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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마 19: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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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말씀에서는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물은 부자 청년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신 이 예수님의 대답이 의미하는 첫번째 의미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선해질 수 있 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자신도 선을 행하여 영생을 얻기 원해서 선행을 통한 영생의 길을 묻는 청년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 중의 하나인 '이웃 사 랑을 실천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 게 나누어 주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계명을 모두 다 지켰다고 말하는 부 자 청년이 실제에 있어서는 지킨 것이 아니요,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계명 을 지키지 않은 불의한 자요, 죄인임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하신 말씀이었습 니다.

더 나아가서 선행을 통한 영생, 네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서 영생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니 아예 포기하라는 것입 니다. 의와 영생의 가능성과 그 근거를 네 자신에게서, 인간에게서 찾으려 고 하지 말라, 아예 그 생각 자체를 버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따르 라', 영생의 가능성을 네 자신에게서 발견하려 하지 말고 나에게서, 그리스 도에게서 그 가능성을 발견하라 하신 것입니다. 네가 선을 행해서 영생을 얻 겠다는 생각을 아예 포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갑없이 은혜로 주어지는 의와 영생을 그저 받아 누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원하셨던 것은 너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는 하나님의 엄중한 이웃 사랑의 계명 앞에서 이제껏 자기의 힘 으로 선을 행해서 영생을 얻겠다는 모든 노력이 헛된 노력이었고, 자신은 여전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불의한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주여, 내가 죄인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오직 주만이 구원과 생명의 길 되심을, 오직 주 안에서만 나의 영생이 가능함을 믿나이다 '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을 예수님 품 안에 던져 내 맡기기를 원하신 것입니 다.

예수님과 더불어 임하는 영생의 나라, 천국에 대해서 세례 요한이나 예수 님께서는 말씀하시되 그 외친 제일 첫 마디가 '회개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였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임하는 영생의 나 라, 그 영생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회개 한다고 하는 것은 먼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되었다,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요, 나에게는 의가 없다'고 시인함으 로써 나의 가능성, 인간의 가능성을 철저히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가 이처럼 죄인됨을 시인, 고백하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면 회 개는 우리에게 절망스러운 것, 죄인이니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절망 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죄인임을 시인하 고 고백하는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는 것, 하나님에게서 구 원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용서 하시고 자녀로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바라고 그의 긍휼하심 에 나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 긍휼하심에 맡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 경을 보십시요. 예수님을 만나 또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참 믿음의 사람 들 항상 그들의 간구가 '주여, 긍휼히 여기시옵소서'란 말로 시작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을 가리켜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오니 나에게는 더 이상 영생의, 구원의 가능성이 없나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를 용서하시고 자녀로 받아들이시는 주의 긍휼을 의지하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

