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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왕명(王命)에 사는 사람들 (히 11: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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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임금 솔로몬은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은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고 하였습니다.
저 애굽의 고센 땅에 이주하여 살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은 요셉을 잘 알았던 애굽의 바로 왕 시대에는 형통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애굽의 통치자가 나타났을 때, 저들은 곤고한 날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저들에게 나타난 애굽의 새 임금 바로는 참으로 무서운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명령을 내린 큰 이유는 애굽 고센 땅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크신 섭리의 축복을 받아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출 1:7). 이스라엘 백성의 왕성이 애굽 왕 바로에게는 두려움이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다(출 1:9)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나중에 자신을 도전하여 싸우고 애굽을 떠날까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무서운 왕명을 선포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성격의 왕명은 지상에 자리잡은 여러 시대의 교회도 같이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Ⅰ. 죽음의 왕명(殺人令)
애굽의 새 왕 바로는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어명을 공포하였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왕명(王命)이었습니다.
첫 번째 왕명은 고역령(苦役令)이었습니다(출 1:11).
애굽의 감독들을 세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저들을 괴롭게 하라는 명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장 11절에 「… 괴롭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억누르다’, ‘압박하다’, ‘혹사시키다’라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국고성을 건축하게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고역 때문에 부부생활을 못하게 함으로 그 자손의 번성을 제지하고, 창성함에서 오는 힘의 단결을 저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저들이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했다」고 하였습니다(출 1:12). 그 결과 바로는 근심에 근심을 더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애굽의 왕명은 더 엄한 고역으로 이스라엘에게 가해지고 말았습니다(출 1:13-14). 그러나 고역령의 결과는 이스라엘에게 더 큰 축복의 창성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이 세상(애굽)에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 왕명은 살남아령(殺男兒令)이었습니다(출 1:16).
애굽의 바로는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에게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助産)할 때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살리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선민의 번성을 차단하려는 사탄적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산파들은 애굽 바로의 왕명을 어기고 히브리 여인들의 아들들(남자)을 살리고 말았습니다(출 1:17). 그 큰 이유는 저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는(출 1:17) 것입니다.
나중에 저들은 왕에게 불려 가서 답하기를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출 1:19)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무서운 바로 왕의 살남아(殺男兒) 명령을 거절할 수 있는 은혜를 히브리 산파들에게 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 산파들은 ① 하나님을 두려워 한 자들이었습니다(출 1:17). ②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었습니다(출 1:20). ③ 하나님을 경외한 자들이었습니다(출 1:21). ④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집을 왕성하게 하셨습니다(출 1:21).
저들은 보이는 애굽의 군주 바로 왕의 명령보다 보이지 아니하는 우주의 군주(통치자) 하나님을 더 두려워 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애굽의 보이는 군주 바로 왕의 명령보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더 두려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저들은 애굽 왕 바로의 왕명을 어기고 히브리 여인들의 아들들을 살려 내었습니다(출 1:17). 그들은 죽음의 왕명을 따르지 아니하고 생명의 왕명을 따른 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생육이 번성하고 심히 강대하고 말았습니다(출 1:20).
세 번째 왕명은 모든 애굽의 신민에게 내린 공개적인 살인 명령이었습니다(출 1:22).
바로는 모든 신민들에게 공개적으로 명하기를, 고센 땅에 사는 히브리 여인들이 남자를 낳거든 하수(나일강)에 던지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사탄의 발악입니다. 사탄은 지금도 역사 가운데 사람의 영육을 멸하는 여러 류의 명령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내리고 있습니다.
Ⅱ. 항명하고 사는 사람들

1. 소극적 항명
우리는 지금 고센 땅에 사는 이스라엘에게 선민 멸종의 왕명이 공포된 것을 보았습니다. 히브리 여인들이 낳는 남자는 모조리 죽임의 대상이 된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헤롯 왕이 베들레헴 근동을 중심하고 두 살 아래의 모든 남자를 다 죽이라고 어명을 내린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마 2:16). 헤롯 왕의 그 어명 가운데는 어린 아이 예수가 포함된 것이 중심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히브리 산파들의 항명적 태도를 보았습니다. 오늘 주어진 본문 히브리서 11장 23절에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하는 장면을 봅니다.
