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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사로야 나오라 (요 11: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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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일 예배를 다 끝내 고 집에 가서 쉬고 있는데 여 섯 살 먹은 손녀가 방문을 열 고 살그머니 들어오더니 침대 에 몸을 기댄 채 장난기가 흐 르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면 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 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죽 어도 조금 뒤에 죽으세요.

야, 갑자기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니
있잖아요, 할 아버지도 죽을 거 아니에요 죽어도 좀 늦게 죽었으면 좋 겠다는 거예요.
그리고는 도 망치듯이 문 밖으로 사라져버 렸습니다. 어린애가 뭘 알고 그런 소리를 하겠습니까 그 저 어디서 그런 말을 주워 듣 고는 적당히 한번 해보는 것 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사람이 세상에 나서 불과 대여섯 살이 되면 죽는 다는 말을 입에 올리면서 살 아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얼 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산다는 것은 죽음의 공포와 끊임없이 치러 야하는 치열한 전쟁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산다는 것은 죽음의 슬픔을 지고 비틀거리며 걸어가야 하 는 잔인한 여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의식 속에서는 언제나 이 죽음이라고 하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우리가 다 느끼고 삽니다. 그 만큼 죽음은 굉장한 힘으로 우리를 끌고 가며 막강한 영 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사로 라 는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 젊 은 나이에 죽자 그 누이 동생 들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여러 날을 눈물 속에서 보내어야 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대 나라는 사람이 죽으면 그 슬픔을 좀더 진하게 표현 하기 위해서 곡을 전문적으로 하는 여인들을 불러서 나흘이 나 일 주일 동안, 길면 십 여 일 동안 집에서 곡을 하게 만 듭니다. 그리고 장례식을 할 때도 장례 행렬 제일 앞에 이 곡하는 여인들을 세워서 무덤 에 이르기까지 곡을 하게 한 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 유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죽 음이 들어오도록 제일 먼저 죄를 범한 자가 바로 여자이 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끌고 들어온 그 책임을 절감하도록 하기 위해서 죽은 사람 앞에 가면서 곡을 하게 했다는 것 입니다. 잘못을 범한 것으로 따지면 어디 여자만 죄를 지 었습니까 아닙니다. 같이 북 치고 장구 친 남자도 분명 잘 못을 범했습니다. 그러나 어 쨌든 유대인들은 인류를 죽음 으로 몰고 간 죄를 여자가 먼 저 범한 것이니 만큼 죽은 자 앞에서 곡을 하는 것도 여자 의 몫이라고 해석을 했던 것 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숨을 거 두는 자를 두렵게 하고 절망 하게 할 뿐 아니라 유족들에 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 과 상실감과 분노를 안겨줍니 다. 마리아와 마르다 역시 그 마음속에 죽음에 대한 분노와 원한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찾아 오시자마자 왜 여기 계시지 않았느냐고 따지 고 드는 그들의 모습에서 이 사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러나 이것이 어디 그들뿐이겠 습니까 우리 역시 마음속에 죽음에 대한 분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을 너무나 비 참하게 만드는 죽음의 실체에 대해서 우리 모두는 가슴 떨 리는 전율을 가지고 분노하고 또 대적합니다. 죽음은 인류 최대의 원수입니다. 교통 사 고로 하루에 30명 내지 40명 씩 죽어 나가는 우리 나라의 형편을 보아도 이 죽음의 횡 포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우리 가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세계 역사를 돌이켜 보건 대 인간이 발악을 하며 한번 일을 저지르면 세계 여기저기 에 끔찍스러운 사건들이 터지 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 니다. 저는 제랄드 라이트링 거(Gerald Reitlinger)라고 하 는 독일 사람이 히틀러가 580여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 한 것에 대해 쓴 글을 본 적 이 있습니다. 말이 쉬워 580 만 명이지, 총칼로나 목을 매 어 죽이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숫자입니다. 