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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용지물 (요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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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로를 살리셨던 예수님께서는 베다니를 떠나셨다가 다시 유월절 엿새 전에 오 셔서 나사로의 집에서 베푼 잔치에 참여하고, 그 다음 예루살렘을 마지막으로 입성 하시고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은 11장의 연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1:25-26절에서 나는 부활 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의 사실적인 증거가 12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다니에 오셔서 대접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일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잔치를 한 것 같습니다. 거기서 마르다가 음식 시 중을 들고 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 보면 그 잔치에 나사로도 함께 앉아 있습니다. 죽은 지 나 흘이나 되어 무덤에 누워 있었던 썩은 우리를 일으키사 주님이 앉으시는 잔치상에 우리와 함께 앉겠다 하는 것이 여기의 가장 중요한 상징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우 리가 그 잔치상에 현실적으로 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약속 만을 갖고 있습니다. 그 약속의 그 날을 향하여 지금도 나아가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그 잔 치 자리에서 누리게 될 기쁨 보다는 그 변할 수 없는 약속들을 붙잡고 나아가는 것 에 대하여 더 강조점이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나사로가 함께 앉아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중요한 내용으로 취급하고 있 으면서도, 그 보다도 성경은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씻는 사건 을 더 강조 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아직도 세상을 걸어가 고 있는 성도의 삶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더 강조되고 중요시 되어야 할 부분이 무었인지를 오늘 본문을 통하여 정리하고자 하는 것입니 다.

<본론>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씻는 장면을 보고 있던 가룟 유다는 이 일을 가지고 시비를 겁니다. 그것을 팔아서 삼백 데나리온으로 가 난한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을 텐데 왜 이렇게 허비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놔둬라, 이것은 나의 장사를 예비하는 것이다.'라 고 그럽니다. 결국 이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은 나사로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잔 치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 근거가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바로 이 대목에서 강조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쁨과 자랑과 모든 축복은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뜻밖에도 우리의 신앙은 뿌리와 근거보다도 위 쪽에 핀 꽃과 맺힌 열매가 필요 이상으로 강조되고 가장되고 있는 풍토 속에 싸여 있습니다. 신앙의 뿌리를 든든히 내리는 작업보다도 어서 꽃을 만들고 싶어하고 못 만들면 사오기라도 해서 열매를 맺히고 크게 만들려는 분위기 속에 우리가 잡혀있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이 우리에게는 중요한 말씀이 될 것입니 다.

우리가 갖는 기쁨과 신앙적인 자랑들도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연결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말할 때 생 각보다 더 많이 정리할 필요가 있는 단어입니다.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이야기 되어지는 자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 선행되어야 하 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죄와 죄인됨에 대한 철저한 지적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죄와 죄인된다는 지적만큼 우리 신자들에게 중요한 근거도 없을 것입 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지적을 받는 것을 좋아하 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죽음이 없이는 다른 그 무었도 쌓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고쳐내어서 그런대로 쓸 수 있을 정도로 가능성이 있는 존재였 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고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고치는 작업이 아니라, 죽여서 없애는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죽이고 새로 지어야 했습니다. 옛사람을 죽이고, 거기다가 새사람을 지어셔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지으 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성전을 헐어도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을정도로 헐겠 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온 정성과 힘을 다하여 지은 그 성 전이 무너질 때마다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은 어느 것 하나도 나머지 돌을 위에 얹을 만한 제 자리나 제 기초나 힘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누구도 그 위에 쌓게 할 수 있는 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 앞에 무기력한 우리 인간의 실상을 지적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선언 속에는 우리가 갖고 있는 그 어느 것도 하나님과 연결 될 수 있는 부분이 없다는 뜻이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 하나님 사이 에 어떤 좁은 문이라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늘 귀는 실이라도 들어 갑니다. 그러나 죄는 죽음이라는 방법 외에는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어떻게 쓸까' '내가 갖고 있는 것 중 에서 어느 부분을 가지고 갈까'하는 궁리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3:7-9 절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 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 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 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에 비해서 열등 하다는 이야기도 아니라, 아예 해롭다고 그럽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데 있어서 '내가 이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무언가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그 어떤 것도 해롭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나의 물질이나, 나의 사회적 지위 등을 갖고서 하나 님을 잘 섬길 수 있을 것이라는 그 생각이 바로 신앙에 있어서 가장 해롭다는 것입 니다.