출애굽기 2장 2절에는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 달을 숨겼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준수함’이란 단어 ‘토브( )’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창조 사역을 마치신 후 「심히 좋았더라」고 하신 그 단어입니다.
사도행전 7장 20절에는 「그때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성경들은 모세를 두고 ‘아름다운 아이’, ‘준수한 아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이임을 그 부모는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저들 부모는 하나님의 영지 작용을 본 사람들입니다. 그 아이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된 목적과 섭리를 읽을 줄 알았습니다.
이 부분의 말을 더 확실히 하면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 그 부모로 (인하여) 모세가 석 달 동안 숨겨졌더라」고 함이 옳습니다. ‘석 달 동안 숨겼다’는 말은 ① 석 달 동안 모세의 출생 소식을 숨겼다는 뜻이고 ② 석 달 동안 집안의 어떤 은밀한 곳에서 모세가 숨겨진 채로 지냈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바로 왕의 어명(王命)에 대한 항명이요, 항명적 행동입니다. 저들은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히 11:23).

2. 적극적 항명
다음에 저들은 더 숨길 수 없게 되자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만들고, 거기에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출 2:3). 그리고 그 부모는 모세의 누이 미리암으로 하여금 모세를 담은 갈 상자의 행방을 따르도록 지시하였습니다. 미리암은 자기 동생을 담은 갈 상자의 행방을 따랐습니다. 결국 모세는 바로 왕의 딸의 눈에 보여졌고, 마침내 그는 바로의 궁실에서 자라는 결과를 만났습니다(출 2:4-10).
모세를 담은 ‘갈 상자’는 ‘갈대 배’인데, 이 말은 노아의 ‘방주’(창 6:14)란 단어(켄;)와 같습니다. 그것은 아무런 방향 조절기가 없는 배를 뜻합니다. 하나님 자신에 의한 운행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모세의 부모와 형제는 모세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갈대 배에 담아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에 맡긴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바로의 왕명을 어긴 항명적 행동입니다. 왜냐 바로는 죽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는 죽이지 않고 살려 갈대 배에 그 아이를 담아 하나님께 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저들 부모는 참으로 죽을 죄를 지은 자들이 아닌가 군주의 명을 어긴 백성이 아닌가 살아 남을 수 없는 배역 죄를 지은 자들이 아닌가
성경은 저들의 소행에 대하여 말하기를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했다」(히 11:23)고 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항명입니다. 어쩌자고 그리하였을까 왜 그리하였을까 무슨 힘으로 그리하였을까 혈육의 힘이고 애정인가 아니면 단순한 순간의 반항인가 민족적 반항심의 발로인가
Ⅲ. 항명의 이유는 보이지 않는 왕을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23절에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이 왕명을 거절한 힘은 믿음이었습니다. 저들은 믿음으로 모세를 받았습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았습니다. 믿음으로 받은 아들 모세에게,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빛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믿음이 바로 왕의 명을 어기게 해 버렸습니다. 어떤 믿음인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저 히브리 산파들도 그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그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까닭에 히브리 여인들의 아들을 죽이라는 왕명을 무서워 하지 않고, 항명적 행동으로 그 아이들을 살렸습니다.
모세의 부모도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하나님을 가리켜 히브리서 11장 27절에 「보이지 아니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하나님같이 그 앞에서 보이고, 그 앞에서 생각하고, 그 앞에서 판단하고, 그 앞에서 말하고, 그 앞에서 행동했다는 말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자!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에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골로새서 1장 15절에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7절에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실상의 본체이십니다. 그분은 스스로 계신 자였습니다(출 3:14). 영원자존자였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자기 아들 모세를 저들에게 보내신 분이 바로 그 하나님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보이는 피조물인 바로 왕의 명령보다, 보이지 아니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을 믿고 따르기로 결심하고 행동하였던 것입니다. 유한한 바로 왕의 명령보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믿었습니다. 악한 바로 왕의 악명(惡命)보다, 선하신 하나님의 선한 명령을 믿었습니다. 무능한 바로 왕의 명령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믿었습니다. 육(肉)인 바로 왕의 명령보다, 영(靈)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믿었습니다. 땅에 사는 바로 왕의 명령보다, 하늘의 영광의 보좌에 좌정하신 권세 높은 하나님의 명령을 믿었습니다.