그래서 히틀러는 가스실을 만들어 집단 학살을 자행한 것입니다. 라이트링거 는 수백 명의 유대인들이 발 가벗긴 채로 가스실로 들여보 내진 후 한꺼번에 죽어 나오 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잠시 후 가스실에 들어간 유대인들은 가스가 새어나오 는 것을 느끼고 서로 모여들 면서 작은 창문이 달린 거대 한 철문을 거세게 두드리며 몸부림치게 된다. 철문 앞에 서 그들은 서로 할퀴고 치고 받으면서 결국은 끈적끈적한 피를 뿌리며 피라미드처럼 시 체로 쌓이게 된다. 25분 후 전기 펌프 식의 배출기가 가 스로 가득 찬 실내의 공기를 제거하면 거대한 철문이 열리 고 고무장화와 가스마스크를 쓰고 호스를 손에 든 유태인 모범수들이 들어간다. 그들이 처음에 하는 일은 피와 오물 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 다 음으로 시체를 올가미와 갈고 리로 떼어내어 금을 찾거나 독일인이 전략물자로 간주하 고 있는 이빨과 머리털을 뽑 는 소름 끼치는 일이 시작된 다. 그 일을 한 다음에 그 시 체들은 들것이나 화차에 실려 용광로로 옮겨져 태워진 후 분쇄기로 들어가 아주 고운 재로 변하여 화물 트럭으로 솔라강 하류에 뿌려졌다.

예수님의 눈물
죽음의 횡포나 그 죽음으 로 인해 인간이 당하게 된 처 절한 고통은 이루 말로 다 표 현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 잔 인한 죽음의 횡포로 인해서 하나님도 우셨습니다. 죽음은 하나님을 울게 만든 것입니 다. 3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 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무덤 앞에서 유족들과 그들을 찾아 온 사람들이 통곡하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 셨다고 그랬습니다. '눈물을 흘리셨다'는 말은 헬라어로 '에다크뤼센'(edakrusen)인데, 이 말은 막연히 눈물을 흘렸 다는 뜻이 아닙니다.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는 강한 의미 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 이 인간에게 안겨 주는 슬픔 과 절망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하나님 자신마저도 눈물 없이 는 그것을 지켜 볼 수가 없었 던 것입니다.
성경은 눈물을 흘리시던 주님의 감정을 두 마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심령에 통분히 여 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통분 히 여긴다'는 말은 분이 나서 씩씩거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 습니다. 무엇에 대해 하나님 이 분노하신 것일까요 저는 죽음을 이 세상에 끌어들인 죄를 향해 거룩한 분노를 발 하고 계신다고 봅니다. 인간 을 처참한 지경으로 몰아 넣 은 죽음의 실체를 보고 진노 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분히 여긴다는 말의 의미입 니다. 한편 '민망히 여긴다'는 말은 하나님 자신이 죽음의 슬픔과 공포 아래서 학대받는 인간의 처지로 내려오셔서 그 고통을 자기 것으로 맛보시는 심정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우리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기에 사랑하는 자를 죽음에 빼앗기고 슬퍼하 며 고통 하는 그 사람들의 마 음을 고스란히 받으셨고, 그 들과 똑같은 심정을 느끼셨습 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겪는 이 죽음의 공포와 슬픔 을 놓고 눈물을 흘리실 뿐 아 니라 마음으로 분노하고 우리 의 모든 아픈 감정을 함께 나 누시는 하나님으로서 지금 서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흘리신 눈 물은 패배와 절망의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 은 자기를
부활이요 생명이 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25절 이하를 보십시오.
예수 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 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 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 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 냐
할렐루야! 주님은 비록 눈물을 흘리시고 계셨지만
나는 부활이야, 나는 생명이 야.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실을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아날 것 이며, 아직 죽지 않고 있는 자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 이라 선언하고 계십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믿는 자 들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이 진 정한 죽음이 아니라는 말입니 다. 육신의 죽음이라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죽음이 아니라 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자는 죽음의 영역에서 이미 해방되 었기 때문에 안 죽는다는 말 입니다.
