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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0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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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팔년 동안 누워서 병마에 시달려 온 병자에게 묻는 예수의 질문이다. 동 시에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하루 이틀도 아닌 무 려 삼십팔년이나 되는 세월을 이제나 저제나 병 낫기만을 고대하며 고통 속에 살아온 병자 앞에 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말 같지 않은 질문을 던지는 이 예수는 누구신가 무릇 모든 병에 신음하는 사람들은 꿈에도 소원이 그 병으 로부터의 해방일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병자를 무시하고, 이처럼 병자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이 병자의 누워 있는 것과 이미 그 병이 오래 된 것임을 보 시고 아주 태연하게 그리고 아주 냉정하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신 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은 그 손짓 발짓과 아울러 한마디 한마디가 의미의 집합이며 고도로 절제된 상징체계이다. 당연히 병자를 향한 이 질문 속에는 네가 낫고자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개연성으로부터 심지어는 너는 지금 베데스다 연못가에 나와 누워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너의 병으로 부터 낫고자 하지 않는다는 책망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의 이 질문은 질문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병자의 입장으로서는 당연히 어안이 벙벙했을 터이다. 무슨 말 같잖은 소리냐 , 낫고자 하지 않는다면 무엇하러 여기 나와 누워 있겠는가, 너무나 한심하고 같잖은 예수의 질문에 대꾸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 다. 그러나 이 삼십팔년 된 병자는 예수를 향하여 분노를 표출하는 것도 아니 고, 그렇다고 정말 낫기를 원한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 면 이 병자의 대답은 무엇인가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 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얼핏보면 굉장히 안타까운 병자의 절규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대답은 예수님 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는 거리가있다. 예수님은 지금 그에게 물이 동할 때 에 못에 넣어줄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를 질문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낫기 를 원하느냐고 묻고 있을 뿐이다. 그게 그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 나 여기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병자의 대답이 예수님이 질문한 내용의 답이 되기 위해서는 한가지 전제해야 할 것이 있다. 즉 삼십팔년 된 병자의 병이 오직 베데스다 연못이 동할 때에 가장 먼저 뛰어드는 것으로만 치료가 될 경우에는 정답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병자는 본문에서 보는대로 베데스다 연못에 뛰어들어 병을 고친 것은 아니다 . 다시말하면 꼭 베데스다 연못에 가장 먼저 뛰어들지 않더라도 병을 낫게할 방도가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 병자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지만.

그러니까 이 병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자신의 병이 낫기를 원한 것이라기 보다 는 베데스다 연못이 동할 때에 가장 먼저 뛰어들기를 삼십팔년 동안 원해왔다 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짐작컨대 물론 이 병자도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경직되 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약을 쓰기도 했을 터이고 여러 의원을 찾아다니기 도 했을 터이다. 그러나 백약이 무효라는 것을 알고 그 어떤 의원도 자신의 병을 치료할 수 없다는 절망에 이른 다음부터는 오로지 베데스다 연못에 뛰어 드는 것만이 남아 있는 유일의 해결책이라고 믿고 그렇게 지내온 것이다. 그 러면서도 그 많은 세월 동안 한번도 그 연못에 뛰어들지 못한 채 말이다.

사람이 하나의 문제에 너무 심각하게 매이다 보면 가끔 가치의 전도 현상이 일어난다. 이 병자는 지금 자신이 풀어야 하는 문제가 연못에 뛰어드는 것인 지, 아니면 병이 낫는 것인지를 착각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병이 낫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과제는 연못에 뛰어드는 것으로 변 질되어 갔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오직 그 길만이 자신의 병을 치유하는 유 일의 해결책이라는, 전해 내려온 전설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개재되어 있었 다. 그 전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자신이 확인하지 못하는 한 영원히 「믿음 」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병자는 설사 물이 동한다고 할지라도 그 못에 가장 먼저 뛰어들기는 커녕 꼴찌로라도 뛰어들 수 없는 몸을 가지고 그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오호 애재라 통재라! 그러니까 예수의 질문 네가 낫고자 하느냐 속에는 이미 이러한 병자의 심 리 상태를 꿰뚫어 보는 예수께서, 그래, 물이 동한다면 네가 거기에 가장 먼저 뛰어들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의미를 담아서 물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질문이 내포하는 의미를 이 정도라도 이해해야만 병자의 대답 또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전해 내려온 전설이 아무리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물이 동할 때에 못에 들어가 지 못하는 자의 그 비참함과 서글픔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못가를 떠나지 못하는 삼십팔년 된 병자의 한계. 베데스다는 이 런 면에서 이 병자를 기만하고 있는 것이며, 병에 고통하는 자의 아픔을 이용 하여 그들을 자기 곁에 묶어두고 있는 것이다. 그가 소경이든 절뚝발이이든 혈기마른 자이든, 도저히 하지 못할 일을 제시하고는 병이 낫지 못하는 것에 대한 책임은 병자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는 이 기가막힌 논리구조.