우리 성경은 위에 있는 권세자들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라고 하였습니다(롬 13:1-4). 그러나 이 말씀은 보이지 아니하는 의의 왕 하나님의 권세 아래서 이루어지는 순종과 복종을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하부(下部)의 권세는 상부(上部)의 권세에 순응함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네 부모를 순종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 「주 안에서」 네 부모를 순종하라고 하였습니다(엡 6:1). 주 밖에 있는 부모가 주의 뜻을 거스리는 명령을 할 때는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신앙의 가정에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 된 아내들은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하고,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위에 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같이, 또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함같이 해야 된다고 하는 최우선적인 권세가 앞서 있음을 봅니다(엡 5:22-25). 이 모든 사랑과 순종은 피차 그리스도를 경외함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엡 5:21).
구약의 저 용감한 주의 청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어명에 항명하고 말았습니다(단 3:16-18). 사도들은 너희들의 말을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고 하며, 유대교권주의자들의 명령에 불복종하였습니다(행 5:2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히브리 산파들은 왕명을 좇아 살았습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왕명을 보는 것같이, 듣는 것같이 믿고 행동하면서 살았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므로 보이는 애굽 왕 바로의 명을 어기고, 히브리 여인들의 아들들을 살려 주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저들은 왕명을 어긴 애굽에서 망하거나, 약하거나, 추방을 당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이 저들의 집을 왕성하게 하였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하나님의 왕명을 좇았습니다. 모세를 받았을 때 보이는 임금의 명령도 아랑곳없이 모세를 죽이지 않고 살려내고 말았습니다.
그 확실하고 분명한 내용은 저들은 보이지 아니하는 실존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왕명을 따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힘이 있습니다. 위기를 처리하는 결단적 행동의 힘이 있습니다.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내는 축복의 힘이 있습니다. 오늘의 절망을 내일의 소망으로 상승시키는 성화적 위력을 발휘합니다.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힘을 공급받는 믿음만이 보이는 세계의 현실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진리입니다. 그 이유는 보이는 현상 세계는 보이지 않는 원리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보이는 대로만 듣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세계를 보고, 듣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들입니다. 바로 그것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다음 주 계속-

199

7.

9. 2

1.
왕명(王命)을 받은 사람들(5)
-보이는 왕과 보이지 아니하는 왕-
히브리서 11장 23-28절
설교:석원태 목사
주제:믿음(순종하는 믿음)
논지: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는 오직 “예”하고 믿음으로 순종만이 있을 뿐이다.
Ⅰ. 왕명을 받은 모세
저 애굽의 고센 땅에서 죽음의 운명을 타고났던 한 사람 모세는 ‘갈대 배’ 안에서 극적인 구출을 받아 애굽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이 된 사람입니다. 그 이름 모세는 ‘물에서 건져 냄’을 뜻하는 이름으로 바로 왕의 공주에 의해서 지어진 것입니다(출 2:10). 물론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 자신의 구속사적 섭리였습니다.
그는 바로의 궁실에서 장성하면서 애굽의 학문을 통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기 동족 히브리인과 싸움하던 애굽 사람을 쳐죽인 일이 탄로가 된 후 바로 왕이 그를 죽이고자 하는 뜻밖의 사태를 맞이하면서, 그의 삶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바로 미디안 광야 목동 생활이었습니다(출 2:11-15). 미디안에서의 그의 목자 생활은 장차 이스라엘 선민의 목자적 구원 운동을 예비하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모세가 목자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의 생애를 극적으로 변화시켜 버린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저 유명한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양무리를 이끌고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던 어느 날, 그는 참으로 엄청난 광경을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불타고 있는 떨기나무’를 보게 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그 나무는 불꽃 속에서 타 버리지 아니하는 이상한 광경이었습니다. 모세는 이 광경 앞으로 이끌림 당하였고, 어찌하여 불꽃 중에 있는 저 떨기나무가 타지 않는가 하는 의구심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모세야, 모세야!” 하는 자기 이름을 불러 주는 한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음성이 떨어지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내가 여기 있나이다」(출 3:4)라고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다시 모세에게 들려 온 음성은 더 이상 불타고 있는 떨기나무로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때 모세의 걸음은 멈추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어서 또 들려 오는 음성이 「너의 선 곳은 땅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음성은 모세에게 계속이 되었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자기 정체를 알려 주었습니다. 바로 그때야 모세의 인격은 떨렸고, 두려움으로 그 얼굴을 가리우는 지경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실로 엄청난 명령을 내렸습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 3:7-10)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선민 해방령을 받았습니다.
