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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탓이요라고 하자 (욘 0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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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서 오래 살다 온 제 친구 한분은 저에게 우리나라에 오니까 웬 현 수막과 구호들이 그렇게 많으냐고 물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과연 우리나라는 어디를 가나 현수막이 없는데가 없고 또 구호들이 너무 많아 눈이 아플 정 도였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선진 외국에 비하여 아직도 우리는 구호라는 것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생활에 정착되지 못하여서 그렇다고 생각할 수 밖 에 없겠습니다. 우리 생활속에 좋은 뜻이 정착되고 잘 실천된다면 구호나 현 수막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 교회도 금년 일년간 표어를 가지고 지내왔습니다. 또 큰 거리나 작은 골목에 헤아릴 수 없는 구호들이 너무 많 습니다. 그 중에는 비방이나 비난성 구호들도 적지 않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가장 마음에 드는 구호를 하나 택하여 보라고 한다면 천주교회에서 채택한 '내 탓이요'라는 구호를 택하고 싶습니다. 물론 그것마저도 최근 자동차에 스티카로 붙이고 다니는 것을 오히려 비난하는 분들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 는 피차 '내 탓이요'라고 하는 자성과 자책의 구호는 많을수록 좋겠다고 생 각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결국 다 내 탓입니다. 우리는 지금 1990년을 마 지막으로 보내는 시간의 종점에 이르렀습니다. 돌이켜 한 해를 생각해 보면 모든 문제들은 내 마음, 내 생각, 내 양심의 문제들이지 타인이나 주변 환경 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본문의 말씀에 보면 요나는 선지자이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하 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요나처럼 도망한 일은 없 었습니까 책임을 회피하고 사명을 저버리고 명령을 거역하며 주님의 낯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가지는 않았나요 우리가 사는동안 자기의 사명을 망각 하는 일처럼 큰 과오는 없는 것입니다. 요나는 지금 이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하여 욥바로 내려갔다 '(욘 1:3). 니느웨로 가야할 요나가 정반대 방향인 다시 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과 그 뜻을 거역하는 길에 순탄함이 있을 수 없습 니다. 요나는 요행이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으나 그 배는 곧 태풍을 만나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파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하셨다'고 성서 는 말씀합니다. 사공은 두려워 하였고 사람들은 각각 자기 신들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물건들을 모두 바다에 던지고 배 안은 수라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 배를 타고가는 이 공동운명체가 뜻하지 아니한 폭풍으 로 인하여 파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과연 이것이 누구 탓이었을까 요 자연적인 현상으로 바다에 이는 풍랑을 누구의 탓이라고 하겠습니까 그것은 자연의 재난일 뿐이겠지요 그러나 성경은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위에 내리셨다' 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는 요나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자연의 재난도 우연이 아닌 것입니다. 자연의 모든 재난을 그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바람과 바다도 손으로 다스리시 는 그 하나님은 대풍도 바다위에 내리십니다. 그래서 인생을 교육하시고 훈 계하시며 깨닫고 돌이키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자연의 재난에 대해서도 결국 내 탓이라고 깨닫고 반성하고 회개하는 일이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금년 한 해도 수없이 일어난 끔찍한 재난, 홍수와 가뭄, 무서운 화재, 사고와 질병, 공해와 오염으로 인한 자연과 생태계의 이변등 그런 일들을 우리는 누 구 탓이라고 해야하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각자의 '내 탓'입니다. 그것 모두 가 내 탓이라고 말하고 깨닫는 자들이 되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전혀 그런 생각을 못했습니다. 사실 이 배가 파선하게 된 원인이야 말로 바로 요나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배 밑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욘 1:5). 그는 배가 풍랑을 만나 파선 직전에 있는 것조차 모르고 깊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내 탓인 줄 모르면 그런 것 입니다. 이 때에 선장은 요나를 보고 '자는 자여 어쩜이뇨 일어나 네 하나님 께 구하라'(욘 1:6)고 책망하여 그를 일깨웠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잠 자고 있는 상태가 아닐까요 우리는 깨어 일어나 그것이 내 탓인 줄 알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참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 주기를 탄식하면서 기다 린다고 했습니다. 자연과 재난은 사람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그 책임이 다 사람에게 있습니다. 요나가 타고 간 배가 대풍을 만나 깨어지게 된 것은 자 연적인 것이 아니라 요나 때문이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고 회개하여야 합 니다. 그것은 바로 내 탓입니다. 그런데 내 탓으로 오는 피해는 바다와 배에 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배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을 다 위험하게 만듭니 다. 그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 하나의 잘못으로 다른 사람 이 해를 당하며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고 한 단체와 한 나라가 수난을 당한 다는 일, 그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일 내 자 녀나 내 가족이나 내 이웃이 잘못되고 있다면 그것이 누구의 탓입니까 깊 이 생각해 보면 그것도 내 탓입니다. 내 책임을 모면할 길이 없습니다.

