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나로부터 (욘 01:1-16)

첨부 1


예수께서는 오늘도 하루의 일과를 마치시고 기도도하고 쉬기도할 겸 올리브 나무가 우거져 있는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다음날 아침 성전 앞에 모습을 드러 내자 여느 때와 같이 사람들이 주위로 몰려 들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윽고 날씨 얘기며 어젯밤 꿈얘기며 간단한 이야기 거리로 말의 실마리를 풀어나갈 즈음이었습니다.
갑자기 무리들의 한쪽 귀퉁이가 떠들썩 하더니 몇 사람이 여자 하나를 끌고 예수에게로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끌고 오는 사람은 다름아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에 모두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사람들이었지요. 율법학자들은 하나님의 법,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지요.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청결하고 원칙적인 신앙생활로 존경을 받던 인물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보존할 책임이 있는 이들에게 예수는 항상 율법을 소홀히하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도 그렇고, 죄인들과 함께 식탁나눔을 하는 것도 그러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그런 예수의 행동에 공개적으로 쐐기를 박아 놓아야 겠다고 맘을 먹었습니다.
위대한 스승 랍비 예수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 데 예수 선생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예수께서는 난감해졌습니다. 한 편으로는 법이 엄중하고 한편으로는 처참한 죽음을 판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재촉하는 소리를 뒤로하고 잠시 땅에 엎디어 무언 가를 쓰면서 생각에 잠겼습니다. 재촉하는 소리는 더 심해졌지요. 고개를 드신 예수께서 나지막 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중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들어 이 여인의 죄를 집행하라.
다시 예수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무언가를 쓰시면서 반응을 기다렸습니다. 숨막히는 순간이었지요. 격렬한 논쟁이 있거나,예수의 일갈하는 꾸지럼이 있거나 했던 다른 곳에서의 상황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여인의 외마디 소리가 있고 무리들의 분노가 있고 피가 터지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긴장된 순간이었지요.
그러나 의외로 분위기가 살얼음판이긴 했지만 조용하고 박자가 느린 속도였습니다. 무리중의 어떤 사람들은 오늘 예수의 명 설교를 듣기는 분위기가 너무 어색해 졌다고 생각하면서 자리를 떴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병을 고치러 왔는데 이런 살벌한 분위기에서는 예수께서 힘든 병고침 행사를 할 것 갖지 않아 자리를 떴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에 부담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사람은 이 여자의 죄를 집행하라고 했는데 , 그 자리에 계속 남아 있다가는 그 여인의 죄를 집행하려고 남아있는 사람으로 오해받을 까봐 자리를 떠났습니다. 어쨋든 무리들도 율법학자도 바리사이파 삶들도 자 자리를 떴습니다. 예수와 그 여인 둘이만 남게 되었지요.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 예수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회칠한 무덤들아 하고 쌍 욕을 퍼붓던 예수를 생각하면 논리와 행동의 일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성전 앞 뜰의 돈 바꾸는 상을 둘러 엎으시고 제물이 될 소와 양들을 노끈으로 후려쳐서 풍지박살을 내던 예수와는 전혀 딴 판이었습니다.
첬째; 비판은 나로부터 출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성격과 개성은 다 다릅니다. 천차만별이지요. 그러나 통일된 근본적인 속성이 있습니다. 칭찬은 듣기 좋아하고 비판은 주기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진리에 근거한 비판으로 부터 건전한 삶은 질서를 잡습니다. 비판은 진리를 세웁니다. 비판은 인간의 나약한 점을 경계해 줍니다. 비판은 잘못된 인간을 교정해 줍니다.
우리는 이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향한 비판에만 전문가가 되어서는 개인도 역사도 변화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유다의 종교 지도자를 공격한 것중의 상당한 이유는 자기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엄격했던 것이었습니다. 비판이 자기 자신의 부족과 죄를 정당화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예수의 비유가 있습니다.(눅18:9-14) 오 하나님 저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 하거나 음탕하지 않을 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 바리세인의 기도였지요.
오 하나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세리의 기도였습니다.
타인에 대한 비판을 하지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비판은 나로 부터 출발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다른사람에게서 시작해서 다른사람을 향한 비판으로 끝을 맺는 비판은 개인과 역사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에서 예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는 간음한 여인의 죄를 옹호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간음하는 풍토를 조장할 생각은 더욱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마지막 못을 박아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무게를 이 여인은 천근만근으로 느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의 최종 의도는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종교지도자들과 무리들을 향해서는 돌을 들어 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자신에게도 그만큼 가혹할 수 있는가를 먼저 생각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내 탓이요'하고 돌리는 것은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로 부터 출발하지 않는 비판과 개혁은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예수님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손가락질 하면 두손가락은 다른 사람을 향하지만 세 손가락은 자신을 향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비판과 개혁의 분담율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양 날개의 균형을 잡아야합니다.
자기를 향한 비판과 타인을 향한 비판의 균형입니다. 그리고 그 순서는 자기를 향한 비판과 개혁으로 부터 출발해서 타인과 제도를 향한 비판과 개혁으로 종착을 해야 합니다.
인간 삶의 변화와 역사의 변화는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갖게 됩니다.남의 눈의 티를 보고는 입에 거품을 품고 비난하고 정죄하던 사람들이 정작 자기 자신의 눈에는 들보를 가지고 있더라는 예수의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과 함께 되 살아 오릅니다.
타인에 대한 비판에 습관성이 붙으면 고치기 힘든 고질병에 거립니다. 이것으로는 개인과 역사의 변화는 일어나기 힘듭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지요.
삭개오의 변화는 자기로 부터의 변화였습니다. 도둑질한 것의 네 배를 갑고,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변화는 자기로 부터 일어 났습니다.
손가락질을 자기 자신에게로 먼져 돌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삭개오라고 남들을 손가락질 할 거리가 없었겠습니까 또 그것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킬 명분이 없었겠습니까 처녀가 아이를 배어도 할 말이 있다고 했는데요.
요나의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상황의 반전은 요나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귀를 기울려야할 또하나의 중요한 말씀입니다. 개인과 역사의 변화는 자기로 부터의 혁명을 먼저 출발하는 데서 가능합니다. 인간의 속성상 어려운 일이지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의 무리 속에 나는 끼어 있지 않은지 살펴봅시다.
머리를 박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기도하는 세리의 기도로 부터 우리의 개혁을 시작하십시다. 상황이 어려우면 나의 책임을 생각하는 요나의 삶으로 부터 우리의 개혁을 진행하십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