모세를 찾아오신 분을 가리켜 ‘여호와의 사자’(출 3:2), ‘여호와’(출 3:4), ‘하나님’(출 3:1), ‘조상의 하나님’(출 3:16)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먼저 모세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찾아 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편에서 먼저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뢴 것이 아닙니다.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① 영광의 하나님이었습니다. 불꽃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분입니다(출 3:2). ② 모세의 이름을 불러 주는 인격적 음성을 발하시는 분이었습니다(출 3:4). ③ 조상의 하나님, 곧 언약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이었습니다(출 3:6). ④ 선민 역사의 현장을 통찰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선민 고난의 참상은 ‘보고’, ‘듣고’, ‘알고’(출 3:7), ‘기억하고’(출 2:24), ‘권념’(출 2:25)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친히 역사의 현장에 ‘내려 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려고’(출 3:8) 모세를 지목하여 찾아오신 분입니다(출 3:10).
그리고 모세에게 명령하신 분입니다. 선민의 출애굽 운동을 하명하신 분입니다. 나중에 모세는 다시 하나님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계신 자」 곧 「영원 자존자」로 알게 되었습니다(출 3:14).
히브리서 11장 27절에는 그 하나님을 가리켜 「보이지 아니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자」( τν γρ ρατον ρν = the invisible One ) 곧 ‘눈에 안 보이는 자’,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자’를 말합니다. 없거나 계시지 않음이 아니라 살아계신 실존 자체이시면서 우리의 육체적 시각 작용으로는 감각을 할 수 없는 자를 가리킵니다.
살아 계신 영원 자존적 인격자이신 하나님은 어떤 현상적 모습은 볼 수 없으신(골 1:15) 분이십니다. 그러면서 그는 영원한 왕이시고, 죽지 않고, 보이지 않으신 분이시라고 하였습니다(딤전 1:17).
모세는 그 놀라운 장면을 가리켜 「이 큰 광경」(출 3:3)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류의 큰 광경은 모리아산에서 아브라함에게도 있었습니다(창 22:). 사무엘에게도 있었습니다(삼상 3:). 엘리야엘리야에게도 있었습니다(왕상 18:, 왕하 2:).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다니엘에게도 있었습니다(단 6:-9:). 이사야에게도 있었습니다(사 6:). 예레미야와 에스겔에게도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에게도 있었습니다(마 17:, 계 1:). 물론 세계적 선교사 바울에게도 있었습니다(행 9:).
여러 시대, 여러 모양으로 나타내신 하나님 자기 현존 계시의 ‘큰 광경’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이 큰 구원 계시의 광경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전부를 폭로해 주시고 말았습니다. 독생자의 영광으로 나타내어 주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은혜와 진리의 충만이었습니다(요 1:14, 18).
바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의 화육강세, 무죄의 삶과 기적, 십자가 대속의 죽음, 부활, 승천, 보좌에 앉으심, 성령으로 다시 오심, 그 결과 교회를 세우심 등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공개하는 ‘큰 광경’입니다. 사도행전 2장 11절에는 이 사실을 가리켜 「하나님의 큰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큰 광경’은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은혜를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기 계시의 큰 광경을 신구약 성경에 기록함으로 말세를 만난 신자들은 ‘큰 광경의 노다지’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요 보라 지금은 은혜의 날이라고(고후 6:2) 하였습니다.
