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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로 살게 하리라 (겔 37: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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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로 절망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은 에스겔을 불러서 환상 중에 해골골짜기로 안내하셨습니다. 수 백년 동안 공동묘지로 사용하였던 곳으로 살은 이미 다 썩었고 뼈들만 앙상하게 남아서 햇볕에 쬐이고 비바람이 스쳐서 백골이 되어 뒹굴고 있는 골짜기입니다. 이런 곳에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데리고 가서 뼈들에게 “대언 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고 했을 때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흩어졌던 마른 뼈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서로 연결됩니다. 뼈들 곁에는 살점이 붙고 힘줄이 생깁니다. 가죽이 덮어집니다. 그리고 그 속에 생명이 깃들기 시작하면서 마치 군대로 변하여 부활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장면을 통해 우리들에게 깊은 교훈을 던져주고 있는 것입니다.
해골골짜기에 이 부활운동이 에스겔 선지자에게 보여주셨던 환상인 동시에 오늘날에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본문 14절에 나와 있는 말씀을 의지하여 “ 너희로 살게 하리라”라는 제목을 가지고 말씀에 은혜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소망이 없는 곳에 찾아오셨습니다.(11절)1) 본문설명
해골골짜기가 어떤 곳입니까 또 이 해골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본문말씀 11절에 보면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 되었다 하느니라” 하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음의 골짜기에 있는 마른 뼈들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은 바벨론 제국의 군대에게 짓밟혔습니다. 성과 성전은 무너졌고 많은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어떤 희망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2) 성경적 연결
엡2:1절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하셨습니다. 바울은 본 절에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과거의 삶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의 과거의 삶은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죽었던”은 신체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이며 도덕적으로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명을 수여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3)적용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기도 희망도 없이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민족을 택하셨기 때문에 그 민족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죽음의 골짜기 바벨론 포로의 생활에서 건지시고 새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소망 없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시는 구원자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소망이 끊어진 우리를 예수로 말미암아 소망을 허락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골짜기에 널려 있는 뼈들과 같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소망을 얻었으니 은혜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명령하셨습니다.(12절)1)본문설명
본문12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는 대언 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라보면 하나님께서는 백성을 깨우치고 나라의 방향을 제시할 때 직접 하시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할 선지자를 뽑아서 그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2)성경적 연결
기독교를 가리켜 말씀의 종교라고 합니다. 요한복음1:1절 이하에 이와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니라” 예수님은 ‘빛이라, 생명이라, 말씀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말씀이 이 땅에 임할 때 세상이 빛이 있었고 세상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3)적용
예수님에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는 책임이 오늘날 저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 있든지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고 무슨 말씀을 하시고 어떤 행동을 하셨을까 을 항상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입니다. 이와 같은 말씀의 능력이 있을 때 새 생명 운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갈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13-14절)1)본문 설명
13-14절에 보면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내 신을 너희에게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생명이 있었지만 그대로 머물러 있는 다면 아무런 힘도 값어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말씀에 해골골짜기에서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얻은 하나님의 생기를 안고 교회 밖으로 나가서 그리스도인 됨을 나타내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기운동이 일어나니 뼈와 뼈들이 서로 연결되기 시작했고 새 생명을 얻어 무덤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2)성경적 연결
요한복음1:4절에 “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했고 딤후1; 10절에서는“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들어 내신지라” 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생명”은 육체의 생명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을 의미하고 있으며 영적인 생명은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교제가 이루어지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영원한 은혜의 뜻을 이루신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사망을 폐하셨습니다. 둘째는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들어 내셨습니다.
3)적용
지금 우리 사회는 심각한 분열과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기성세대와 자라나는 세대간의 갈등,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계층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해야 할 일은 갈등과 분열로 얼룩진 이 사회를 치유하는 일입니다. 나누어진 상태를 하나 되게 하고, 서로 일치하고 연결하고 조화를 이루고 화해를 추구해 가는 그러한 치유자의 역할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본문 14절에 보면“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개인생활이나 가정, 직장이나 사업은 물론이고 한 나라의 역사까지도 사람의 생각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력을 주실 때 인격이 바로 설 수 있고, 가정이 행복해 질 수 있으며, 사회가 올바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학우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살아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능력이나 지혜나 힘으로는 우리의 인생을 이끌어 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슥4:6절)에“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하셨습니다. 성령의 생기가 저와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여 수많은 영혼들을 살릴 수 있는 주님의 도구가 되어지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성 경:고린도전서10:31-33
성도의 참된 생활
설교자:민만식
서론
오늘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내에서 생긴 우상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하여 성도들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언급하는 동시에 그로 인하여 세상 이방인들에게 비춰지는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른 모습에 대하여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고린도는 상업과 물질적인 번영을 누린 항구도시로써 잡다한 인종들이 많이 모여 살았습니다. 특별히 그곳에는 적어도 12개 이상의 신전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큰 신전은 사랑의 여신 아데미 신전이었습니다. 이 신전에는 여사제들이 무려 1000명이나 있었고 종교적인 한 절차로 음탕한 행위까지 행하였다고 합니다. 고대 고린도에서는 국가적인 축제나 개인적인 다양한 축하 행사가 신전(temple)을 중심으로 거행되었습니다. 그러한 행사 때에는 고기를 비롯해서 많은 음식을 준비하여 우상에게 바친 다음 참석한 사람들이 우상 숭배 의식의 일부분으로 그것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1세기 시장에서 파는 고기 중 얼마는 이 우상의 제물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성도들로 하여금 시장의 고기는 아무 말 하지말고 먹되 다만 이교 신전에 가서 제물을 먹는 것만큼은 우상 숭배라는 이유로 절대 금하였습니다.
고전10:23절로 그 이하에 있는 말씀에서 바울은 25절에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말하면서 26절에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어느 집에 초대를 받았을 때 초대받은 자 중에 어떤 불신자가 “이것은 제물이라”고 말하면 그때에는 그들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는 무엇보다도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이기주의가 팽배한 시대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돈으로 해결하려고 몸부림치는 세대요, 또한 나 외에는 관심이 없는 세대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아픔을 감싸주고 이해해주기 보다는 오히려 서로를 넘어지게 하여 자신이 영광을 받는 세대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 사람들만의 모습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이는 모습입니다. 참다운 희생을 보여주어 그들로 하여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 만큼은 다르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사실 이러한 소리는커녕 시대 속에서 오히려 더욱 많은 문제들을 일으키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성도가 성도로써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데서 온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본문 말씀은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대 속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명확하게 가르쳐 주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생활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1.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31절).1) 본문설명: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절대적인 자유를 음식에 두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에 두었습니다.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기본원칙을 나 자신의 유익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에 그 목적을 두었습니다. 여기에서 ‘영광(doxa)’ 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 안에서 무려 145번에 걸쳐서 언급하고 있는데, 특별히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영광뿐만 아니라 영원한 축복으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은 곧 내세의 영원한 축복이라는 것을 그의 삶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의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이 땅위에 지으신 목적이 있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일 것입니다.
2) 성경적 연결
구약성경 이사야서43:1-7절에 보면, 우상숭배로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 야곱이라 부르시며, 과거 애굽에서 종 되었던 바 가운데서 구원하여 주신 이가 바로 하나님이시며 그가 지명하여 불러 내 것이라 부르시고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할 뿐만 아니라 무릇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지었고 만들었다고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 사도 역시 에베소서1:6-14절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이유가 그리스도안에서 우리가 구속함을 입었으며 그 결과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 적용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1문에 보면,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값없이 구속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주님을 위하여 산다고는 말하지만 실상 그 삶을 볼 때면 주님과는 완전히 멀리 떠나 사는 것을 많이 봅니다. 말과 행함이 다른 모습들!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모습들! 주를 위해 살아간다고는 고백하지만 사실은 나의 영광만을 위해 교회에도 나오고 또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또는 사회공동체 안에서 비춰지는 우리들의 모습들은 과연 어디에 서 있는지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질문해 보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2. 성도는 거치는 자의 생활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32절).1) 본문설명:
본문 32절을 보면,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23절 이하에서 불신자의 집에 초대를 받아 음식을 먹으러 갈 경우 앞에 차려 놓은 음식에 대하여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음식이 우상의 제물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초대받은 자 중에 어떤 불신자가 “이것이 제물이라”고 말하면 그들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을 진정으로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런 행동을 얼마든지 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독교가 유대교의 한 분파라고 생각하였고 또한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처럼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는 그렇게 말한 자가 그리스도인들은 우상 숭배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으로 인정할까봐 바울은 그 음식을 먹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유익보다는 주위에는 있는 유대인이나 헬라(이방인)인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에 더욱 더 깊은 관심과 애정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고린도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일 부분은 유대인 디아스포라, 이교도인들로서 회심한 이방인들, 그리고 부유한 자들과 가난한 하층민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에서 적어도 성도라면 서로가 서로에게 거치는 자가 되어서는 않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성경적 연결
마가복음9:33-4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쌔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 라고 변론하는 것을 보시고 열 두 제자들을 불러 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서로를 섬기는 자가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큰 자’ 라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성도들의 삶과 연결짓어 제자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42절에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3) 적용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의 유익이나 이익만을 위해 사는 삶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을 통해 남에게 유익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첫째는 남에게 유익도 손해도 주지 않는 사람, 두 번째는 거미와 같이 남에게 손해만 주는 사람, 세 번째는 꿀벌과 같이 남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가운데 어디에 속해 있는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나에게 유익이 있는 일이라고 해서 무조건 다 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이것이 나에게, 이웃에게 또는 하나님의 교회에 진정으로 유익이 되는 일인가를 질문하면서 심사숙고하게 행동해야 될 것입니다.

