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배울 점 (살전 01:2-10)

첨부 1


이제 가을이 시작되는 9월의 첫 주일을 맞이했읍니다. 이 달에는 올림픽을 비롯한 수많은 국제행사도 있고 민속절의 하나인 추석도 있는 달이어서 참 바쁜 달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가을이 시작되는 달이어서 농부들은 물론 온 국민이 기뻐하는 추수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시간 우리는 신자로서 과연 금년에는 우리의 영적 농사는 어떻게 되었는지, 혹은 흉년은 아닌지, 과연 금년의 영적 추수는 얼마나 거두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는 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가장 모범적인 교회의 하나였던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우리가배워야 할 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우리 교회도, 또 우리 교인들 한 사람,한사람도 다 모범적인 신자들이 될 수 있기를 먼저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 먼저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떤 교회였읍니까
데살로니가 교회는 당시 로마의 영토였던 마게도니야주의 수도로서 큰 도시였을뿐 아니라 또 상업 도시로서도 유명한 곳이었읍니다. 바울은 제 2차 전도여행 때 디모데와 함께 이 곳에 와서 4주동안 머물면서 개척한 교회입니다. 당시 바울은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아 밤에 몰래 도망을 가야 하는 그런 수난을 당한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충분히 가르치지도 못했고 돌보아 주지도 못했기때문에 과연 데살로니가 교회가 잘 성장하고 있는지, 어려움은 없는지 여러가지로 걱정이 많았읍니다. 마치 어머니의 심정이라고 할 수 있읍니다.
지난 주 저의집 막내가 개학이 되어 다시 미국에 들어갔읍니다. 그런데 저는 대견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데 저의 집 사람은 그렇지 않아요. 그 어린것이 집에서는 소제 한번 안하던 것이 밥은 제대로 할까, 설거지는 제대로 할까,이런 저런 걱정이 많은지 혼자서 훌쩍훌쩍 해요. 아마도 이것이 엄마의 마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바울도 그랬을 것입니다.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했는데 어려움은 없을까 잘들 있을까 그래서 디모데를 보내어 교회의 소식을 알아보았읍니다. 그런데 결과는 대단히 좋은 것이었읍니다. 그래서 감사의 편지를 쓴 것이바로 이 데살로니가 전서입니다.

