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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의 문 (요 1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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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갖고 살아 간다는 것,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의 眞髓는 무엇인가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신앙 생활의 구체적인 내용을 상실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이유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궁색하고, 신앙생활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 생활의 감격을 누리지 못하고 메마르고 무기력한상태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1)사람들은 대체로 교회에만 나오면 저절로 교인이 된다고 錯覺합니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해서 스스로를 敎人이라고 간주하고 맙니다. 주위에서 보더라도 그리스도인 됨에 대한 의미를 정확하게 고백하고말할 수 있는 분들이 의외로 적다는 사실 앞에 놀라곤 합니다. 교회에서 상당히많은 시간동안 복음을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세례문답등을 해보면 안타까운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생활을 오래한 사람들 중에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정확하게 신앙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결과적으로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지를 모르고 교회 속에 들어와 있는 교인이 상당수여서확신없는 교회생활 혹은 확신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교인들을 量産하게 된것입니다.
2)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의미를 분명하게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정말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 오랜 세월 교회안에 몸담고 있었던 사람들도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은 교회에 나오고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헌금하고 봉사하는 것이 신앙 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물론성경공부나 기도나 찬양이나 헌금이나 봉사가 우리의 신앙 생활을 신앙생활답게 하는 요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꼭 기억할 것은 성경을 읽는다는그 자체가 신앙생활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기도하는다는 그 자체도 신앙 생활은 아닙니다. 찬송을 하고 헌금을 하고 봉사를 하는 그 자체를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1.하나님의 신앙공동체와 문

본문은 <나는-이다>(I am)라는 예수님의 두 가지 유명한 선언을 통해서 교회의 이 두가지 딜레마에 대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자기계시는 <나는 문이다.>라는 선언과 <나는 목자다>라는 선언입니다. 이 두 가지선언이 어떻게 오늘날의 교회가 직면한 두 가지 문제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는지 함께 생각해 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로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요10:1)여기서 '우리'라는 것은 당시 팔레스틴 지역의 양들의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목자들은 개인적으로 양을 몇 마리씩 소유했습니다. 그런데 밤

중에 양들을 재울 때는, 개인적으로 마련된 우리 속으로 양들을 몰고가는 것이아니라 마을 공동의 우리에 맡겨 관리하였던 것입니다. 또 그 공동 우리를 지키는 관리자가 있었는데 본문에서는 그를 문지기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3절)
아침이 되면 목자들이 다시 와서 자기 羊들의 이름을 부릅니다. 우리가 개나애완용 동물에게 그 이름을 붙여서 부르듯, 팔레스틴 지역의 羊들에게도 이름이붙여져 있었습니다. 양들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목자의 음성을 듣고 우리에서 나옵니다. 그러면 목자는 다시 자기 양들을 데리고푸른 初場으로 갑니다. 그러기에 이 '우리'라는 것은 양들의 공동체 생활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共同의 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우리는 문자그대로 양무리들의 우리였던 것입니다.
주님이 (요 10:1)에서 이 '양의 우리'를 말씀하셨을 때 그 분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공동체를 생각하고 계셨음에 틀림없습니다. 구약 신앙공동체! 하나님의 백성!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주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시고 세우셔서, 이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하나님의 계획을 시작하셨지만, 그렇다고해서 이스라엘 민족들만 사랑사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사역의 출발점에 불과합니다. 신약에 오면 신앙의 공동체는 좀더 넒어집니다. 즉,이스라엘 민족뿐 아니라 열방의 모든 이방 민족들이 함께 이 하나님의 공동체안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이 신앙공동체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구약의 이스라엘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된 것이 바로 신약의 교회입니다.
양이 우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문이 필요합니다. 팔레스틴에서 사육하는 양의 우리는 높은 담으로 된 벽이 있고 문은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그 문에는 문지기가 있어서 그가 통과시켜 주어야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문이 단 하나의 문이었던 것처럼,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도 단 하나의 문을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태어나지않고는 그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신약의 교회라는 하나님의 백성의 무리 속에들어가기 위해서도 반드시 통과해야 할 하나의 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중생의 문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3,5)
예수님이 門이십니다. 그분을 통해서 들어가지 않는 사람은 모두가 절도요 강도라고 주께서 규탄하십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주님이 절도와 강도를 말씀하시면서 어떤 사람들을 영상했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2.역사적 배경
1) 요한복음 10장의 역사적 배경 수전절(受殿節)
이 말씀은 수전절 때에 선포된 것입니다. 하카누는 기원전 168년 알렉산더대왕이 자신의 영토를 나누어서 다스렸는데 유대지역을 포함하여 그 주위를<시리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시리아를 다스리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팔레스틴 지역을 완전 장악한 후, 유대인들의 성전 제사를 금지해 버렸습니다.
그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께 제사하던 이을 금지시켰고 하나님대신 제우스신을 성전에 갖다 놓았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이 제일 싫어하는 돼지를 잡아서 그 머리를 제단에 올려 놓고 예배하라고 강요하였습니다. 유대인들모욕하기 위한 이 방법을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나중에는 먹고 살기 위하여 악한지도자들과 타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화가나서 분노의 칼을 든 가문이 마카비형제인데 이들을 하나님의 땅을지키기 위하여 게릴라 전쟁을 벌렷습니다. 2-3년동안 혈전을 벌려서 그 악한 세련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더렵혀진 성전을 깨끗하게 하였습니다. 성잔을 회복하던 그날 금촛대를 켰는데 하루 정도 밖에 쓸수없는 등잔의 기름이 8일 동안 타올랐다고 합니다. 그 불빛 아래에서 다시 찾은 성전을 기뻐하며 춤을 추는데 이

