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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근심하는 삶의 치유 (빌 0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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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길모어가 표현한대로, 참으로 근심된 일이많고, 곤고한 일이 많고, 죄악된 일이 많은 세상입니다.

따라서 이런 세상속에 사는 우리 인생은, 아침에 눈을 떠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때 까지 근심과 걱정과 염려거리 속에서, 마치 물고기와 같이 헤엄을 치면서 사는, 그런 인생을 산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들속에 있는 수 많은 근심거리, 걱정거리, 염려거리가 무엇입 니까 과연 이러한 근심, 걱정, 염려, 불안이 우리들에게 무슨 의미를 주고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한번 살펴보고, 묵상함으로서 근심과 염려의 물속에서 탈출해 보고자 합니다.

 1.근심은 무엇입니까.

근심은 한마디로 비생산적이요, 비 신앙적인것입니다.

아무리 근심을 많이 한다고 해도 더 나아지는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염려를 많이 해도 해결되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마 6:27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염려하므로 그 키를 한 자나 더 하겠느냐 고 했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로마인들보다 키가 작았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항상 저들을 지배하는 로마인들보다 키가 작다는 열등감으로 가득차 있 었는데, 우리 예수님게서는 그런 열등감을 가진 유대인들이 아울러 그 키가 작다는 것 으로 인해 근심하거나, 걱정하거나, 염려한다고 한들 그 키가 더 자라지 않는다는것을 말씀하시고 있는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비 생산적인 근심에 대한 정의를 내릴 때, 근심은 한 사건에 대한 반응일 따름이지,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은 아닌것 입니다.

구체적인 행동은 커녕 이런 근심과 염려가 더해 갈수록, 축적될수록, 근심, 그 자체가 우리 인간을 파괴하는 힘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예로, 제 2차 세계 대전 때, 전선에서 연합군이 독일군과 일본군에 대항해서 직접 전 사한 사람의 수는 35만명인데 비해, 남편이나 아들을 전장에 보내 놓고 근심하거나 혹 은 전쟁의 공포속에서 불안해 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이 100만명이 넘었다는 통 계가 나왔습니다.

이런 경우를 통해 볼 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질병이 대부분 염려와 불안과 근심때 문에 오는 경우가 많은것을 알 수 있읍니다.

현대 학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고혈압, 저혈압, 류마티스 ,감기, 신경성 관절염 , 좌골 신경통 , 위장병등의 질병도 70% 이상이 이런 염려와 근심을 통해 볼안과 공포속에서 생긴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근심이라는 것이 이렇게 비 생산적인 파괴적인 것이 됩니까 그것은 근심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닌 비 신앙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염려와 근심은 죄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하는 죄인것입니다.

마 6:31에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근심과 염려는 신앙적인 하나님의 백성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신앙인인 이방인의 것이라고 명백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 다시 하번 더 물어 봅시다.

왜 근심하십니까 걱정 염려 불안 초조 그 근심 걱정 염려 불안 초조의 의식의 밑 바탕에 흐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불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 신앙이 모든 염려와 근심과 걱정의 밑 바탕에 흐르고 있습니 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 그 중에서도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 내 삶의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나를 돌보시고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 ! 내 삶속에 들어 오셔 나를 조정하시는 하나님 ! 이런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 신앙이 바로 근심과 염려인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위대한 성자 기도의 성자인 죠지뮬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염려의 시작은 신앙의 끝이다.

그러나 신앙의 시작은 염려의 끝이다.

성도 여러분 ! 근심과 염려는 비 생산적인 것이요, 비 신앙적인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이런 비생산적이요 비신앙적인 근심과 염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 비 생산적이요 비 신앙적인 근심과 걱정에 대한 처방은 어떤 것입니 까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 말씀을 중심으로 2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1)...하나님께 우리의 근심거리를 맡기는 것입니다.

시 37:5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시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려라 너를 붙드시리라 이 말씀은, 우리의 모든것을 세상의 창조자와 조성자요 주관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을 이루시고 우리를 붙드신다는 것입니다.

