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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을 향한 교회의 사명 (왕하 04:3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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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교회의 관계를 보는 입장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보수적인 입장으로서 오로지 교회는 복음 전도에만 전념할 뿐 세상의 사건이나 정황에 대하여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진보적인 입장으로서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는 그 시대와 역사 현실에 깊이 개입하고 참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두 가지 입장이 모두 일리 있는 것입니다.그러나 교회의 바람직한 입장은 이상의 둘을 한데 묶어서 만들어야 합니다.다시 말하면 양극화 현상은 바람직한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보수적인 사람들이 진보적인 사람들을 평할때 “저 사람들은 맨날 밥 먹고 데모나 하고 운동이나 하는 사람들이라”느니 심지어는 “좌경화 되었다느니”“공산당인 것 같다”는 말로 공격하고 매도합니다.그러나 그렇게만 보아서는 안됩니다.그런가 하면 진보적인 사람들은 보수적인 사람들을 “불의와 타협하고 소리 한 번 제대로 지르지 못하는 옹졸한 사람들이라”느니 “권력과 결탁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이라”고 매도하고 공격합니다.그것도 물론 잘못입니다.
교회라고 해서 허구한날 침묵만 지키고 벙어리 노릇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반대로 교회가 맨날 데모의 선봉장 노릇이나 하고 정치 집단이나 결성한다면 그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교회는 소리를 쳐도 교회의 소리를 내야 합니다.다시 말하면 정치꾼들이 내는 것과 똑같은 소리를 내면 안되는 것입니다.교회의 소리는 신령한 소리어야 하고 생명의 소리어야 하며 영혼의 소리어야 하고 구원과 사랑의 소리어야 하며 진리의 소리어야 합니다.합동 연설회장에서 들리는 소리와 교회 강단에서 들리는 소리가 같은 소리가 되면 안되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4:38-41의 말씀은 엘리사 선지자가 길갈에서 행한 기적에 관한 기사입니다.
어느 날 엘리사가 길갈 지방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마침 길갈 지방은 흉년으로 먹을 것이 없어 민생이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그래서 귀빈이 왔지만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대접할 것이 없었습니다.엘리사는 물론 일행들도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그 지방에 있는 사람도 찾아간 손님도 어떻게 할 길이 없는 딱한 형편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보다 못한 엘리사 선지자가 선지 학교 생도에게 들에 나가 채소라도 뜯어다가 국을 끓여서 마시게 하라고 했습니다.그 말을 듣고 한 사람이 들에 나가 야등덩굴에 매달려 있는 들외를 따다가 썰어서 국을 끓였습니다.
국이 다 끓은 다음에 퍼서 먹다가 먹던 사람들이 소리쳤습니다.“솥속에 사망의 독이 들어 있다.”이 말은 독초를 뜯어다가 국을 끓였기 때문에 국솥에 독이 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주경학자들은 야등덩굴은 “클로신드”라는 풀로서 설사를 일으키는 풀이라고 했습니다.그리고 설사가 계속되면 탈진 상태가 되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엘리사가 가루를 가져오라고 하여 그 가루를 국 솥에 던지고 이제는 퍼다가 먹으라고 했고 퍼다가 먹었더니 사망의 독이 없어졌다는 것이 본문의 줄거리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 속에서 몇 가지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1.국솥에 사망의 독이 들어가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생각해 봅시다.
여러 사람이 먹어야 하는 국솥에 독이 들어가게 된 원인은 독이 있는 풀로 국을 끓였기 때문입니다.들에 나간 선지 생도가 독이 있는 들외를 따온 것은 그 속에 독이 들어 있는 줄을 몰랐기 때문일 것입니다.그 들외는 겉으로는 먹음직스럽게 생겼을 것이고 독초라는 표식이 없었을 것입니다.
독 있는 뱀이 더 아름답고 독있는 풀일수록 윤이 흐른다는 말이 있지만 문제는 어느 것이 먹을 수 있는 풀이고,어느 것이 먹을 수 없는 풀인가 하는 것을 분별할 수 없었다는데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진실과 허위를 구분짓기가 어렵고 옳은 것과 옳지 못한 것을 구분하기가 몹시 어려운 혼미 상태가 만연되어 가고 있습니다.주님은 제자들에게 어둠의 자식들이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해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로 우리에겐 독초를 가려내고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이것을 먹으면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를 헤아리는 판단력이 필요합니다.우리가 사는 세상은 먹어서는 안될 독초같은 악의 요소들이 너무나 많이 깔려 있습니다.군사 전략가들은 현대전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세 가지라고 합니다.
첫째는 핵무기라는 것입니다.만일 미국이나 소련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를 모조리 터뜨리는 날이면 이 지구가 6번 멸망하고도 폭탄이 남는다니 두렵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둘째는 중성자탄이라고 합니다.이 무기는 건물은 고스란히 그대로 놔둔 채 그 안에 있는 사람만 죽이는 무기이기 때문에 그 살상 능력이 가공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탱크가 이 무기에 맞으면 탱크는 그대로 있고 탱크 안에 타고 있는 병사만 죽게 되며 아군 기지가 그 폭탄에 맞으면 기지 사령부 안에 있는 참모들과 병사들만 죽에 될 것입니다.