소서' 이와같은 믿음으로 예수님 앞에 무릎 꿇는 자는 그 순간 사망에서 생 명으로 옮기우며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생명을 받아 누리는 삶이 시작되 는 것입니다. 오직 이와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그것에 나 자신을 맡기는 믿음으로 우리는 영생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의 특징은 시종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나는 죄인이요, 구원의 가능성이 나에게는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요, 오직 모든 가능성 은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두고 이를 붙잡는 것입 니다. 이 자기를 부정한다, 나에게는 의로운 것이 없습니다. 내가 뭐 받을 만한 것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이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자기 부정의 태도, 자기 의를 구하지 않고 하나 님의 의를 붙잡는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롬 10:3에 보면 바울은 다 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습니다. 이 유대인, 구약에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 인 이 유대인, 이스라엘 사람들, 이 사람들이 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또 예수님이 오셨으나 십자가에 못박고 또 그 복음을 전하는 바울 사도를 온갖 핍박으로 박해하던 사람들이 바로 이 유대인이었습니다. 이 불쌍한 사실을 두고 바울 사도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왜 유대인이 이처럼 하나님의 복음에 참여하지 못하는 줄 아는가' 그것은 이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열심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안식일에 적군들이 달려와 목 을 치는 것도 감수했던 민족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있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었다고 말씀합니다. 말하자면 옳은 열심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의 내용을 설명하여 말하기를 '자기 의를 고집하다가 하나 님의 의를 배척하는 민족'이었다는 것입니다. 제 스스로 뭔가 선을 행해서 영생을 얻었다고 날뛰다가, 정작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한 민족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망하였다고 바울 사도는 한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는 말씀의 두번째 뜻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내용에 따르면,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는 계명 즉, 율법의 말씀은 이 부자 청년으로 하여금 그가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동시 에 자신에게는 영생의 가능성이 없음을 깨달아서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하려 는 즉,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 선생의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 다. 죄의 정체를 드러내서, 죄가 죄로 드러나게 해서 스스로 정죄받아 나는 구원받지 못할 죄인임을 깨닫게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 어 주라' 이웃 사랑의 계명을 말씀하신 의도가 그저 네가 죄인임을 깨달 아 그리스도를 의지하라 즉, 청년으로 하여금 스스로 죄인임을 깨달아 그리 스도를 의지하게 하려는 그런 목적으로만 주어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와같은 계명을 말씀하신 것은, 이웃 사랑의 계명을 지키라고 말 씀하신 것은 그저 죄인임을 깨닫게 하기 위한 의도뿐이고 실제로 그렇게 행 하는 의도는 없는, 그런 기여도 하지 않는 빈말에 지나지 않는 계명인가 하 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9장 본문 말씀을 주의 깊게 읽으면 누구나 느끼듯이 이 계명은 그저 빈말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저 죄인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 서만 하신 말씀이 아아닙니다. 분명히 그렇게 행하라고 주어진 말씀입니다.

이 계명을 말씀하신 의도는 먼저 부자 청년으로 죄인임을 깨달아서 그리스 도를 의지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생명을 얻게 하시려는 것과 동시 에, 믿게된 경우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된 경우, 그 청년으로 하여금 그 계명 을 실제로 실천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시려는 이 두 가지 의도를 다 포 함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이 간단한 말씀 속에 율법의 이중 기능 즉, 하나는 죄의 정체를 드러내어 우리로 하여금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따라서 나는 구원의 가능성

이 없으니 그리스도를 의지해야겠다는 이런 기능과 동시에, 그처럼 그리스도 를 의지하고 난 다음에는 계명을 실제로 순종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게 하려는 이 두 가지 기능이 다 거기에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간단한 말씀 속에 이처럼 복잡한 내용이 함축되어 있을 수 있는가 또 어 떻게 한 마디 동일한 말씀이 그런 이중적인 뜻을 가질 수 있는가 의아해 하는 분을 위해서 좀더 구체적인 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한마디로 결론지어 말씀한다고 하면 이 예수님의 말씀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자에게 주라' 하는 이 예수님의 말씀은 이중의 요구를 함축 할 수 밖에 없는 것 입니다.

로마서 6장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은혜가 더욱 풍성하 도록 우리가 계속 죄에 머물러야 하겠는가 그리스도 안에는 무한한 죄사함, 용서가 있으니 이제는 죄짓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 에 대해서 특별히 마음 쓸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것머 그렇게 굉장하게 세 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죄를 지어도 이미 그리스도 께서 무한한 용서를 이루셨으니 죄에 대한 책임을 지 지 않아도 될 것이며, 오히려 죄를 범하면 범할수록 그 죄를 용서하시는 하 나님의 은혜도 상대적으로 더 풍성해질 것이니 오히려 더 좋은 일이 아닌가 ' 이와같은 어리석은 가상적인 질문에 대해 바울이 반문하기를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 믿음으로 그와 하나되어 그 안에 있는 영생을 누린 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냐고 힐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얻는다고 하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곧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이요 즉,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던, 계명을 지키지 않 던 불순종의 삶과 관계를 끊는 것이요, 거기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새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 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새 생명의 특징은 오직 하나님을 향해서 사는 것, 불의의 삶을 청산하고 모든 지체를, 모든 삶을 의를 행하는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 거룩한 열매 맺는 삶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구원 자체가 하나님을 불순종하여 죄와 사망 가운데서 헤매는 상태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서, 하나님을 순종하여 생명을 누리는 새 생명을 얻게하는 것인데 죄를 짓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한다는 것은 이 새로 얻는 구원의 생명을 버리고 다시 죄와 사망 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는 것 이니, 기껏 죄와 사망에서 종노릇하는 것을 해방시켜주었더니 다시 죄에게 종노릇하겠다고 부득부득 걸어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는 것 입니다.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해내서, 해방시켜서 자유롭게 하나님 을 섬기라고 해 주었더니, 고기가 먹고 싶어서, 죄짓던 생활이 그리워서 다 시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아우성치는 이 이스라엘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된 다스림 안에서 생명을 누리며 사는 이 순종의 삶 을 은혜로 우리에게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또 죄를 짓는다고 하는 것,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한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 생 명을, 영생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기껏 생명을 주어놓았는데 그 생명 싫소 하소 다시 죽음의 상태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뜻하는 것 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은 계명 순종과 생명을 누리는 삶이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번에도 거듭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만은 우리가 계명을 순종해서 그 보답으 로, 그 댓가로, 그 보상으로 생명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계 명 순종의 삶과 생명 누림이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서 누리는 생명의 본질이 바로 순종의 삶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도 안에서 누리는 새 생명, 영생은 항상 하나님께 순종하는 형식으로, 그의 계명을 지키는 순종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계명, 율법의 이중 기능 즉, 죄인임을 깨닫게 해서 그리스도 를 의지하게 함으로써 새 생명을 얻게 하고, 또한 계명을 순종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생명의 삶, 계명을 순종하는 가운데 지속적으로 생명을 누리는 이 삶은 상호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너무 까다로운 말