마 6: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 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을 보라 귀하지 아니한가 공중의 새보다 더 귀한 성도 여러분 ! 근심 걱정과 염려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우리가 이 세상의 주관자라고 생각하는데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있어야만 그 문제가 해결되어질것 같고, 내가 개입되어져야만 그 일이 되어질것 같은데, 나는 힘이 없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걱정, 근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무한하신 능력의 하나님이 계시고 그 무한한 능력속에 우리의 유한함 이 파뭍칠 때 모든 걱정 근심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 우리의 먹고 사는 것 누구의 영역속에 있는 것입니까 다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존 다 하나님께 맡겨버립시다.

우리의 경제, 우리의 죽음, 이렇게 우리의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맡길 때, 우리는 근심과 걱정을 극복할 수 있습 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을 때, 한가지 꼭 기억해야 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렇게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고 해서, 우리에게 있는 모든 근심걱정거리가 우리의 삶속에서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인생 자체가 원래 근심과 걱정이 있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근심이 없는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무조건 잔잔한 인생, 고요한 인생인 것은 아닙니다.

근심이 없는 삶이라는 것은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더라도, 나는 절대로 가라 않지 않는다 라는 신념과 그에 따른 신앙인 것입니다.

그 예로 갈릴리 호수에서 풍랑이 칠 때 배속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의 모습 갈릴리 호수위로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 그런 예수님을 보고 바다위로 역시 걸어가던 베드로의 모습, 바로 이런 모습이, 우리가 당면한 근심된 일속에서 그 근심거리를 극복하고 평안을 이 루는 것입니다.

언젠가 두 사람의 미술가가 평화라는 제목으로 각기 그림을 그렸습니다.

한 사람은 고요한 농촌의 전원풍경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토지가 기름져서 곡식이 무르익고 꼬불꼬불 좁은 길이 한가롭게 뻗쳐 있는 농촌 풍경 이었습니다. 풍차가 돌고 축사에는 소, 돼지, 닭들이 한가롭게 쉬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햇살이 눈부시게 농가의 지붕을 비춥니다, 그런데 다른 한 화가는 그것과 전연 다른 평화의 개념을 그의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 그림은 사나운 폭풍이 휘몰아치는 그림이었습니다.

나무들이 모두 뿌리가 뽑히거나 꺽어지고 돌멩이들이 강풍에 날리며 하늘은 먹물을 끼얹은 듯 시커멓게 흐렸고 그 사이로 이따금씩 번개불이 번쩍입니다. 골짜기 밑에는 홍수와 바람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어 난장판입니다.

이 화가는 어떻게 여기서 평화를 볼 수 있다고 생각했겠습니까 폭풍이 몰아치는 산 밑 낭떠러지에 우뚝 솟아 있는 바위 ...

그 그늘에는 조그만 새둥지가 하나 있고 , 그 안에는 작은 새 한 마리가 외부의 폭풍이나 홍수 따위는 일체 아랑곳 없다는 듯이 조용히 앉아 있었습니다. 아무 불안 이나 공포가 없이 조용히 앉아 있는 이 작은새의 모습에서 그는 진정한 평화의 모습 을 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평화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복잡한 사회 정세나 국제 기류에서 오는 온갖 폭풍과 홍수..., 그러나 그런 상황속에서도 당황하거나 초조하지 않고 초연한 마음의 자세를 가짐으로 삶의 평화를 소유할 수 있는 자 , 바로 이런자가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기고 주 안에서 안정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 벨전 5:7 , 너희는 너희의 염려를 다 주께 던져 버려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 이니라 이렇게 우리의 모든 근심을 주께 맡겨 버리는 것이 비생산적이요 비신앙적인 근심되는 삶을 치유하는 첫번째 방법입니다.

 2. 비생산적이요 비신앙적인 근심하는 삶을 치유하는 두번째 방법은 기도와 간구입니 다.

이 방법은 우리속에 잠재되어 있는 근심 걱정 거리를 없애기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막 11:24 ,믿고 기도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러하면 그대로 되리라 마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문을 두드 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렘 33:3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 을 네게 보이리라 성도 여러분 ! 기도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만변통치약입니다.