베데스다에 가장 먼저 뛰어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건강한 자들 뿐이다. 베데 스다에 들어감으로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건강해야만 베데스다에 뛰어들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것이 기독교의 역설이다. 뛰어들 수 없는 사람들에게 뛰어들면 건강해진다니! 그래도 사람들은 자신이 뛰어들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망각하고, 건강하게 되고자 하는 욕심에만 사로잡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끊임없이 기다리며, 시도하며, 한숨쉬며, 안타까워 하며, 회개하며, 동 병상린의 집단을 만들며, 집단을 만들었으니 회장을 선출하며, 하루종일 기다 리기 위해 도시락을 준비하며, 그래서 또 도시락 준비위원장을 선출하며, 햇 볕이 뜨거우면 천막이 있어야 하므로 또 천막위원장도 선출하며… . 이렇게 벼라별 짓을 다하다가 끝내는 자기들끼리 다투고 찢고 싸우고 그러다가 하나 님 앞에 와서 누가 잘했네 누가 나빴네 그래 가면서 울고불고… .

오늘날 역시 마찬가지이다. 여전히 예수는 우리에게 와서 네가 낫고자 하느 냐고 물으신다. 그러나 그날 그 용어로 묻지는 않는다. 이렇게 바꿔서 물으 신다. 네가 구원 받고자 하느냐 혹은 네가 천국 가고자 하느냐 이 질문을 옛날 삼십팔년 된 병자에게 했다면 이 병자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 이다.

주여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는데 나로서는 도무지 예수 의 말도 믿을 수가 없고 예수의 삶은 더더욱 아니올시답니다.

그러나 요즘 신자들은 이렇게 대답하지 않는다.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성경에 보면 주 예수를 믿으면 나와 나의 가족이 구원을 얻게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미 구원 받았습니다. 물론 앞으로 천국 갈 터이고, 영생 얻을 것입니다.

도대체 일상적인 인간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모 를 때에는 이럴 수 있다. 그러나 삼십팔년 된 병자는 자신이 자신의 능력으로 베데스다 연못에 뛰어들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오늘날 우 리가 예수를 믿는 일은 이 삼십팔년 된 병자가 베데스다 연못에 뛰어드는, 그 것도 가장 먼저 뛰어드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니 천지개벽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먼 저 알아야 한다.

이 병자는 비록 끝까지 자기가 베데스다에 들어가고자 말하고 있었지만 이미 그의 몸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고백하고 있었다. 이 병자가 예수의 은혜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자신의 한계에 대한 인식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수많은 병자가 모여 있었지만 병에서 나은 사람은 이 한사람 뿐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병자들은 예수께서 보기에 덜 불쌍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적어도 우리를 향한 예수의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할 줄 알아야 한다.

주여 구원을 얻기 위하여 예수를 믿고자 하나 도무지 믿을 수 없나이다.

그러나 이런 대답을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대답이 나오기 위 해서는 우리가 삼십팔년 된 병자의 삶을 살았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를 만나 더라도 그냥 지나치는 것은 이런 삼십팔년 된 병자의 삶이 없기 때문이다. 그 리고 이런 병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지 않기 때문이고 오히려 그 병을 즐기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의 예수는 오히려 거추장 스럽고, 왜 자꾸 내게 와서 병을 고쳐 주겠다는 것인지 성가실 따름이다. 이 병은 다만 우리의 숙명이요 운명인 것을 그걸 고쳐 어쩌겠다고 그러시는가.

다만 아픈 몸 추스리며 잘 살 수 있도록 돈 보따리나 한 보따리 주실 일이지.

그래서 성경이 혀를 차며 이들에게 이르시는 말.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마13:14-15) 이들은 자신들의 병으로부터 놓여나서 예수님께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한다.

