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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경의 기독교인가 기독교의 성경인가 (마 06: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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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으로 유명한 J.S.밀은 일반화된 진리는 이미 그 속에 오류를 내포한 다는 말을 한 바 있다. 아무리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다고 인정하는 사실( 진리)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기 속에서 자기것이 된 진리가 아니라면 그것 은 이미 진리로서의 가치성을 상실한다는 점을 간파하여 한 말로 볼 수가 있 겠다. 이 점은 신앙의 영역이 아니더라도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 는 제1의 가치라고 할 수 있으며 철학이나 신앙의 영역에 있어서는 정말 아무 리 강조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문제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의 모습을 보노라면 자기 내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여 이르러야 할 진리들에 대하여 너무 쉽게 정답을 제공함으로써 무엇이 진리인 가에 대한 답은 알면서도 전혀 자기것으로 소화하지 못하고 성경과 겉도는 기 독교인을 양산하고 있지않나 생각되어 안타깝기 짝이 없다. 이러한 신앙의 행 태는 결국 단어의 모양이 기독교적이면 ─ 예를들어 하나님이라든지 구원이라 든지 천국등 ─ 모두 우리편이고, 하는 말이 기독교적이 아니면 모두 성경적 이 아닌양 치부하고, 진리를 향한 고민과 갈등의 모습에 대해 전혀 백안시 해 버리는 어리석음을 낳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기독교는 성경적인가 하는 질문을 우리 스스로 해 보아야 할 줄 안다. 어떤 분은 아니, 그러면 기독교가 성경적이 아니라는 말이냐라 고 대뜸 따질지도 모르겠다. 물론 성경적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성경 적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개연성을 부인하지 말자는 말이다. 왜냐하면 절대로 성경이 먼저였지 기독교가 먼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치 유대교 가 하나님을 믿고 구세주를 기다리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결과적으로 성경(구약)적이지 못했던 것처럼 오늘날 기독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 나님을 섬기며 영광의 재림을 소망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성경적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다만 기독교가 의미 있는 소망의 종교가 되려면 어 디까지나 성경적일 때만 가능하다. 성경의 기독교,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여야 지 기독교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기독교의 성경이어서는 안되겠다는 말이다.

즉 기독교내에 이미 형성된 제반 교리나 견해에 입각해서 성경을 볼 일이 아 니라는 점이다. 이점은 오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부연한다면, 전기한대로 이미 형성된 교리의 눈을 통하여 성경을 대하게 되면 성경을 교리화 할 수 있을지 는 몰라도 절대로 진리화, 자기화 할 수는 없다. 이 말은 교리가 틀렸다는 말 이 아니다. 교리가 맞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교리를 만들어낸 사람의 진리 일 뿐, 그것을 학습과정을 통해 습득한 사람에게는 생명의 진리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러한 교리가 성경의 진리를 가로막는 장애요인이 될 수도 있으며 나아가서는 기독교라는 틀이 성경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의 목덜미를 잡고 놓아주지 아니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마태복음 23장 13절의 화있 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는 말씀은 바로 이 점을 경계한 말씀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은 다 아실 일이지만 흥행성이 좋 은 영화 가운데 하나가 공포영화인데, 이들 공포영화의 일반적인 구조를 보면 대부분 선한 신으로서의 하나님과 악한 신으로서의 사탄을 등장시키고 그 둘 사이의 투쟁과 갈등을 사람과의 관계에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영화 에 심취하고 나서 성경을 보면 영화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들이 마치 성경에서 말하는 사실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즉 성경의 시각으로 영 화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눈으로 성경을 읽으려든다는 점이다. 분명 한 사실은 영화가 반드시 성경적이어야 할 필요도 없고 또 성경적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해서 장사가 잘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영화는 재미있어서 장사 만 잘 되면 되는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는 점을 간과하면 안된다. 다만 그런 영화를 보고 얻을 점이 있다면 얼마나 그런 영화들이 비성경적인가를 참고했 다면 그것으로 유익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독교의 교리나 역사에 안주하여, 거기에 젖어 살면서 성 경을 보게 되면 다분히 기독교적 시각으로 성경을 보게 된다는 점이다. 이것 이 문제이다. 자신이 성경의 시각으로 성경을 보고 거기서 기독교의 교리를 도출해 냈다면 그것은 의미 있는 사건일 수 있다. 그러나 거꾸로 기독교의 교 리를 통하여 성경을 이해했다면 그것은 한편의 영화를 통하여 성경의 진리를 발견하려는 어리석음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성경이 원인이 된 하나의 결과적 실체라는 점을 알아야 한 다. 결코 기독교가 원인이 되어서 성경이라는 경전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유념한다면 성경적이지만 기독교의 교리적이지는 못한 사실들을 수용 하고 자기 것으로 만듦에 있어 과감해질 수 있을 것이다.