염려와 근심거리는 다 기도하라는 신호인 것입니다.

환난과 고통 모든 근심거리는 우리가 세상으로 기울어져서 하나님과 멀어질때 하나님 께서 우리를 부르는 사랑의 신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다면 이제 그 문제에 대한 해결을 위해 기도해야 되는 것입 니다.

아니 우리에게 근심거리를 주는 그 환경까지도 변화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나도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경우 풍랑속에서 물위로 걸어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자신의 모든 것을 예 수님께 맡기고 걸어갔지만 얼마가지 못해 주위의 환경,근심거리,풍랑을 보고 그만 좌 절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물에 빠져 버린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연약함으로 우리들의 주위에 포진해 있는 근심거리 자체를 없 애달라고 기도하고 간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런 근심거리가 나타날때 전혀 문제가 되지 않게 해 주소서라고 간절히 기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페이지라는 영국의 비행기 제조자가 어느날 시험비행중 비행기에 이상을 발견하게 되 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이상으로 착륙할 곳을 찾으려 했으나 마땅한 곳을 찾을 수가 없 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비행기 기관속에서 쥐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만약에 쥐가 비행기의 기계에 고장을 일으키는 날에는 생명이 위태로웠습니다. 그는 즉시 비행기를 하늘 높이 빨리 올라가게 했습니다. 얼마 후 그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차차 작아지기 시작하더니 아주 소리가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적당한 곳에 착륙하여 기계를 열러 보니 커다란 쥐 한마리가 죽어 있엇습니다. 쥐는 낮은 땅에 사는 고로 높 은 하늘 공기에는 견디지 못하고 죽었던 것입니다.

옳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생의 삶을 갉아먹고, 뼈까지 마르게 하는 근심이나 걱정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높은데로 향하게 되면 물러가게 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로 구원의 길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은, 우리를 근심의 사슬에 매어 있도록 버려 두지 않습니다.

아들을 보내신 이유는 이 모든 사슬에서의 자유를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게 간절히 기도하고 간구하는것 ! 부르짖고 매어달이는것 !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근심하는 삶이 치유함을 받는 방법인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비생산적이요 비신앙적인 근심거리가 걱정에 대한 처방을 말씀을 통해 교훈으로 받았습니다.

 3.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간 이후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근심하는 삶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한 신학자가 일세기를 살던 초대교인들의 삶이 기록된 서류들을 뒤지다가 그들의 문서 속에서 다음과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수가 굉장히 많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티테이오스 쟌 ,티테이오스 폴, 티테이오스 바나바...

이름앞에 왜 이 단어가 붙어 있습니까 티테이오스라는 단어의 뜻은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티테이오스 폴(염려하지 않는 사람 폴 ) 티테이오스 정정일(염려하지 않는 사람 정정일).

그들은 그들의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간증을 말할 때 염려하지 않는 다는 것이 기독교 적 삶의 보화라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 티테이오스 여러분이 되지 않겠습니까 송명희라는 시인의 글을 잠시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의 괴로움을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할때 예수님이 당신의 고통을 알아주시리 ! 당신의 눈물들을 모든 사람들이 보지 못할때 예수님이 당신의 눈물을 닦아 주시리 ! 당신의 십자가를 인간세상이 돕지 못할때 예수님이 당신의 멍에를 도와주시리 ! 성도 여러분 ! 여러분의 근심 걱정 초조 긴장 염려 다른 사람이 , 모든 사람이 , 아니 인간 세상이 알지못하고 ,보지 못하고,도와주지 못한다해도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근심과 걱정과 초조와 긴장과 염려를 알고 보고 결국에는 도와줄 줄로 믿습니다.

아무쪼록 근심된일이 많은 이 세상에서, 곤고한일이 많은 이 세상에서, 오직 주님께 모든것을 맡기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그 근심과 걱정과 염려의 강에서 벗 어나서 해방되어져서 새로운 희망에 찬 인생의 삶을 사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 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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