Ⅱ. 믿어 버린 모세
히브리서 11장 24절에 「믿음으로 모세는…」, 11장 27절에 「믿음으로…」, 11장 28절에 「믿음으로…」, 11장 29절에도 「믿음으로…」라고 연발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 큰 광경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스러운 계시를 ‘믿음’으로 수용해 버렸습니다. ‘믿음’의 방법이 아니고는 그 놀라운 큰 광경을 글로, 말로, 어떤 과학적 수단으로 설명하고 증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 큰 광경의 실상을 믿어 버렸습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 자신의 계시(나타냄)에 대한 인격적 응답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크리스천의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크리스천 생애의 활동과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 큰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 눈이 보았고, 그 귀가 들었고, 그 인격이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설명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사색이나 논리나 분석이나 종합 따위가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확실한 지식이었습니다. 아예 모세를 새롭게 변화시켜 버린 생명의 지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이 지식만이 그 ‘큰 광경’을 수용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나타내신 자기 구원의 계시, 곧 이 큰 광경들을 ‘성경’을 통하여 보고, 받고, 느끼고, 확신하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내증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어린 자식에게 자신의 존재와 부권(父權)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자신이 아버지임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 어린아이는 그 아버지 어머니를 태산처럼 믿고 즐기고 행복해 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그가 자라서는 더더욱 그 아버지, 어머니의 존재와 권위에 복종하고 순종하며 효행을 하게 됩니다.
모세는 그에게 임한, 스스로 자존하신 왕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의 존재하심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명하신 명령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왕을 기쁘시게 해 드렸습니다.(히 11:6).
Ⅲ. 왕명대로 행동한 모세
히브리서 11장 24절에 「믿음으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됨을 거절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실상 전 애굽의 보화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5-26절에는 도리어 자기의 동족과 함께 고난과 능욕을 받기를 더 좋아했다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7절에 보면 믿음으로 그 백성을 이끌고 애굽을 떠나는 출애굽의 거사를 단행하고 말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8절에는 출애굽 전날 밤에 저 유명한 유월절을 창조해 내고 말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큰 이유는 ‘보이지 아니하는 자’, ‘스스로 계시는 자’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그는 왕의 존재와 명령을 믿었습니다. 그 결과 왕명을 따라 행동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진리를 따라 행동하고 마는 것입니다.
요한 번연(J. Bunyan)이 쓴 〔천로역정〕에 기독도와 신실(신앙)이 나옵니다. 저들은 이 세상 장망성을 떠나서 천성을 향해 길을 가는 중에 ‘헛된 전람’(vainity Fair)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헛된 사치품들을 많이 파는 장소였습니다. 집들, 땅들, 직업들, 장소들, 영광들, 관직들, 소유권들, 나라들, 왕국들, 정욕의 대상들, 쾌락의 대상들, 기생들, 창녀들, 처자들, 주인들, 종들, 생명(영혼)들, 피, 몸들, 은금, 진주, 보석… 등이었습니다.
이곳을 지나는 기독도와 신실에게 어떤 사람이 “너희는 무엇을 사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이들은 엄숙히 “우리는 진리를 사겠노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때 저들은 이 두 사람을 업신여기며 때리고 가두었습니다. 신실은 거기에서 심한 핍박을 받다가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이 행동화 할 때 오는 일들입니다. 저들은 진리를 위하여 용감하게 행동할 줄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역사는 이 사실을 밝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과학적 진리를 위하여 죽는 자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복음 진리를 위하여 죽은 자들의 수효는 다 셀 수 없을 정도가 아닌가!
모세는 그가 받은 왕명이 진리인 줄로 믿었습니다. 그 결과 믿음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그것이 애굽의 영화를 거절한 것입니다. 동족과 고난을 함께 하였습니다. 종된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이 고난이지, 출애굽운동이 무슨 고난인가 해방의 길, 자유의 길, 가나안의 길이 왜 고난인가 참 이상한 말처럼 생각되지 않은가
그럼에도 성경은 종된 애굽의 고역에서 벗어나 가나안으로 하나님 섬기러 가는 길은, 또 다른 면에서의 고난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것은 십자가를 짊어지는 새로운 고난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짐(멍에)은 쉽고 가볍다고 하였습니다(마 11:28-30). 그 이유는 감격과 감사의 멍에이기 때문입니다. 그 멍에는 내가 지는 것 같지만, 실상은 예수께서 이미 대신 짊어져 주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짊어지는 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보이지 않는 왕 예수를 믿고, 섬기고, 따르는 특수한 무리들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왕명에 전 인생의 승부를 걸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왕 예수의 왕명을 우리의 기업으로 여기고, 그 왕명을 좇아 행동하는 것을 영예롭게 여기고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 이유는 ‘상 주시는 분을 바라보고’ 살기 때문입니다(히 11:26). 그 왕명에는 영화로운 미래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다음 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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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9. 2

8.