이 되었습니다만은, 이 율법의 이중 기능을 다른 각도에서 한 번 살펴보십 시다. 조금 이해를 돕기 위해서, 율법의 첫째 기능이 우리로 하여금 죄의 정 체를 드러내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은 죄다, 가장 큰 죄다. 이와같은 율 법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살면서도 죄가 죄인줄 모릅니다.

이와같은 율법이 있으면, 아! 그와같은 것이 죄로구나, 죄의 정체가 드러나 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의 정체를 드러내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이 율법의 첫째 기능 이 기능은 사실, 이렇게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뭐 한 가지가 전제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율법에 비춰 보니 아!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로구나' 이런 깨달음이 있는 사람은 그 깨달음 이전에 또 다른 깨달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은 율법은 하나님으로 부터 말미암은 거룩하고, 신령하고, 선하고, 의로운 계명이라! 이것을 인정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어떤 계명을 두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명령 하신 것이요, 이것은 옳고, 선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것이다. 이것을 인정 하지 않으면 그 법에 비추어서 내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계명에 비추어서 내가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먼저 그 율법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요, 거룩하고, 선하고, 옳은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믿음이 먼저 전제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사람 즉, 모든 중생자는 이미 하나님의 율법이 선하고, 신령하며, 옳다는 것을 인정한 사람이요, 따라서 모든 중생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기뻐하고 그 대로 살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매우 이상한 일입니다마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다 기초적으로 다 경험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계명 앞에 '내가 죄인이구나' 하는 것을 깨 닫는 순간,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의 사랑이 있음을 깨닫고 그리스도 를 의지하는 순간, 이상하게도 이전에 나를 정죄하던, 나로 죄인임을 깨닫게 하던 그 계명이 나에게 기쁨을 줍니다. 그 계명을 기뻐하게 됩니다. '아! 저 것이 옳구나, 저렇게 살아야겠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다'고 하는 소 원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첫번째 현상입니 다.

