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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기적으로 살아남은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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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結婚)한 지 일년이 지난 무렵, 창동교회(倉洞敎會)를 시무(視務)할 때 공산당(共産黨)의 핍박공세(逼迫攻勢)가 우리에게도 점점 다가왔다. 신혼생활(新婚生活)의 꿈도 펼쳐보지 못한 채 밤마다 불안(不安)을 느끼며 초조(焦燥)하게 보냈다. 평양(平壤) 시내(市內) 목사님들 중에서 한 분 두 분이 온데 간데 없이 행방불명(行方不明)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 집에도 두 세 차례 낯선 사람들이 남편 전도사를 만나겠다고 찾아온 일이 있었다. 때마침 남편은 집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길이 어긋났다. 하룻밤은 깊은 밤중에 대문(大門)을 두들기는 이가 있었다.

'오늘밤에는 우리 차례인가 보다'는 직감(直感)이 왔다. 둘이서 검은 옷을 입고 뒷문(門)으로 빠져 나와 교회 지하문(地下門)을 통하여 거리로 나가, 화신(和信) 옆 골목에 사는 사촌(四寸) 언니 집에 가서 밤을 지내고, 다음날 새벽에 창동교회(倉洞敎會)에 모시고 있는 채필근(蔡弼近) 목사님께 허락(許諾)을 맡고, 기차(汽車)로 본촌(本村)인 박천문중(博川門中)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틀이 지나자 6 25가 터졌다. 소식(消息)에 의하면 평양(平壤)의 목회자(牧會者)는 거의 전부(全部) 잡혀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평양(平壤) 시내(市內) 목회자(牧會者) 전원(全員) 검거(檢擧)하는 공산당(共産黨)의 큰 죽음의 그물에서 미리 빠져 나오게 해 주신 것이었다.

하마터면 남편을 잃은 교역자(敎役者) 미망인(未亡人)이 될 뻔한 것이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다. 피신(避身)하려고 본촌(本村)에 찾아갔으나 그곳도 공산당천하(共産黨天下)였다.

짧은 몸 하나 숨길 곳이 없었다. 남편은 얼마 동안 작은 할아버지집 양복(洋服)장 뒤와 부엌 땅구멍 속에 숨어 검거망에서 벗어났으나, 오래 있을 수가 없어서 청천강(淸川江)을 건너 안주(安州) 친정집 빈방에 옮겨 피신(避身)하였다.

그러나 친정마을도 마찬가지 상황이어서 방전도사님(方傳道師)과 이모부(姨母夫)인 장로(長老)님이 잡혀가셨다. 그리하여 할 수없이 나는 친정에 그냥 남고, 남편은 혼자 다시 박천(博川)으로 건너 가 소똥더미 밑 땅굴 속에 숨었다.

비오는 날이면 소똥 물이 줄줄 흘러 흠뻑 맞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때 유일의 소망(所望)은 UN군 전투기(戰鬪機)였다. 비행기가 나타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우리를 살리러 오는 것만 같았다. 참으로 지옥(地獄)같은 세월(歲月)이었다.

드디어 역사(歷史)의 변동이 오기 시작하였다. 9월 28일, 인민군(人民軍)이 후퇴(後退)하면서 국군(國軍)과 UN군(軍)이 북진(北 進)해 들어왔다. 마침 청천강이 일선지구(一線地區)가 되다보니 이번에는 UN군(軍)을 피(避)해 산골 이모(姨母)님 집으로 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친정 어머니가 '남편이 왔다'며 데리러 오셨다. 얼마나 반가웠으랴! 그런데 남편은 숨어 있을 때 내가 찾아오지 않았다고 화가 나서 이렇게 오래간만에 만났는데도 그도 UN군(軍)이 들어와 희망(希望) 속에 만났는데도 반가워하지도 않는 것이었다.

나는 비록 전쟁(戰爭)터와 같이 된 청천강(靑川江)을 건너갈 수가 없어서 가지는 못하였지만 마음만은 한시도 남편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사정(事情)도 모르는 남편은 '친정에 있다가 기차(汽車)가 다니면 평양(平壤)에 나오라'는 식(式)으로 이야기를 했다.