3. 성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33절).1) 본문설명: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삶과 자신의 행동을 본보기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따라 살아갈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33절에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이러한 말을 하기에 앞서서 바울 자신이 스스로 그러한 생활의 원리를 따랐다는 것을 보여 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제2차 전도 여행 중에 A.D 50/51년 가을에 고린도에 도착하여 1년6개월 동안 하나님의 말씀 사역을 감당하면서 동역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장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복음을 증거하였고, 뿐만 아니라 방탕과 음란이 만연한 도시에서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을 전하는데 자신의 삶을 받쳤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에 있어서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살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목표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이 세상 가운데 전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삶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을 본받는 삶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그 삶 그대로의 모습을 살려고 몸부림쳤던 것입니다.
2) 성경적 연결
마태복음16:2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바울 사도는 사실 자기 자신이 철저하게 주님으로부터 택정함을 받은 사도요 제자라고 믿었습니다. 모든 바울 서신의 맨 첫 글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 나 바울” 이라는 문구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예수의 종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누구보다도 더욱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빌립보서2:3-5절을 보면, 그가 빌립보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 한번 찾아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3) 적용
현시대 교회와 모든 성도들은 바울과 같은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그가 보여주었던 삶의 모든 모습들 즉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이웃과 민족과 국가를 위해 아낌없이 바쳤던 그 모습을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어느 누구만 특정적으로 선정하여 제자로 세워 두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구주로 믿고 따르는 모든 자가 사실은 주님의 제자인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가져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주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의 그 희생적이고 자기를 낮추시고 이 세상 가운데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섬기신 그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갖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이 시간부터 철저하게 나를 포기하고 주님의 모습 그대로 따라 살려고 기도하면서 성령님 안에서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고린도 교회안에 있었던 문제들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특히 사도 바울이 보여 주었던 그 가르침을 우리는 잘 기억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과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몸을 버려서까지도 사랑해 주신 은혜 그리고 그로 인하여 우리가 그 은혜에 감사하여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본문을 통해 잘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삶의 목표와 삶의 방향이 올바르게 설정되길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현시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없는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성도들과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 생활은 잘 한다고 하지만 세상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더 부족하고 더 못한 인격을 가진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개인 이기주의로 물든 세상 속에서 나만 아는 현시대의 사람들!
남이 죽든 살든 관심조차 두지 않는 많은 사람들!
우리 가족만! 우리 교회만! 우리 교단만! 우리 학교만! 축복해 달라고 기도하는 우리 모습들을 현실적인 모습속에서 우리는 철저하게 가슴 아파하며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Coram Deo)라는 고백 속에서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는 참된 교회와 참된 성도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 이 순간에도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본문:롬 4:1-25
제목:믿음으로 이루어진 약속
설교자:신창남
서론
죄 아래 있는 인생들이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있는 길를 찾아내는 것은 비록 수많은 사람들이 의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지라도 누구에게나 시급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죄에는 형벌이 따르며 의의 통로를 찾지 못하면 인류와 개인 모두에게 어떤 희망도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의에 통로에 대하여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길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본론

