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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든 것이 합력하여 (롬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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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말씀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씀입니다.저도 이 말씀을 매우 좋아하며 암송하고 있는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성경에는 약 127가지의 축복의 말씀이 있습니다.그 많은 말씀들 가운데 하나인 본문의 말씀을 오늘 함께 나누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행복과 불행을 판단 할 때 당장의 현실만을 볼 때가 많습니다.사실 진정한 축복의 판단은 마지막을 보아야 합니다.우리는 최근 세금비리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을 봅니다.그들이 발각되기 전에는 부자였습니다.통장에 많은 돈을 쌓아놓았습니다.얼마전까지만해도 남들에게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그들이 진정 복 받은 사람들입니까.요셉의 경우를 보십시다.그가 애굽으로 팔려가서 종살이를 할 때 많은 사람들은 그가 불행한 사람들 중에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그가 믿는 여호와는 무능하고 복을 주지 못하는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복받지 못한 불행한 사람이었습니까.그는 마지막에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많은 부와 명예를 갖게 되었습니다.다윗이 사을 왕 앞에 목동의 옷을 입고 섰을 때 누가 복받은 사람으로 보였습니까.사울은 왕이었습니다.그러나 다윗은 일개 보잘것없는 목동입니다.어느 누구도 사울이 복받은 사람이라고 말을 할 것입니다.그러나 그들의 마지막을 보십시다.아들 요나단을 전사하고 사울 자신은 비참하게 자살했습니다.그러나 다윗은 통일 왕국의 왕이 되었습니다.욥도 마찬가지입니다.그가 모든 것을 잃고 고난을 당할 때 친구들이 비웃었습니다.그는 저주를 받았다고 놀렸습니다.어쪄다 저렇게 복없는 사람이 되었느냐고 사람들이 수근 거렸습니다.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어떻습니까.그는 동방에서 가장 복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누구도 그가 받은 엄청난 축복을 따라 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다른 형제 자매들을 볼 때 지금의 현실만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올바른 이해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현재 내가 바라는 현실이 아니기에, 내 뜻대로 되지 않기에, 어려운 일들이 닥치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과는 멀어져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이것이 모든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나중의 축복을 망각해 버립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은 바로 우리의 나중과 미래에 대한 축복을 말씀해 주고 있는 축복의 말씀인 것입니다.
28절에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축복의 대상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아무에게나 축복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어떤 사람에게 축복을 하십니까.그들은 곧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입니다.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사람의 자의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왜냐하면 “그 뜻대로”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그는 누구를 말씀합니까.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택 기준은 무엇입니까.한 마디로 성경에서 하나님의 선택의 기준은 조건이 없습니다.조건과 기준을 인간이 모릅니다.우리의 노력과 상관이 없습니다.왜 갈대아우르에 사는 우상의 집안이 아브라함을 택하셨는지 우리는 모릅니다.왜 에서는 버리고 사기꾼 같은 야곱을 택하셨는지 우리는 모릅니다.왜 똑똑한 사람들이 즐비한 여리고 성 안에 하필 기생인 라합만을 택하셔서 구원하셨는지 우리는 모릅니다.왜 예루살렘성의 박식한 사람들을 택하시지 않고 무식하고 성경도 잘 모르는 바닷가의 어부들을 택하셨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택함을 받기 위하여 우리가 생각하는 조건들은 무엇입니까.어떤 흠 없는 의로운 수준에 도달했든지, 아니면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어떤 위대한 일을 했든지, 희생적인 일을 했든지 하는 등의 일들일 것입니다.쉽게 말하자면 학교에서 선행상을 받았다든지, 국가로부터 효부 상을 받았다든지, 물에 빠진 사람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고 희생적으로 건져냈다든지, 신장을 무료로 기증했다든지, 고아원에 매달 송금을 했다든지 하는 등의 행동일 것입니다.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 이런 조건에 따라 선택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베드로가 고기를 잡던 어느 날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었기에 주님께서 베드로를 찾아가셨다는 내용은 아무리 보아도 없습니다.오히려 주님을 부인하는 죄인의 자리에까지 갔었습니다.십자가의 강도는 어떻습니까.오죽 강도짓을 했으면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합니까.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을 어떻습니까.그는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며 살았던 부정한 여자들 중에 부정한 여자 였습니다.바울은 어떻습니까. 그는 믿는 사람을 핍박하던, 그의 말대로 죄인 중의 괴수 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결국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택하시는 기준은 인간의 기준에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우리의 행위네 상관없이 선택하시는 것입니다.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선택하여 부르신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엡2:8-9에서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수원교도소에서 사형을 담당하던 한 직원이 예수를 믿게 된 간증을 본 일이 있습니다.
