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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깊은 곳에서의 기도 (욘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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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 뱃속에 버림을 받은 요나는 비로서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의 채찍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비극의 밑바닥에서 그는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그가 버림을 받고 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전혀 느끼지도 못했고 감을 잡지도 못했었습니다만 그의 불순종이 극에 달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손을 펴시고 적극적으로 방향을 조정하기 시작하셨다는 사실을 그는 체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뢴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이 판단이 되어서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이 판명되기 전까지는 인간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습니다.
‘스올’은 지옥이라는 말로 고기 뱃속에 들어가 있는 상황을 묘사한 것입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여기에 나타납니다.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우리의 이성을 가지고는 판단이 되지 아니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요나의 사건을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셨다고 하는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계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기적은 계시의 싸인입니다.
자연기적을 통해서 자연의 주되심을, 치유기적을 통해서는 생명의 주되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모든 생명, 모든 자연은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 주성 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기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요나의 기적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저주를 받으시고 버림을 받아 스올을 체험하시는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마16:4이하).
예수님은 “너희에게 요나의 기적 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이 완전히 받으셔서 하나님으로부터 끊견진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완전히 버림을 받으신 예수님은 스울을 경험해고 지옥에 떨어진 것을 요나의 기적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2,3일 동안 인간이 살수 있을까요
화씨 104 도에서부터 180 도의 열기가 끊는 곳이며 또 먹은 것을 어떻게 이 고기가 토해 낼 수 있을까요, 이 모두가 하나님이 일으키신 기적입니다.
기적은 설명할 수 있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어도 믿는 것입니다.
고난이 복일 수가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 부르짖고 응답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난은 맵습니다.
고난을 당하기 전에 늘 주님과 가까이 하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계시가 없는 기적, 마귀가 일으키는 ‘기적’ 이라는 것에 미혹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병든 자가 일어나는 것만이 기적이 아닙니다.
병든 상태에서도 주님을 믿고 생명의 주인이 주님이신 줄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기는 신앙자체가 기적입니다.
병든 가운데도 찬송하고 기뻐할 수 있으면 그것이야말로 바른 믿음입니다.
요나의 기도는 진실했습니다.
만일 그 자리에서까지 그가 위선적인 기도를 하거나 거짓된 기도를 했다면 요나야 말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이런 때야 말로 사람은 진실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요나의 기도의 성격을 4가지로 분석해 봅시다.

1.정직한 기도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찌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 보겠다 하였나이다”(2:4)
요나의 기도는 솔직하고 진실한 정직한 기도였습니다.
4절 하반절의 말씀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주의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처소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그곳을 바라보겠다는 말은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손에 구원이 있기 때문에 주님을 바라본다는 말씀입니다.
가끔 어린아이들이 엄마 앞에 와서 무엇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어머니가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앞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그만 돌아가라고 야단을 쳐도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이 아이는 어머니의 마음을 바꾸어 보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치 이와 같은 어린아이의 모습을 기도인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뜻을 하나님께 주입을 시켜서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작전을 하는 태도는 진정한 의미에세 기도다 될 수가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정직하게 묻고 하나님의 뜻앞에 정직하게 순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두 가지 태도로 나타납니다.
한 사람은 그 고난을 여호와께로 가지고 나가는 자요, 또 한 사람은 고난을 지고 완악함으로 여호와를 등지는 사람입니다.
고난을 여호와께 나 내어 놓는 이것이 신앙입니다.
요나는 바다에 빠진 것이 자기의 실수나 사공들의 고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믿엇습니다.
“주께서 나를 깊은 바다에 던지셨으므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파도는 당신의 파도요 이 물결은 당신의 물결입니다.” 요나를 재판정으로 끌어내어 유죄판결을 내리시고 사형을 선언한 분이 바로 하나님인 줄을 인정한 것입니다.
모든 풍랑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이루실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심연에서 요나를 훈련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죽음의 고비를 넘긴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악한 수십만의 불신앙의 백성이 사는 니느웨에 가서 심판을 선언한다는 것은 생명을 내놓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죽으나 니느웨에가서 복음을 외치다가 죽으나 죽기는 일반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의미없는 죽음을 죽느니 차라리 복음을 외치다가 죽는 길을 택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람이 죽음에 직면하면 진실해지는 법입니다.
화씨 108도의 열기로 끊는 용광로 같은 생지옥에서 거짓과 가식의 허울을 쓸 사람은 없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에 여호와를 부르는 것이 상책입니다(시50:1).
아직도 심연의 체험을 못해 보셨습니까
감사함으로 더욱 하나님을 잘 섬깁시다.
스올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고통 중에 있습니까. 주님의 뜻을 바라봅시다.
이미 스올의 체험이 지나간 과거의 사건입니까. 당시에 드린 서원을 갚읍시다.
생명 내걸고 주의 복음증거하다가 세상 이별하는 날 주께로 갑시다.