것이 하누카, 受殿節의 유래입니다. 이러한 유래 때문에 수전절이 되면 8일 동안 촛불을 켰으며 이 역사적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찾았습니다. 즉, 성전을 되찾은 것은 그들의 투쟁이나 노력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3.당시 바리새인들의 신앙

본문의 '절도와 강도라는 것은 당시 바리새인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더불어 격렬한 논쟁을 벌이던, 바리새인 같은 당시의 종교인들을 대상으로 말씀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됩니다. 자칫 우리는 바리새인들을나쁘게만 매도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주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또 하나님을 향한 철저한 봉사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없이 하나님을믿으려고 한것입니다.
나는 문이다. 이 문을 통과하지 않고 이 문을 들어가려 하는 것은다 절도며 강도다.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 찾아오신 분!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를 해결하시고, 하나님과 죄인을 화목하게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요, 그 백성이 되게 하고자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그런데 하나님을 경배하고 충성을 다하고자 힘썼던 유대인, 특히 바리새인들이 그들을 위해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슬픈아이러니입니까 오늘 날 교인들 가운데 이런 사람이 없겠습니까 예수를 빼놓고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메시야 되심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책임있는 응답을 강조하지 않고 막연히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것은우리를 바리새인으로 만들어 버릴 가능성이 많습니다.
바울이 바울 되기 전에 가졌던 결정적인 결함이 이것이었습니다. 그는 바울이되기전에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것도 열심히 믿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믿는데, 하나님 말고 또 누구를 믿으라고 하는가 하나님 외에 아무도 신앙의대상이 될 수 없다 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그 땅에서 척결하기 위해 다멕섹까지 쫓아갔습니다. 그는 그 정도로 열심이었던 것입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는 별로 큰 충격이 아니지만, 당시 유대인이나 바리새인들에게는 두 가지 면에서 굉장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1)바리세인의 첫번째 충격 누구든지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 속에 들어가는 사람은 유대인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예수님은 이제 모든 사람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아무나 오게. 이 주님의 초청은 우주적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주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을 초청하셨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며 모든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충만하게 담겨져 있습니다.
2)바리새인의 두번째 충격/ 나로 말미암아
그들은 지금까지 메시야 되신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고 하나님과의관게를 맺고자 애썼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나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이 문은 구

원의 문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이 없이는 그리고 그리스도에대한 분명한 응답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할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고 해도 하나님 앞에 세울 수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선언하신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분명한 관계를 맺었습니까

