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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자와 나사로1 (눅 16: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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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에는 특히 재물에 관련된 비유가 많다. 어리석은 부자 얘기 하며 불 의한 청지기의 비유, 그리고 본문의 부자와 나사로 등은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말씀이다. 그만큼 누가는 이 세상의 재물과 하나님 나라의 관계를 집중적으 로 조명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누가복음 강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신앙생활이란 궁극적으로 선악 상대적인 관념의 세계를 벗어 나서 하나님의 생명을 향한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 로 등장하는 것이 율법적인 자기 의의 탈피와 이 세상 재물에 대한 집착으로 부터의 벗어남이다.

계속하여 하는 말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 을 수 없다. 우리의 의는 오직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 은혜로 말미암아 존재 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대가로 의로워지는 게 아 니고, 아버지의 명을 지켜 어김이 없으려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친구들과 나누 어 먹지 않은 것으로 의로워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의는 우리가 어떤 사람 이냐에 좌우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냐에 좌우된다.

사람들의 병폐는 자기가 율법적이니까 하나님도 그러리라고 생각하며 자기가 육신적이니까 하나님도 역시 그러리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의 기준으 로는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디며 포도원에서 일한 사람과 느지막히 와서 단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을 동일하게 대우한다는 것은 불의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말아먹은 탕자와 집에서 아버지의 명을 어김 없이 받들어 모신 큰 아들을 동일하게 대우하는 것도 공의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분명히 불의라고 할 만한 일을 서슴 지 않고 행하신다. 탕자를 위하여는 송아지를 잡고, 한 시간만 일한 사람에게 도 한 데나리온을, 그것도 먼저 와서 하루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사람들보 다 먼저 준다. 하나님의 의는 이런 것이다.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 암아 구속되고 의로워졌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이런 모습에 대한 이해가 있어 야 한다. 하나님이 탕자를 받아들이는 모습과, 더 늦게 와서 일도 별로 하지 않은 사람을 먼저 온 사람과 동일하게 대우하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 람은 아직 예수의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를 알았다고 그것으로 신앙생활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하 나님의 의를 아는 것은 순간적인 깨달음(頓悟)이지만 그러나 우리의 삶은 여 전히 잡다한 문제들로 가득차 있고, 하나님의 세계를 향해서 눈이 열리긴 했 지만 그래도 여전히 세상에 몸담고 있는 자신이 존재하는 것이다. 삶이란 항 상우리의 머리에서 끝나지 않는다. 두 손과 두 발이 존재하는 시공이 곧 우 리 삶의 터전이며 그것으로 하는 일이 곧 우리 삶이다.

그 어떤 깨달음도 그 어떤 의로움도 그것으로 완성일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 다. 문제는 우리가 언제나 그 깨달음 안에 깨어 있어야 하고 항상 그 의로움 에서 살아야 한다는 점이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 나오는 부자를 하나님도 모르고 천국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 면 안 된다. 이 부자는 하나님 앞에서의 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다. 본문 24절과 25절에 나오는 부자와 아브라함의 대화를 한 토막 옮겨보자.

부자: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아브라함: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분명히 이 부자는 아브라함을 향하여 아버지! 하고 있으며, 아브라함은 그를 향하여 얘야(아들아)! 한다는 사실. 이 정도면 아브라함과 부자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 이해가 될 터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말 의 의미는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하나님이 지시하 는 땅 가나안을 향한 여행을 떠난 사람이라는 의미이고, 따라서 하나님을 믿 는 사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예수 시대에 있어 아브라함 의 자손이라는 말이 가지는 이 정도의 의미는 아주 보편적인 것이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 (요8:33-39) 예수와 유대인들 간의 대화의 일부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 손이라는 대단한 긍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곧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말과 똑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위의 내용은,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틀림없다고 우기고 있는 반 면 예수의 말씀은 이들의 주장에 대해 웃기지 말라는 의미가 다분하다.

즉 유대인들이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내세우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들의 주장일 뿐이고, 예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 말은 곧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그네들의 주장일 뿐이지 예수 가 보기에는 아니올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부자는 아브라함을 향하여 아버지! 라고 외치며, 아브라함은 그를 향하여 아들아! 하고 있다. 즉 요한복음 에서처럼 어째서 내가 네 아버지냐 하는 논쟁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말인 데, 이 점이 아주 중요하다. 아브라함이 그 부자를 당신의 아들로 인정했다는 것. 이것은 그 부자가 이삭으로 말미암은 자라는 뜻이다. 무슨 말인가.