본문이 지적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각의 문제이다. 성경을 보느냐 보 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성경은 성경을 보라거나 보지 말라거나를 가르쳐 야 할 대상을 향해 쓰여지지 않았다. 성경은 성경을 보는 사람들을 향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발언이다. 때문에 본문의 말씀도 몸의 등불인 눈이 있느냐 없 느냐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눈이 성하냐(aJplou 하플루스,순수한,건전 한) 아니면 나쁘냐(ponhrov 포네로스,악한)를 묻고 있는 것이다. 또한 눈이 성하고 나쁜 것이 육신적 시력의 정도가 아니라는 것쯤은 독자들께서도 쉽게 전제할 수 있을 줄 안다. 그렇다면 성한 눈과 나쁜(악한) 눈의 기준은 무엇 이겠는가.성경은 성한 눈으로 몸을 볼 때에만 온 몸이 밝을 것이고 눈이 나 쁘면 온 몸도 어두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우리의 눈 이 과연 성한 눈인지 아니면 나쁜 눈인지에 관심을 둘 줄 알아야 하겠다.

마태복음 20장에는 포도원 주인이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을 하고 포도원 일을 시키는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품삯을 받을 때 일 어난다. 공교롭게도 주인은 나중(11시; 우리 시간으로는 오후 5시)에 온 사람 들로부터 시작하여 한 데나리온 씩을 주기 시작했는데 3시, 6시, 9시등에 온 사람들이 자기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이 주어지는 것을 보고 주인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이 때 주인이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나쁜 눈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다. 20장13절 이하를 보자.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 고 가라. 나중 온 이사람에게 너와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 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마20:13-15 ).

여기서 15절 마지막 부분,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oJ ojfqalmo sou ponhrovejstivn oJvti ejgw; ajgaqoveijmi를 직역한다면 내가 선 하기 때문에 너의 눈이 나쁘게 되었느냐가 된다. 문제는 하나님의 선함이 인간들의 눈에는 악함으로 비쳤다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의 기준(시각)으로는 하루에 12시간 일을 했거나 아니면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극단적으로 1시 간만 일했거나를 막론하고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선(agaqov 이 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시각을 바라보는 인간들의 시각은 하루에 1시 간 일한 사람은 12시간 일한 사람과 동일한 대우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어느 쪽이 맞느냐, 틀리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발언도 일리()있는 말씀이고 인간들의 주장도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기 때문 이다 (적어도 오늘날 노동경제의 가치관으로 이 사건을 이해하려 든다면 그렇 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온 자들의, 이와같이 단위노동에 대한 임금의 균등을 주장하는 논리를 악한 눈이라고 규정지었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이들 먼저 온 자들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사건을 파악, 조명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사회적 습관과 통념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불상사가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우 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인식의 틀 ─ 그것이 비록 기독교의 교리라고 할지라도 ─ 속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게 되면 번번이 실패하고 나아가서는 하나 님을 원망하고 성경에 대하여 불평을 늘어놓게 된다. 나쁜(악한)눈이란 바로 이것이다. 대대로 내려온 우리 사회의 통념이기 때문에, 아니면 이러한 내용 은 기독교의 교리이기 때문에, 또는 윤리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기 때문에 성 경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 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인간이나 사회의 제도, 문화, 종교등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얼 마나 그것들이 비성경적인가를 보여주는데 그들의 가치성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지 아니하고 그러한 나타난 현상들을 통하여 성경을 이해하려든다면 그것 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6장 23절의 마지막 부분,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eij oun to fwto; en soi; skovvtoejstivn, to; skotovpovson.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움이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심하겠느냐)는 악한 눈을 부연 설명하는 말씀으 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속에 빛이 빛으로 존재할 때에만 우리는 성한 눈으 로 살 수 있다. 우리 속의 빛이 어두움이窄우리의 눈은 늘 악한 것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이사야도 이 점을 염려하여 미리 다음과 같이 경계한 바 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어두움)으로광명(빛)을 삼으며 광 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 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뇌물로 인하여 악인을 의롭다하고 의인에게서 그 의를 빼앗는도다 (사5:20).

성경은 기독교의 경전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하나님 역시 기독교의 교주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온 인류와 온 우주의 하 나님이다. 결코 어떤 한 종파의 교주일 수 없다. 그러므로 종교는 없어질 수 있어도 하나님은 없어질 수 없으며, 기독교는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어도(벧 전4:17) 성경은 그럴 수 없으며, 오히려 세상과 기독교를 심판하는 주체이다( 요12:48). 아무리 기독교일지라도 그 기독교적 시각이 성경을 성경으로 인정 치 않는다면 ─ 어폐가 있지만 행간을 읽으시기 바란다 ─ 그것은 오히려 악 한 눈이요 어두움일 뿐이다.

성경의 눈으로 기독교를 보고 세상을 보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보자.

필자가 유독 기독교, 기독교 하는 것은 그만큼 기독교를 사랑하고 있다는 표 시이다. 오해 없기를 바란다. 기독교가 몸의 등불이 되어서는 안된다. 몸의 등불은 그리스도이어야 한다(계21:23).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때에 손을 씻 지 아니하나이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 의 계명을 범하느뇨…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 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마15:2-3,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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