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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기적을 일으킨 조카 사랑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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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2월 28일, 누님으로부터 갑자기 전화가 왔습니다. '이목사! 어제 정희가 경기를 일으켜 쓰러졌는데 기도해줘.'라는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였습니다. 목소리가 다급했지만 처음에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대학 2학년에 올라가면서 무리한 다이어트, 그리고 학교 성적으로 마음이 상하게 생긴 일시적인 문제이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1997년 3월 1일, 저녁 무렵, 조카는 더욱 심하게 경기를 일으켰고 혼수상태에 빠져서 인천 길병원에 급히 입원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저도 마음이 조금 다급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큰 염려는 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밝고 명랑하게 지내는 조카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절망적인 상황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97년 3월 2일,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교인들과 함께 병원에 심방을 갔습니다. 그러나 병실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고 의사가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병원 2층 로비에서 기도하면서 저는 조카의 사태가 생각보다 매우 위중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후 날이 갈수록 조카의 상태는 심해졌습니다. 언어능력을 상실해 갔고, 폭력적 발작 행위가 심해졌으며, 지속적인 혼수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저는 조카를 위한 집중기도에 들어갔습니다.

1997년 3월 18일, 3주 째 조카는 일어날 줄 몰랐습니다. 누님을 만났는데 심신이 지쳐 있었고 삶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돈도 싫다. 약국도 싫다. 아무 것도 하기 싫다. 딸을 저 꼴로 만들어 놓고 무슨 사는 낙이 있는가?' 고통하는 누님을 위로하고 싶어 말했습니다. '평안히 기도하세요. 누님!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위로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1997년 3월 28일, 조카는 인천 길병원에서 삼성의료원 특실로 옮겨졌습니다. 길병원에서는 아무리 해도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카는 이미 한달 가까이 한시간 이상 잠을 못 잔 상태였고, 상태는 더욱 심해져서 사람을 전혀 몰라보는 완전 혼수상태가 되었습니다. 삼성의료원 특실은 하루 병원비만 40만원이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병원비 얘기를 들을 때 '한달 병원비'를 '하루 병원비'로 잘못 들었는 줄 알았습니다. 누님이 그때서야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고 한 달에 십만 원만 십일조로 드렸다. 그게 돈을 버는 길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병원비를 생각하면 한 달에 그 하루 병원비조차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한 것이 그렇게 후회가 되었다. 내가 진정 하나님을 살아 계시다고 믿는다면 그렇게 인색하지는 않았을텐데...'

저는 그 누님의 고백을 들으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님!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그 힘써 모은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잠깐의 운전 실수로 어렵게 모은 돈을 허무하게 날리는 경우를 흔히 목격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움켜쥔다고 해서 돈이 우리에게 있어줍니까? 우리에게 조금만 허점이 보여도 돈은 어느새 다른 연인을 찾아 매정하게 우리를 버리고 떠나지 않습니까? 영원히 있어 주지도 않으면서 그 돈이 우리의 삶에 그토록 많은 아픔을 주고, 우리의 신앙을 그토록 방해하지 않습니까?' 누님에게 이 말을 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모처럼 얻은 깨달음을 방해할 것 같아 묵묵히 누님의 말을 듣고만 있었습니다.

1997년 5월 6일, 삼성의료원에 입원한지 40일이 지났으나 병세는 여전했습니다. 그때까지 병원에서는 수십 가지의 각종 첨단 검사를 다 했는데, 병의 원인을 밝히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조카는 거의 식물인간 상태가 되어 대소변을 남이 받아주어야 했으며, 6가지의 연쇄 합병증이 온 상태여서 목숨이 위태한 상태였습니다. 의사들은 병자에게 해가 될 수 있다고 여전히 저의 접근을 막았습니다. 의사의 견해와 전문성은 존중하고 그들의 염려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삼촌인 목사가 잠깐 기도해주는 것까지 막는 것은 조금 심한 처사라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때 누님에게 말했습니다. '누님! 의사들도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다고 하니 퇴원시키고 하나님께 정희를 온전히 맡기는 것이 어떨까요?' 그러나 누님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1997년 5월 14일, 누님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습니다. '삼성의료원 병원비가 너무 비싸서 강남 성모병원으로 옮길 것을 생각하고 매형과 함께 강남 성모병원 정신병동을 방문해 보았는데 너무 시설이 차이가 나서 마음이 아파 도저히 병원을 옮길 수 없겠다.' 돈을 생각하면 빨리 병원을 옮기고 싶지만, 딸을 생각하면 도저히 옮길 수 없다는 얘기였습니다. 강남 성모병원을 나서면서 그때 비가 왔는데 누님이 매형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나 비 좀 맞고 싶어요!' 억수같이 비가 오는데 눈물을 흘리면서 30분 동안 누님과 매형은 병원 후문 계단에 같이 앉아서 비를 맞았습니다. 30분 동안 비를 맞았더니 그 동안 딸에 대해 잘못했던 미안한 감정이 없어지고 슬픔이 조금이나마 가라앉더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저도 같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까지 자신만만하게 살았던 누님이 그렇게까지 연약한 모습을 보일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1997년 5월 17일, 조카를 잠시 누님의 집에 데리고 왔습니다. 앞으로 상태에 따라서 토요일마다 데려와서 하루 동안만 집에서 조카를 보살피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같이 예배드리고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때부터 저의 주관 하에 가족 친지들의 간절한 기도와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처음 예배드렸을 때 읽었던 본문 말씀은 이사야 40장 28-31절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우리 모두 영원하신 하나님, 창조자 하나님, 그리고 피곤을 모르시는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밤낮으로 지키시기 위해 24시간, 철야근무까지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는 명철이 한이 없으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에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와 계획이 있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만 바라보고 힘과 능력을 얻어서 모두 이 어려움을 이겨 나갑시다.' 말씀이 끝난 후, 우리는 모두 함께 전심으로 조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1997년 5월 25일, 정희를 향한 저의 정성에 감명을 받아서 드디어 매형이 우리 교회에 나와 간절히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아래 처남으로만 여기고 대했지만 그때부터는 저의 말을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사의 말로 존중하며 들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순수한 신앙을 보면서 '희망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1997년 5월 30일, 조카가 집에 잠시 있을 때에 상태가 조금 호전되는 것 같아서 조카를 병원에서 퇴원시켰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조카는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했고, 잠도 여전히 자지 못했으며, 수시로 발작을 일으켰기 때문에 가족들의 심적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그리고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저의 몸과 마음도 지쳐갔습니다.