로마서 7장에 보면, '거듭거듭 말하기를 중생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선하고 신령한 것으로 인정할 뿐 아니라, 그 율법 행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기뻐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생명, 새 생명 의 본질인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계명, 하나님의 율법이 옳고, 거룩하 다고 인정하는 마음이 없거나, 계명을 기뻐하고 그것을 행하기를 원하는 소 원이 없다고 하면 이 사람은 중생한 사람,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사람이라 고 할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시작된 새 생명의 소원보다, 그것이 외치는 소리보 다 우리 육신의 정욕이 외치는 소리가 더 커서 거기에 눌려 지내는 사람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의 이와같은 이중 기능이 가장 아름답게 이루어진 실례를 우리는 삭 개오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자기 의를 자랑하는 바리새인과 회개하는 세리의 이야기로 시작한 후에 바로 그 다음에 어린아 이 안수 사건이 나오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바로 부자 청년의 이야기입 니다. 그 다음에 소경의 이야기가 나오고 이어서 삭개오의 이야기가 나옵니 다. 이런 순서로 배열된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고, 부자 청년과 삭개오가 바로 이 초두에 있던 바리새인과 세리의 전형, 또는 실례로서 제시되고 있 는 것입니다. 자기 의를 고집하던, 자기가 선을 행해서 영생 얻겠다고 하던 부자 청년은 '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는 이웃 사 랑의 계명 앞에서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지도 못하고, 그 계명을 실행하지도 못하고 근심하면서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 반면 자타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세리 삭개오는 그저 예수님께서 주신다고 하니 어린아이 처럼 영생을 받아 누렸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저 은혜로 값없이 영생을 받은 삭개오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가진 재산 전부를 남에게 끼친 해를 보상하 는데, 그리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데 사용함으로써 그처럼 경건한 부 자 청년도 실패한 이웃 사랑의 계명을 이 세리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삭 개오가 훌륭하게 실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내가 은혜로 받 은 영생에 대한 보답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한 것이 아닙니다. 삭개오는 그 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누리게 된 영생, 이 새 생명의 본질이 무엇인가 를 직감적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그가 얻은 새 생명은 하나님의 긍휼하심 처럼 남을 긍휼히 여기는 삶이요, 거룩하고 선한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삶인 것을 그가 직감하였기 때문에 그와같은 일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런 일을 행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갖고 있는 오해중에 하나가 다 예수 믿어 공짜로 값 없이 구원은 얻는데, 그 다음에 계명을 순종해서 거룩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 으로부터 값없이 구원을 얻었으니 이제 내가 하나님을 순종함으로 보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마치 의무처럼 생각합니다. 이 것은 큰 잘못인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죄에 찌들어서 우리가 원하는 삶이 란 뻔하잖습니까 남을 억누르고 남의 것을 빼앗고 착취해서 한 푼이라도 더 벌어서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것입니다. 내 자식, 내 가족, 내가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참된 삶일까 이것이 아름답고 고귀한 삶일까 아무도 그렇다고 생각지는 않을 것입니다. 서로 잡아먹고 약육강식하는 그와같은 삶 이 결코 고귀한 삶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말씀 하신 그 모든 계명들, 그것이 우리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 같으나,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의 계명대로 그대로 산다고 하면, 그것처럼 고귀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삶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그 삶 자체가 가장 귀한 복인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고 귀한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여러분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하신 새 생명, 그것은 바로 이와같이 고귀한 삶을 사는 삶인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 계명 앞에서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나에게로 와서 영생을 얻으며 하나님의 거룩하고 고귀한 계명을 순종하라'는 삶, 그 거룩한 생명의 삶을, 그 생명을 지속적으로 누리며 살라는 뜻인 것입니다.

이 '나를 따르라'는 말씀의 또 다른 뜻은,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게된 자에게 이루어진 삶, 요구되는 삶은 전적 헌신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나를 전적으로 드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네 재산을 다 포기하 라는 말씀을 듣고 재산을 포기하기 보다는 차라리 그가 그처럼 갈망하던 영 생을 포기한 이 청년의 행동에서 볼 수 있듯이, 재물은 부자 청년에게 있어 서 그 어느 것 보다 말하자면 영생보다 더 귀한 것 이었습니다. 영생이 참으 로 재물보다 더 귀했다면 그는 재물을 포기했겠죠. 또, 예수님께서 청년에게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재물을 포기하라 하신 것은 그저 재물만 포기하 라 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전부를 포기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자기 전부를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따르는 전적 헌신의 삶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과 관련된 19장 27절의 말씀을 보면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 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를 포기하고 주를 좇았나 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부모와 아내와 남편과 자식과 전토를 다 버리고 주를 좇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전적 헌신의 삶은 특별한 사명을 받은 사도나 목사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 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믿는 자에게서 전적으로 헌신을 요구하신다고 말하면, 대개 사람들은 그것은 목사나 할 수 있는 것이요, 특별한 은혜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외면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것은 대개 다음과 같은 잘못된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 다. 첫째는 세상 재미도 손에서 놓기 싫고, 구원도 받고 싶다는 생각 때문

