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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전방에서 겪은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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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를 두 달 앞두고 우리 부대는 강원도 산골로 동계훈련을 나갔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이 와서 다행히 날씨는 그렇게 춥지 않았지만, 산 전체가 온통 하얀 눈에 뒤덮여 주위를 분간하기 힘들었다.

안전사고를 걱정한 부대장이 훈련을 중단하고 그냥 부대로 복귀할까 망설이고 있다는 얘기도 들렸다. 하지만 나는 조금만 더 버티면 꿈에도 그리던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약간은 들뜬 마음으로 훈련에 임했고, 어느덧 마지막 날 밤을 보내게 되었다.

새벽 한 시쯤 불침번 근무를 서기 위해 나온 나는 잠이 덜 깬 눈으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하얀 옷을 두껍게 차려입은 나무 위로 춥게 떠있는 달이 으스스해 보였다. 깊은 산 속에 혼자 깨어 있다고 생각하니 약간은 두려웠지만 용기를 내어 조금 멀리까지 나가 보았다.

달빛이 밝고 발자국도 뚜렷하게 남아 있으니 길을 잃어버릴 염려는 없었다. 산 아래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위치에서 한참 눈 쌓인 산의 경치를 감상하다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리는 순간 발 밑에서 바스락 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에 나는 정신없이 굴러 내렸다.

얼마나 미끄러졌을까. 겨우 몸을 추스리고 보니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지만 골짜기로 구르는 동안 방향감각을 잃어버려 거기가 어디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대충 방향을 가늠잡아 기어 올라가 보았지만 세상이 다 똑같아 보이고 몇발자국을 걸어보았지만 계속 같은 자리만 맴돌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얼마나 걸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전투화가 서서히 젖어오기 시작하면서 발뒤꿈치와 새끼발가락에 물집이 생겼다. 처음에는 모래라도 들어간 것처럼 꺼끌거리더니 곧 발바닥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커다랗게 번져 한발한발 걸을때마다 통증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고통도 잠시, 나중엔 동상에 걸렸는지 발의 모든 감각이 마비되고 말았다. 손가락과 얼굴도 꽁꽁 얼어 마치 남의 살처럼 거북스럽게 느껴졌다. 졸음과 피곤함이 몰려오고 만사가 귀찮아져 그냥 주저앉아 잠들어버리고만 싶었다.

살을 에던 바람결도 느껴지지 않을만큼 몽롱한 의식. 아 이제 끝이구나. 제자리에 서서 불침번 근무나 제대로 할 일이지 눈 내린 달밤의 경치에 취해 장소를 이탈하다니…. 따뜻한 난로가 생각났다.

김이 모락모락나는 김치찌개도 떠올랐다. 이불속에 누워 푹 잠이나 잤으면…. 그때였다. 저멀리 보이는 산 아래 반짝이는 꽃같은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헛것이 보이나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지만 오색 잎에 둘러쌓인 빨간 꽃의 모양은 없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관찰하고 나서야 나는 그게 크리스마스 장식을 해놓은 교회의 십자가임을 알게 되었다. 하얀 눈 위에 핏방울이 떨어져 있는 듯한 모습의 그 십자가를 보는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신없이 뛰고 구르면서 오직 십자가를 향해 달렸다. 십자가는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무리 달려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가시덤불이나 깊은 골짜기, 험한 절벽 때문에 비잉 돌아서 가다보면 잠시 십자가가 안 보이게 될 때도 있었는데, 그 몇 분간의 순간이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한지 몰랐다.

십자가를 놓치면 이대로 얼어죽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춥고 살벌한 산길에서 멀리 보이는 십자가를 향해 온 힘을 다해 뛰어가는 것, 그것만이 살 길이었다. 주위가 어슴프레 밝아올 무렵, 더 이상 움직일 힘조차 없을만큼 지쳐서야 십자가가 있는 곳에 다달았다.

도착하자마자 부대에 전화를 걸어 몇가지 복잡한 과정을 거친 후에 가까스로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었다. 부대장은 내가 탈영한 줄 알고 상부에 보고까지 올렸다가 살아돌아오자 걱정했던 마음에 화를 내다가 자초지종을 듣더니 모든걸 이해해 주었다.

내 손가락과 발가락, 코와 귀가 몽땅 동상에 걸렸었지만 다행히 중상은 아니어서 불구는 피할 수 있었다. 그때, 십자가를 본 건 정말 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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