왕명(王命)에 사는 사람들(6)
-다니엘 3장 16-18절-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때에 저들은 바벨론의 압제를 받고 있었습니다(슥 1:15). 유다는 망해 버렸고, 유다의 몇 왕족들과 귀족의 자녀들 중에 혹자들은 바벨론 땅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가 버렸습니다.
주전 6세기경을 살던 히브리 소년 다니엘이나 사드락이나 메삭이나 아벳느고 같은 자들은 그러한 포로인들 중에 손꼽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들은 포로지 바벨론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강한 신앙의 지조를 지킨 결과 하나님께로부터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왕의 녹을 먹는 높은 공직자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저들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 중에 다니엘은 이상(異像)과 몽조(夢兆)를 깨닫는 은혜를 받아 바벨론 제국의 통치자에게 슬기로운 고문 역할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저들에게,
Ⅰ. 왕명(王命)이 시험이 되었습니다(단 3:1-15).
그 왕명(王命)은 ‘금 신상에게 절하라’는 어명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금으로 큰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두라 평지에 높이 세웠습니다. 그리고 전국의 이름 있는 공직자들로 하여금 왕의 신상 낙성식에 참집(參集)하여 그 금 신상 낙성식 때 악기 소리에 맞추어 절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단 3:1-5).
이것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자신의 ① 전쟁 승리를 자축하고 ② 그의 통치 위엄을 높이고 ③ 이로 인하여 자신의 이름을 떨치며 ④ 통일 제국의 군주로서 기반을 튼튼히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이 법령에 따르는 부수 법령이 발표되었습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신분 여하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의 금 신상에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으라는 명령이었습니다(단 3:6).
마침내 왕의 황금 신상 낙성식은 시작되었습니다. 거기에 참석한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우렁찬 악기 소리에 맞추어 느부갓네살이 세운 금 신상에 엎드려 절하였습니다(단 3:7).
이때 바벨론 신하(갈대아 사람) 중에 어떤 자들이 왕께 나아와 그 금 신상에 절하지 않았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참소(讒訴)하고 말았습니다(단 3:8). 저들은 왕께 나아가 “왕이 세워 바벨론 도를 다스리게 한 자 중에 ① 왕을 높이지도 아니하며 ②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③ 왕이 세운 금 신상에 절하지도 아니하였습니다.”라고 고소한 것입니다(단 3:12). 그 고소 앞에 왕은 노하고 분하여 그 앞으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왕 앞에서 뜻밖의 후대를 받았습니다. 왕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이제라도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3:14-15)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왕은 저들에게 “짐짓 그리하였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고의적’으로 그리하였느냐는 뜻입니다. 이것은 저들에게 베푼 왕의 특별한 후대였습니다. 왕이 명한 법도를 왕 스스로가 유예를 하면서 저들에게 관용을 나타내는 태도였습니다.
「이제라도 너희가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왕의 특별한 배려요 후대였습니다. 아마 느부갓네살 왕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평상시의 충성심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기의 신상 앞에 절하지 않고 불충(不忠)할 사람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Ⅱ. 항명하는 사람들(단 3:16-18)
그날 두라 평지, 왕의 황금 신상 낙성식 현장은 예기치 못한 항명(抗命) 파동으로 그 분위기가 대단히 무거워지고 있었습니다. 그 낙성식에 참예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시선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게 되었습니다. 실로 무거운 역사의 한 순간이요 장면이었습니다.
이때 히브리 땅에서 끌려 온 바벨론의 공직자들은 공개적인 항명(抗命)을 선언하고 말았습니다. 저들은 왕의 금 신상 앞에 절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항명(抗命)하였습니다.
