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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한 이웃이 되는 길 (눅 10:3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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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신문에 서울의 모병원 원장이 제왕절개 수술을 받아야 할 산모를수술비가 없다는 이유로 방치해 두었다가 결국 산모와 태아가 죽어서 병원장이 구속되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나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입맛이 씁쓸해 졌습니다.
이유는 의사의 히포크라테스 박애정신의 결여라기 보다는 병원의 간판명과연관된 씁쓸함이었습니다. 그 병원간판이 예수 병원 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원장이셨다면 두 생명이 번연히 죽을 줄 알면서 수술비가 없다고그대로 방치해 두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적어도 그 병원의 이름을 예수님이름으로 사용하려면 예수님의 이웃사랑 정신을 어느 정도 실천할 각오와믿음이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장사속으로만 사용하려던 그 원장이 밉고 야속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서기관과 율법사들의 질문에예수님께서 대답하신 한 사건의 예화입니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강도를 만나 지녔던 재물은 강탈을 당하고몸은 얻어맏아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때에 지나가는 행인이 있었다. 그 사람은 당시의 지도듭의 인사였던 서기관과 제사장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안전을 위하여 피해갔다. 그 때에 여행하는 사마리아인이 그 길을 지나며강도 만난자의 호소를 들었다. 그는 외면치 않고 강도 만난자를 도와 주었다. 매맞은 상처를 싸매어 주고 자기 약대에 싣고 주막집으로 데려가 치료비를 부담하며 주인에게 치료를 부탁하였다. 누가 이 강도 만난자의 이웃이되겠는가 하는 얘기였습니다.
이 세상은 홀로 사는 세상이 아니요, 함께 사는 고가존의 세상이기 때문에함께 살아가는 이웃을 사랑하는 예수님의 정신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선한 이웃으로 등장된 사마리아인을 통하여 우리가 배워야 할 진리는 무엇일까요
첫째, 사랑의 관심입니다.
강도를 만나 구원의 손길이 임하지 않으면 혼자는 도저히 살아날 수 없는죽어가는 사람을 당시의 지도급의 인사들은 자신의 안전을위하여 외면하고말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천민사회에서 냉대받던 사마리아인의 죽어가는 당도 만난자를 향하여 사랑의 관심을 가졌습니다. 선한 이웃이 되는 길은 자기위주와 자기중심의 정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마치 병아리가 출생을 위하여 지금까지 보호의 벽인 껍질을 깨뜨리고 나와야 하듯이 아집과 이기주의와 자아중심의 생활이 깨어져 나가고 이웃을 향한 사랑의 관심이 봄이 되면 싹이 트듯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통하여 내 안에서 싹터 나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강도 만난 이웃을 향하여 남의 일이기 때문에 너무나 무관심하지 않았는지 자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두번째, 사랑의 봉사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사랑의 관심으로 끝나지 않고 사랑의 봉사로 발전을 하였습니다. 자신이 영행중인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의 일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강도 만난자를 구하기 위하여 시간을 내어 봉사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여행중에 사용될 음료수와 의약품인 포도주와 기름으로 상처를싸매주고 그를 주막집까지 자기의 약대에 태우고 갔습니다. 봉사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봉사란 관심만 가지고도 되지 않고 한계단 올라서서 수고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랑의 봉사가 있는 교회라고 바울 사도는 칭찬을 하였습니다.(살전1:2-8) 우리 교회도 각기관에서 주어진 직무를 쫓아 열심히 봉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하여 사랑의 봉사를 배우게 되었고실천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봉사하는 일을 외면하지 마시기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봉사의 일을 외면하면 우리의 신앙은 이기적인 신앙으로 전락하게 되고 말것입니다.
타고르는 봉사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질을 사랑하면서도 물질에얽매이지 않고 그 물건에 아름다움에 입히는 것은 위대한 봉사적 행위이기때문이다. 모든 대상에 사랑의 옷을 입힐 수 있는 마음을 가지라 이것이 진실한 생활이며 이 세상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생활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름답게 사랑하는 생활이 곧 봉사의 생활이요, 이 모든 것에게 사랑으로옷을 입힐때 곧 진실한 생활이 이룩된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삶은 서로 돕고 사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봉사할 능력이 남아 있다면 슬픔도 고통도 불행도 비탄도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야 할이유가 될 수 없다고 어떤분은 말했습니다.
세번째, 사랑의 희생입니다.
봉사에서 한 발자국 더욱 깊어진 것이 희생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죽어가는 당도 만난자를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위태로움을 생각지 않고 자신의 일정, 자신의 재물, 자신의 안전을 희생하였습니다.
지난 여름, 성지를 방문했을때 예루살렘에서 사해로 가는 길에 여리고를통과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그 주막집에서 (당시의 건물은아니지만) 사진도 찍고 선한 사마리아인을 생각하면서 같이 동행한 일행이함께 기도를 드린적이 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는 말씀을 생각합니다. 바로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 처럼 하늘로 부터 인간을 향하여찾아 오셔서 원수 악한 마귀 강도로 부터 갈기 갈기 찢긴 인생을 구원하여주셨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하여 아프리카로 갔을때를 이렇게 회고 했습니다. 나는 처음에 아프리카로 갈때 세가지 희생을 각오하고 있다.
첫째, 오르간 예술을 체념하는 것,
둘째, 애착 깊은 대학교수의 활동을 포기하는 것,
셋째, 경제적 독립을 상실하고 앞으로의 생계를 친구들의 원조에 의하는것, 그런데 이것을 희생했을때 하나님은 나를 돌보시어 파리 바하협회에서페달달린 열재지대 피아노와 열대기후에 적을할 건강을 주셨습니다. 대학의강사로서의 활동은 체념했지만 많은 강단에서 설교를 함으로 충분한 보상을받았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어떻게 선한 이웃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첫째로,상조회를 발족하여 상부상조의 정신을 키워 가려고 합니다.
둘째로, 장학회를 구성하여 경제적으로 조금 나은 분들이 어려운 가정의자녀들을 도우려고 합니다.
셋째로, 교회의 부채를 청산하게 되면 교회 예산을 대폭 사회를 향한 선한이웃으로서의 교회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부분에 편성하려고 합니다.
친애하는 성도 여러분!
이 사회는 선한 이웃을 찾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모든 성도들이 선한 이웃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때 사회는 보다 밝고 명랑한 사회, 즉복 받은 사회가 될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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