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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물은 방주보다 높지 못함 (창 07: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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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많아지니 방주가 땅에서 떴고 더 많아지니 방주가 물에 떠 다녔는데 물이 불어서 15규빗이 오르매 천하의 산이 다 덮였다 는 것이다. 물은 모든 것을 삼키기 위하여 불어났고 더 불어났 지만 그럴수록 방주는 더 떠오르고 떠다녔다는 것이다. 왜냐하 면 방주의 높이는 30규빗인데 물의 높이는 15규빗이라는 것이 다. 또한 방주의 길이는 3백규빗인데 물이 땅에 창일한 날수는 1백5십일이라는 것이다.

15규빗은 천하의 산들을 다 덮을 높이를 말하고 1백5십일은 땅 에 있어 코로 생명의 기식을 호흡하는 모든 생명이 살아 남을 수 없는 시간을 말하고자 함인데 사망의 물이 아무리 높아도 생 명의 방주 높이의 반이며 멸망의 시간이 아무리 길어도 구원의 방주 길이의 반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 가! 하나님은 창조하셨고 사탄은 파괴하였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었 고 사탄은 지식(사망)을 주었다. 역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창 조를 파괴하는 사탄의 장난으로 이어져 왔다. 하늘들과 땅을 창 조했을 때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은 물로 대항했고 사람을 창 조했을 때 선악과를 먹여 사망에 빠뜨렸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 혜는 사탄의 저주를 항상 절반 앞섰던 것이다. 생명은 끊임없는 도전을 받아 왔다. 그러나 그럴수록 생명은 더욱 강하여졌고 확 산 되었다.

하나님은 사탄이 물을 준비할 때 방주를 준비하셨다. 15규빗 높 이의 물을 준비할 때 30규빗 높이의 방주를 지었다. 1백5십일의 길이를 준비할 때 3백일을 준비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는 넉넉하 다. 사탄이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것들로 홍수를 준비할 때 하 나님은 가장 볼 모양 없는 노아로 방주를 준비하셨다. 그러나 방주는 얼마나 넉넉한 구원인가! 사탄이 힘과 능력을 합하여 거대한 성을 쌓을 때 하나님은 생명 의 씨를 낳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바로가 국고성을 쌓 고 있을 때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해방시켰다. 헤롯은 4십6년 동안 헛된 돌집을 지어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 했지만 예수 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나타내셨고 십자가에 못박았을 때 우리 의 구원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계시는 점진적으로 발전 되었다. 그 발전의 모든 단계 는 사탄의 계교와 인간의 불순종과 죄들 때문에 이루어졌다. 천 사들의 반역이 없었다면 사람이 창조 되지 않았을 것이며 선악 과를 먹지 않았다면 은혜의 약속이 없었을 것이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사탄의 어떤 것 보 다도 크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흙 속에서 모든것은 죽는다. 그러나 씨만은 흙을 먹고 살아나서 나무가 되고 열매가 되는 것이다. 사탄의 모든 계교는 세상을 이끌 수 없다. 그는 능력이지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욥의 모 든 소유는 앗아갈 수 있었지만 그의 생명은 가져가지 못하였다.

사탄은 바람이요, 불꽃일 뿐이다. 사탄은 원래 천사였고 천사는 생명을 돕도록 창조 되었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반역자가 되었 다 해도 생명을 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생명을 돕게 되는 것이 다. 개는 짖도록 창조 되었기 때문에 도적을 도울 수 없고 오히 려 주인을 돕는 것이다. 불은 자기가 꺼지지 않는 한 뜨겁게 하 지 않을 수 없다. 사탄이 생명을 돕지 않으려면 자신이 죽는 수 밖에 없다. 사탄은 움직이고 계획할수록 더 생명을 도울 뿐이 다.

물은 모든 것을 삼켰으나 방주를 돕고 말았다. 물이 방주를 돕 지 않으려면 스스로 말라야 한다. 그러면 방주는 뜨지 못할 것 이다. 방주는 물이 없으면 집이 되고 물이 있으면 배가 된다.

이 방주를 물이 어떻게 해할 수 있겠는가! 물은 방주를 삼키려 고 불어났지만 방주가 뜨자 더욱 불어났다. 그러나 방주는 더욱 더 떠다니는 것이다. 1백5십을을 창일하였으나 오히려 방주가 손상 되지 않자, 물은 이제 말라지기 시작하여 땅에서 사라졌 다. 그러자 배는 아라랏산 위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물이 어떻 게 방주를 이길 수 있겠는가! 물이 이길 수 없는 방주는 무엇인가 물은 사망이다. 사망이 이 길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 코로 숨쉬는 모든 생물이 죽었다.

그러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다.

방주는 물을 막았고 노아는 살았다. 잣나무는 죽어서 배가 되었 고 노아를 살렸다.예수는 십자가에서 죽고 그 생명은 부활 안으 로 살아났다. 사망을 이긴 자는 부활 안에 있는 생명이다. 사탄 은 예수를 죽음 안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부활 안으로 이끌었다. 밖에는 죽음이 있고 안에는 부활이 있다. 그 는 세상에 대하여는 죽음이었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삶이었다.

잣나무이신 예수는 세상에 대하여 죽고 생명이신 그리스도는 하 나님에 대하여 살았다. 잣나무는 죽음으로 물을 이겼고 예수는 죽음으로 죽음을 이겼다(히2:14-15).