1. 개인적으로 인정받은 아브라함의 믿음1) 본문 설명
4장 맨 처음에 나오는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라는 질문이 유대인들의 선입관에 대한 의문점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진술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담대하게 선언합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면 자랑할 것이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치 않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자랑거리가 그 자신의 업적을 말합니다. 이 점을 입증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성경을 인용합니다. 그는 아브라함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성경구절(4:3;창15:16)과 다윗과 시 가운데 한 편(4:7-8; 시32:1-2)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인용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만일 그가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면, 그것은 그에게 당연히 지불되어야할 몫의 지불이라는 성격을 지녔을 터이고 결코 은혜의 선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진리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인간의 죄에 대한 경험과 인간과 여호와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경험을 다루는 다윗의 저 위대한 시 서론 부분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인용문에서 바울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싶어한 것은 어떤 경우든 축복은 하나님의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요, 인간의 행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임이 분명합니다. 믿음은 행위로 입증된다는 점을 결코 아닙니다. 이 말은 인간의 행위가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지 못하며, 복된길로 들어서는 관문도 아님을 강조할 뿐입니다. 이 시편 인용문에는 믿음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지만, 축복이 인간의 공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하나님의 행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할례가 차지하는 위치는 어디며 그 가치는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이 시편 인용문과 관련하여, 시편 기자가 언급한 축복이 할례자에게만 해당된 것인지 아니면 무할례자에게까지도 해당된 것인지에 대해 유대인들이 묻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이 질문의 요지는 유대인들이 이 시편을 유대인의 시편으로 여김으로써 할례를 표로 하여 세운 언약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를 적용시켜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물음에 답하면서 아브라함이 할례 의식을 행하기 전에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게다가 할례 의식이란 이미 수립된 일에 대한 외적인 표에 불과하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할례와 관련해 볼 때 믿음이 행위로 말미암은 의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행위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결과임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끝으로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육의 할례를 받은 사람들의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할례를 받지 않았아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아버지라고 선언함으로써 이 명제를 완벽하게 마무리짓습니다. 아마 유대인들은 이런 진술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2) 성경적 연결
사람이 의롭게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음뿐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단 한 사람도 하나님에 의에 도달할 수 없으며 절망을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의로 인정받게 됩니다. 고후5:21을 보면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 적용
교회가 성도들은 신학적인 이론이나 성경적 교리보다는 믿음에 우선 순위를 두고 신앙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없는 지식, 믿음없는 교리는 하나님에 편에서는 아무런 가치나 의미도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2.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1) 본문 설명
사도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맺은 인격적인 관계에 대한 문제를 취급한 다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통해서 새 이스라엘을 부르신다는 사실을 고찰합니다. 즉 이 세상의 상속자가 되라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위대한 약속은 보다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이것은 아브라함의 순종을 불러일으키고 민족적 활력의 중심이 되었던 메시아 소망을 언급한 말입니다.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것이 아니라 앞에서 고찰했던 바와 같이 믿음의 의를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주제를 다루면서 메시아 소망이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서 불타올랐으며 적어도 율법이 주어지기 전 사백 년 동안 아브라함의 자손들로 구성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활력을 복돋워주는 영원한 자극제가 되었다고 언급합니다. 물론 이 소망은 믿음에 대한 은혜의 약속입니다. 만일 이러한 구원 약속이 율법 준수에 의해 좌우되었다면 이 약속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죄를 드러내며 드러난 죄는 진노를 불러일으키고 더 나아가 조건들을 위반 할 경우 약속은 취소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주님을 따르는 믿음에 대한 보상입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모든 자녀들에게 곧 율법에 속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믿음에 속한 사람들에게도 주어진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은 아브라함을 육신의 조상으로 삼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행동의 결과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가장 강력하게 입증되었습니다.
2) 성경적 연결
하나님께서는 무자한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리라’고 말씀하시면서 그에게 자녀 주실 것을 약속하신바 있습니다(창15:4,5). 그러나 이러한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는 오래도록 자녀를 갖지 못하였습니다(창16:16
17:24,25). 아브라함이 100세 사라가 90세가 되어서야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리라’(창17:16,17)는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습니다. 이때는 이미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자식을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때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미 생식능력이 없어진 자신과 신체적 조건을 알면서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음을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4:19-21). 이러한 사실은 사라가 이삭을 잉태하기 전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그 자신과 집안 식구의 할례를 기꺼이 행한 점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창17:23-17).
3) 적용
우리는 상식과 이성과 상황과 현실을 초월하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확연하게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아브라함과 같이 절망적인 현실에 처한다 할지라도 상식과 이성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뜻이 이루어질 것을 믿어야합니다(시40:1;잠20:22;마6:10;행1:4).