육신의 죽음이 주님 보시 기에 진정한 죽음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죽음이 없어진 사람들입니다. 죽음에서 벗어 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 스도가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 문입니다. 아직 세상에 살고 있는 성도는 죽음을 기다리는 자들이 아닙니다. 예수가 부 활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믿는 자의 죽음은 잠 자는 것일 뿐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우리 친구 나사로 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나사로의 죽 음을 잠으로 여기시는 것입니 다. 이 얼마나 권위 있는 말 씀입니까 자신이 죽음을 극 복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이요 부활이 되시는 구세주가 된다 는 사실을 강력하게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10절은 이 렇게 말씀합니다.
이제는 우 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 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 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 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예수 님은 사망을 폐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사망을 무력화시켰 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복음 으로서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 이 마리아와 마르다 앞에서 서 계시는 이유가 무엇입니 까 그가 육신의 몸을 입고 무덤 앞에 서 계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눈물을 흘리 고 계십니까 히브리 저자가 그 이유를 웅변적으로 설명하 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2장 14-15절을 보십시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속 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 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 를 없이하시며 또 죽기를 무 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 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사망의 권세를 잡 은 마귀를 정복하고 그 죽음 의 쇠사슬에 묶여서 일생 동 안 종노릇하는 우리들을 놓아 주시려고 예수님이 인간의 몸 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 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님은 자기를 부활이요 생명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수를 의지하고 믿는 자에게는 죽음은 더 이상 죽 음이 아닙니다. 이것을 입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나사로 를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요 한이 요한복음을 쓰면서 선정 한 일곱 가지 이적 기사가 있 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장엄 하면서도 감동적인 것이 바로 나사로의 부활이었습니다. 더 욱이 이 이적은 사복음서 전 체에 기록된 예수님의 36가지 이적들 중 유대 지도자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안겨 준 것이 었습니다. 47절 이하를 보면 나사로가 부활하는 이 사건에 대해 전해들은 후 그들이 곧 바로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 고 예수님을 처형해야 되겠다 고 최종 합의하는 장면이 나 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죽 음의 손아귀에서 건져내기 위 해 자기가 사망의 손에 죽지 아니하면 안 되는 몸이 된 것 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예 수님의 운명이었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으 로 가셨습니다. 그의 무덤은 굴로 되어 있었는데, 큰돌이 그 입구를 막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돌을 옮겨 놓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예수님의 말을 가로 막고 나섰습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이것은 상 식적으로 볼 때 틀린 말이 아 닙니다. 그러나 조금 다른 각 도에서 보면 그는 지금
이미 죽어 부패하고 있는 마당에 무덤 입구를 열어 어떻게 하 자는 것입니까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24절)는 예수님 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입니 다. 합리적인 사고는 언제나 믿음을 방해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인간적인 계산으로 하나님의 일을 생각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습니다. 마르다가 바로 그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마르다를 보시고 예 수님은 별로 곱지 않은 시선 으로 그를 쏘아보시며 한 마 디 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 느냐
우리는 이 말에서 '왜 내 말을 네가 믿지 않느냐 왜 나를 의심하느냐' 하고 추궁하시는 것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드디어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돌이 옮겨졌습니다. 무 덤이 열린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하늘을 향해 하나님 앞에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 다. 41절을 보십시오.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 을 감사하나이다.'
주님은 하 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 리신 이후에 왜 나사로를 살 리기 원하시는 지 그 이유를 밝히 말합니다.
이 말씀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 려 함이니이다.
둘러선 무리 들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께 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과, 이 예수님이 세상에 부 활이요 생명이 되는 것을 믿 도록 하기 위해서 나사로를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기도를 마치시자마 자 무덤을 향해 큰 소리로 말 씀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 오라!