단단히 노(怒)한 모양이다. 나는 필사각오(必死覺悟)를 하고 어머님께서 부엌에서 입던 치마 저고리를 입고 수건을 푹 뒤집어쓰고 얼굴에는 숯검정을 비벼 묻치고 보따리를 이고 남편을 따라 평양(平壤)으로 나섰다 .

친정 아버님과 어머님께는 '청천강에서 UN군(軍)이 다시 후퇴(後退)하면 평양(平壤)으로 나오세요' 말씀드렸다. 남편 도 '같이 평양(平壤)으로 나가셔야 합니다' 몇 번이고 권하였지만 친정 부모(父母)님은 '우리 걱정은 말고 너희나 어서 나가라'하시며 재촉해 주셨다.

이것이 우리 사남매(四男妹)를 키워 주시고 훌륭하게 되라고 온갖 희생(犧牲)을 아낌없이 감수(甘受)하신 부모(父母)님을 이 세상(世上)에서 영영(永永) 다시 만나지 못하는 마지막 이별(離別)이 된 것이다.

삼일 (三日)을 걸어서 평양(平壤)에 도착(到着)하였다. UN군(軍)이 청천강에서 평양(平壤)까지 또 후퇴(後退)한다기에 내심(內心) 친정 부모(父母)님을 한(限)없이 기다렸으나 나오지를 않으셨다.

시댁 부모(父母)님과 식구는 모두 평양(平壤)에 와 계셨다. 12월 4일 주일예배(主日禮拜)를 드리고 12월 5일에 목선(木船)을 타고 대동강(大洞江)을 건너 밤늦게 중화(中和)에 도착(到着)하여, 다 피난(避難) 가고 빈 예배당(禮拜堂)에서 피난민(避難民) 신자(信者)들이 하룻밤을 지나고 다시 남하(南下)의 길을 떠났다.

시부모(父母)님은 시동생과 그 아침에 나누어졌는데 기차(汽車)를 타시고 서울을 거쳐 이리(裡里)까지 가시고, 우리 부부(夫婦)와 시누이 둘은 수(數)많은 인파(人波) 속에 해주(海州)까지 걸어갔다.

해주(海州)에서 인민군(人民軍) 포위(包圍)를 받아 인공세상(人共世上)이 된 아침 포위망(包圍網)을 뚫고 또 한번의 사선(死線)을 넘었다. 우리의 피난(避難)은 너무 늦어서 예성강(江) 하류(下流) 베아리포구(浦口)까지 이르렀을 때는 이미 중공군(中共軍)이 육로(陸路)로 우리보다 앞서 서울쪽을 향하였다.

최전방(最前方) 전투기(戰鬪機) 폭격(爆擊)을 지휘(指揮)하기 위하여 베아리 앞바다까지 나온 해군(海軍) 함정(艦艇) 302호의 구출(救出)을 받아 인천(仁川)까지 도착하였을 때가 1월 4일이었다.

베아리는 틀림없는 우리들의 마지막 무덤이 될 뻔하였으나 생각지도 못하였던 기적(奇蹟)에 의하여 또 한번의 탈출(脫出)이 되었다. 1951년 1월 5일 인천(仁川) 월미도(月尾島)에서 마지막 미국(美國) 상선(商船)인 바두카빅토리호에 3천명 피난민(避難民)과 함께 타고 떠났다.

그 동안 사지(死地)에서 일초일초(一秒一秒) 희비(喜悲)가 엇갈리는 초긴장(超緊張) 속에 발걸음마다 기도하며 전진(前進)하던 것이 이제는 공산당권(共産黨圈)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니 한결 안도의 숨을 내 쉬게 되었다.

해상(海上)에서 15~6일을 지나 제주도(濟州道) 성산포(城山浦)에 내려 표선면(表善面)에 이르러 피난(避難) 보따리(실제(實際)는 아무 것도 없었음)를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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