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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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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목적을 위하여 사람을 창조 하셨다. 이 목적을 위하여 만든 첫번째 사람이 아담이다. 그는 온 인류의 씨로 창조되었다. 그가 퍼져서 온 땅을 점령하도록 설계되었다. 그러나 사탄이 이 사람안에 선악과를 넣었기 때문에 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아담으로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담의 역사는 타락과 구원의 연속일 뿐이고 결국 바벨탑에 이르게 된다.

노아시대에 노아를 구원함으로 그가 씨가 되어 시날평지에 모여 살게 되었고 거기에서 바벨탑을 쌓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 바벨탑을 허물고 거기에서 당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아브람을 부르셨다. 아브라암은 부름받은 사람의 조상이다.

아브라암은 하나님께로 부름받은 최초의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부르시고 그에게서 이삭을 낳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아들,곧 이삭을 씨로 삼으셨다. 하나님은 영원한 언약을 이삭과 맺으셨다. 아브라암은 이삭을 낳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 창세기 17:21 ) 는 말씀은 하나님의 두번째 부르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이삭은 그 씨로 설정되었다. 이 씨가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를 퍼지게 할 수 있는 그런 씨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 씨를 중요하게 여기실까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목표를 이루는 유일한 방법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지식이나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방법을 이룰 수 없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목적은 당신 자신을 표현하고 만유 위에 당신을 대리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꼭 당신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아니면 안되는 것처럼.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 씨가 아니면 그 생명이 아니면 안된다. 만일 우리가 무궁화꽃에 대해서 아주 잘 표현해 놓았다 하자. 그렇지만 무궁화씨가 떨어져서 무궁화꽃이 된 것과 같지는 않다. 무궁화꽃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은 무궁화씨가 떨어져서 그 싹이 나서 그 꽃이 계속 피어야만 한다.

이것이 영 있고 그 원칙안에서 그의 나라가 있고 부름받은 자로써의 사명이 있게 된다. 누구도 이 씨가 없이 일할 수 없다. 성경안에 출현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이 원칙속에서 살았다. 모세를 생각해 보자. 육신의 소망이 완전히 끊어진 80살에 부름을 받았다. 역시 이삭의 원칙이다. 이것이 부활이다. 부활의 원칙안에서 하나님의 세계가 가능하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면서 왜 세상을 이렇게 놓아두십니까 세상이 이렇게 부패하고 멸망해 가고 있는데 왜 하나님은 그대로 보고 있읍니까 라고 탄원하기 위하여 성전오 사람이다. 모든 사람은 이 씨의 원칙으로 부름받고 있다. 이 씨가 없이 부름받은 사람은 없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부를 때는 반드시 그 사람 속에 그 씨가 있어서이다. 이와같이 영생도 그리스도의 씨의 원칙안에서 있을 수 있다.

영생은 어떠한 상태이다. ' 술이 취했다.' 는 것이 사람속에 술이라는 원인이 들어와서 생겨진 증상이듯이 영생도 독생자라는 원인이 우리 속에 생김으로 나타난 증상이다. 예수가 원인이 될 때 나타난다. 예수가 나의 생명이 될 때 이 증상은 발생 된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이 씨가 없이 이 상태가 될 수 있다고 오해한다. 차표를 타면 서울에 가듯이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로인해 많은 종교적인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말세문제, 종말론, 죽은 후에 천당에 갈 수 있는가,없는가 혹은 지금 구원을 받았으니 앞으로는 무슨 일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문제 외에도 많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모두 영생이 씨가 들어와서 생긴 증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차표를 사놓고 있다든지 보증수표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씨가 없이 영생을 얻을 수 없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애급에서 종노릇하던 이스라엘을 광얗이지 않는 것 이 멸망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강도는 ' 당신이 하는 일이 옳지 않은 것이 없읍니다. 당신의 나라에 이를 때 나를 기억해 주소서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영생이다.