입니다. 세상 재미도 적당히 보고 구원도 받고 싶고 그래서 주일 날에 열심 히 와서 찬송, 기도하고 그 외에 나머지 6일 동안은 제멋대로 적당히 살아 갑니다. 이것은 비유컨대, 생명과 사망 중간 지점에 서 있겠다고 하는 뜻인 데, 사람이 죽기도 하고 동시에 살기도 할 수 있습니까 죽거나 아니면 산 것이지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상태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혹시 콤마 상태, 식물인간 상태라고 예를 들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만일 영적으로 식물인간 상태라면 그것은 참 형편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 과 하나님을 함께 사랑할 수 없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것은 특별한 사명자에게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는 명령인 것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흔히 열심있는 진지한 신자들에게서 발견되는 한 가지 오해 인데,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일, 신앙생활은 교회 내에서 주일날, 수요일, 금요일에만 할 수 있는 것이요, 성경보고 기도하는 것만 경건한 일이요, 하 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몇 몇 신자들, 교회 직분자들끼리 어울 려 다니면서 모여서 하는 일 그것만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 나 하나님의 일은 어디서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모든 인간관계에서 이 루어질 수 있습니다. 부부 간에서, 부모 자식 간에, 직장에서, 직장 동료 간 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말씀을 따라 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이요,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 장소가 어디거나 그 대상이 누구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삶이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몸 담고 사는 세상 환경은 악합니다. 일그러져 있습니다. 이런 곳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는 것이, 일그러진 부부 관계, 원수 같은 부모 자식 관계, 시기, 질투, 약육강식의 직장 동료 관계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그 뜻을 이루 는 것이 우리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교회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삶, 삶의 모든 부분에서 전적인 헌신이, 오직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 만을 위해서 사는 삶이 이루어지길 원하는 것입니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모든 장소에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 명 순종의 삶이 이루어지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모든 영역에서 전 적 자기 부정의 삶, 여기서 자기 부정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위해 사는 삶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삶, 이 삶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오늘 두 번째로 말씀들일 것은 이와같은 헌신의 삶,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삶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너 자신을 포기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부자 청년이 슬퍼하면서 돌아가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불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경악했다. 심 히 놀랐다고 되어 있는데, 그것보다 더 심한 말이 경악했다, 'shock'를 받았 다고 되어 있습니다. 저런 경건한 사람,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부자인 사람 이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과연 누가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 는 그들을 주시하면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나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함이라.

이 말씀의 첫번재 의미는 지난 번 말씀드린 대로 사람이 자기 선행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값없이 주시는 의와 생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말씀을 듣고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라고 물은 이 제 자들의 반문에는 또 다른 의미 즉, 영생을 얻기 위해서 부자 청년처럼 그가 가진 모든 것, 그 자신 전부를 포기해야 한다고 하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 는 사람이, 그래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라는 의미도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인간인데 과연 누가 자신을 전적으 로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헌신의 삶을,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 에게 주라고 하는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히 순종하며 살 수 있겠는가 네 마음

과 성품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네 가진 것을 모두 팔아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런 삶을 과연 누가 살 수 있겠는가 제자들의 이러한 반문은 당연한 것이었고, 옳은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께서 확인하시기를 사람은, 인간은 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삶, 그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되면, 다 행해 서 다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계명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자, 영생을 얻은 자가 그 후 날마다 하나님의 계명 을 순종하여 사는 삶 안에서 영생을 지속적으로 누리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신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었지만 구원 얻은 다음부터 신자의 삶은, 그리스도의 은혜에 보답 해서 열심히 내 힘으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고 생각합니다. 이런 보답과 감사의 삶이 당연히 내 힘으로 내 열심으로 이 루어져야 하고 왜 하나님께 갚아야 하니까, 또 내힘으로 할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잘못된 생각입니다.

