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영원 전에 계획된 구원 (엡 03:1-4)

첨부 1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비밀을 알려 주셨는데 그 방법을 계시라고 말한다. 바울이 비밀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우리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계시는 ‘덮은 것을 벗긴다’ ‘뚜껑을 연다’ ‘보자기를 벗긴다’는 뜻이다. 지금 하나님은 그것을 벗겨서 바울에게 ‘계시’로 알려 주셨다는 것이다.
‘계시’ ‘비밀’이란 인간의 모든 수단과 방법으로는 전혀 알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등장한 말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비밀을 계시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의지와는 아무 관계없이 기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로 하여금 그 말씀을 듣고 반응하고 의지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즉 우리의 반응과 더 나아가 책임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말씀을 알게 하시고 그것을 제시하셔서 우리의 반응을 요구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을 ‘그가 이루고자 하시는 것을 이루고야 마는 분’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비밀-영원, 천국, 하나님과의 교제, 영혼문제 등-을 알려 주시기 전에는 도저히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죄인들이다. 그 내용을 하나님이 계시하셔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설명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그런 내용을 받아들이도록 권유하는 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그 내용을 우리에게 받아들이도록 권유하고, 우리는 자신의 선택 여부에 따라 받아들이고 또 안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내용을 설명하시고 우리에게 받아들이도록 하게 하는 하나님의 요구는 그 자체가 이미 우리를 자녀로 삼았기 때문에 꼭 결과되어야 하는 방법인 것이다. 누구는 일찍 누구는 늦게 반응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 결국은 하나님의 의도대로 이루어지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면 구원의 조건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그 사람을 구원시키기로 작정하셨느냐의 여부가 조건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한 번 구원시키겠다고 작정하시면 결코 실패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구원을 시간상으로 이야기 할 때 ‘태초’ ‘영원’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한번 작정하시면 끝까지 실패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 사람을 내 자녀로 삼고 천국에서 영원토록 살게 하겠다고 정한 이상은 그 사람의 의사로 결정하고 가겠다고 반응 할 때까지 설득시키시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요구한 자리까지 우리 스스로 가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항복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실존적인 공간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기도 하고 보류하기도 하고, 받아들이기도 하여 내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 속에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결정하고 항복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결코 우리를 강제로 로보트처럼 시키는 대로 하도록 만들지는 않으셨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이미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면 전도는 왜 하느냐를 묻게 된다. 사실 복음의 내용을 제대로 설명하면 이런 의문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는 죄인이요, 우리가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셨다면 우리가 굳이 믿어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는 것이 은혜요 선물이라면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좋은 것이 아닌가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 문제를 좀더 정확히 파악해 보자.
우리는 보통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습니다’ 고백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 것일까 엄밀하게 생각해보자. 누군가가 와서 믿을 것을 권면했기 때문에 나에게서 그 고백이 나온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누가 보냈는가 하나님이 구원시키기로 작정하셔서 그 사람을 보내신 것이다. 그래서 구원받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람의 전도를 받고 내가 반응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옳지 못하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
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
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
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3-15)”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은 그를 믿기 때문이며 그를 믿는다는 것은 그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했으니 복음의 내용을 받아들이겠다고 대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듣지도 못한 일을 어떻게 믿을 수 있으며, 듣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가 아닌가를 선택할 수 있겠는가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
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이 그를 보내심으로 믿게 하신 것이다. 구원시키기로 작정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누군가를 보내셔서 복음을 듣게 하심으로 그가 받아들여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확실하며, 우리의 구원이 어디서부터 계획되어지고, 우리가 어디서부터 구원을 받았는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구원받은 자들이다. 이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구원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서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실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라고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출애굽해서 광야로 가자 반응을 요구하셨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시면서 매를 드시는 것이다. 홍해를 건널 때까지 우리가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이때까지는 우리는 자각을 못 하는 것이다. 우리는 광야로 들어온 다음부터 감각이 생기는 것이다. 거기서부터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그의 뜻에 나를 순종시키고, 고쳐 나가고 나를 닦아 나가는 싸움터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애굽에서 살던 것만큼 편안하지 못하다. 그래서 불평이 쏟아져 나온다. 애굽에 있을 때는 배불리 먹었는데 광야에는 먹을 것이 없으므로 왜 우리를 출애굽시켰느냐고 원망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었을 때에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싸우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많이 경험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출애굽하여 광야로 나오자 그들은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을 경험하고, 밤낮 고생을 하고 기껏 목숨이나 연장하기 위해 만나와 메추라기만을 먹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악의 상태에서 전혀 다른 영역인 하나님의 자녀의 영역으로 옮겨 오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뜻대로 살게 하시려고 그분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인정시키고 납득시키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많은 반대를 하거 거역한다. 여기에 수많은 고생이 뒤따라 온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으로 신비로운 영역에 초대받고 들어온 자이며, 많은 것 중 단 몇 가지만을 납득하고 항복한 사람들에 불과하다. 아마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과 그를 믿어야 하며 그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납득하고 항복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나를 쓰시는 방법에, 그의 일을 이루시는 방법에 대해서는 항복을 하지 않는다. 나는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다만 그가 나를 완성의 대상으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의 인격의 변화를 요구하시는 것이다. 한 인격이 신의 성품에 참여되며,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함께 있어도 될 자로서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키며,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의 기쁨으로 원하시고 요구하시는 것이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