사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 외에도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이 먼저 있었다. 그리 고 아브라함도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는 이스마엘이 약속의 아들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마엘로 이어지지 않고 이 삭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아브라함의 자손은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이삭으로부터 나야 하는 것이다.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롬9:7) 세월이 흐른 후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고, 자신의 육신적 능력이 이룬 이스마엘을 통하여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과 따라서 이스마엘의 자손은 믿음의 자손이 아니라는 사실을 파악했던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이 부자가 이스마엘과 이삭의 차이를 분간하지 못하고 자신이 이 스마엘의 자손이면서도 아브라함을 향하여 아버지! 하고 불렀다면 아브라 함이 뭐라고 했을까.

이스마엘도 아들은 아들이니까 물론 아들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에 오는 내용이 달라진다. 이 경우를 지칭하는 사건이 바로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와 큰 아들이다. 15장의 큰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은 모른 채 자신이 아버 지를 섬겨 명을 어기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다시말하면 자신 의 노력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율법적인 인간의 대표로 서 곧 이스마엘이다. 그러나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리긴 했지만, 그 사건을 통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한 사람이고, 하나님은 율법의 하나님 이 아니라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임을 이해한 사람이다. 이삭이 상징하는 바가 곧 이것이다. 즉 이삭은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능력이 이루는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가 이루는 아들이라는 점.

탕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탕자의 의미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받아들여 짐으로 의로워지는 것이며, 다시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큰 아들이 아버 지를 향해 대답하는 말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가운데 나오는 아버 지의 의미는 말로만 아버지이지 실제 의미는 주인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 서 자신도 아들로 산 것이 아니라 종으로 살았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아들에게는 아들아! 한 다음에 네가 과연 아들이냐를 되묻지 않을 수 없으며, 이 물음에 애정이 깃들면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눅15:31)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16장에서 부자에게 주는 아브라함의 말은 이와다르다. 15장의 큰 아 들이 아버지께로부터 염소 새끼 한 마리 받지 않았다는 것은 순전히 그의 「 착각」으로, 이런 사람을 고치는 약은 사실을 사실로 볼 수 있는 눈, 즉 깨 달음이다. 하지만 16장의 부자에게는 내 것이 다 네 것 아니냐는 따위 의 가르침을 주지는 않는다. 이어지는 아브라함의 얘기를 들어보자.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여기서 아브라함은 이 부자가 하나님을 안 믿었다거나 아니면율법을 어겼다 거나, 혹은 나사로같이 불쌍한 이웃을 도와주지 않았다거나를 책망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느니 율법을 어기면 안 된다느니 혹은 나사로를 도와주어야 한다느니 하는 문제는 아직 하나님의 의가 무언지 모를 때 일어 나는 싸움이다. 예수의 십자가에 참으로 연합한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다 는 말을 하지 않으며,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사도 바울의 고백 대로 정말 더이상 정죄가 없으며, 더이상 범법이 없다.

부자를 향한 아브라함의 책망은 그가 선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고, 간음하고 살인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그냥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다는 말이다.

네 좋은 것.

문제는 여기에 있다. 누가복음 15장을 지나온 사람에게는 더이상 율법적인 정 죄는 없다. 그렇다고 그것이 곧 완성은 아니란 것과, 누가복음 16장은 그 이 후에 벌어지는 삶이란 점은 그동안 여러 모양으로 다루어온 바다. 16장에서의 문제는 네 좋은 것이 무엇이냐에 있다.

나는 이 누가복음 강해를 처음 시작할 때, 이 누가복음 십사오륙장이 우리 신 앙 생활의 세 단계라 할 수 있는 부르심과 의롭다 하심, 그리고 영화롭게 하심(롬8:29)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얘기한 바 있다. 전체적인 이해를 돕 기 위해 이쯤에서 누가복음 십사오륙장의 특징을 개괄한다면 다음과 같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일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 신 말씀의 뜻이 여기 있다. 아브라함의 여행이 이스마엘에서 끝났더라면 하나 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일 수 없고, 이삭의 삶이 에서에게서 끝났다면 역시 이삭의 하나님일 수도 없다. 이삭이 있기에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며, 야곱이 있기에 이삭의 하나님이다. 야곱 역시 마찬가지다. 야곱의 한 평생이 하나님 앞에 성공작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 그 조상들의 공으로 천국에 갈 수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그 조상들마저도 완성되지 못한다(히11:40).