3. 아브라함:약속의 성취1) 본문 설명
인간적으로 생각해서 민족이 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 때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가운데 바라고 믿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불리한 상황들에도 불구하고 믿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들만 보아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한 아들을 보내시어 그를 통해 민족을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으므로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아무런 희망이 없고 또 자연 법칙에 따르더라도 바라던 결과가 나올 것 같지 않을 때 그는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일단 하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신다는 확고부동한 신념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은 이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그의 아들을 이 땅으로 파송하신 것입니다.
2) 성경적 연결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의 죽은 태에서 이삭을 낳게 하실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였습니다(히11:17-19).
3) 적용
오늘날의 성도들도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롬8:34)를 믿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행13:39).
결론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신앙 중심으로 살아가기에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본문:사도행전 2:43-47
제목: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교회!(행2:43-47)
설교자:최장엽

Ⅰ. 서론
구원의 역사를 이룬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6:47)라고 구원받은 사람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그 구원에 대한 감격과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견딜 수 없는 전도의 열정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아낌없이 드립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 중에는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그렇게 힘들고 결실조차 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지 매우 궁금해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콩나물에 물을 줄 때, 준 물이 다 빠져나갑니다. 그렇다고 물을 주지 않는다면 그 콩나물은 곧 말라죽고 말 것입니다. 비록 준 물이 다 흘러 버린다해도 우리는 또다시 물을 줘야 합니다. 곧 그 콩나물이 잘 자라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전도는 콩나물의 물과 같습니다. 비록 그 물이 다 흘러 버리는 것처럼 헛되이 보이지만 콩나물이 잘 자라있는 것과 같이 그 속에서 복음은 생명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복음의 자생력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말씀을 통하여 충고와 권면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초대교회의 모습이 분명하고도 의미있게 펼쳐져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회의와 의구심을 떨쳐버릴 신약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강림의 영향이 초대교회에서 어떻게 펼쳐졌으며 성도에게 어떠한 삶의 모습으로 나타났는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모습을 닮아 감으로 구원사역에 일익을 담당하는 교회를 이루고자 합니다.
Ⅱ. 본 론