2. 그러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떤 교회였기에 우리가 배워야 합니까
무엇보다도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고 했읍니다(1:6). 이것이 문제입니다. 교회가 본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실제 그렇지를 못합니다. 과거 우리교회는 우리 교단의 권력의 중심이 되면서 마치 부패의 상징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전도의 문이 닫혀졌지만 그러나 이제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어야합니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며 어떻게 세상속에서 개혁을 해야하며, 기독교문화를 어떻게 형성해가야 하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살아있는 모델이 되고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떤 면에서 그 지역의 모범이 되었는지를 살펴보면서 우리 교회도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될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데살로니가 교회는 첫째로 믿음의 역사가 있는 교회였읍니다. 믿음의역사라는 말은 믿음의 구체적 결과가 나타난 교회라는 말입니다. 즉 살아있는믿음을 가진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믿음이란 말이 명사로서도 사용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동사의 형태로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가장많이 사용되고 있는 말이[pisteuoeis]즉 believe into라는 단어입니다. 그냥 믿는 것이 아니고 into 즉 안으로들어가는 믿음, 살아서 움직이는 믿음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열매를 맺어야 그것이 믿음이지 가만히 있는 것이 믿음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고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것이니라고 하였읍니다(2:26). 그리고 이런 행함이 없는 사람들을 [허탄한 사람]이라고 불렀읍니다. 그러면서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고 했읍니다(2:18). 또구약의 전도서에 보면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을 허탄한 것으로 규정하면서이렇게 말했읍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이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구체적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움직이는 것이지 정적으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가 있는 교회였읍니다. 이것을 우리는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보여야 합니까 아마도 기도하는 모습,성경을 읽는 모습, 교회에 가는 모습, 그러나 참으로 보여야 할 것은 바로 주님의 모습입니다. 왕이시면서도 종으로서 봉사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2] 둘째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랑의 수고가 있는 교회였읍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은 말로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수고로써 나타납니다. 어떤 부모도 자식을 다 사랑하지만 한국의 부모들만큼 자식들을 위해 수고하는 부모들은 없읍니다. 이것은 한국의 부모들의 사랑이 다른 어떤 나라의 부모들보다 더 크다는것을 말해줍니다. 사실 사랑은 입으로 보다는 손으로 그리고 몸으로 나타내는것입니다.
에벨린 듀발 박사는 사랑은 다음 여섯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했읍니다. 첫째로 사랑은 언제나 밖을 향해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남에게 관심을 가지고 무언가 주어야 합니다. 둘째로 참된 사랑은 창조적이기 때문에 모든 일에열심을 낸다는 것입니다. 세째로 사랑은 분담하기를 원한다고 했읍니다. 나혼자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괴롬도, 슬픔도 함께 나누는것입니다. 네째로 사랑은 [나]만을 생각하는 대신에 [우리]를 생각한다고 했읍니다. 다섯째로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좋아한다고 했읍니다. 끝으로 사랑에서 시간이 가장 확실한 시금석이라고 했읍니다. 사랑하면 어떤 어려움에도 꾸준히 끈기있게 참고 계속합니다. 중간에 포기하는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밖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읍니까 아니요. 항상 안으로만 향해 있읍니다. 오늘 우리가 오후 3시에 올림픽 성공을 위한 연합예배를 우리 교회당에서 가지게 됩니다만 저는 이것을 우리 교회의 이미지 개선을 위한 전략적 측면에서, 그리고 교회성장이란 측면에서 갖는 것을 허락했읍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좀 걱정을 하는 분들이 없지 않지만 그러나 우리 교회는 밖을 향해손을 벌리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열심을 가지고 이 민족이 당면한 이 중대한일에 우리도 한 일부를 분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남을 위해 무엇을 할때어려움이 없지 않을 것이지만 그러나 참고 견디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에,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되기 위해서 우리는 밖으로 우리의 시선을 돌릴 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그래야 우리 교회가 삽니다.
[3] 세째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소망의 인내를 가진 교회였읍니다. 그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많은 박해를 받았읍니다. 정치적으로 로마당국으로 부터황제숭배에 가담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박해를 당했고, 유대교인들에게 기독교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사회적으로 소외당했고, 또 직장이나 그 밖에 어떤 단체에서든지 핍박을 당했읍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것을 잘 견디어 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 소망 때문이었읍니다. 사실 사람은 소망이 있으면 어떤 어려움도 잘 견디어 냅니다. 그러나 소망이 없을 때에는 작은 어려움도 견디어 내지를못합니다. 벵겔은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가장 확실한 특징이라고 했읍니다. 그래요, 이것이 있어야 진짜 신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크든 작든 어려움이 있읍니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들이당면하고 있는 어려움은 무엇입니까 솔직히 저는 모릅니다. 저는 지난 금요일에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이 명순 집사님을 심방했읍니다. 우리 교인들이 열심히 기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시 23편 4절에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고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말씀을 읽고 간단히 증거한 뒤에 함께 기도했읍니다. 투병생활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괴롭다는 것을 눈으로 보았읍니다. 기도할 때 눈에 눈물이 많이 고인것을 보았읍니다. 뒤에서 잊지않고 위해서 기도해주는 성도들의 사랑, 먼 서울까지 와서 함께 기도해주는 목사에 대한 고마움... 아마도 그런 것이 함께 어울려 나오는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저도 그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지만사실 울었읍니다. 예수님처럼 나사로야 일어나라 하고 일으켜 세워서 함께 대전에 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읍니까 그러나 함께 오지못하는 인간적 한계 때문에 답답하여 울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투병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망입니다. 내가 다시 낫는다는 소망을 가진 사람과 아이구 이제는 모든게 끝났어 하고 자포자기한 사람은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것은 투병생활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생활에서 그렇습니다. 얼마전 삼부 아파트에 사는 두 노인내외가 남해인가 어디에가서 함께 투신자살을 하였읍니다. 자녀들을 기를 때 별아별 어려움이 다 있었지만 이 놈들을 기르기만 하면 모든게 다 잘 될거야 하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굶어가면서도 잘 참았는데 그러나 정작 기르고 나니 서로 부모를 안돌보겠다고 미룹니다. 그래서 에헤라 이 놈들 보기싫다. 이제 아무에게도 부담을 주지말자하고 자살한 것입니다.
빅톨 프랭클 박사가 쓴 [의미를 찾는 인간의 탐색]이란 책은 많은 감화를줍니다. 그는 나치독일의 처참한 유대인 수용소에 대한 관찰기록을 했읍니다.
그에 의하면 건강하게 살아있는 사람들은 다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고 그 중에서도 남을 격려하며 도와주는 사람들이란 통계를 냈읍니다. 이처럼 사람은 소망이있어야 건강하게 살아 남습니다.

이제 설교를 맺을려고 합니다. 우리 교회도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믿음의 소문이 많이 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믿는 자의 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대전을 복음화하기를 원합니다만 그러나 이것은 말로서 되는것이 아니고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이 있어야 됩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세가지를 구비해서 한국에서 제일가는 교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