4.우리에게 주시는 교훈
1)유일함
나는 문이다 영어로 I am a door아니라, I am the door입니다. 뜻 그대로 다시 옮기면 하나 밖에 없는 그 문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이야기) 노아의 舫舟에 門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 문을 열지 않고는 아무도 방주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 문이야말로 노아 시대에 살고있었던 모든 사람들의 救援과 滅亡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문이었습니다. 이 방주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문 밖에서 선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북었습니다. 그 문을 통해서방주 안에 들어온 노아의 8가족만이 구원을 받았음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계획한 유일한 구원의 문을 통과하셨습니까 방주에 단 하나 있었던 그 문은 하나님이 구원의 계획 가운데 예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감사해야 합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에게주어진 가장 중요한 단 하나늬 질문은 이것입니다.
당신은 방주 안에 있습니까 아니면 방주 바깥에 있습니까당시은 그리스도안에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그리스도 바깥에 있습니까(행 4:12)절에는 명확하게 말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요 14:6)도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꼐 올 자가 없느리라.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로 是非를 그치지 않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렇게 독단적으로 단 하나의 문만을 준비하셨습니까그런 분에게 이런 반문을 합니다.
<도저히 희망이 없었던 당신을 위해서 주님께서 단 하난의 문을 열어놓으신 그 사실이 감사하지 않습니까>
어쩌면 오늘 이것이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주신 구원의 기회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함이나 노력으로는 결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구원의 좁은 문, 유일한 문을 예비하셨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잠시 후 이 땅에는 진노의 날이 찾아올 것입니다. (계 6:17)에 보면 [진노의 날]이 이르렀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향해서 인내하시고, 참으시고,구원의 복음을 던지시면서 초청하시던 하나님이 역사의 시간을 마침내 진노의시간으로 바꾸시는 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이 문이 언제까지나 열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직은 누구에게라도 열려 있습니다.
2) 풍성함
'우리'안에 들어가는 양들에게는 쉼이 있고, 保護함이 있고, 安息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한 번 들어간 사람에게는 놀라운 自由가주어집니다.
그러나 잘못하면 다시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온다는 것은 구원을 잃고 바깥으로 빠져 나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적용을 하면 안됩니다. 목자와 한번 관계를 맺고 그 목자의 양이 되어 목자의 우리 안에 들어간 사람은그 목자와 양의 관계를 절대로 변질시킬수 없기 때문입니다.
날이 밝습니다. 이튿날이 되었습니다. 목자가 자기 양들의 이름을 부르며우리에서 나오게 합니다. 어디로 갑니까 푸른 초장으로 갑니다. 그 초장에 가서 목자와 같이 있으며 산책도 합니다. 구원은 내가 건짐을 받았다. 이제 안전

하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에는 좀더 적극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풍성한 삶의 시작인 것입니다. 우리는 목자되신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그 모든 풍성한 것을 즐기는 풍성한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영적 지도자였던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신앙을 지켜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제시하는 여러 수준의 요구들을 지키려고 애쓸때, 그 노력의 결과에 따라 하나님과의 관게가 좋아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한것은 바리새인들의 교훈을 뒤집는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우리에게 허락된 영원한 생명을 지켜주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들어 갔을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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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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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나는 문이다라는 예수님의 위대한 선언과 함께 본문에 기록된 또 하나의위대한 예수님의 선언은 나는 선한 목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문을 통과할 때, 우리는 '양의 우리'안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초장에서 맘껏 즐기고 넉넉하게 먹다가 언제든지 다시 돌아올 수가 있습니다. 목자와 양 사이에끊을 수 없는 관계가 맺어졌기에 양은 목자의 보호속에 살게 됩니다. 이것은신학의 술어로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는 삶>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철저한 주권 아래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노라.주께서 양들을 보호하시는 선한 목자라는 선언에는 세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1.생명을 지켜준다는 것입니다.

2.풍성한 양식을 공급한다는 것입니다.

3.좋은 길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을 때, 주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영원한 생명이 잃어버려지지 않고 지켜지고 있는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우리의 확고부동한 결심때문이 아닙니다. 목자 되신 주께서 우리를 보호하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지키기위하여 철저히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여 주신 주님께서 계속하여 내 구원을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사랑,그 분의 은혜, 그 분의 구원의 약속이 우리를 보장하십니다. (요 10:28)을 읽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신앙이나, 개인의 자유도 하나님을 향한 이 믿음도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결심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하셨습니다. 양은 아주 약한 동물입니다. 모든 동물은 저마다 보호할수 있는 보호책이 있어서 어던 동물은 주변의 자연색상과 비슷한 保護色을 가지고 있기도하고 날카로운 부리로 자기를 방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양은 자기를 방어할수 있는 무기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제 먹을 것도 마련하지 못하고 방향감각도 매우 둔하여 자기 집을 찾아 갈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목자의 음성을 들으면 됩니다. 목자가 양을 보호하고 먹이를 공급하고 가야할 길을 인도합니다.
우리도 진리의 말씀으로 영적인 양식을 공급하고 성령을 통하여 날마다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그 분을 목자로 모실때 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양은철저히 의존해야살수 있는 동물입니다. 그런데 제멋대로 고집을 부린다면 심각한 문제들이 야기 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문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 속에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목자로 삼고 선한 목자이신 주님만 철저하게 의존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철저하게 의존한것 자체가 구원을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 순간에 구원은 이루어졌습니다. 내가 구원 속으로 들어갈 때, 그본이 나를영원히 지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 앞에 나 자신을 기쁘게 내놓아야합니다. 나를 인도하기 원하시는 그분께 기꺼이 나아가,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오늘 하루도 그분을 따라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철저하게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니다. 주님은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원칙을 이 위대한 선언에서 우리에게 啓示하십니다.
우리는 참된 목표도 없이 방황 가운데 불안한 인생길을 가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나의 구원이 되어 주셨습니다. 나의 인도자로서 내 평생삶의 주관자가 되어 주신 놀라운 주님!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문이다.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나는 선한 목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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