정말 기가 막힌 말씀 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상상력이 풍부하다면 그 장면 을 한번 그려보고 싶은데 아 무리 잘 그리려고 해도 마치 컵으로 바닷물을 뜨는 것처럼 부족한 것 같습니다. 무덤 안 에는
나사로야, 나오라.
하 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이 메아리쳤습니다. 조금 후에 수의를 걸친 나사로가 뚜벅뚜 벅 걸어나왔습니다. 주님은 그 수의를 풀어 주어 자유롭 게 다니게 하라고 명령하셨습 니다. 주님은 나사로에게 생 명을 주셨을 뿐 아니라 자유 도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 다. 우리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밖에 없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심 으로써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 임을 실제적으로 증명하셨으 며, 며칠 후에 그 자신이 십 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 실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예 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나 아가 세상 끝날 예수님이 재 림하실 때 하늘의 별과 같이 무수한 성도들이 천사의 나팔 소리를 듣고 무덤에서 일어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사로의 부활은 선 택된 모델이었습니다. 모델이 라는 것은 메시지를 전하는 것으로 충족한 것입니다. 반 복해서 똑같은 모델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 면 제2, 제3의 나사로 사건을 계속 만들 필요가 없다는 말 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전하는데는 나사로의 부활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것입니다.
이제 초등학교에 갓 들어 간 아들을 데리고 등산을 하 는 아버지를 한번 생각해 보 십시오. 어린애의 눈에 아버 지란 존재는 언제나 천하에서 제일 크고 힘이 세고 제일 잘 난 남자로 비춰집니다. 아들 이 산을 오르는 도중에 조그 마한 돌멩이를 보고 아버지에 게 이렇게 말을 건다고 해 봅 시다.
아버지, 이거 들 수 있 어요
그래 들 수 있지. 너 한번 들어봐라.
그 애는 자 기 딴에 젖 먹던 힘까지 써가 며 돌을 들어보려 하지만 못 들어올립니다.
아버지는 너 보다는 힘이 있어. 아버지 힘 센 거 보여줄까
그리고는 그 바위를 들어 가지고 멀리 던져버립니다. 그러면 애가
우와. 아버지, 정말 힘세네 요.하고 으쓱해 합니다. 자기 가 힘이 세다는 것을 증명하 기 위해서 아버지가 그 산에 있는 돌을 다 들고 던질 필요 는 없습니다. 하나를 던지면 되는 것입니다. 아들에게 아 버지가 힘세다는 메시지를 전 하는데는 돌멩이 하나 던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마찬가지입니 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 인 것을 인류에게 전하기 위 해서 이 세상에 있는 무덤마 다 찾아다니면서 죽은 자를 다 일으킬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나사로 한 사람만 일으 켜도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 이시라는 증거를 얻을 수 있 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사로 를 다시 살리신 그 예수님을 통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 니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이 되는 줄을 믿습니다. 우리 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 이 얼마나 큰복입니까 우리 가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알게 되고 그분의 생명 속에 우리가 감추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입니까 고린도전서 15장 57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죽음을) 이김을 주 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예수님의 승리가 곧 나의 승 리요,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나 의 부활이요, 예수님의 생명 이 곧 나의 생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 람은 이제 죽음에 질질 끌려 다니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 죽음 때문에 하나님께 감 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신앙의 음지
그렇지만 오늘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조금 어두운 면 하나를 살펴보아야 되겠습니 다. 마르다의 신앙에서 우리 가 발견하는 어두운 일면입니 다. 마르다는 굉장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는 베드로와 함께 성경에서 가장 완벽한 신앙고백을 한 두 사람에 들 정도로 믿음이 대단한 사람입 니다. 마르다가 어느 정도로 믿음의 사람인지 한번 살펴봅 시다. 23절 이하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울고 있는 마르다 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 라
하고 말씀하시자 그는 그 말을 대뜸 이렇게 받았습니 다.