1. ‘초대교회에는 구제하는 헌신적 사랑이 있었습니다’(행2:44, 45). 1) 본문설명:
본문 44절에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들 상호간에 이루어진 영적인 일치는 서로 필요한 물건을 공유하는 생활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모든 재산을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공동의 유익을 위하여 내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이 없이 모든 물건을 공유 할 수 있었을까요
다음 절 45절을 보면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재산은 토지와 같은 부동산을 말하며 소유는 일반적인 유동자산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재산과 소유’는 성도의 전재산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성도는 자신들의 전재산을 팔아서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구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헌신적인 사랑없이 이러한 일이 가능할 까요 그러므로 이 일은 자발적이고도 순수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결코 억지나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2) 성경적 연결:
이러한 구제가 성경에는 환난을 당한 자(딤전5:10), 빈궁한 자(눅18:22; 엡4:28), 주린 자(사58:7), 혹은 옷과 먹을 것이 없는 자(눅3:11), 쓸 것을 예비하지 못한 자(느8:10)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제할 때는 진정한 마음으로 할 것(눅11:41)과 아낌없이 할 것(눅12:33; 신15:10), 사랑으로 할 것(고전13:3)과 기쁨으로 할 것(고후9:7)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을 행한 모범적인 인물로 욥바의 여제자인 다비다(행9:36)와 가이사랴의 백부장 고넬료(행10:1-6)를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선행과 구제를 많이 하였다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행9:36; 10:2). 그들은 이웃을 헌신적으로 돌보고 구제의 손길을 아끼지 않았던 진정한 사랑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새생명을 얻는 놀라운 축복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간의 헌신적 사랑은 ‘변화된 생활의 증거’(요13:35, 골1:4-8, 살전1:3, 딤후1:7)이며, ‘성령의 열매’(갈5:22)요, 예수님의 제자됨 증거(요13:34, 35)이며, 신자의 추구해야 할 최고의 덕목(고전13:1-13, 16:14, 요15:12)이라는 것입니다.
3) 적 용: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증거되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이라 할지라도 교우와 이웃을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갖고 계십니까 이것은 헌신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형식과 가식으로나, 이기심과 탐욕으로는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나를 버리고 약한 자와 가난한 자, 부족한 자를 진정으로 포옹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이며 초대교회의 성도간의 이루어졌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제는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된 초대교회의 모습을 우리는 좇아 행해야 합니다. 또한 헌신적 사랑으로 이웃간에 교우간에 돈독한 관계를 형성해야 합니다. 과욕과 이기심을 이제는 버리고 무너지는 신뢰와 사라지는 희생정신을 다시 회복시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추구해야할 최고의 덕목이요, 예수님의 제자됨의 증거인 사랑을 교회 안에서 이루어 주님의 구원역사에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헌신적 사랑이 있었던 초대교회는 또한 어떠했습니까

2. ‘초대교회의 성도는 한마음으로 모여 교제를 나누었습니다’(행2:46).1) 본문설명:
본문에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한마음으로 신앙적 모임에 부담이나 거리낌이 없이 자발적으로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반절에는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회당이나 성전에서 뿐만 아니라 성도간의 각 가정에 모여 교제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본 구절의 ‘집에서’의 헬라어 원문은 ‘kata oikon’으로 의미를 분석하면 ‘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넓은 공간이 있는 집을 택해 돌아가면서 기쁜 마음으로 성찬과 애찬의 모임을 가졌던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초대교회 교인들의 신앙행위와 교제의 뜨거운 열정은 교회와 가정 구석구석에까지 미쳤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2) 성경적 연결:
이러한 교제의 대상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인과 더불어(요일1:3; 고전1:9)나누라고 하였습니다. 요한 일서1장 7절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의 자녀로 자녀들간의 교제는 올바른 행동이며 성경이 권하는 복된 일입니다. 교제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케도냐 교회들은 물질(고후8:4)을 나누었습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교제와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고난가운데 교제(빌3:10; 단3:16-30)가 있습니다. 또한 복음사역을 위해서도 교제(갈2:9; 빌1:5; 엡3:9)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교제는 사랑과 겸손(벧전3:8, 10, 11)입니다. 바로 이러한 아름다운 교제를 초대교회는 나누었습니다.
3) 적 용:
오늘날 세상은 너무도 바쁩니다. 세상의 혼잡함이 우리의 정신을 혼탁하게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찾는 발걸음을 더디게 합니다. 세상에서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진정한 삶을 영위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듭니다. 교회내의 교제와 모임을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혹은 성도간 특별한 사유없이 모이는 교제를 무슨 전제조건이 있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초대교회에서처럼 날마다 교제의 시간을 갖는 다는 것은 오늘날 상상할 수 없는 기현상으로 비쳐 지고 있습니다. 이제 초대교회의 정신으로 다시금 복귀해야 합니다. 위로와 도움이 풍성했던 옛 교회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을 재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급진전된 과학문명으로 사람간의 마주하는 것의 가치를 희석시킬 것이 아닙니다. 헨드폰과 컴퓨터통신 등과 같은 기계문명이 교인간의 만남을 통제하는 한 요인으로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만나지 않고 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10장 25절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성전이든 가정이든 어느 곳에서든 모여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어야합니다. 구제와 믿음, 복음사역을 위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은 하나되는 사귐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또한 초대교회는 교제가운데 무엇이 있었습니까

3. ‘초대교회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찬양이 있었습니다’(행2:47a).1)본문해설:
본문 47절에 ‘하나님을 찬미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초대교회 성도는 성령의 선물을 통하여 최고의 축복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찬양을 드렸습니다. 찬양은 가식과 억지에서는 나올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찬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는 온전한 하나님 중심적 신앙 안에 거하고 있었음을 확인해 주는 것입니다.
2) 성경적 연결:
초대교회에 있었던 찬양에 대하여 성경은 그 대상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시9:11). 수금과 비파로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합니다(시33:2). 더 나아가 ‘모든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라고 시편기자는 호소하고 있습니다(시67:3).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13장15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찬양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찬양을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하다고 하였습니다(계5:12). 찬양은 하나님의 능력(시21:13)과 기사(시89:5)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와 공의(시101:1)를 높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찬양의 진리를 초대교회 성도는 성령을 통하여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을 찬미했던 것입니다.
3) 적 용: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입술의 열매인 찬양을 하나님께 드립시다.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찬양합시다. 초대교회 성도가 오순절 성령체험 후 예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날마다 찬양하였듯이 여러분도 찬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삶이 아무리 우리를 곤고케 하거나 황무케 할지언정 여호와의 능력과 기사, 인자와 공의를 찬양합시다. 그 때 우리의 메마른 삶은 성령의 단비로 회복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여 찬미하는 초대교회 성도를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곳에 넘쳤던 찬양이 오늘날 우리 교회에도 충만하길 원합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은혜와 축복이 이 시간 우리에게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는 여호와를 소리높여 찬양합시다. 찬양이 있는 곳에 주님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할렐루야!
찬양하는 초대교회를 바라보고 그 당시의 사람들은 어떠한 행동을 했습니까 그들을 경멸했습니까 아닙니다.