헌금이란 무엇입니까 헌금은 이런 멧시지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돈으로 사 는 자가 아닙니다!'라는 고백이 헌금입니다. '난 이것으로 살지 않겠습니다!' 하는 뜻으로 일종의 버리겠다는 행위요, 표현인 것입니다. 엄밀히 생각해 보십시오. 십 일조를 내고나면 십분의 구만 남는데 그게 무슨 이익입니까 십일조를 물질적인 이 익을 위해 하나님께 재투자하는 것 정도로 생각한다면 분명히 이것은 잘못 오해하 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물질이나 이 세상의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신령한 양식과 은혜로 살아간다는 신앙의 표현으로서 십일조와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헌금을 하고 하나님께 시간을 바치고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은 내가 가진 그 어떤 시간이나 힘으로도 이익을 보지 않는다는 것을 선언하는 행위가 포함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것이 가장 강조된 것이 금식입니다.

금식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먹어서 힘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안 먹는다는 것은 내가 내 힘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금식 기도에 잘 응답하시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금식기도 후에 일이 되었다면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왜 잠을 안 자고 철야 기도를 합니까 편안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내가 가진 어 떤 것으로도 되지 않고, 내가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눈을 뜨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도무지 도리가 없습니다. 해결해 주셔야 됩니다.'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입니다. 금식이나, 철야는 바로 그런 멧시지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때문에 신앙 생활에서 혼동하게 되는지 모 릅니다.

가나안 농군학교를 시작하신 김용기 장로님에게 한 번은 박정희 대통령이 방문을 하였습니다. 그 때에 유명한 일화를 남겼습니다. 가나안 농군학교의 그 정신과 훈 련과 근면에 대하여 감복한 박대통령이 김장로님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뭐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없소' 이 때 김장로님은 이렇게 대답하였답니다. '각하! 각하께서 도와 주시면 우리는 망합니다.' 여러분 이 말의 뜻을 제발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 니다. 즉, 대통령이 도와 주는 것은 도와주는 것만큼 게으름으로 뛰어넘고 다른 나 쁜 버릇을 키우는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를 심어서 하나를 거두고, 둘을 심어서 둘을 거두는 것을 착실해 배워나가고 있는데, 갑자기 권세가진 자가 나타나 한마디 하니까 십년동안 할 것을 한시간 만에 이루는 것밖에 배우지 않게되는 것입 니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는 현실에 충실하기 보다, 내 마음과 영혼을 팔아서라도 현실을 즐기는 방법에 몽땅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것 이 과연 내게 필요한 것인지를 확인도 해보지 않고서 얼마나 그저 쉽게 쉽게 살아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야말로 바로 세상 일의 연장이 아니라, 영적인 일 에 대한 깨우침입니다. 교회는 돈을 모아서 하는 것이 아니며, 실력을 모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성가대와 주일학교 교사가 그렇습니다. 성가대는 성악가가 모 인 곳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한 자들이 마음을 합치고 목소리를 합치는 곳입니다. 세상의 유능한 선생님들 이 모여서 주일학교 교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이 감격을 내 후손 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뜨거운 마음이 그 자리에 까지 오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교 회입니다. 그래서 보통 성가대에서는 성악가가 실수를 잘하고, 교사중에서는 꼭 세 상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 실수를 합니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습니 다. 그러므로 반드시 십자가를 통과해야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바랍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갖고 있던 것을 모두 용광로 속에 집어 넣고 새로 빚어서 이 자리에 새 피조물로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사건에서 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꿇어 엎드린 것이 전부인가 하는 점입니다.

거기에는 또하나의 큰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는 이 사건이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머리부 터 발 끝까지 다 부은 셈인데 왜 요한복음은 발에다 부었다고 했을까 하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마리아가 그녀의 머리털로 발을 씻었다는 것을 강조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마리아가 머리털로 발을 씻었다면 그 모습이 어떠 하겠습 니까 주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무릎 을 꿇었다는 것은 참으로 처첨한 모습이고 열등감을 느끼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그녀가 간직했던 삼백 데나리온 이상 나가는 값진 향유를 갖다 붓는 것이었습 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기쁜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간절한 소원이 었던 것입니다. 그당시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 할 때입니다. 그러니 삼백 데나리 온 이상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1년 봉급입니다. 가이 짐작할 수 있는 돈입니다. 상 당히 값나가는 것을 지금 갖다 부은 것입니다. 자원해서 말입니다.