모세는 반역과 불신앙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하나님 이것이 내 탓입니까, 제가 이 많은 사람을 다 낳았단 말입니 까'라고 항변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은, 또 그렇 게 말하면 안되는 것은, 그는 그 민족의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란 것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자인 것 같이 한 다'(히 13:17)고 했습니다. 그것이 지도자입니다. 지도자는 비록 개인적으로 는 자기에게 아무런 흠이 없다고 해도 남의 죄를 자기 탓으로 돌리며 남을 위해 가슴을 치며 자신이 회개하는 자라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성 도들은 모두 세상의 지도자요 선생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요 어두움속 에 빛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산위에 세운 성과같이 모든 사람들에게 쉽게 노출되게끔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역할을 못하면 맛잃은 소금이 되어 사 람들이 짖밟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알게 뭐냐' '나하고 무슨 관계냐' 라고 할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크리스쳔의 양심을 가지고 세상을 본다면 나와 관계없는 것이 하나도 없고 내 탓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 다. 양심적인 성도라면 결국은 '다 내 탓이로구나' 하고 인정하게 될 것입니 다.

우리의 인간관계에 있어서 공연히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 도 겸손히 나 자신을 살펴보면 그것도 내 탓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원수들을 용서하여 달라고 기도했는데 '저들이 몰라서 그 렇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몰랐다는게 바로 '내 탓'입니다. 세상이 모두 남의 탓으로 돌려 원망하고 시비하고 싸우고 다투는 때, '그것은 제 탓 입니다' 선뜻 이렇게 나와 자기 책임을 통감하며 자기의 무능을 인정하 는 사람을 만나면 그것은 어두움의 불빛을 본 것과 같을 것입니다. '내 탓입 니다' 하는 것은 밝은 빛입니다. 모든 인간관계를 해결하는 첩경입니다. 얼 음같이 찬 것을 녹이는 힘이 됩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될 것입니다. 각자가 모두 내 탓임을 고백한다면 공권력이나 전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무서운 사회악도 봄눈 녹듯 다 녹아 버릴 것입니다.

여기 요나가 타고가던 배에서는 도대체 이러한 재앙이 누구때문에 임했 는지 알아보자 제비를 뽑았더니 그것이 바로 요나였습니다. 요나는 깜짝 놀 랐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전혀 자기 탓이라고 생각한 일이 없었습니다. 선원 들은 요나를 심문했습니다. 도대체 너의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어 느나라 사람이냐 요나는,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 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다' 라고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낯 을 피한 것을 그들에게 고하였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하나님 을 바로 믿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믿는 자인데 바로 믿지 못한 것, 그 뿐만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그 낯을 피하여 도망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죄요, 그것이 재앙의 원인이 되었다고 정직히 시인했습니 다. 그러니까 '요나의 탓'입니다. 그 때에 이 말을 들은 이방인들이 오히려 두려워 했습니다. '무리가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 였느냐' 라고 하였다 합니다.

여러분! 교회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합니까 성직자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합니까 성도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합니까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느냐 그것은 우리에게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바라보는 불신자들의 세계에서 하는 말인 것입니다.

차라리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였다면, 차라리 교회가 아니었다면, 차라리 성직자가 아니었다면, 차라리 성도가 아니었다면 오히려 좋았을 것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 게 행하였느냐' 이것은 선지자인 요나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들은 꾸중이었습니다. 그런 책망을 선지자 요나가 들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찌 내 탓이라고 아니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개인적 으로는 훌륭하고 정직하고 깨끗하게 사셨다고 하더라도 연대감 속에 얽힌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는 교회가 세상을 위해 짊어진 그 책임을 모면 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더욱 '내 탓'이라고 해야 되겠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어려운 문제들과 고난을 바로 내 탓이라고 인식하고 회개하며 더욱 옳바르고 진실하고자 할 때, 거기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이루어질 수 있 다고 믿습니다.