마지막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24 절). 그는 마지막날 부활을 믿고 있었습니다. 대단한 믿 음 아닙니까 또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하고 말씀하시자 마르다는 그 말을 이렇게 받았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 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 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 나이다.
이 얼마나 기가 막 힌 신앙고백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마르다를 보면서 석연치 않는 부분을 발견합니다. 이렇게 완전한 신앙 고백, 이렇게 완벽한 믿 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이 오빠를 잃어버리고 슬 퍼하는 자기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 때문에 뭐가 달라진 것이 있나 하고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달라 진 면모를 찾을 수가 없습니 다. 물론 상을 당한지 일주일 이 안된 마당에 마음이 상하 고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것 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닙 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 람이라 해도 사랑하는 자를 죽음에게 빼앗기고 나면 그 슬픔을 한 순간에 다 몰아내 지 못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특별하다 해도 죽음의 공포 앞에서는 불안을 느끼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그레그라는 목사님이 자기 교회에서 자녀를 잃은 부모들 의 슬픔에 대해 조사를 해 가 지고 발표를 한 것을 보면 자 녀를 잃은 슬픔이 얼마나 대 단한 지 불면에 시달리기도 하고, 잠을 자도 피곤이 풀리 지 않고,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해도 나중에 그 말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슬픔에 정신을 빼앗긴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슬픔은 아주 오래 간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믿 음이 좋아도 그 슬픔이 2년 이상 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 회 성도들을 봐도 그런 것 같 습니다.
어떤 면에서 슬픔은 하나 님께서 사람에게만 주신 특별 한 감정인 것 같습니다. 우리 가 가끔 <동물의 왕국>이라 는 프로그램을 텔레비전에서 보지 않습니까 평화롭게 풀 을 뜯고 있는 얼룩말 떼에 사 자가 덤벼들어 가지고 그 가 운데 한 놈을 잡습니다. 그러 면 다른 놈들은 다 도망가버 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 놈 을 잡으면 사자가 더 이상 추 격을 안 하니까 얼룩말들도 조금 도망가다가 그냥 멈추어 섭니다. 자기 동료 하나가 사 자 밥이 되어 피를 흘리며 죽 었는데도, 언제 그런 일이 있 었냐는 듯 꼬리를 치면서 풀 을 뜯으며 자기들끼리 장난을 합니다. 얼룩말에게는 슬픔이 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 슬픔 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 에게만 주신 것 같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왜 우리 인간에게 슬픔을 주셨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은 슬픔은 불에 데인 살갗과 같다는 것입니다. 불에 한번 데이면 아무리 좋은 약을 발 라도 한동안은 쓰리고 아프고 고통스럽지 않습니까 시간이 지나야 통증이 가라앉는 것입 니다. 슬픔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그 믿 음이라는 약을 가지고 슬픔을 금방 씻어낼 수는 없는 것입 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충분히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마르다 를 보면서 깊이 생각해야 되 는 문제가 있습니다. 마르다 는 멀리 있는 진리를 믿는 데 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 다.
주여 마지막날에 살아 날 줄을 믿습니다.
그는 그 때가 언제일지 몰라도 마지막 날의 진리를 믿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모든 성도들이 부활 하게 될 것이고, 자기 오빠도 살아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 다. 멀리 있는 진리는 주저하 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 나 가까이 있는 진리는 제대 로 믿지를 못했습니다. 주님 께서
네 오라버니가 살리라
고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그 말씀이 안 믿어지는 것입니 다. 당장 적용이 되어서 그 결과가 눈앞에 드러나야 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믿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마르다는 고백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아니합니 다. 고백적인 진리가 무엇입 니까 주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 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 사실 은 틀림없이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진리는 금방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내 가 부활이요 생명이다
하시 는 주님의 말씀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진리를 받아들이면 당장 죽은 자기 오빠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을 체 험해야 되는 부담이 있기 때 문입니다.