고전11:5절에 보면 긴 머리는 여자의 영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것을 사람의 몸 중에서 가장 하챦은 데에 갖다 댄 셈입니다. 그리고 가장 값비싼 것을 거기다 부은 셈입니다. 이것은 이 여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은 언제나 모든 신자를 여자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랑이고 우리는 신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결국, 우리 모두의 영광이 주님의 발 밑에 있다는 것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권위의 질서상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우리의 기쁨입니다. 십자가란 우리가 누구였는가를 지적하며, 확 인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자랑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늘나라에 들어가기에 부적합했다는 지적인 동시에, 하늘나라의 영생과 진리의 유 일한 길에 들어설 수 있게 된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6:3-4절에 보면 이 런 설명이 나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 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 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 한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죽음을 기뻐하는 것은 그 죽음이 새로운 세계에로의 입문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에게서 가장 감격스러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한 사람의 돌이킴입니다. 회개 의 간증을 하는 것만큼 감격스러운 것도 없습니다.

예수 믿기전에 그렇게도 부인을 괴롭히고 방해하던 사람이 그 옛날의 순 악당 짓 을 하던 사람이 예수를 믿고 그 날들을 이야기하면 그것이 그렇게 감동과 감탄을 불러 일으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순악당, 순악질 경연대회라도 하는 것같 이 간증 나온 사람들의 무공담을 듣는듯이 성도들은 감탄을 해대는 것입니다. 도대 체 그같은 악당들의 행동들이 뭐가 좋은 일이라고 그렇게 감동을 한단 말입니까 거기에는 대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에 그런 나쁜 짓 한 것에 대하여 감동이 있는 것 입니다. 무슨 대전제입니까 그게 모두 과거였으며 이제 돌이켰다는 대전제입니 다. 이같은 대전제로 '내가 왕년에는 이렇게 나쁜 사람이었습니다.'라고 읖는 것이 간증인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놓고 생각할 때 '내가 죄인입니다. 내가 죽어 마땅합니다.'라는 것을 아무리 지적당해도 우리에게 처절함과 절망이 아니라 기쁨과 환희가 있는 것 은 지금 우리가 그 죄와 절망의 자리에서 이미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같은 자리에서 지금 본문 속의 마리아는 그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딱을 수 있으며, 그녀의 전 재산을 다 동원한 향유를 부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신앙을 종종 놓치고 살고 있지 않는가 싶습니다. 분명히 우리 는 다른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 신자에게 있 어서 하나님 앞에서 칭찬을 받고 세상에서 대접을 받고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최선 입니다. 절대로 이 최선의 삶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여기서 차선책이 있는 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둘 중의 하나를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어느 쪽을 놓아야 하겠습니까 세상을 놓아야 됩니다. 하나님께 칭찬을 받되 세상에서 대접을 못받는 것은 차선책입니다. 세선째 유형은 세상에서 대접을 받되 하나님께 대접을 못 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맨 꼴찌는 무엇입니까 양쪽 다 별볼 일 없는 것입니 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신앙이 어떤 위기적인 분위기에 쌓여 있느냐 하면, 예수를 믿 는다는 표현은 똑같이 쓰는데 세상 살이에 집중되어 있는 신앙이 만연되어 있습니 다. 우리와 동일한 신앙 고백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우리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고 그리고 잘살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 께서는 우리를 세상에서 잘 살게 하지 않습니다. 맡기시는 일은 있습니다. 하나님 께서 우리에게 건강을 맡기실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나를 위하여 건강을 주 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또한 우리에게 많은 물질을 맡길 수 있습니다. 그 러나 그 물질이 나의 만족을 위해서 주신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거기 파뭍혀 헤 어나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무서운 일들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에 오늘날 같이 신자가 많아진 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로는 우리와 동일한 신앙고백을 하는 자 들이 그들의 모든 신앙에 있어서는 세상에서의 안위와 행복과 성공과 자랑들로서 동원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다시말해 세상에서의 부귀 영화와 행복과 안위와 성공 그 자체가 곧 아름다운 신앙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는 그 극단적인 예가 나타납니다. 여인의 참 사랑의 헌신에 가룟유 다가 가로막고 나섭니다. 왜 이것을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 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마리아는 그의 진심을 묶어서 하나님 발 앞에 갖다 놓고 있다면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팔아서라도 은 삼십을 가져야 되었던 사람입니다.