4. ‘초대교회 성도는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47b).1) 본문설명:
초대교회는 온 백성으로부터 칭송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들의 삶이 타인들에게 아름답게 비쳐졌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삶은 그들이 형식적으로 만들어 내거나 잘 보이려고 노력한 결과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 행했고 성령의 받은 바 은혜에 따라 서로 위하며 사랑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삶의 열매입니다. 이웃에게 혐오감을 심어준 것이 아니라 관심과 호기심을 자아내게 했습니다. 즉 아름다운 삶을 보여줌으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칭송을 받았던 것입니다.
2) 성경적 연결:
이처럼 우리 주변에 아름다운 덕을 나타내는 것은 결과적으로 이웃에 대한 전도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16절에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에베소서 5장 8절과 9절에 바울은 믿는 자에게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삶의 열매를 이룬다면 이웃과 형제에게 관심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착한 행실로 인하여 아버지는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삶을 통하여 아버지께 영광을 올리는 것은 그리스도 인들의 즐거움이 되어야 합니다.
3) 적 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처럼 이웃과 형제에게 칭찬받는 사람이 되고 있습니까 빛의 자녀로 어두운 세상을 비추고 계십니까 이 대답에 ‘예’라고 대답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사람들로부터 격리되고 맙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는 모습을 갖추어 나갈 때 비로소 세상의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사람들로부터 비난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부패한 곳에 빛을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는 정치적 논쟁으로 분열을 일으키거나 성도간에 시기와 이해타산으로 등을 돌리는 기현상을 연출하고 있기에 비난의 대상이 되고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바꿔야 합니다. 나 중심의 삶의 방식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말씀과 성령에 따라 사는 삶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이웃과 형제에게서 칭송받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구원의 역사가 우리를 통해 주님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Ⅲ. 결 론 .
오늘 우리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초대교회의 성도의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교회는 과연 초대교회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그저 주일마다 피동적으로 성전에 앉았다 가는 일회용 신자들로 채워져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모습으로는 구원의 역사를 이룰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좇을 때, 우리 교회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초대교회처럼 구제하는 헌신적 사랑을 성도간에 나누어야 합니다. 둘째, 초대교회처럼 한마음으로 모여 성도간에 교제하기를 즐거워 해야합니다. 셋째, 초대교회처럼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날마다 찬양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초대교회처럼 많은 백성들로부터 칭송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감동할 것입니다. 그 순간 주님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실 것입니다(47c).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이와 같이 우리도 초대교회처럼 행함으로 날마다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교회를 만들어 갑시다!
구원을 이루는 교회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살전 5:16-18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설교자:정택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를 원합니다.
시대가 악해져 전쟁이 일어나거나 아니면 정치가 혼란스럽거나 경제가 침체될 때에 환란이 다가오는데 이러한 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가 생각을 많이하게 됩니다.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못알아서 가산을 탕진하거나 직장에 사표를 내거나 심지어는 자살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불신자가 이렇다면 이해가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되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이러한 일을 당한 것은 어려운 환경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을 하지 못한데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사회가 혼란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해주는 것은 오직 성경 뿐 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통해서 만이 혼란한 시대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는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누이 인 데살로니가의 이름을 따서 지은 도시 입니다.
바울은 2차 전도 여행중에 이 도시에 교회를 세웠는데 그 교회가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였습니다.
그 당시 데살로니가 도시에는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살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잘못된 종말사상과 도덕적 타락이 나타나서 매우 혼란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종말이 가까워 졌다고 열심히 일하지도 않았고, 음행과 방탕에 빠져가고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시대가 악해지고, 거짓 교리가 나타나자 혼돈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보고 받은 사도 바울은 편지를 써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잘못된 생활을 바로 잡았는데 그것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을 통하여 사회가 혼란하여 환란을 당할 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본론>
첫째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1.본문설명: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고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출교를 당하기도 했으며, 직장에 취직도 돼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근심과 걱정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말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의 원어적 의미, 곧 헬라적 의미는 ‘판토테 카이레테(παντοτε χαιρετε)’입니다.
이 말은 원하는 일이 성취되었을 때 ‘기뻐하는 것’도 되지만, 더욱 근본적인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감정을 통해서’가 아닌 그것은 성령을 통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은 성령을 통하여 오는 것이기에 시대가 악해도 환경이 어려워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가식적인 기쁨이 아닙니다.