물론 본문의 출처인 이사야서에서는 두려워하는 주체가 하나님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마태복음에서는 두려워하는 주체를 저희들로 묘사하고 있다. 자세 히 언급할 기회가 있겠거니와 사람들은 예수가 자신을 고치는 것을 그리 달가 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삼십팔년 된 병의 고통이 자신의 생생한 삶의 여정이자 거기서 벗어나 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은 결국 예수를 만나게 되어 있고, 비록 그 예수님께 약간 엉뚱한 얘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끝내는 예수님의 은혜 안에 그 병으로부터 놓여나 성전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요5:14).

이제 예수님은 이 삼십팔년 된 병자를 베데스다 연못 물이 동할 때 거기에 넣 어 준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이 병자를 고치시는가를생각해 보자. 예수께서는 이 병자의 넋두리 같은 7절의 대답을 들으신 후에 다짜고짜 다음과 같이 말 씀하신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만하면 선문답이 따로 없다. 기껏 삼십팔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 느냐는 따위의 말을 물어 보시더니 이제는 다짜고짜 일어나 네 자리를 들 고 걸어가라고 하시다니! 지금 누구 놀릴 일 있는가 이 문제에서도 우리는 흔히 이 병자가 예수의 말씀을 믿고 자신의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고 생 각한다. 물론 이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 나 비록 이 병자가 예수께서 자신의 병을 낫게하실 수 있다는데 동의하고 그 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고 하더라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문제가 하나 남아있다. 요한이 9절 후반부에서 언급하고 있는 안식일 문제가 그것이다.

하필이면 그날이 안식일이었다는 얘기다.

아니 안식일이 어쨌다는 말이냐, 그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것 하고 이 병자가 예수의 말씀을 믿은 것 하고 도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다는 말이냐고 질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날이 안식일인 것과 아닌 것과의 차이는 아주 중요하다.

즉 그 날이 안식일이 아니었다면, 예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 라고 하신 말씀에 대하여 이 사람이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간 행동은, 예 수의 말씀에 대한 신뢰와 예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의 표현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성경에서 지적하고 있는대로 그 날이 안식일이었다면 예수의 말씀이나 능력에 대한 신뢰 외에도 한가지 문제가 더 남아 있다. 즉 안식일에는 어떤 짐을 들고 걸어가서는 안되는 문제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이 병자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책망하는 것이다.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출20:10, 느13:19, 렘17:21 참조) 유대인들의 이러한 지적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충분한 컨센서스가 이루어져 있는 상황이었으며, 따라서 삼십팔년 된 병자 역시 이런 유대 사회의 규범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이 병자가 예수의 능력을 믿고 병이 나았다고 하 더라도 그 날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데에는 안식일을 범하는 문제가 상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문제는, 걸을 수 없는 병자에 게 하는 말이 아니라 걸을 수 있는 병자()에게 하는 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날이 안식일이 아니었다면 이 병자는 병을 고치는 예수의 능력을 믿은 것 이지만 그 날이 안식일이라면 이 병자는 안식일을 범하는 예수의 삶을 믿은 것이 된다. 전자라면 예수는 그 병자의 육신을 건강하게 한 것이 되고 후자라 면 예수는 율법 아래 매여 있는 그 사람의 영혼을 건강하게 한 것이 된다. 일 반적으로 환영받는 예수는 전자이다. 후자는 언제나 부딪히는 돌이요, 거치는 반석이었다. 오늘날 기독교가 환영하는 예수 역시 거의 대부분은 전자 예수 이지 후자 예수가 아니다. 전자 예수를 환영하는사람들에게 있어 후자 예수 는 사회의 질서(당시로 보면 안식일)를 깨뜨리고 규범을 파괴하는, 체제에 반 하는 위험인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예수는 처단하여야 하며 축출하여야 한다. 세계 역사는 이러한 축출의 역사였고, 소위 정통이라 함은 언제나 이런 축출의 힘을 지녔던 기득권자들이었을 뿐이다.

지금 예수께서 말하고 있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이러한 축 출의 음모에 대한 맞받아침과 삼십팔년 동안 자신을 매고 있던 율법으로부터 의 자유가 참으로 사실이라면 이제 너도 그들의 그러한 축출 앞에 네 자신을 정직하게 내어 보이라는 실존적인 결단의 촉구이다. 이러한 예수의 부르심 앞 에 자신을 순종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지나온 삼십팔년에 대한 환멸과 분함과 원통함이 있어야 한다. 베데스다 연못에 전혀 들어가지 않고도 멀쩡하게 나 을 수 있는 것을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거기 들어가고자 몸부림치며 산 세월 에 대해 치를 떠는 아픔이 있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삼십팔년 된 병은 단순한 육신의 중풍이 아니라, 하고자 하는 의지는 있으되 할 수 있는 능력은 없는, 율법 아래 매인 삶, 출애굽한 이스라 엘이 광야에서 헤메는 삶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 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임에도, 마치 자기들이 가나안을 잘 정탐하고 성공적으로 공격하여 얻는 것처럼 생각하여 열두지파의 대표들이 가나안을 탐지하는 때로부터 광야 생활을 벗어날 때까지 걸린 기간이 현실적으로 삼십 팔년이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신2:14).