로마서 7:14 이하에 보면 바울은 중생한 자에게서 하나님의 법을 기뻐하며 그 계명대로 행하기를 원하는 소원이 간절함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 로 백 번이면 백 번 죄의 힘에 눌려서 패배하며 죄의 노예로, 포로로 사로잡 혀가는 것을 봅니다. 자기 힘으로 도저히 죄의 힘, 자신의 부패하고 타락한 성품, 자연인 속에서 역사하는 죄의 세력, 육신의 정욕과 싸워 이길 수가 없음을 발견합니다. 도저히 하나님의 계명을 행할 수가 없는 것을 발견합니 다.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여러분께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려고 많이 노 력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도 성공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부자 청년 처럼 '난, 다 행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부자 청 년 처럼 하나님의 계명을 적당히 할인해서 행한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의 계명은 사람의 힘으로는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날마다 체험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려는 소원은 그처럼 간절한데 내가 아무리 할 려고 해도 맨날 죄와 싸워 지니, 그것이 너무 답답하고 비참해서 바울은 탄 식하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에서 구원하랴 '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 번 더 나 자신을 부정하지 않 으면 안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계명을 행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부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순종의 가능성을 발견 해야 합니 다. 바울 사도께서는 자기 자신에게서는 죄와 싸워 패배 할 수 밖에 없는 악함과 무력함을 발견하지만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기 에게서는 죄에 대한 승리를 확인합니다. 로마서 8:1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 하였음이라'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 밖에 있는,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자연인으로서의 바 울에게 있어서는 전혀 불가능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서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부터 해방시켰음을, 자신을 해방시켰음을 발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생명의 성령 안에서는 죄와 사망의 법에 패 배하지 않는, 오히려 승리하는 것이 가능함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13을 보시면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여기서 영이라는 말은 성령님을 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성령님의 능 력으로 몸의 행실, 육신의 정욕에 따라 행하는 일을 죽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육신의 정욕, 죄의 세력을 죽이시는 능력이 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날마다 받으며, 생명을 누리는 삶이 가

능하다고 그는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의 힘주심과 인도하심 안에서 생명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그는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나의 힘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받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죄와 싸워 이길 수 있으며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으며, 이처럼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 여금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케 하시는 은혜 안에서만 참된 생명을 날마다 지 속적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첫 시간 설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귐 안으로 들어가며 그 사귐 안에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 살아 움 직이는 생명을 누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누리 는 이 생명 살아 움직이는 생명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난 다고 하였습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시는 무한한 긍휼로 그 아들에게 주사 우리로 하여금 받아 누리게 하신 것이요, 그 아들 그리스 도께서는 그의 구속을 통하여 이 생명을 받아 누리게 하셨고, 성령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시사 이 생명의 사귐 안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우리 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케 하시는 능력이 되사 날마다 이 새 생명의 살아 움직임이, 활동이 있게, 열매가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철저한 자기 부정입니다. 나는 의가 없다, 나는 의 로울 수가 없다, 자기를 위한 삶을 부정합니다. 내 삶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부정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그리스도 안 에서 값없이 주어지는 의와 생명을 받아 누리며, 그 다음에는 오직 그리스도 를 위해 살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성령님의 힘으로 사는 것임 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사오니 오직 주를 의지하 나이다'라고 하는 것이 신자의 삶의 기본 태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의지하고 그에게 내어 맡기는 삶, 어떤 사람은 성령님은 능력 덩어리여서 뭘 받아 가지고 내가 그 능력을 가지고 어떻게 하는 것으로 생각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과 꼭 마찬가 지로 인격이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듯이 우리는 성령님을 믿 고 의지해야 합니다. 이 자기 부정의 삶과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태도, 이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우리가 상기하기를 원합니다. 자기 힘을 의지하던 부자 청년은 계명 순종에 실패한 반면, 철저히 자기를 부정한 세리 삭개오는 은혜 로 영생을 얻고 새 생명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의해서, 성령님의 힘주심 에 의해서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계명을 순종하는 삶 안에서 생 명을 계속 누린 것을 기억하십시다. 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자가 예수를 믿을 때나, 이미 그리스도를 믿은 신자에게서나 늘 자기 부정이 요구되고, 자기 부정,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태도가 요구되고, 오직 그리스도를 의 지하는 것, 그리스도 안에 내 모든 것을 던져 넣는 것,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 그를 따르는 삶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기억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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