2.성경적연결:
바울은 빌 4장 4절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할수 있었던 것은 그가 늘 성령을 통한 기쁘고 즐거운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이 세상의 괘락적인 기쁨보다 성령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더 소중함을 증거해주는 말씀입니다.

3. 적용: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환란이 닥쳐올 때에 기쁨을 얻으며 감당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비통하게 좌절감에 빠져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환란이 닥쳐올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향하신 뜻은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을 통한 기쁨으로 세상의 환란이 이 기쁨을 빼앗아 가지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을 소망하면서 사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1.본문 설명:
항상 기뻐하는 다음에 해야할 일은 ‘쉬지말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본문 17절 말씀에 하나님은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뜻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아디알프레이프토스 프로슈케스테( διαλιπτο προσευχεστε)로 24시간 무릎 끊고 입술을 움직여 기도하는 뜻이 아니라, 매일 매순간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의미로 ‘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핍박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자 기도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까
그것은 기도를 쉬면 사단의 공격을 받아서 실족하기 때문입니다

2. 성경적연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잠을 잤습니다. 그러자 사단이 베드로를 공격하여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이와같이 기도를 쉬게 되면 예수님을 부인하고 시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시험할 때 이를 물리칠 있었던 것은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예수님도 기도의 중요성을 인식하시고 행하셨던 것입니다.

3. 적용
성도 여러분
환란 가운에서 하나님의 뜻은 쉬지말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사단의 공격을 받아 실족하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그러한 사단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가 쉬지 않고 기도할 때에 천사가 예수님을 도와 기도하게 하였던 것 처럼 우리를 도와 기도하게 하시고 어려움을 면케해주실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1.본문설명:
사도 바울은 핍박받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범사에 감사하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범사에 감사하라’란 원어로 ‘엔 판티 εν παντι’ 입니다.
이는 모든 상황에서 감사하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일이 잘풀리고 평안할 때는 감사의 기도를 잘합니다. 그러나 환란이 닥쳐 상황이 어려워지면 감사하기란 참 힘든 것입니다.
고난 중에 감사하기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겐 불가능한 것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성경적연결
사도 바울은 감사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 15장 57절, 58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사도 바울은 세상을 이길 힘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말합니다.
그는 어려울 때 주안에서 힘쓰는 모든 것들이 결코 헛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비록 지금 일이 안 풀릴지라도 감사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 주님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셨습니다.

3.적용: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증거요, 영생을 얻었다는 증거입니다.
비록 지금은 힘들어도 결국에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범사에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결론>
성도 여러분
오늘은 혼란한 시대 속에서 우리에게 환란이 닥쳐올 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보았습니다.
그것은 “항상기뻐하는 것이고 쉬지말고, 기도하는 것이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사회가 혼란하여 환란이 닥쳐올지라도 오늘 배운 말씀대로 사십시요.
그러면 하나님이 분명히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려울 때에 자기의 뜻대로 행하는 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 세게 하리라 내가 너를 도와 주리라.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보라 네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하게 될 것이요, 너와 다투던 자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
저는 여러분들이 사회가 혼란하고 환란이 다가올 때 항상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여서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체험하시길 기도합니다.

본문:히브리서 10:19-25
제목:하나님께 나아가자
설교자:김호인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변함없이 우리에게 좋은 날 주시고 여기에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은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드리면서 설교를 시작하려 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어떤 마음으로 여기에 오셨습니까 이런 생각 해 본적은 없으신가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아무 생각없이 여기에 앉아 있을 때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짐승의 피를 가지고 나아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피를 보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피는 결코 완전하거나 영원한 효력을 갖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키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이 매일 자신들의 죄를 위해 희생제사를 드려야 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조차도 먼저 자신의 죄를 속하고서야 백성들을 위해 제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반복되는 이러한 의식을 행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이렇게 번거롭고 힘든 일을 반복하지 않을 수는 없을까 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단 한 번으로 영원히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소망했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희생제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원하고도 완전한 희생이 드려질 때를 바라보게 하셨던 것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에 더 이상 죄 때문에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더 이상 제사를 드리지 않고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까요 오늘 본문을 살펴보는 가운데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지를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본론