마르다의 경우 얼마나 유 리한 입장에 있습니까 하나 님이 자기 앞에 서 계십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을 일대일 로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인 격 대 인격으로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으로부터 직접
나는 부활이 요 생명이라는 말씀과
네 오라비가 살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은 먼 훗날의 진리일 수 가 없습니다. 그것은 당장 효 력을 나타낼 수 있는 진리입 니다. 그러므로
주여, 옳습니 다. 제가 믿습니다.하고 주님 에게 전적으로 믿음을 의탁했 더라면 나사로가 살아난 이후 에 느끼게 된 그 기쁨과 감격 을 나사로가 살아나기 이전에 벌써 체험할 수 있었을 것입 니다. 그 마음을 짓누르는 슬 픔이 말끔히 사라지는 것을 그가 체험하게 되었을 것입니 다. 무어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늘의 평화가 그의 마 음을 고요히 감싸는 것을 그 가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르다에게서 이러한 변화를 찾아 볼 수가 없습니 다. 그는 예수님을 지금 나에 게 일어난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부활 로, 생명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 습니까 우리에게는 그와 비 슷한 신앙의 음지가 없습니 까 마르다처럼
천국 간다, 마지막 날 주님이 재림하신 다, 그 때는 모든 성도가 부 활한다는 것 같은 멀리 있는 진리는 잘 믿으면서 가까이 있는 진리는 금방 믿으려 들 지 않는 절름발이 믿음을 가 지고 있지 않습니까
전능하 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 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하고 교리적인 진리는 주저하지 않 고 잘도 고백하면서 천지를 만드신 그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나에게 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역사 하실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 습니까 이것은 우리 모두가 가지기 쉬운 믿음의 약한 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그래도 마르다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그 말씀을 듣기라도 했지하 고 변명하려 들지도 모릅니 다. 그러나 사람이 되신 하나 님을 만난 마르다와, 부활이 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모시고 있는 우리, 누가 더 유리한 입장에 있다 고 생각합니까 우리가 아닙 니까 그러므로 이 부활의 능 력과 생명의 능력은 남의 일 이 아닙니다. 멀리 있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우리 안 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요, 가장 가까이 존재하는 하나님 의 기적이요 하나님의 역사입 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 가 매일 체험할 수 있는 하나 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현실 문제에 부딪히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시는 주님의 그 말씀을 통 해서 쉽게 은혜를 받지 못합 니다. 유익을 얻지 못합니다. 죽음에 대해서도 도대체 예수 님이 나의 부활이요 생명이 되신다고 고백하는 자다운 태 도를 취하지 못하고 세상사람 들과 매 한가지로 죽음에 대 한 본능적인 반응만을 보입니 다. 믿음의 반응이 본능의 반 응에 묻혀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죽음에서 자유 하기는 고사하고, 죽음 의 노예가 되어 질질 끌려 다 니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물론 우리 역시 인간인지라 죽음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의식하는 것 자체 는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의식에 끌려 다니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 리는 이미 부활이요 생명 되 시는 주님의 손에 붙들린 자 유인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서도 자유함을 가져야 됩 니다. 슬픔을 당해도 자유인 으로서 슬퍼해야 되고, 죽음 의 실체 앞에 공포를 느낄 수 는 있지만 자유인으로서 그 공포를 처리해야 됩니다. 우 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여 전히 죽음에 끌려 다니는 이 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마르다처럼 부활이요 생명이 신 주님이 실제로 나에게 어 떤 은혜를 주시는가를 잘 모 르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 다.
우리는 바울 사도의 생활 태도를 모범으로 삼아야 합니 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 서 바울은 참으로 기가 막힌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날마 다 죽노라.