누가복음 14장은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관한 내용으로 그 부르심에 참여하는 사람과 그 부르심을 거절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궁 극적으로는 그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그 소망이 이루어지기까지 어떤 비 용이 얼마만큼 들 건지 얘기하고, 하나님을 향한 여행을 떠나기 전에 미리 앉 아 계산해 보라고 권한다. 괜히 갈대아 우르만 떠나서 하란에 머물 바에는 오 히려 떠나지 않는 게 낫다는 얘기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이런 사람들 의 대명사이다.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닌 사람들. 교회를 다니는 것도 아니고 안 다니는 것도 아닌 사람들. 하나님이 뭐가 좀 부족해서 자기 도움을 필요로 하기에 교회 나가 주는 사람들. 그러니 소 사고 밭 살 일이 있으면 주일 성 수는 당연히 뒷전일 수밖에 없고, 장가 가고 시집 갈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15장은 이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15장은 만사를 제치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며, 만난을 무릅쓰고 가나안을 찾아 나선 아브라함 같 은 사람들에게 하는 얘기다. 그러므로 15장은 아브라함의 발전된 모습이며 신 앙의 제 2기로서, 15장에서의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나 이삭의 모습으로 나타 난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참여하여 신앙의 여정을 떠나는 모든 아브라함은 필 연적으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게 되는데, 이 이스마엘이 바로 인간의 육 신적인 능력으로 이루는 신앙 생활이며, 아들이긴 아들 같은데 종의 삶을 벗 어나지 못하는 신앙 생활이다.

집안에서 아버지의 명을 지켜 어김이 없는 큰 아들이 바로 이런 이스마엘을 대표한다. 이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신앙 생활을 너무 열심히 해서 탈이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자기만큼 성실한 사람이 없고, 자기만큼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사람이 없다. 그야말로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의 무리 며, 한번도 잃어버려진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15장에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나 탕자 등은 바로 이런 자기 열심이나 자기 능력이 결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며 이것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스마엘로도 충분한데 어느날 하나님이 오 셔서 이삭을 말씀하시고, 그 이삭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이삭을 말씀하셨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이스마엘에 대한 부정을 담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여러 해 동안 이스마엘을 그야말 로 자기 자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가만 계시던 하나님이 어느날 갑 자기 그것을 부인해버릴 때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오늘날 대부분의 신앙 생활이 이삭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이스마엘이 부 인되지 않기 때문이요, 이스마엘이 부인되지 않는 것은 집 안의 큰 아들처럼 아버지의 명을 어김이 없는 신앙 생활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아브라 함이 이스마엘로 끝나면 아브라함의 구원은 없다. 아브라함에게는 애를 끊는 슬픔일지라도 이스마엘을 끊어버려야 하고, 이삭으로 거듭나야 한다.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

이게 이삭이며, 이게 하나님이 인간을 의롭다 하심이다. 그래서 창세기에는 이삭의 얘기가 별로 나오지 않는다. 다만 인간들의 육신적인 능력으로 하나님 의 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상징으로 잠깐 등장하여, 아브라함으로부 터 야곱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역할만 하고 사라진다.

그러나 이삭에게서도 에서라는 사람이 나온다는 데 누가복음 16장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도 한 어머니 배에서 더구나 쌍동이로서 말이다. 우리의 삶이 선악 시비의 관념의 세계가 아니요, 또한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율법적으 로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가는 길은 에서 아니면 야곱이다.

16장에 나오는 부자는 바로 이 에서와 같은 사람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부 자를 향하여 아들아! 한 다음에 너는 살았을 때에 네가 좋아하는 것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에서가 좋아한 것이 무엇이었던가.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 에서가 맹 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창25:32) 육신의 생명을 보존하는 팥죽 한 그릇을 장자의 명분보다 더 좋아했다는 얘기 다. 창세기에서도 에서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은 그가 세일산에서 강도짓을 했 다는 데 있지 않다. 이런 강도짓은 김영삼 정부에게나 관심 사항이지, 하나님 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책망은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네가 좋 아한 것은 결국 팥죽 한 그릇이었다는 얘기고, 그 팥죽 한 그릇에 대한 미 련 때문에 결국은 장자의 명분을 놓쳤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부자가 좋아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거듭 하는 말이지만 이런 말씀을 볼 때 주의해야 할 점은 부자가 저 혼자 잘 먹고 잘살았다는 것을 책망하는 게 아니란 점이다. 다만 부드러운 옷과 호화 로운 생활을 좋아했다는 지적일 뿐이다. 부드러운 옷을 좋아하느라고 천국을 향한 침노의 삶을 놓쳤다는 말이며, 이 세상을 좋아하느라고 말씀 안으로 들 어가는 삶을 놓쳤다는 말이다. 천국보다 세상을, 말씀보다 옷을 더 좋아했다 는 것.