그 첫 번째 대답은 계명 표준의 항명(抗命)이었습니다.
본문 3장 16절에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의 이러한 항명(抗命) 속에는, 적어도 아브라함의 자손들인 유대인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결코 섬길 수 없다는 내용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외에 무슨 형상이든지 만들 수 없고, 또 거기에 절할 수 없다는 저 십계명 중 1, 2계명을 절대 준수하는 내용입니다(출 20:3-5).
저들은 지금 느부갓네살 왕보다 더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왕명(王命)을 받고, 그 왕명(王命)을 따라 살고 있는 자들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들의 신앙이요 또한 자존심이었습니다.
그 두 번째 대답은 전능하신 왕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하는 항명(抗命)이었습니다.
본문 3장 17절에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앞서 느부갓네살은 저들 앞에서 어느 신이 너희를 건져내겠느냐고(3:15) 호언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들은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하나님은 극렬히 타는 풀무 뿐 아니고, 왕의 손에서도 능히 자신들을 건져 낼 전능한 구원의 신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저 히브리 청년들의 평소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그 세 번째 대답은 순교적 신앙의 항명(抗命)이었습니다.
본문 3장 18절에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풀무에서 죽을지언정 우리는 금 신상에 절하라고 하는 왕명에 항명(抗命)한다는 대답입니다. 저들은 저렇게 순교적 부활 신앙으로 대답하였습니다. 실로 엄청난 도전이요 항명(抗命)이었습니다. 바벨론 전 제국의 지도자들이 모인 두라 평지, 역사의 현장에 일어난 항명(抗命)사건이었습니다. 항명(抗命)파동이었습니다. 실로 역사를 뒤흔드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Ⅲ. 왕도(王道)를 걷는 사람들(단 3:19-30)
저들은 분명히 말하기를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저들이 섬기는 왕이 있고, 그 왕도를 걷는다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느부갓네살은 분이 가득하고 말았습니다. 낯빛을 변하였습니다. 그의 음성은 풀무를 평소보다 7배나 더 뜨겁게 하라는 진노를 발하고 말았습니다(단 3:19). 군대 중에 용사 몇 사람들은 그 반역하는 공직자들을 「고의(袴衣)와 속옷과 겉옷과 별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들을 불못 속으로 던지고 말았습니다. 그 불길의 강도 때문에 세 청년을 던지던 군인들이 풀무불에 휩싸여 죽고 말았습니다(단 3:20-24). 이는 하나님의 즉결 심판 행사입니다.
마침내 저들은 평소보다 7배나 더 뜨거운 풀무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실로 느부갓네살의 권력은 막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그 장면을 직접 목격하고 있던 느부갓네살 왕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모사들에게 묻기를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고 질문하였습니다. 신하들이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때 왕은 「지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결박된 세 사람이 아닌 ① 결박되지 않은 네 사람을 보았습니다. ② 죽지 않고 불꽃 가운데서 걸어다니고 있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③ 그 네 번째 사람은 신들의 아들 같은 자로 보았습니다(단 3:24-25).
마침내 왕은 친히 그 극렬히 타는 풀무 아구 가까이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고 저들을 불러내었습니다.
저들은 왕명(王命)에 순종하여 불 가운데서 죽지 않고 살아 나오고 말았습니다. 물론 불이 저들의 몸을 해하지 아니하였고, 머리털이 타거나 고의(袴衣) 빛이 변하지도 아니하였고, 불탄 냄새도 없었습니다(3:26-27).
바벨론의 군주 느부갓네살은 그 현장에서 크게 소리쳤습니다.
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② 그 하나님이 그 사자를 보내어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③ 하나님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고 ④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은 구원하셨도다(단 3:28)라고 하였습니다.
왕은 조서를 내렸습니다. 「누구든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설만(褻慢)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터로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단 3:29)라고 하였습니다.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이니라」(단 3:30)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늘의 하나님은 살아 계신 인격적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왕 되심은 그분 스스로가 정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분은 우리를 존재케 하신 창조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그분은 스스로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신 구원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히브리 청년들의 말처럼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되십니다. 우리는 여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분을 왕으로 섬기고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명령을 따라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 히브리 청년들은 저들이 비록 포로지 바벨론에서 그 나라의 녹을 먹고 공직 생활을 하였으나, 저들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었습니다.
