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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물이 불어나자 방주가 뜸 (창 07: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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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에게 포함된 모든 생명이 방주에 들어가자 하나님은 노아를 닫아 넣었고 물이 지면에 창일하매 방주는 물 위에 떠다녔다.

물이 불어 산들이 덮이자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고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살아 남았다. 노아와 함께 있던 자들은 방주로 물을 통과하였다.

노아가 6백세 되던 해는 무드셀라가 죽은 해다. 무드셀라는 아 담 이 후 노아까지의 10대중 가장 오래 산 사람이었으며 그는 창 던지는 자였다. 그의 이름 안에는 그가 죽을 때에 그것이 임 하리라는 뜻이 들어 있다. 인간은 무드셀라 이상 살 수 없다.

그러므로 무드셀라가 죽는다는 것은 인생이 끝난다는 것을 의미 한다. 인생이 끝나는 날 홍수가 임했다. 아담의 영광은 무드셀 라에서 끝이 났고 새로운 세대는 노아의 아들들로 시작되었다.

아담에게는 은혜가 필요하다.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는 10대는 오래 살았고 아들들을 낳았다. 이 계보는 다시 노아의 아들 셈 에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고, 아브라함의 후예는 다윗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에 이른다. 무드셀라가 죽은 후에 노아는 은혜를 입고 거스리는 세대에서 구원을 얻는다. 구원의 원칙은 인간의 능력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 무드셀라는 최고의 수 명을 누렸지만 은혜를 입지 못했다. 그가 죽은 후에 노아가 은 혜를 입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우리의 무드셀라가 죽고 난 후에 우리의 노아는 은혜를 입는 법이다.

무드셀라는 아담으로서 구원 얻기 위하여 최선의 힘을 발휘한 것이다. 그가 자기의 수명으로 사망을 항거하고 있었지만 사망 은 그를 삼키고 말았다. 밖에는 큰 사망의 물이 엄습하고 있었 기 때문이다. 아담 이 후 노아까지의 계보는 잃어버린 창조의 목표를 회복하려는 인간의 노력으로 이어졌고 그 절정은 무드셀 라지만 아담을 타락하게 했던 천사는 사람의 딸들과 여전히 결 합하고 있었고 그들은 네피림이 되어 사망의 홍수로 자라고 있 었던 것이다. 아담은 그 사망의 물을 막아 보려고 최선의 노력 을 다했지만 결국 무드셀라는 죽고 홍수는 쏟아졌다.

오늘날도 사정은 동일하다. 지금도 아담 안에서 수없는 사람들 이 아담 자손의 노력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와 철학과 종교의 각 방면에서 아담은 멸망을 극복하려고 천년의 사다리를 기어오르고 있다. 그러나 무드셀라는 9백6십9번째 계단에서 죽 고 사망은 땅을 업습했다. 어떤 방법과 노력으로도 아담은 사망 을 이길 수 없다. 처음부터 아담은 사탄에게 패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는 동안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그는 은혜를 입은 노아 가 될 것이다.

사망의 물은 항상 있다. 창세기 1장2절에 보여졌던 큰 물은 9 절에서 보여진대로 한 곳으로 몰아부쳐져 있을 뿐이다. 사망의 물은 하나님의 창조가 허물어지면 언제든지 몰려 올 수 있는 것 이다. 아담 자손이 생명을 연장하려고 천 년의 노력을 기울이는 동안 사탄은 네피림으로 홍수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무드셀라 안에 있는가, 노아 안에 있는가 무드셀라가 죽었을 때 그 안에 포함된 모든 것이 죽었다. 결국 무드셀라는 아담 안 에서 사탄에게 패한 것이며 네피림은 사탄 안에서 무드셀라를 이긴 것이다. 아담과 사탄의 싸움에서 사탄은 이미 승리를 확보 해 놓고 있는 것이다. 무드셀라와 네피림의 싸움은 아담과 사탄 의 싸움이다.

물은 노아에게 포함되지 않은 모든 생명을 삼켰다. 아담은 물을 통과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모든 사람은 물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아브라함은 강을 건너온 사람이고 이스라엘 도 홍해를 건넜으며 요단강을 건넜다.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물두멍을 지나야 했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침례를 받아야 했다(행2:37-38). 그러므로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를 구원 하는 표니 곧 침례라(벧전 3:21).

물을 통과한 자만 산다. 그러나 아담 안에서는 아무도 이 물을 통과할 수 없다. 흙은 물 속에 잠겨 있었다. 이에 하나님의 호 흡이 들어감으로 인하여 사람이 되었다. 아담의 계보는 물로 덮 여 있었다. 그러나 노아가 은혜를 입음으로 구원이 시작되었다.

아담은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어도 물(사망)을 이길 수는 없다.

물은 아무리 높아져도 방주보다 높아질 수 없었다. 아담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어도 물을 이길 수 없지만 물은 아무리 많아도 방 주를 이길 수 없다. 오히려 방주를 도울 뿐이다. 하나님이 노아 를 닫아 넣으시자 노아는 방주가 되었다. 은혜를 입은 노아는 방주를 입었다. 은혜는 방주로 변화한 것이다.

은혜는 무한한 변화로 나타난다. 때로는 산성이 되고 때로는 방 패가 된다. 때로는 피난처가 되고 때로는 요새가 된다. 은혜는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창15:1, 시 46:1, 91:2, 144:2). 물 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방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는 방주가 된 것이다. 사탄이 화살일 때 은혜는 방패가 되고 사탄이 침략 일 때 은혜는 요새가 된다. 하나님은 노아를 은혜 안에 닫아 넣 으신 것이다. 은혜 안에 닫혀진 사람은 복되다.