그러면 나사로는 어떤 사람인가.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 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 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 데를 핥더라.

 여기서도 주의해야 할 점은 그러니 우리도 가난하게 살자가 아니란 점이 다. 이 비유는 예수의 비유 가운데 아주 독특한 형태인데, 예수께서 비유 가 운데 실명(實名)을 등장시킨 점이 그것이다. 예수는 여기 외에는 한번도 비유 에 실제 이름을 등장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어차피 비유기 때문에 등장 인 물의 이름이야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 나사로라는 이름은 그것이 어떤 특정한 인물을 지칭하는 고유 명사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사람을 총칭하는 보통명사의 성격이란 점을 이해 해야 한다. 즉 나사로라는 이름도 비유의 중요한 한 부분이라는 말이다. 우선 나사로라는 이름의 의미부터 생각해 보자.

Lavzaro:라자로스, 기원은 히브리어(rz:[:l]a, 엘아자르), 이스라엘인의 이름 그러니까 라자로스라는 헬라어 이름은 히브리어 엘아자르(rz:[:l]a,)의 음역 인 셈인데, 엘아자르(rz:[:l]a,)는 하나님이라는 뜻의 엘(lae)방어하다, 돕다는 뜻의 아자르(rz[:)의 합성어이다. 「창세기 산책」의 돕는 배필 에서 돕는 자로 사용된 단어가 에제르(rzE[<)였는데, 이 아자르(rz[:)의 명사형으로 보면 된다. 이렇게 보면 라자로스란 이름은 하나님이 도우신다 나 도움의 하나님이란 의미가 되는데, 결국 나사로란 하나님의 도움으 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총칭이다. 즉 하나님이 그의 돕는 배필이 된 사람 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또 주의해야 할 점은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말의 의미를 ,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적인 풍요를 쏟아부어 우리의 이 세상 삶을 돕는다 고 생각하면 곤란하다는 점이다. 문자 그대로 하나님 그 자체가 도움이라는 말이다. 반대로 부자라는 이름은 돈의 도움으로 사는 사람이라는 뜻 이며, 돈이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나 나사로는 그렇지 않다.

비록 밥을 얻어 먹고 몸에는 종기가 나서 개들이 와서 핥고 있을지라도, 하나 님 그 자체로 의미고 말씀 그것만으로 위로가 되는 사람이다.

하나님과 말씀에만 의미를 두고 살다보니까 육신적인 양식은 누가 도와주기 전에는 때거리가 없을 정도로 빈궁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나사로는 우리의 인 생이 결코 이런 육신의 세계만으로 끝나지 않으며, 이런 육신의 세계는 그야 말로 한 순간이라는 것을 제대로 본 사람이다. 팥죽 한 그릇의 효용은 불 과 몇 시간에 지나지 않지만 깨달은 마음에서 나오는 단 한 마디의 말씀은 영 원토록 솟아나는 생수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도 어찌 팥죽 한 그릇 때문에 장 자의 명분을 버릴 수 있겠는가 말이다.

영원을 준비하는 사람은 순간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순간에 매여 사는 사람들의 눈에는 나사로가 가난한 자일 수도 있고, 꿈 속에 사는 몽상가 일 수도 있으며, 제 앞가름도 못하는 팔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참새가 어찌 대붕의 마음을 알겠으며, 그저 순간에만 매여 사는 눈으로 어찌 영원을 볼 수 있으랴.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이 꿈인지는 지금 있는 자리를 벗어나야만 알 수 있는 것. 부자와 나사로가 죽어 장사되었다는 말은 그들이 현실이라 고 생각했던 그 환경을 벗어났다는 말이다.

그랬더니 거기는 육신 세계의 능력이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 성경의 표현이야 어떻든 이제 부자는 더이상 자기 능력으로 행복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돈의 도움은 육신이 있을 때까지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아는 것 같으면서도 정말 모른다. 다른 사람들 은 다 죽어도 자기는 영원히 살 줄 알며, 다른 사람들은 모두 빈손 들고 가더 라도 자기는 잔뜩 싸가지고 갈 줄 안다.

그래서 오늘도 팥죽 한 그릇과 장자의 명분을 바꾸는 일이 일어난다.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가운데서. (계속) 글/이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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