런 위기에 직면하여 있습니다. 그래서 그 들도 살아남기 위하여 문호를 개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살필 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관용의 정 신입니다. 관용의 정신을 가지고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용납하 며 함께 더불어 화평하게 살아가는 길을 모색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살던 시대는 지 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양하게 창조하신 세계를 체험하지 않으면 안될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 우리는 물론 우리 자신의 고유성과 본질을 더욱 분명하게 하여 간직하여야 할 것입니다.

동시에 이제까지 우리가 쌓아올렸던 담을 헐고 다양한 세계 속으로 들 어가야 할 것입니다. 교회와 세상 사이에 쌓아올렸던 담을 헐고 세상 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관용의 정신을 가지고 이 세상을 변화시키 기 위하여 세상 속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교회는 이제 까지 쌓아 올렸던 교파간의 장벽들을 헐고 연합과 일치를 모색하면서 하나 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나와 다른 신앙형태를 가졌다 할지 라도 근본에 있어서 같은 신앙고백을 할 때는 언제나 연합하여 함께 변화의 새역사를 위해 일하여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모든 갈등 관계 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담을 헐어 내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용납 할 수 있도록 관용의 정신을 전파하고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양하게 지으신 세계에 대한 이해를 가질 때, 우리는 서 로 다른 모양, 다른 언어, 다른 문화에 대하여 관용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을 것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관용의 마음으로 모든 악의 요 소들을 몰아내고, 이해와 협력과 봉사로 조화를 이끌어 내야 할 것입 니다. 그럴 때 거기에 다양하면서도 조화를 이룬 사랑의 공동체인 하 나님 나라가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너그럽고 열린 마음인 관용의 정신을 가 지고 교회를 사랑의 공동체로, 한국 교회를 일치로, 이 분단된 민족을 통일로, 이 세계를 평화로 이끌어 가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끊임없 이 기도하고 노력하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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