무드셀라는 천계단을 다 오르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나 노아는 은혜 안에 닫혀졌다. 우리의 무드셀라가 죽을 때 세상은 심판되 고 우리의 노아는 은혜안에 닫혀진다. 홍수는 땅 위에 창일했고 방주는 물 위에 떴다.

노아는 방주로 물을 이겼다. 우리도 방주로 밖에는 물을 이길 수 없다. 방주는 무엇인가. 은혜를 입은 노아다. 네피림의 시대 에서 왜 노아는 은혜를 입었는가. 그는 네피림이 아니었기 때문 이다. 지금도 네피림이 아닌 사람은 다 은혜를 입을 수 있다.

흙은 왜 호흡을 받았는가. 흙은 호흡이 없으면 바위가 되기 때 문이다. 흙은 왜 씨를 받는가.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받는 것이다. 씨는 왜 흙에서 자라는가. 흙은 뿌기를 내리기에 적합 하기 때문이다. 흙은 씨에게 이용될 수 있는 물질이다. 우리도 하나님에게 이용될 수 있으면 은혜를 받을 것이다. 네피림은 너 무 위대하고 지식이 많으며 장대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용할 수가 없다. 그는 은혜를 입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생명을 받은 자가 아니고 능력을 받은 자다. 천사는 능력이지 존재가 아니다. 그는 생명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며 존재이 시다. 아담은 생명이요 존재이신 하나님을 받지 않고 능력을 받 았기 때문에 위대해졌고 장대해졌지만 생명이 없고 은혜(하나 님)가 없다. 능력과 지식으로는 사망을 이길 수 없다. 능력과 지식은 9백6십7세를 버티었어도 결국은 죽고 사망이 다시 왕노 릇하게 되었다. 물을 이길 능력과 지식은 없다. 생명만이 물을 이길 수 있다.

크고 작은 모든 생물이 물이 밀려 오자 다 죽었다. 거기에는 능 력과 기술과 지식의 모든 것이 동원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물 을 이길 수 없었다. 땅에서 생명이 있다고 하는 모든 것들이 죽 었다. 그러나 물에 사는 생명은 하나도 죽지 않았다. 은혜 안에 닫혀진 노아와 물 속에 사는 생물만 살아 있었다. 홍수 속에서 살아 남은 자는 선악과로 말미암은 지식의 능력을 가진 자들이 아니었다. 땅 위에서 씨를 가진 모든 것들이 그것이 능력이 있 든 없든, 지식이 있든 없든 다 죽었다. 노아에게 포함된 자와 물 속에 사는 고기만 살아 남았다. 구원은 은혜와 생명의 문제 이지 능력과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생명 자체만을 필요로 하신다. 생명에 부가된 어떤 것 도 원치 않으신다. 생명은 부가될수록 쓸모가 없게 되기 때문이 다. 흙은 온전히 흙이어야 한다. 사람도 사람 그 자체여야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아담에게는 선악과 가 더해졌고 노아의 때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천사들이 더해졌 다. 이것은 세상(cosmos)을 만들기에는 필요하지만 천국을 만들 기에는 합당하지 못하다.

노아는 더해진 세대에서 구원을 받았다. 네피림의 세대는 더해 진 세대다. 노아는 더해짐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세대에 서 뒤진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에는 적합한 사람이 었다.노아는 네피림의 세대에서 구별된 사람이었고 방주는 물 위에 구별된 물체였다. 구별됨이 없이는 구원도 없다. 구원은 코스모스로부터 구별되는 것이다. 네피림으로부터 구별되는 것 이 노아의 구원이다. 구별된 물체와 구별된 사람은 하나다. 방 주와 노아는 하나인 것이다. 아브라함은 강 저 편 사람들과 구 별되었고 이스라엘은 에급 사람들과 구별 되었다.구별은 그의 어떠함 때문이었다. 방주가 그 구조와 성질상 물에 뜰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노아도 그 사람됨 때문에 그 세대에서 구별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노아를 닫아 넣으시자 노아는 방주가 되었다. 은혜를 입은 노아는 방주를 입었다. 은혜는 방주로 변화한 것이다.

은혜는 무한한 변화로 나타난다. 때로는 산성이 되고 때로는 방 패가 된다. 때로는 피난처가 되고 때로는 요새가 된다. 은혜는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물에서 뜰 수 밖에 없는 방주로 조성하기를 원 하신다. 우리가 방주를 붙잡고 살아나기를 원하시기보다 우리가 주 안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되게 하기를 원하신다. 하나 님은 결코 네피림을 구원하지 않으셨다. 네피림은 물에 뜰 수 없다. 네피림은 곧 물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사망 자체 인 것이다. 사망은 결국 멸망 받아야 할 자다(고전 15:26). 사 망은 구원 받아서는 안된다. 사망은 없어져야 한다.

노아는 방주였으며 네피림은 홍수였고 노아는 구원이었고 네피 림은 사망이었다. 네피림은 온 천하를 휩쓸었고 지금도 휩쓸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방주는 떠 있었고 지금도 떠 있다. 결국 물은 감하여질 것이며 방주는 산 위에 머무를 것이다. 마지막 멸망 받을 원수는 물이다. 아멘!!!(고전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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