예수 한 사람을 놓고 그를 받아들이는 것이 영생이고 그를 거부하는 것은 지옥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배가 고플때 음식을 받아들이면 배가 불러지고 음식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배가 고파서 괴롭게 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여지면 그것이 곧 영생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람이 와서 열심히 고르더니 가짜 진주를 사가지고 갔다. 그런데 한 사람은 진짜 진주를 사가지고 갔다. 주인은 뒤에 진짜 진주를 사가지고 간 사람에게 너의 눈이 복이 있구나. 할 것이 아니겠는가. 마찬가지로 예수를 보고 하나님의 독생자,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라고 받아들여지는 사람은 복이고 그 자체가 영생이며 행복이다.

이렇게 영생은 어떤 것으로 인해 우리에게 밀려오는 상태이다. 흑암의 권세에서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긴 상태이다. 다시말해서 깜깜한 굴속에 있던 사람이 굴 밖으로 나와서 광명한 세계로 나온 것과 같다. 이것이 곧 구원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뱀에 물렸을 때 모세는 장대에 구리뱀을 매달아 놓고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은 살 것이라 하였었다. 그리고 모세의 말을 따른 사람은 살았고 따르지 않은 사람은 죽게 되었다. 이와같이 예수 십자가를 동정적으로 생 각한다. 얼마나 괴로울까, 얼마나 슬픈가, 얼마나 아플까 하는 동정심이 발동하게 된다. 그래서 카톨릭의 한 신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얼마나 고통스런가를 경험하기 위하여 자기가 직접 십자가에 달리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동정적인 마음이다. 이 마음으로 예수를 보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그의 십자가에 달림을 보고 구원이 되는 것이다. 예수를 보고 아! 하나님의 독생자이구나! 하나님의 독생자가 저런 사람이구나.라고 보여지면 영생이 그에게 있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부터 나는 왜 태어났을까 ,나는 왜 이렇게 부족할까, 나는 왜 마음대로 할 수 없을까 하는 문제를 가직고 있다. 이것이 불행이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 저렇게 죽는구나.라고 보여진다면 그는 다시 그의 인생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라는 말씀이 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것을 마치 갓바위에 가서 돌부처에 절하는 것처럼 믿으려고 한다. 영험이 많은 돌부처를 믿고 공을 들이면 자기들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도 그렇게 믿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를 구원하는 길이 아니고 우리를 더욱 부족하게 느껴지게 할 뿐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라는 말씀이 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것을 마치 갓바위에 가서 돌부처에 절하는 것처럼 믿으려고 한다. 영험이 많은 돌부처를 믿고 공을 들이면 자기들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도 그렇게 믿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를 구원하는 길이 아니고 우리를 더욱 부족하게 느껴지게 할 뿐이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하나님의 독생자로 보여야 한다. 그 모습이 하나님의 유일한 모습이고 참 하나님의 모습으로 보여야 한다. 그리고 그 모습이 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참 만족과 행복이 찾아 오게 된다. 잘 못먹어서, 잘 못입어서, 잘 못생겨서 불행했던 사람들이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보는 순간 자기의 문제와 예수의 문제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교회안에서 간증도 마찬가지다. 갑이라는 형제가 간증을 할 때 을이라는 형제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갑은 환경도 좋고 돈도 많고 괴로운 일도 없으니까 ... 라고. 그러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일은 이런 세계와 다른 세계의 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일과 전혀 다른 세계에 있다. 영생은 이런 생존에 문제를 잘 해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전혀 다른 차원에서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생존의 문제는 우리들이 잘하면 해결이 되고 잘 못하면 해결이 잘 안되기도 한다. 또 잘 해결이 된다고 해서 천국이 가깝고 잘 해결이 안 된다고 해서 천국이 멀어 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천국은 생존의 문제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고 세상을 구원하려고 하신다는 말씀이다. 그의 아들을 보냈다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자, 또는 하나님이 그렇게 나올수 밖에 없는 자, 하나님의 형상이 된 사람을 보냈다는 뜻이다. 이 아들을 보낸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함이 아니고 세상을 구원하려함이다. 하나님이 이 아들을 보내야만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근원적으로 자신이 천사가 되지못한 것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궁극적인 불만이다. 이 긍극적인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도전하고 어떤 사람은 반항하고 어떤 사람은 무조건 비는 사 인정을 받는 것을 볼 때 우리의 관념은 완전하게 뒤바뀌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천사가 되지 못한 불만도 우리를 천사가 되게함으로 해결하신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보내시고 우리가 그를 보고 이 사람이 복된 사람이구나 라고 알아온다든지, 구원의 차표를 탔느니 안 탔느니, 구원의 확신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자기가 구원을 받아 놓았다는 것은 동화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아무런 약속을 받은 것이 없다. 단지 자기의 상태가 현재 구원의 상태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다. 성경에서는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느니라. 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아들이 있으면 생명이 있고 지금 아들이 없으면 생명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은 현재의 어떠한 상태이다. 스윗치를 켜니까 뭄▼ 받을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지만 유일하게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된 한 인격을 가지고 있다. 영생은 이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인격만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성분일 수 있다.