자신은 사형수들이 죽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많이 보아왔답니다.감옥에서는 사형수들을 전도하는 선교회가 있는데 거기서 전도를 받고 그 악하던 사형수들이 회개하고 새 사람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그런데 그 분이 믿음을 갖게 된 것은 그들이 마지막 죽는 순간에서 였답니다.보통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신부가 아무리 안심하라고 해서 막상 교수대 앞에서면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한답니다.불교를 믿는 사람은 벌벌 떨면서 스님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한답니다.그때까지도 아무 종교도 갖지 않은 독한 인성을 가진 불신자들은 아예 국가와 법을 저주하고 이를 갈면서 교수대에 오른다고 합니다.그런데 기독교를 믿고 변화된 사형수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며 환한 표정으로 목사님 먼저 갑니다 하면서 찬송을 부르며 죽는답니다.그들이 죽기 전에 제일 많이 부르는 찬송이 405장으로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고 합니다.그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교회를 찾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회는 죄인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법과 사회가 정죄한 죄인을 선택하셨습니다.우리가 이렇게 물을 수도 있습니다.“하나님은 그 보다 의인들이 많을 텐데 왜 하필 그런 죄인을 선택하십니까”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그것은 창조자이며 역사의 주관자인 나의 주권이다.내가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 그를 선택했노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선택하여 부르시고 구원하시는 것은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자비입니다.만약 하나님께서 의인을 부르신다면 여기 있는 여러분 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의의 수준에 이를 수 없습니다.그것은 마치 3살된 아이에게 설악산에 가서 흔들바위를 들고 오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하나님은 이미 우리가 의인될 것을 포기하셨습니다.그래서 행위로 구원을 얻는 율법을 폐하시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복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예수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어 구원에 이르는 길을 만드신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여러분은 어떻게 오셨습니까.누가 불렀습니까.하나님께서 그 분의 뜻에 따라 은혜와 자비로 부르신 것입니다.우리의 행위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죄값으로 영원한 멸망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영원한 고통 가운데 들어가야만 하는 비참한 운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보시지 않고 우리를 일방적으로 부르시고 구원하셨습니다.이렇게 선택되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이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 하여”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범사의 모든 일을 말합니다.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일들을 말하고 있습니다.합력 한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서로 연관되어 작용한다는 뜻입니다.쉽게 말하자면 모든 일들이 서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그 말은 모든 일들 속에는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우리가 보기에는 우연이며 내가 스스로 만든 일이라고 생각할지라도 모든 일들 속에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가 있다는 것입니다.앞에서 언급했던 요셉의 경우를 보십시다.요셉의 형들이 그를 구덩이에 넣었습니다.그를 지나가던 애급의 장사꾼들이 건졌습니다.어쩌다 우연히 그들을 만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그들은 그를 애굽의 장군인 보디발의 집에 팔았습니다.분명 우연히 그 집에 팔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또 거기에서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물리치다가 그만 감옥에 갔습니다.그것도 역시 우연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우리 말대로라면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종으로 팔려간 것도 억울한데 오해로 감옥에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어떻게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여길 수 있겠습니까.하나님의 인도와 섭리라고 믿기에는 너무도 이해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감옥 안에서는 어떻습니까.왕의 곁에서 가까이 있었던 신하들을 만났습니다.그것도 역시 우연한 일이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그에게 요셉은 부탁하기를 왕에게 말씀을 드려서 나의 억울한 사정을 아뢰서 나를 감옥에서 나가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그러나 그들은 얼마후 감옥에서 나갔지만 요셉의 부탁을 잊고 말았습니다.요셉을 날마다 나가기를 기다렸습니다.얼마나 기다렸습니까.창41:1절에 보니 2년을 그렇게 기다렸습니다.
2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꾸고 해석자를 찾지 못하자 그제야 그 신하들이 요셉을 기억하고 그를 불러내어 바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순간이 있기까지 요셉은 어떻게 보면 우연한 불행의 연속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볼 때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 였던 것입니다.그가 애굽으로 가는 장사꾼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애급으로 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보디발 아내의 오해를 받지 않았다면 감옥에서 왕의 신하들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그들이 나가서 바로에게 곧 바로 요셉의 억울한 사정을 고했다면 혹 풀려났을런지는 몰라도 왕의 꿈을 해석할 기회를 갖지는 못했을 것입니다.하나님은 요셉이 활동할 정치적 상황이 무르익은 2년 후에 바로의 꿈을 통해서 요셉을 이끌어 내신 것입니다.