1.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야 합니다(19-20).1) 본문설명
본문은 먼저 예수님께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에 우리가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근거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담대하게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소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성소는 자신의 죄를 속한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음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엡3:12)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해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길이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1년에 한 번 대제장만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의 휘장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열어 놓으신 그 길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길입니다. 또한 그 길은 생명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위한 새로운 길이요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인 것입니다.
2) 성경적 연결
예수님께서 친히 이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6에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열어 놓으신 길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는 사도행전 4:12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다른 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7:50,51을 보십시오.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영혼이 떠나가시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20절에 의하면 그 휘장은 바로 예수님의 육체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둘로 찢어진 휘장,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찢으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여셨다는 말입니다.
이제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2:13,14)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찢으심으로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담을 허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게 되었다고 말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엡2:18).
3) 적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짐승의 피가 아닌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가 우리를 정결케 했기 때문입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14:6)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는지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피를 힘입었기 때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21-22).1) 본문설명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까요 22에 보면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요.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입니다. 진리의 빛을 받음으로써 참되고 올바르게 된 마음입니다. 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마음이 바로 참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면 온전한 믿음은 무엇이겠습니까. 온전한 믿음은 완전하고도 확신에 찬 믿음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확신에 찬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온전한 믿음은 맹신도, 광신도 아닙니다. 미신은 더더욱 아닙니다. 확신에 찬 믿음은 하나님과 그 분이 하신 일을 굳게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단순히 구원을 확신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단 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21절에서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2) 성경적 연결
이와같이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도무지 그런 마음과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6:5을 보십시오. 우리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였었다고 골로새서 1:21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18-21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떠했습니까 우리는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살후1:12)에 속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은”(렘17:5)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마17:17; 막9:19; 눅9:41)라는 책망을 받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우리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겠습니까 본문 2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였던 것입니다(히9:14).
또한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마저도 예수님의 은혜를 통한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엡2:1-8).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지 않고 “받았다”고 했습니다(약2:1).
3) 적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와같이 우리가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 스스로 이런 마음과 믿음을 갖추어야 했다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친히 갖추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만 예수님의 보혈의 피를 의지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 회개하는 마음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 주시리라는 확신에 찬 믿음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십시오(빌2:2:5-8). 과연 나는 믿음에 있는지 늘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시기 바랍니다(고후13:5).

3. 소망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23).1) 본문설명
이와 같이 예수님의 피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근거라면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은 우리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다음으로 본문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우리에게 소망을 굳게 잡을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23절 하반절을 보면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소망의 고백을 붙잡고 유지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는 소망은 예수님께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로 들어갈 것이라는 소망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생명에 이르리라는 소망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소망을 계속해서 고백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굳게 붙들고 간직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소망은 계속적인 고백을 통해서 유지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소망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소망을 이룰 주체가 불확실하거나 미덥지 못하다면 불안감 속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붙잡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리라는 확신이 있기에 소망을 굳게 붙잡고 흔들리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2) 성경적 연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사람은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지니”(시146:3)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사2:22). 만약 사람에게 우리의 소망을 둔다면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쁘신 하나님께 우리의 소망을 두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반드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사46:11;55:11).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기 때문에 결코 식언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민23:9). 우리 사람은 신실함이 없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미쁘신 분입니다(딤후2:13). 그래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시118:8)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소망을 이루실 분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이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로 들어갈 수 있는 소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예수님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셨습니다(딛3:7).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세상에서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엡2:12). 그러나 이제 우리는 우리의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둡니다(딤전4:10).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39:7)라고 고백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소망이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만 바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시62:5).
3) 적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이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굳게 잡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변치 않으시는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히6:17-19).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에 거하고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으면 우리는 마침내 하나님의 약속을 누릴 것입니다(골1:22,23).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은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가면서 당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서 또한 그것을 이루시리라고 확신합니다. 또한 그 소망이 흔들리지 않도록 입으로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빌1:6)라고 말입니다.

4. 서로 돌아보아야 합니다(24-25).1) 본문설명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며 어떤 자세로 나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굳게 붙잡아야 할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서로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돌아본다”는 말은 ‘주의 깊게 살핀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서로의 부족함, 연약함 등을 살펴서 적절한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끊임없는 관심을 가져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돌아보는 것에는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일이 포함됩니다. 여기서 “격려하다”는 “고무하다, 자극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도록 격려하고, 그 사랑을 바탕이 되어 선한 행실로 구체화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서로 돌아보는 것에는 모이기에 힘쓰도록 권하는 일이 포함됩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모임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교회 모임에 참여함으로써 불신자들로부터 당하게 될 불이익이 두려운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구원받았으면 됐지 다른 것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또는 교회 모임이 자신에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영적 교만에 빠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서로 권면하여 모이기에 힘씀으로써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서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2) 성경적 연결
그렇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각 지체로서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다고 했습니다(고전12:25-27).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서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요일4:20).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13:35)고 하셨습니다. 먼저는 우리들 서로가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진실하게 행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요일3:18). 갈라디아서 6:10에서 “우리가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히브리서13:16에서는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면서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모임은 단순한 친목을 위한 모임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임은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기 위함입니다(시95:6). 또한 세우신 사역자들을 통하여 성도들의 영적 성숙을 도모하기 위함입니다(엡4:11,12).
3) 적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로를 돌아보며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모이기를 힘쓰는 것은 우리에게서 보여져야 할 외적인 표지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과 삶이 분리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믿음은 삶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아무리 큰 믿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행함이 없다면 그것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어떻게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전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미가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6-8).
서로를 돌아본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지체로서 한 몸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바로 이것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열매들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히4:16).
둘째로,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마5:8).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히11:6).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 주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영생의 소망을 굳게 잡으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견딜 수 없는 어려움이 닥치기도 하겠지만 결코 우리의 소망을 흔들어 놓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들이며,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서로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한 몸의 지체들입니다. 지체가 건강하지 않으면 온 몸이 고통을 받습니다. 서로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이것은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선한 행실이 그 열매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 오늘 여기에 어떤 마음으로 오셨는지 질문하면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이 질문은 제가 할 질문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우리들 각자가 스스로에게 해야할 질문일 것입니다. 나는 오늘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가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마다 풍성한 은혜로 만족케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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