저들은 이 세상 군주의 명령이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의 명령일 때 순종하고 복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군주의 명령이 만왕의 왕 되신 하나님의 명을 어길 때는, 단호히 더 높은 하늘의 왕명(王命)을 좇는 거룩한 왕도(王道)를 좇고 말았습니다.
하늘의 왕명(王命)을 좇는 자는 거룩한 왕도(王道)를 걷는 자들입니다. 그 왕도(王道)가 물 속일 수도 있고, 불꽃 속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외로운 길일 수도 있고, 버림을 당하는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 굶주리고, 헐벗고, 목마르고, 괴로운 길일 수도 있습니다. 저 두라 평지의 뜨거운 풀무는 그 양태와 모습을 달리하고 역사상에 어느 곳에든지, 예수 왕명(王命)을 좇아 왕도(王道)를 걸어가는 자들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도 온갖 류의 풀무가 평소보다 7배나 뜨겁습니다. 그 중에 하나님의 백성이 걸어다니고 있습니다. 그 풀무는 권력일 수도 있고, 무신론, 유물론, 진화론, 우상숭배, 온갖 류의 세속주의일 수도 있습니다. 과학지상주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왕도(王道)를 좇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능하신 기적도 일어납니다. 2000년 기독교는 이 기적의 웅변적 증거물이 됩니다. 반면에 왕도(王道)를 좇는 자들에게 이 세상에서 영광스러운 순교까지도 일어납니다.
지금 미국에는 중국계 미국인 목사 한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 미국 정부 관리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을 사양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어떻게 그처럼 좋은 관직의 자리를 거절하고 목사가 되었는가” 라고 질문했을 때 그는 목사가 된 동기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나는 의화단(義和團) 사건이 일어났을 때 중국 내륙 지방에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 마을엔 우상을 섬기는 큰 신당이 있었는데, 하루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마적떼 같은 군인들에게 끌려서 그 산당으로 왔습니다. 그 군인들은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그 우상에게 절하고 신앙을 버리도록 위협했습니다. 우상에게 절하면 살려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군인들을 신자들을 한 줄로 세워 그곳으로 지나가게 하면서 절하도록 위협했습니다.
놀랍게도 그 앞을 지나가는 163명의 크리스천들은 하나같이 우상에게 절하기는커녕, 고개도 끄떡하지 않았습니다. 절하지 않고 그냥 지나오는 크리스천들은 그 옆에 대기하고 있던 군인들의 칼에 목베임을 당했습니다. 그 163명이 모두 그렇게 죽었습니다. 나의 아버지도 그 163명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비록 어렸지만, 그 사건은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분명히 가르쳐 주었습니다.”라고 그가 목사가 된 동기를 알려 주었습니다.
저들은 거룩한 왕도(王道)를 걸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전자전(父傳子傳)하는 왕도(王道)를 걷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경향인 여러분!
지금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늘이 반(半)시 동안 고요한(계 8:1) 잠정적인 평화의 때를 주었습니다. 지금은 순교자를 내는 시대가 아니라, 선교사를 내는 시대입니다. 일하는 시대입니다. 전도하는 시대입니다. 여러분에게 충성의 믿음이 생깁니까 그것이 바로 이적입니다. 여러분에게 감사의 믿음이 생깁니까 그것이 바로 이적입니다. 그것이 바로 평소보다 7배나 뜨거운 풀무불 같은 수고와 고난을 이길 승리와 축복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생애 중 그 최고의 경지를 맞고 있습니다. 세계 선교의 마지막 보루가 될 거룩한 하나님의 선교 기지를 짓고 있습니다.
이 축복의 고난에 동참하여 죽고자 뛰어든 자에게는 죽지 않고, 오히려 그 충성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자(使者), 예수를 만나서 그와 함께 걸어다니고 말 것입니다. 공개적인 역사의 현장에서 그와 그 자손들이 승리의 왕도(王道)를 걷게 될 것입니다.-아멘-(다음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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