바울의 생활은 매일 매일이 죽음과의 대결이 었다는 말입니다. 삶이 얼마 나 힘든지, 산다는 것 자체가 죽는 것과 같았다는 말입니 다. 목숨을 잃는 것만 죽음입 니까 아닙니다. 목숨을 잃는 것보다 더 지독한 죽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살면서 살고 싶지 않을 정도 로 시달리고 고통 하는 것입 니다. 때때로 우리 역시
날 마다 죽는다는 바울의 말이 마음에 그대로 와 닿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인생은 죽음 과의 대결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매일의 삶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죽는다는 바울의 고백에서 한 가지 중 요한 진리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날마다 죽기 위해서 는 날마다 부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죽고 끝나면 '날마다'라는 말을 쓸 수가 없 습니다. 사실 죽음이라는 것 은 한번 죽으면 그것으로 끝 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날마다' 죽을 수 있겠 습니까 바울은 이 '날마다'라 는 말을 묘하게 이용하여 예 수님의 생명의 능력, 부활의 능력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날마다 죽는 다
하는 말은
내가 날마다 산다. 날마다 부활하고 있다
는 말입니다. 매일 죽음의 위 기를 당하지만 그때마다 부활 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주시 는 능력을 체험하면서 산다는 말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사실을 고린도후서 4장 8절 이하에서 보다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 니다. 이것은 바울의 체험적 인 고백입니다. 현대어 번역 을 보면 참 실감나게 번역되 어 있습니다. 제가 한번 읽어 드릴 테니 귀담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사면에서 닥치는 고통에 짓눌리지만 움 츠러들지도, 쓰러지지도 않습 니다.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일에 당황할 때도 있지만 절 망하거나 자포자기하지 않습 니다. 우리가 박해를 받을 때 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우리 는 얻어맞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서 달려 나갑니다. 우 리 몸은 예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부단히 죽음에 직면하 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살아 계신다는 사 실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우 리 죽을 육체를 통해서 증거 되고 있으며 나타나고 있으며 체험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멋있는 고백입 니까 먼 훗날 내가 부활한다 는 그런 먼 훗날의 진리를 믿 는 것과 똑같이 지금 당장 날 마다 죽는 체험을 해야 되는 나에게 날마다 부활하는 체험 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 력을 맛볼 수 있다면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달라지겠습니 까 죽음에 대해서도 우리가 얼마나 당당하게 대할 수 있 겠습니까 이 시간 우리에게 이와 같은 은혜가 있는지 조 용히 스스로를 한번 살펴봅시 다.
1부 예배를 드릴 때 한 형 제가 나와서 간증했습니다. 그는 학원을 차려 가지고 그 동안 꿈을 가지고 일을 하며 여러 가지 고통들을 간증했습 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려도 응답이 없을 때 몸부림치는 그의 모습을 우리는 간증을 통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간증을 들으면서 '야, 저 형제는 날마다 죽고, 날마 다 죽었구나.'하고 생각을 했 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죽어 야 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어 디 그 형제 하나 뿐이겠습니 까 여러분 가운데는 날마다 죽어야 되는 그런 고통스러운 삶을 사시는 사람이 한두 명 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 여러분이 반응하 는 태도는 세상 사람들과는 분명 달라야 합니다. 부활이 요 생명이신 주님을 모시고 산다면 날마다 죽는 그 체험 속에 뭔가 다른 점이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폴 투르니에라고 하는 분 은 스위스의 의사이자 정신의 학자요, 유명한 저술가입니다. 그가 쓴 신앙 간증집이 하나 있는데 「듣는 귀」라고 하는 제목의 간증집입니다. 그와 그의 아내는 금실 좋은 남편 과 아내로 소문났는데 한번은 그리스에 휴가를 갔다가 아내 가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 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 다. 죽기 직전에 아내는 평화 스러운 미소를 띠고 남편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숨을 거두기 전에 남편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여 보, 오늘 천국에 도착하면 먼 저 가 계신 시부모님을 만나 정말 즐거울 것 같아요.