어디가 다른지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스스로를 생각하기를 나는 그래도 가룟 유다 와는 거리가 먼 사람일 것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유다보다도 더합니 다. 아주 쉽게 예수를 팔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내 돈궤를 챙기는 데 우리는 훨씬 빠르고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내 돈궤를 깨뜨려 주님의 장 사를 기념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장사를 기념하며 그것이 자랑이며 행복인 자와 주 님을 팔아야 내 욕심이 채워지는 자의 이 극과 극을 달리는 차이를 보십시오. 우리 는 사실 하루에도 몇번씩 마리아가 되었다가 유다가 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원래가 그리스도가 죽은 것으로 도움이 되는 줄로 여기는 자가 아니라, 주 님이 오셔서 그 주님이 내가 팔아먹을 수 있는 물건이 되는 쪽을 더 좋아하는 사람 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오늘날 널리 퍼져있는 신앙의 풍토가 그것 을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세상의 물질과 안위와 행복과 성공이라는 이익으로 우리의 참신앙을 바꾸도록 유혹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전 생애를 걸쳐서 가져야할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자세를 확실 히 아셔야 됩니다. 그 근본적인 질문이 예수를 믿어서 무슨 이익을 얻을 것이냐는 질문이라면 참으로 곤란한 질문입니다. 영적으로 물으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의 부활이요 생명이 되심을 확인하샤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근본입 니다.

한 돈 많은 나쁜 사람이 점점 원성을 사는 일만 하다가 마침내 나이가 들면서 외 롭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현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고민을 털 어 놓았습니다. 그러자 현자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저 창문에 가서 보십시 오. 무엇이 보입니까' '길 가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저 거울 앞 에 가서 보십시오. 무엇이 보입니까' '내가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창문이나 거 울은 똑같은 유리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거기 뒤에 아무것도 없으면 다른 사람들 이 보이고, 쇠붙이로 막혀 있으면 자신밖에 안 보이는 법입니다. 이 얘기를 우리는 조금 비약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영안을 갖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이 끝이 아니요, 보이는 것이 전부 가 아닌 것을 알고 있는 자입니다. 영혼이 있으며, 천국이 있으며, 우리와 천하 만 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계시는 줄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렇지만 마치 거울 앞에 서 서 사는 자와 같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우리 자신의 이익밖에 보지 못할까요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신앙이 아직까지 어리기 때문이며, 더 크게는 우리 주변의 환경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신앙인이라는 이름으로 행세하면서 너무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로 인하여 많은 신자들이 미혹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험을 경계해야 합니다. 잘 먹고 잘 살기만 하면 시험 에 들든지, 죄를 짓든 상관이 아니라는 식의 무감각한 신앙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복과 기적과 은사와 은혜와 감동과 승리를 쉽게 이 야기 해버려서 이제 더 쓸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다 각자 자 기의 욕심과 배를 채우는 길로 빠져 버렸습니다. 우리 앞에 너무 많은 가룟 유다들 이 보이자 우리들도 드디어 마리아 하기를 포기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현실입니다.

갈6:14절에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에게 이런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 하여 그러하니라 바로 우리는 이같은 결론을 갖고 계셔야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남입니다.

세상이 나에 대해서도 남이고, 내가 세상에 대해서도 남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밥먹고 살아야 되고, 일하고 살아야 됩니다. 이런 것에서 남남 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삶의 방향과 목적과 원리와 방법 중에 그 어느 것도 일치하 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기로 결심한 자들입니다.

복음은 바로 주님의 죽으심을 우리의 생애의 목적과 원리에 그대로 수용하는 것으 로 밖에는 표현되지 않습니다. 막14:9절에 보면 오늘 본문의 사건을 이렇게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하는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복음을 영접한 심령에게는 이 마리아의 행동과 동일한 신 앙고백과 행동이 나올 수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결론> 여러분이 참으로 예수를 믿는 자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한 자라야 합 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요, 주님께 대하여 산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는 직장이나 만나는 사람들로 통해서 우리의 참된 가치가 어디에 있는 지를 마리아가 주님께 솟아붓고 섬긴것처럼 그 독특한 향기가 나타나야 할 것입니 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요, 특권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인생의 가치가 있는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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