세째는 세균전이나 화학전이라고 합니다.
세균을 무기로 사용하게 되면 온갖 전염병은 물론 대기와 식수가 감염되고,화학 무기의 경우 문틈으로 스며든 공기를 호흡하다가 쓰러져 죽는 끔찍한 결과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게하고 막아야 할 더 무서운 파멸의 적이 있습니다.그것은 국솥에 퍼져서 온 국솥을 독으로 채웠던 그 독보다 더 무서운 죄인 것입니다.죄가 퍼지면 개인도 망하고 사회도 망하고 정권도 망하고 국가도 망하게 됩니다.죄짓고 사는 개인이나 집단이나 정부는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이유는 자신도 죽고 남도 죽게 하기 때문입니다.
솥 안에 가득 들어 있던 국을 퍼서 먹던 그들은 재빨리 국솥 안에 독이 퍼져 있음을 발견했습니다.그들의 조기 발견 때문에 더 큰 피해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입장은 여당이냐 야당이냐가 아닙니다.누가 정권을 잡느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교회의 관심은 죄짓지 않는 사람들,죄를 무서워하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들,양심의 소리를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교육도 맡아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2.문제의 발견과 조치를 생각해 봅시다.
국솥에 독이 들어 있음을 발견하는 즉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이여 솥에 사망의 독이 있나이다”라고 소리쳐 그 사실을 엘리사에게 알렸습니다.여기서 그들이 엘리사를 가리켜 “하나님의 사람이여”라고 부른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그는 정치가도 경제가도 아니었습니다.그는 그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 시대와 역사를 향하여 외치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역사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사는 기도와 거기서 비롯된 뛰어난 영감 때문에 적군이 쳐들어 오려는 음모를 사전에 탐지하는 영적 레이다 역할을 했고,아람 나라의 사단 병력이 이스라엘을 공격해 왔을 때는 엘리사의 기도로 그들의 눈을 어둡게 만들어 그들을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까지 인도하여 혼쭐을 내주기도 했습니다.그러한 그였기 때문에 그가 나이 많아 죽게 되었을 때 요아스 왕이 찾아와 “내 아버지시여,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라면서 애석한 눈물을 흘린 일도 있었습니다.
엘리사는 그 손에 활이나 창이나 칼을 쥐어본 일이 없었지만 그는 이스라엘을 지키는 군단이었고 최신예 병기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고,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고,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그리고 나아가 국가적으로 겪고 있는 난관이나 위가를 극복하려면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그리고 하나님의 보호와 능력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국솥의 독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이여”라고 소리쳤지만 우리는 직접 “하나님”,“아바 아버지”라고 소리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습니다.
문제가 적으면 소근거려도 되지만 문제가 크면 소리질러야 합니다.내가 문제를 풀고 교회가 교회 구실을 하려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 위치를 확고히 해야 합니다.

3.엘리사의 치유를 생각해 봅시다.
엘리사는 솥 안에 독을 치유하기 위해 세미나를 열고 위원회를 구성하지 않았습니다.이미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위탁하신 능력을 믿고 가루를 가져다가 그 솥에 던지라고 명령했습니다.그것으로 솥안의 독은 없어졌고 많은 무리들이 그날 그 국을 나누어 먹게 되었습니다.
솥에 던져 넣은 가루가 밀가루냐 보리 가루냐 옥수수 가루냐 아니면 특효약 가루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문제는 능력의 사람의 명령을 따라 순종했을 때 기적이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죽은 지 나흘되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신 주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한마디 명령을 내리셨을 때 나사로가 수족을 동인 채로 나왔다고 했습니다.거기엔 순서도 절차도 필요가 없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순서나 절차나 위원회가 너무 많습니다.고문 치사 사건이 터지자 무슨 전담 기구를 만들어 인권을 보호하겠다고 발표한 뒤 그런 것을 만들었습니다.그러나 기구나 위원회가 문제를 해결짓는 것은 아닙니다.그 마음속에 가루를 던져야 합니다.악독과 시기와 증오와 죄악으로 가득찬 인간의 심령 속에 치료하시는 은혜의 가루를 던져야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5:26에서 하나님은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을 향한 교회의 사명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어머니를 미워한 중학생이 자기집을 찾아온 여대생을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살해했습니다.청소년의 탈선,성폭행이 증가하고 있습니다.정치는 양극화 되어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어른도 아이들도 모두가 독이 찬 독초처럼 독기를 품고 있습니다.민주화보다 더 시급한 것은 독기를 빼는 일입니다.
누가 어떻게 이 독기를 뺄 수 있습니까 바로 여기에 있는 우리 크리스챤의 사명이 교회의 사명인 것입니다.복음의 가루,사랑의 가루,화해의 가루를 뿌려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썩는 곳에 소금이 되고 어두운 곳에 빛이 되고 독이 스민 곳에 해독제가 되고 싸움이 있는 곳에 화해자가 되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도 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허락하신 삶의 현장으로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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