2.참회의 기도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2:8)
참회란 ‘고백이 있는 기도’ ‘자기를 부정하는 기도’ ‘죄를 슬퍼하고 애통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죄를 슬퍼하고 애통하는 기도는 그 죄를 끊는 순간에 진정한 의미의 참회가 되는 것입니다.
요나는 아무것도 구한 것이 없습니다.
살려달라고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애통하고 있을 뿐입니다.
요나가 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긍휼을 베풀어 달라는 말밖에는 할 것이 없을 것인데 요나는 그것조차도 하나님 앞에 요청할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요나는 다시스로 향하던 눈을 다시 여호와의 전으로 돌이켰습니다.
거역하던 자리에서 순종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회개’는 마음과 생활의 방향을 180도 바꾸어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육지에 올라와서 한 기도가 아닙니다.
아직도 물이 영혼까지 둘러친 깊음 가운데서 드린 것입니다.
산의 빗장이 가로막는 상태에서 드린 기도입니다(5-6).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극한 고난의 상황에서 드린 기도입니다.
음부같이 어둡고 지옥같이 기막힌 거기에서 드린 기도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문제가 해결된 후에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문제에 휘말려 있는 상태에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더라도 주님만을 바라보겠다는 일사각오의 기도입니다.
요나는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렸으므로 하나님이 이지경을 빠뜨린 것을 인식하고 다시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돌이켜 보려고 금식도 하고 철야도 하고 별짓을 다해 보는 어리석음을 버립시다.
짧은 기도속에도 진정이 토해지면 하나님의 마음이 뜨거워질 것입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는 일사각오의 태도로 주님 앞에 섭시다.
하나님을 설득하려 하지 말고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설득을 당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3.감사의 기도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2:9상)
요나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 육신적인 관점에서 보면 감사할 조건이 하나도 없습니다.
살아날 가망은 전혀 없고 녹아드는 빛 한 점 없고 머리 위에는 노도 광풍이요 숨막히는 악취와 열기, 캄캄한 밤, 환란의 밤, 절망의 위기입니다.
그러나 그는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발견하고 그의 인격이 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안의 죽음이 불순종의 삶보다 낫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분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을 인생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구원하시려고 계획하시는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에 감사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장차 이 순간 이후 무엇이 그에게 닥칠지 전혀 예견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게로 돌아서서 주를 부를 수 있게 하신 그것을 그는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순간 만이라도 하나님을 부를 수 있다고 하는 그 사실에 그는 하나님 앞에 감사라고 표현을 했던 것입니다.

4.서원의 기도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2:9중)
요나는 희생과 헌신과 서원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가 서원을 드리고 있즞 하나님은 구원과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는 ‘약속의 하나님’ ‘구속주 하나님’ 이라는 뜻입니다.
약속을 충실히 지키시고 기도를 이루시는 인격적이고 구속주이신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에 요나는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모든 환난 가운데서 구원하시며 우리의 생명을 파멸에서 건지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아는 자가 바른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구원이 요나 자신에게 있다면 이미 여망이 없습니다.
구원이 환경으로부터 온다면 이미 소망의 줄은 끊어졌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로 말미암아기 때문에 아직도 소망이 있고 은혜를 힘입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는 ‘여호와가 구원하신다’ 는 뜻입니다.
요나는 스울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옥의 고통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는 바로 요나의 고백입니다.
환난가운데 처햇습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묵상합시다.
구원의 실체로 다가오실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관념이나 상상의 산물이 아닙니다.
인격체시요 실체이십니다.
기도하면 들으시는 하나님께 불러 아룁시다.
쏜 화살에 먹이가 걸린 것을 확인하듯이 기도의 응답을 체크해 보십시다.
선한 기도는 반드시 응답이 됩니다. 믿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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