니고데모는 자기가 무엇을 좀더 하면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을까 해서 예수를 찾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읍니까 라고 예수님께 물었다. 예수님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당신 자신이 니고데모의 씨임을 말하고 있다. 만일 예수님에게 노골적으록까 라고 반문하게 되었다. 이에 예수님은 당신은 이스라엘 선생으로 이것도 모릅니까 진실로 당신에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우리의 증거를 받지 않고 있읍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당신이 믿지 않는데 . 예수의 씨와 니고데모의 씨가 다르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자기의 씨를 받아들여서 자기와 같은 나무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렇게 영생은 씨에 관계된 문제이다. 씨가 있는 사람은 영생이 있고 씨가 없는 사람은 영생이 없다. 하나님은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멸망시키지 않으신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다 영생안에 있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독생자(씨)안에 있지 않기때문에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랜 시간이 지나오는 동안에 왜 모세만 씨를 갖게 되었을까 모세는 80년 동에 놓고 ' 아버지 할수만 있으면 이잔을 내게서 옮겨 주옵소서. 그러나 내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할때 우리는 그와 가장 친근함을 느끼게 되고 이것이 인생의 가장 진실한 모습인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이것이 하나님이 지은 인간의 모델(원형)인 것을 인식하게 된다. 이렇게 알아지는 것이 구원이다.

불교에서도 인간의 진면목을 찾기 위해 道를 닦는다. 자기 자신을 깍아서 도를 닦지만 인간의 진면목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결국 '無'라고 결론내리고 수양을 통해 '무'가 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나 비참한 자리인데 그자리가 사람의 참 모습이고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자리이다. 제자들은 이 영광을 본 뒤에 예수를 따를 수 있었다. 비참한 모습만 보일 때는 예수를 버렸지만 그에게서 영광이 보였을 때 그들은 목숨을 바쳐서 그를 밭에 묻힌 보화를 사기위해 밭을 산 것처럼 우리는 예수라는 십자가에 죽은 사람을 사야만 부활한 예수를 사게 된다. 만일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사지 않고 부활한 예수를 산다면 일시적으로 기쁠지 모르지만 기초가 없는 건물처럼 쉽게 허물어지고 만다. 이것은 마치 사과 농사를 지을 줄 모르는 사람이 잘 키워논 사과밭을 산 것과 같다. 첫 해는 사과를 잘 따먹을 수 있지만 다음 해에는 사과 밭이 엉망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농사를 지어 본 사람이라야 사과를 계속 수확할 수 있다. 이와같이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사람을 사지 받아들인다는 것은 천당에 가는냐 지옥에 가는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를 거부하는 자체가 지옥인 것이다. ' 정죄는 이것이니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라.' 라는 말씀처럼 아담은 스스로 어둠을 사랑하였다. 면 그 자체가 심판이고 천국에서 지옥을 보는 것 자체가 심판이다. 정죄는 이것이니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들어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앞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함이라 하시니라. 우리가 하나님앞에서 담대하게 설때 우리의 행위를 가지고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앞과 사람앞에서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의 운명으로 설 때이다. 흙이 흙으로 서는 것은 당당하고 능력이 있다. 예수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예'가 되었다는 말씀처렐 있고 또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아브라함이 백살에 이삭을 낳은 자리이고 모세가 팔십살에 이스라엘을 구원한 자리이다. 이 흙의 자리가 확실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것을 낳게 된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았던 이유이다.

예수가 우리안에 있으면, 다시 말해서 우리의 운명이 더욱 더 분명해 지면 우리는 세상을 이기게 된다. 하나님의 진실인 예수가 우리안에 분명해 질수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앞에서 담대할 수 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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