죽음으로 죽음을 이긴 결과는 부활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영원 한 인격이다. 이 인격은 물이 삼킬 수 없다. 사탄은 이 인격을 해할 수 없다. 오히려 도울 뿐이다. 사탄은 코로 숨쉬는 모든 것을 해하였다. 그러나 부활이신 인격은 해할 수 없다. 해하려 고 하면 할수록 돕게 되고 오히려 사탄은 이 인격에게 거름을 줄 뿐이다. 이 인격의 양식이 될 뿐이다. 부활생명은 사망을 양 식으로 먹고 자란다. 부활은 사망을 먹고 나왔기 때문이다. 시 궁창이 더 시궁창이 될수록 미나리는 더 풍성하게 자란다. 예수 를 시기하고 미워하던 바리세인도 사두개인도 대제사장도 울법 사도 심지어는 선생을 팔았던 가롯유다도, 그 누구도 예수를 영 화롭게 하는데 돕지 않은 사람은 없다. 예수를 만났던 모든 사 람은 예수를 영화롭게 하고 있었다. 미나리씨는 시궁창에서 자 란 미나리에서 나왔기 때문에 시궁창에서 영광을 얻는다. 부활 생명은 죽음을 먹고 나왔기 때문에 죽음이 올수록 영화로와진 다.

세상이 당신을 사망에 빠뜨리는가 아니면 세상이 당신을 부활생 명에 이르게 하는가 세상은 코로 숨쉬는 당신을 십자가에 달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당신으로 하여금부활생명을 낳게 하는 것이다. 구원이 없으면 부활도 없다. 그러나 당신이 스스로 죽 는다면 결코 부활을 얻지 못한다. 사탄과 세상이 당신을 죽음에 넘긴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부활로 살릴 것이다. 세상과 사탄이 우리를 부끄럽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영화롭게 한다. 죽음은 코로 숨쉬는 육체 안에서 역사하고 부활은 방주 안에 있는 인격 안에서 역사한다. 잣나무 방주는 죽음에 싸여 있었고 노아는 부 활에 싸여 있었다. 죽음은 잣나무에게 역사했고 생명은 노아에 게 역사했다. 할렐루야!(롬 6:9-11, 고후 4:12 참조) 죽음을 거친 생명 안에는 다시 죽음이 없다. 모든 것이 죽었으 나 죽음 안에 있었던 노아와 그와 함께 있던 자는 살았다. 죽음 을 거친 생명은 완전하다. 죽음은 시시각각 여러 모양으로 우리 를 엄습한다.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끊어지게 하려고 한다. 우리 는 그 죽음을 우리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통과해야 한다. 그리하 여 사망으로 사망을 멸하여야 한다. 코로 숨쉬는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죽었다. 노아의 때에 이미 죽은 것이다.

아니 아담 안에서 이미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 신을 이미 죽은 자로 여긴다면 사망은 더 이상 우리에게 찾아오 지 않을 것이다. 사망으로 사망을 이기신 주님을 따르자! 사망은 사망으로 말미암은 방주를 삼키지 못했다. 방주는 사망 으로 말미암아 지어진 것이다. 우리의 사망을 선포하자. 예수님 도 요단강에서 자신의 죽음을 선포하시고 하나님께 의로 인정 되셨다. 이제는 세상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사탄에 대하여 더 살려하지 말자. 삶을 주장하지 말고 고집하지 말자. 죽음을 선 포하자. 코로 숨쉬는 인생의 죽음을 선포하자. 우리가 똑똑히 다 보지 않았는가. 코로 숨쉬는 모든 생명이 다 죽은 것을 보지 않았는가! 네가 정녕 죽으리라 는 말씀이 이제는 그림처럼 드 러났다. 코로 숨쉬는 인생은 죽은 것이다. 그것을 사망에게 내 어주자. 그리고 우리 자신을 잣나무처럼 잘리고 쪼개어져서 판 자가 되고 그 조각은 다시 붙여져서 배가 될, 그런 자로 여기 자. 이것이 사망을 이기는 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방주를 위하여 잘라져야 하고 쪼개어져야 하고 연하여져야 한다. 그것만이 부활을 품는 유일한 길이다. 밖에서 는 죽음일지라도 안에서는 부활임을 깨닫자. 방주는 물의 높이 보다 언제나 반이 더 높았고 물의 길이보다 언제나 반이 더 길 었던 것이다. 물이 높아진다면 방주도 높아질 것이며 물이 길어 진다면 방주도 길어질 것이다. 방주는 참으로 신기한 비밀이다.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비밀인 것이다. 노아는 네피림의 시대에 서는 죽음 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모두들 장부요 용사요 위대한 자들이 될 때 노아는 은혜를 입어야 하는 마리아였으며 죽은 자 와 같은 사라의 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작은 배는 큰 바다 위에 떠 있었고 떠다녔다. 큰 바다는 작은 배를 삼키지 못했다. 배는 물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은혜는 저주보다 높고 생명은 사망보다 높다. 죽음을 통과한 부 활생명은 사망의 법에 속하지 않는다. 방주는 물 위에 떠 있을 지언정 물에 속하지 않는다. 방주가 된 잣나무은 더 이상 죽일 수가 없다. 죽음이 아무리 몰려오더라도 더 이상 죽일 수가 없 다. 하나님은 우리를 늘 죽음에 넘기시고 다시 살리신다. 십자 가에 넘기시고 부활케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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