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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안 슬프고로 해 주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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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아침에 현관문을 열면 사과 몇 알이 담긴 검은 비닐봉투하며 손수 만든 듯한 찐빵 몇 개가 놓여 있다. ‘누굴까?’ 궁금함에도 아랑곳없이 어떤 때는 늦은 밤에, 또는 이른 아침 현관 앞에는 가끔씩 뭔가가 놓여 있었다.
어느 날 모임이 있어서 수원 시내에 갔다가 밤늦게 돌아와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누군가 현관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사람이 들어오는 기척을 느꼈는지 사택 앞에서 구부정한 모습으로 황급히 돌아선다. “누구요?” 부르는 소리에 그 사람은 마치 도둑질을 하다가 들킨양 어쩔 줄을 모른다.
그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집안에서도 인기척을 들은 아내가 마당 불을 켜고 내다본다.
“아니. 정 집사님 아니세요?”
“죄송해요 목사님, 죄송해요…. 놀라셨죠?”
일흔을 훨씬 넘겨 홀로 사시는 정 집사님이 주름이 가득한 얼굴을 붉히며 안절부절이시다. 현관 앞을 내려다보니 뭔가를 담은 비닐봉투가 놓여 있다.
“늦은 밤에 웬일이세요. 집사님? 그리고 또 저 봉투는 뭐구요?”
“밤에 잠이 안 와서 밀가루를 부쳤는데요. 우리 목사님 생각이 나서요.”
그리고는 ‘휭’하니 돌아서서 부끄러운 듯 돌아가셨다. 그 동안 현관 앞에 놓여있던 것들은 모두 노(老) 집사님이 한 일이었다. 그 날 늦은 밤 아내와 함께 지짐이를 다 먹고 책상 앞에 앉았다.
“우리 목사님…”
목회를 막 시작했던 그 때도 들었던 귀에 익은 말이다.
따르릉 따르릉…….
90년 초 봄, 나른한 토요일 오후에 전화 한 통이 왔다.
“아버지께서 쓰러지셨다.”
목회를 시작한 지 일 년 남짓 되었을 때 목회를 하시던 아버님이 쓰러지셨다. 뇌수술을 받은 아버님은 교회를 사임하셔야 했고 갑작스러운 상황변화에 어머니와 갓 대학에 입학한 쌍둥이 여동생들은 어찌해야 할 지를 몰랐다.
“하나님, 잠시만 외도를 해야겠습니다. 동생들 대학 졸업하구 다시 목회하겠습니다.”
한참 동안 고민하며 생각한 결론을 하나님에게 통보하는 기도였다. 첫 목회지는 경상도 산골짜기 교회였다. 그 교회는 가정집을 전세로 얻어서 막 일어서는 때였고, 그래서 예배실은 방 두 칸을 터서 만든 작은 공간이었다. 어느 날 초저녁, 방에 앉아 있는데 예배실에서 기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님예…, 우리 전도사님이 아버님 때문에 슬프신가 봅니더. 요즘 전도사님의 설교를 들어도 슬프게 들리고예…. 하나님이 우리 전도사님 안 슬프고로 해 주이소. 안 슬퍼야 하나님 일도 잘 하실꺼 아닙니꺼?”
학생부 회장 주길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서 교회에 들러 기도드리는 소리였다. 주길이가 기도를 마치고 돌아간 후 예배실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 날 왜 그리 눈물이 나오던지…. 그리고 외도는 커녕 그렇게 ‘우리 전도사님’이라며 따르던 주길이의 송글송글한 도움을 받으며 그 곳에서 자그마한 예배당을 지을 수 있었다.
‘우리’ 라는 말이 무슨 힘이 있길래….
그 때 ‘우리 전도사님’을 위해 기도하는 주길이의 기도, 그리고 오늘도 ‘우리 목사님’을 생각하며 밀가루를 부치는 우리 교회 집사님의 몸짓과 손길, 생각해 보면 그것은 오늘까지도 신념을 가지고 자리를 지키게 하는 주님의 부르심이다. 그 기도와 그 몸짓이 끊임없이 온몸으로 응답하게 하는 삶의 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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