그 말에 그의 남편인 투르 니에 박사가 굉장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아내가 죽 음을 마치 기차를 타고 제네 바에 다시 돌아가는 것처럼, 사랑하는 가족을 재회하는 것 처럼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을 보고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새롭게 체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내를 떠 나 보낸 후에 그의 믿음은 점 점 더 강해졌습니다. 부활이 요 생명이신 주님에 대한 믿 음이 강해질수록 그는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해방되는 놀라 운 자유를 체험할 수 있었습 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아내와 육체적으로만 결혼한 부부였던 것이 아니라 아내의 소망과 믿음 속에 한 몸이 되어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부부들 가운데 이와 같이 고백할 수 있는 사 람이 많기를 바랍니다.
돌을 옮기라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 분, 이제 말씀을 정리해 봅시 다. 우리는 마르다의 믿음과 같은 그늘진 믿음을 가지고는 이 세상을 살지 못합니다. 먼 훗날 부활하는 믿음만을 가지 고는 날마다 죽어야 되는 이 세상 현실에서 다시 살 수 없 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죽어 야 되는 이 세상에서 날마다 부활하는 능력을 체험하기 위 해서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 님이 내 안에 살아 계시며 역 사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바 울이 고백한 것처럼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고, 절망해도 다 시 소망을 가지고, 사람들이 보기에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위기를 만나도 다시 털고 일어나는 그런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마음의 돌을 옮겨 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 사로를 살리기에 앞서 돌을 옮겨 놓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직접 그 돌을 옮겨주시지 않았습니다. 왜냐 하면 나사로를 살리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 이지만 돌을 옮기는 것은 사 람들도 할 수 있는 일이기 때 문입니다. 날마다 죽는 우리 를 날마다 살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지만 돌을 옮기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하는 것입 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가슴을 가로막고 있는 돌이 무엇입니 까 불신앙입니까 마르다처 럼 따지는 신앙입니까 무엇 이 여러분의 돌입니까 이 돌 이 가로막고 있는 이상
나사 로야 나오라
하시는 주의 음 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죽은 자가 부활하는 생명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심령 을 무덤처럼 만드는 돌이 무 엇입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무식한 것입니까 그 돌을 빨 리 옮기십시오. 아직도 예수 님의 말씀을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믿는 골라잡는 신앙 수 준에 머물러 있습니까 그 돌 도 옮기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는 드 리지만 마음이 전혀 열리지 않아 딴 생각만 하다가 돌아 갑니까 그 세속적인 생각의 돌을 옮기십시오. 그 돌을 옮 길 때 주님이 드디어 여러분 의 심령을 향해서
나사로야 나오라
하고 외치십니다. 그 때 내 안에 다시 부활하는 생 명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할 렐루야!
우리 중에 사랑하는 자를 먼저 보내고 아직도 슬픔에 짓눌려 가지고 고통 하는 자 있습니까 돌을 옮겨 놓으십 시오. 부활이요 주님이신 예 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나사로야 나오라
하시는 주 님의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그 음성을 들으면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슬픔이 문을 열 고 나가버릴 것입니다.
언제 죽을지 몰라 공포에 떨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병 에 걸리지는 않을까 하고 항 상 불안에 떨고 있습니까 여 러분은 죽음의 노예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와 같은 노예 생활을 하면 안됩니다. 무엇이 여러분을 그렇게 떨게 만듭니까 약한 믿음입니까 그 돌을 빨리 옮기시기 바랍 니다. 그러면
나사로야 나오 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똑 똑히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음성을 들을 때 우리의 마음 속에 있던 공포가 모두 사라 져버릴 것입니다.
부활이요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이 험 한 세상 살아가야 되는 우리 에게 매일매일 체험되는 부활 이 되기 위해서, 매일매일 체 험되는 생명이 되기 위해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이 예 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에 모셔들이십시오. 그리고 그분과 함께 인생을 사십시 오. 그럴 때 날마다 죽지만 동시에 날마다 사는 부활의 능력이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 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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