요셉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알고 있었습니다.비록 2년간의 억울한 감옥생활은 이해하기 힘든 현실이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원망치 않고 그 분의 인도를 믿고 지냈던 것입니다.그는 그 속에서 얼마나 성실하게 지냈든지 감옥의 죄수와 열쇠를 다 요셉에게 맡겼습니다.열심히 그래서 나중에 요셉이 형들을 만났을 때 말하기를 “형들 자책하지 마시요 형들이 나를 판 것은 오늘의 나를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소“라고 위로했던 것입니다.
모든 일들이 서로 협력한다는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요셉이 당한 일들이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이루기 위한 일들 이었듯이 우리가 격는 모든 일들도 역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연인지는 몰라도 우리에게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이루기 위한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좋은 일들이 있을 때는 하나님께 쉽게 감사하고 하나님의 인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때로는 내가 원치 않는 현실들이 다가 오기도 합니다.요셉과 같이 불행한 일들이 겹치기도 합니다.하나님의 인도라고 믿기에는 너무도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닥치기도 합니다.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인도하신 것과 같이 모든 환경 가운데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사실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그래서 다윗도 시23편에서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찬양했던 것입니다.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일들의 목적과 목표를 말합니다.선을 이룬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축복된 좋은 결과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되 우리에게 선하고 복된 목적을 가지시고 인도하시며 결국은 그것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요 10:9-10에는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찾아오신 주님의 선한 목적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원수인 사단은 우리를 멸망과 패배로 인도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되 결국에는 풍성한 생명과 축복으로 이끄신다는 말씀입니다.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복되고 선한 목적이 있습니다.아브라함은 한 때 먹을 것이 없어서 애급으로 구걸하러 갔었던 때가 있었습니다.그러나 그는 종국에는 축복의 근원이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모세는 한때 세상에서 가장 영화로운 왕자의 자리에서 가장 아무것도 없이 도망 다니는 초라한 거지 신세의 자리에까지 내려갔었습니다.그러나 그의 종국은 역사상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종기로 인하여 한 때 죽을 병이 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모두가 그를 불쌍하게 생각했습니다.그러나 그의 종국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3번째의 선왕으로서 백성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거칠고 험한 환경을 지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되 선하고 결과적으로 복된 목적을 가지고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미래를 위하여서 주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주님은 영원한 멸망에 처해야만 하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셨습니다.주님은 지금도 이 땅에서 누리는 축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찬란하고도 영원한 미래를 준비하고 계십니다.죽음도 아픔도 고통도 없는 영원한 축복의 나라를 예비하고 계십니다.우리에 대한 주님의 최종적이며 종국적인 선한 목적은 이러한 영원한 축복입니다.
지난 주에 강화도에서 목회하고 계신 목사님을 기도원에서 만나서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처음에 교회에 부임해 갔는데 몇 안되는 교인들이 힘을 모아서 심방용으로 자전거를 사주었습니다.그러나 얼마 안되서 자전거도 망가졌습니다.걸어다니는 것을 본 이웃의 어떤 형제가 90cc 조그만 오토바이를 사주었습니다.얼마간 잘 탓는데 서울에 왔다가 그만 그 오토바이를 도둑맞게 되었습니다.그래서 낙심하며 집에 왔는데 어떤 집사님이 타던 오토바이를 주겠다고 했습니다.250cc인데 거의 새것과 마찬가지 였습니다.그래서 기쁘게 타고 목회를 했는데 2년전에 교통사고가 났습니다.큰 사고는 아니지만 다리를 다쳤습니다.흉터가 있는 다리를 보여 주었습니다.치료를 하고 퇴원을 했지만 다시는 오토바이를 타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안타까운 소식을 들은 봉천동에 있는 목사님께서 전도사로 봉사했던 교회에서 봉고 차를 사주기로 했습니다.그래서 지금은 그 차로 열심히 목회하고 있다고 말씀했습니다.우여곡절의 환경 가운데서도 오늘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축복도 마찬가지입니다.우리의 당장 현실만을 본다면 낙심스러운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바울사도는 말하기를 “현재의 고난은 창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비교할수 없노라”라고 하였습니다.여러분의 현실은 어떻습니까.감옥에 있었던 요셉과 같이 암울하고 답답하고 희망이 없다고 느끼지는 않습니까.견디기 힘든 마음의 고통 때문에 낙심에 있지는 않습니까.헤쳐나가기 힘든 환경 때문에 힘들지는 않습니까.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십시다.우리가 원하는 현실이든 원치 않는 현실이든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는 것입니다.모든 일들이 작용하고 합력 하여 하나님의 풍성하고 축복된 선한 목적을 이루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풍성한 선한 목적이 있습니다.하나님은 이 목적을 가지시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오늘 말씀 위에서 하나님의 이 약속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실 것입니다.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새 비전과 소망을 주실 것입니다.세상의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죄인이었던 나를 찾아오시고 선한 목적을 가지시고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오늘도 감사와 영광의 찬양을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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