우리는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는 줄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의 의미는 그 옛날 삼십팔년 된 병 자가 그 아픈 몸을 이끌고 베데스다 연못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뜻이다. 그 때에는 구원의 조건이 「들어가면」이었지만 오늘날엔 그것이 「믿으면」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때의 조건이 삼십팔년 동안 혈기마른 자로서 산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조건이었듯이, 오늘날의 조건 역시 세상에서 세상의 원 리를 신뢰하며 한평생을 살아온 사람에게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불가능한 일 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잊고 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 삼십팔년 된 병자가 베데스다에 들어가지 않 고도 낫게되는 것 이상의 기적이며 은혜이다. 우리가 믿어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못에 들어가서 낫게 되는 것이 아니다. 베데스다는 이렇게, 은혜란 우리쪽에서의 반응 여하에 따라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베데스다는 이름 그대로 은혜의 집이며, 은혜란 그냥 우 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상태가 조건이 되어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삼십팔년 동안 지켜온 안식일이라는 율법으로부터 일어나 걸어 갈 수 있겠는 가 그것 보다 먼저 그러한 율법의 준수가 우리를 꼼짝 못하게 얽어매는, 그 래서 혈기마른 자와 다름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냥 누워서 인생을 보 내게 하는 우리의 「병」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은혜는 이 두가지 질문을 항상 전제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자신을 얽어매는 분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의 하나님은 옛날과 다름 없이 너무 재미 없는 분이다. 이래서는 안된 다. 저러지도 말아라. 물가에 가지 말아라. 빠져 죽는다. 산에도 가지 말아라 . 뱀에게 물린다. 그래서 아무것도 못하고 세월을 보내다 보니 이제는 정말 하고 싶어도 능력이 없어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들은 살인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살인할 수 없는 사람들일 뿐이다. 간음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간음할 수 없는 사람들일 뿐이다. 역시 도둑질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도둑질 할 능력이 없어서 도 둑질 하지 못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살인할 수 있고 간음할 수 있 는 사람들을 향하여, 잘못 되었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살인할 수 있는 사람이 좋겠는가, 아니면 살인할 수 없는(혈기가 말라 누워 있는 사 람들은 살인할래야 할 수 없다) 식물인간이 좋겠는가 간음 할 수 있는 건강 한 사람이 아름답겠는가, 아니면 척추가 부러져서 간음하고 싶어도 할 수 없 는 병자가 아름답겠는가 삼십팔년 된 병자는 살인할 수도 없고, 간음할 수도 없으며, 안식일을 어길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예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살인할 수 있게 하며, 안식일을 범할 수 있게 한다. 우리가 살인할 수 있고 안식일을 범할 수 있다는 것, 얼마나 좋은 일인가 건강하면서 살인하는 것이 적어도 아파 누워 있는 것 보다훨씬 괜찮은 일인 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아 직 하나님의 생명의 원리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살인하고 도둑질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명제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살인할 수 없고, 도둑질 할 수 없고, 간음할 수 없는 사람들인가를 돌이켜 보아야 한다. 그 다음에 그것이 우리의 심각한 병 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우리는 예루살렘의 양문 곁 베데스다 연못을 찾을 것이다. 이 삼십팔년 된 병자는 자신이 살인할 수 없는 사람이요, 안식일을 지킬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몸서리쳐지도록 싫었던 사람이었다.

이 화창한 안식일 아침에, 골프채를 매고 필드로 향하지 못하고 성경을 끼고 교회로 향하는 모든 신자들은 자신이 정말 안식일에 골프를 치러 갈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할 수 있지만 안하는 것 인지, 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못하는 것인지, 자신에게 정말 골프를 칠 수 있 는 능력이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해 보시기 바란다. 골프 칠 능력이 없어서 못 치는 걸 가지고 교회 오고 싶어 온 것처럼 자랑할 것까지는 없지 않겠는가 우리 모두 안식일 아침엔 골프장으로 나가도록 하자. 단 예수님 시대의 유대 인들 처럼 철저히 율법을 지킨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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