이제 이들이 타고 가는 배가 왜 파선의 위험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파도는 더욱 거세어지고 배는 곧 파선하게 되었는데 어 떻게 하면 좋았겠습니까 그래서 선원들은 요나에게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잠잠하겠느냐'(욘 1:11)라고 물었습니다. 여러 분! '내 탓이요'라고 말만 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 탓인줄 알았다면 내가 책임을 지는데까지 나아가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빈말이요 구호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책임을 통감한 요나는,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 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 내가 아노라(욘 1:12).

라고 했습니다. 그는 죽음을 달게 받겠다는 의연한 마음으로 결단했습니 다. 요나는 신앙양심을 되찾았습니다. 그는 내 탓인 것을 심각하게 깨닫고 결심했습니다. 성서는,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욘 1:16).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원인이 제거되니 문제는 쉽게 풀렸습니다. 그 크 고 무서운 바다가 언제 그랬었느냐는 듯이 즉시 고요하고 잔잔해 졌습니다.

이로써 사람들은 과연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느꼈습니다. 우리 자신이 당 하는 심적 고통이나 감정적인 갈등,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고민들 그것이야 말로 누구의 탓입니까 그것은 자기 탓입니다. 자연은 언제나 자연 그대로입니다. 자연은 선도 악도 아닌 것입니다. 자연이 나를 나쁘게 하거나 좋게 하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내가 보는 시각과, 내 의식과, 내 생 각에 달린 것입니다. 자연이 언제 우리에게 뭐라고 하였습니까 모두 나 때 문에 그것이 좋은 때도 나쁜 때도 있게되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사회는 냉정합니다. 그리고 좋 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입니다. 인간사회는 언제나 인간사회 그대로 입니다.

타인은 언제나 타인입니다. 그 사람은 항상 그 사람이지요. 그런데 나 자신 이 그것을 나 혼자 좋아도하고 미워도하고 칭찬도하고 욕설도 퍼붓고 희망 을 갖기도하고 실망하기도 합니다. 남은 가만히 있는데 나 혼자 좋았다 싫었 다 속에서 요동하고 들끓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바로 내 탓입니다.

1990년이 지나고 해가 바뀝니다. 그러나 '해아래 새 것이 없나니 라고 한 바와같이 새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1991년도 똑같은 시간의 반복이 있 을 것입니다. 자연과 만물은 그대로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보는 눈, 생 각하는 방법, 맞이하는 자세, 기대감과 믿음, 즉 내 자신의 결단에 의하여 좋 은 해도 되고 그렇지 못한 해도 될 것입니다. 결국 나한테 달린 문제입니다.

내 마음, 내 결심, 내 각오, 내 목표, 내 길 결국 나 자신에게 달렸습니 다. 우리가 타고 가던 배가 풍랑을 만났다면, 혹은 좌초했다면, 또는 잘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조용히 그 원인을 생각하여 보아야 할 것입니다. 누구의 탓인지 생각해 봅시다. 요나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 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 내가 아노라 ' 폭풍을 만난 것도 바로 내 탓이 라고 생각하는 마음의 자세, 반성과 회개와 결단이 있을 때 구원의 길은 열 립니다. 모든 사람들이 주변에서만 원인을 찾으려 하지말고 각자가 한 일에 서, 자기도 의식 못한 무의식적 동기 속에서, 그 깊은 밑바닥 저변에서 문제 를 찾는다면 이 세상은 곧 하나님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 면 세상은 혼미와 분열과 파괴와 겉잡을 수 없는 파멸의 길로 치닫고 말 것 입니다.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 안다 ' 이렇게 그 원 인을 분명히 알고 진정으로 깨달았을 때 그 순간 하나님의 도우심에 손길이 같이 하십니다. 요나는 고래 뱃속에서 3일을 죽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습니다 진정으로 자기의 책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도 구원을 받았습니 다. 배도 건지고 사람들도 살고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 간 요나도 살았습니 다. 살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드 디어 니느웨성이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인간들이 제 아무리 반항하고 거역하고 도망한다고 해도 저들이 어디를 갑니까 우리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하 늘에 올라 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 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로다(시 139:7-10) 라고 시편기자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 님을 피하려고해도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책임을 모 면해 보려고 해도 안될 것입니다. 혹시 누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도전하 려고 한다면, 그것이 무슨 힘, 무슨 세력이든 간에 결국 좌절 당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모든 뜻은 다 그 뜻대로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 는 길은 하나님께 돌아오며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있으며 하나님의 목전에 서 숨쉬고 움직이고 일하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열심으로 이루워 나아가 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탓'이라고 자기의 책임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내 탓입니다' 라고 고백하고 결단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시 고 사랑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새해에도 이러한 진실한 삶과 겸손한 결단이 우리들 모두에게 있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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