1997년 6월 15일, 주일 낮 예배에서 말씀을 인도하기 전에 '달리다굼!(일어나라!)'이란 찬양을 하면서 조카에게 달리다굼의 역사, 즉 일어나는 역사가 있게 해 달라고 우리 모두 하나님께 간절히 빌었습니다. 강단에서 보니 매형이 그 찬양을 하면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전 가족 친지들이 다시 모여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오! 하나님! 능력의 오른팔로 안수해 주셔서 달리다굼의 역사가 오늘 이 시간에도 나타나게 하옵소서!'

1997년 6월 21일, 누님이 한 남자 약사회원과 대화를 하다가 그분으로부터 희한한 체험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분 아들이 어느 날 배가 아프다고 호소한 다음 정신이 혼미해졌는데, 소화제를 먹였더니 20일만에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얘기였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그날 저녁 누님은 조카에게 백원 짜리 소화제 두 알을 먹였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4개월간 1시간 이상 잠을 못 자던 조카가 그 순간부터 18시간을 내리 잤습니다. 갑자기 전화가 와서 누님으로부터 조카가 오래 동안 자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있는데, 무엇인가 좋은 일이 일어날 듯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전화를 받은 즉시 누님 집으로 달려간 후, 조카가 깨어나기를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조카는 깨어난 다음에 잠깐 식사를 하더니 또 12시간을 내리 잤습니다. 그처럼 정상적인 잠을 자는 순간부터 조카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급속히 상태가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1997년 7월 17일, 조카를 위한 집중 금식기도를 위해 천마산 기도원에 들어갔습니다. 금식 7일째 되는 날, 교회로 돌아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정희는 어떻게 될까요?' 지극한 평안과 함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 염려하지 말아라. 나에게 맡겨라.'

1997년 8월 3일, 주일 저녁예배를 인도할 때 입에서 이런 선포가 나왔습니다. 다니엘서 강해를 하면서 느부갓네살이 7년 동안 기억상실 상태에서 짐승처럼 지내다가 7년 후에 하늘을 우러러보아 총명을 회복했는데, 조카는 7개월만에 총명이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다는 그런 요지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때 매형은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1997년 9월 말, 조카가 쓰러진지 7개월 될 즈음에, 조카는 과거의 기억을 대부분 회복하고 거의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누님 부부의 얼굴에 안도감이 깃들기 시작했습니다.

1998년 1월 말, 그때부터 조카는 영어 회화 교실에 등록해 다니기 시작할 정도로 지적 능력이 거의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정 때 조카한테 세배를 받을 때에는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북받쳐 올라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식물인간으로 지내다가 언제 저렇게 회복되었나 하는 신기한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1999년 5월 30일, 전 가족들이 모여 식사를 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식사 후, 저는 난생 두 번째로 가족들과 함께 노래방을 가 보았습니다. 노래방에서 조카의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속으로 기원했습니다. '하나님! 저 조카의 입술에서 하나님에 대한 감사 찬양이 일생 끊이지 않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날 밤 10시 30분까지 가족 친지들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조카에게 있었던 일을 죽 되돌아보면서 다시 한번 인간의 연약성을 절감하게 됩니다. 인간은 많이 아는 것 같아도 너무 많이 모르는 존재입니다. 몇 백원의 소화제면 금방 해결할 수 있는 일을 4개월 동안 6천 만원을 쏟아 부어서 해결 안되게 하는 인간의 실상을 보십시오. 그러나 사실상 저는 소화제가 조카를 고쳤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연약한 인생들의 애통하는 기도를 듣고 고쳐주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진실된 기도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움직입니다! 그 하나님의 움직이심이 꼭 치유로 나타난다고 억지를 부리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병자의 아픈 심정을 진정 자기의 아픔으로 느끼고, 그를 위해서 의무적인 기도가 아닌 진실된 사랑의 기도를 드린다면 저는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가장 선한 방법으로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이 믿음을 당신에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이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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