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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 십자가의 의미 (요 19: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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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한 주간은 우리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을 묵상하면서 지나는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주일입니다. 갈보리 언덕 위에 세워진 세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일까 오늘 고난주일을 맞으며 우리 모두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진 십자가가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올바로 깨달아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도 요한이 기록한 요한복음에 의하면 다른 공관복음에 비하여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골 곳이란 언덕에 세 십자가가 세워졌는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가운데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는 똑 같은 십자가인데, 그 세 십자가가 각각 우리에게 영적으로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1. 첫째 왼쪽 강도의 십자가를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십자가 형틀에 달려 죽게하는 죄인은 반란자나 노예들의 극형을 처할 때이고, 로마 시민들에게는 아무리 무거운 죄를 범했다 해도 이 십자가 형틀에 못박아 죽이지는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왼편 강도는 그야말로 반 인륜적 포악무도한 죄인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최고의 형인 십자가 형틀에 달린 것이었습니다. 이 왼편 강도의 십자가는 죄의 마지막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십자가였습니다. 모든 죄는 이렇게 죽음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십자가란 말입니다. 죄의 종류가 어떠하든 결국 인간은 죄 값으로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 십자가가 이 왼편 강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뿐만아니라, 회개할 기회마저도 놓치고 죽으면서까지 예수를 조롱하고 불신했던 멸망의 표상(表象)으로서의 죄인의 십자가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죄를 범하고도 뉘우칠 줄 모르고, 죽은 후에 영원한 지옥의 세계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자들의 완악함을 보여준 십자가입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하기를 포기한 사람들의 막가는 인생종착을 보는 십자가란 말입니다. 몇 년 전 우리 사회에서도 <막가파>란 범죄 조직을 만들어 지나가는 사람을 무참하게 죽이고도 뉘우칠 줄 모르고 죽어 간 자들과 같은 죽음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누구나 다 받는 것이 아니라, 택함 받은 자들의 한정된 구원(Limited Salvation)이란 것을 여기서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범하고도 회개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끝까지 자신을 합리화시키면서 회개하지 못하고 가는 인생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왼편 강도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목회 중에 이러한 사람을 한번 본 일이 있습니다. 일본 침략 시대에 동경 유학을 했다면 그 당시로 보면 출세 길에 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도출신이란 딱지 때문에 동경대학 법대를 나왔으나 출세하지 못하고 해방을 맞아 귀국하였는데, 해방이 된 후에는 더더욱 일본 동경대학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까닥하면 친일분자로 몰릴 판이었습니다. 유학 시절에 만난 부인의 덕분으로 생활은 하게 되었습니다. 그 부인도 같은 시대에 동경 유학을 한 약대 졸업생으로 유학 시절 그를 만나 결혼했고, 귀국 후 약국을 경영하면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머리에 든 것은 있고, 현실의 환경은 자기의 생각과 같이 날개를 펼 수 없었기에 언제나 짜증과 술로 지내면서 친구도 없이 살아가다가, 그만 위암에 걸려 말기 환자가 되었을 때, 그 부인이 그래도 그 영혼 구원시켜 보겠다고 젊은 목사인 나를 찾아와 한번만 자기 남편을 심방하여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방에 누구도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합니다. 너무나 무섭게 짜증을 부리며 던지고 때리고 하여서 말입니다. 그러나 제가 갔을 때는 이제는 그럴 기력도 없어져 자리에 누워있을 때였습니다. 방에 들어가니 벌써 냄새가 지독하게 풍겼습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찬송을 부르고 요한 복음 14:1절 이하의 말씀을 읽고 아무 소리도 없고 미동(微動)도 하지 않기에 권 선생님! 예수를 믿으세요.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영혼이 구원받습니다 하니까, 벌떡 눈을 뜨면서 내가 구세주여 하고는 다시 눈을 감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놀래고 당황했던지 그래서 기도를 하는 둥 마는 둥하고 돌아온 경험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는 다 회개한다는 말이 옳은 말이 아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이 아니면 죽으면서도 왼편 강도처럼 예수님을 조롱하면서 죽어갑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 내려와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예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그런데 같은 죽음을
하면서도 오른편 강도는 완전히 그와는 달랐습니다.

2. 둘째로, 오른편 강도의 십자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른편 강도는 같은 죄를 범했으나, 회개한 자의 십자가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란 엄연한 사실 앞에서 그래도 구원에 이르는 길이 열려 있음을 보여준 십자가란 말입니다. 즉 죄의 값은 죽음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고 그에게 자신의 영혼을 맡기고 그와 함께 낙원에 이를 것을 믿으면 구원에 이른다는 사실을 보여준 십자가입니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구원은 인간의 행위의 공로가 아니라, 믿음의 결과로 주어진 은혜의 선물이란 것입니다.
이 선물이 너무나 값이 비싸 도무지 값을 매길 수 없는 은혜란 것입니다. 값이 너무 비싸면 가격을 매길 수가 없습니다.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은 화랑에서 고가로 값을 매겨 놓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1500년경에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의 그림은 값을 매길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그림에는 '프라이슬레스'(Priceless)라고 써 놓았다고 합니다. 너무나 소중하고 귀한 것이니까 값으로 따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쓸모 없는 무가치한 죄인들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고귀한 은혜의 선물이란 것입니다. 이 구원의 은혜를 나타내 보여준 것이 바로 오른편 강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이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나 같은 죄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깁니다. 그것도 죽는 순간에 믿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놀라운 비밀을 보여준 것이 바로 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211장을 보면 그 흉악한 한 강도는 제 죄를 깨달아, 죄 없으신 주 예수를 구주로 믿었네, 내 지은 죄 흉악하나 주 예수 믿으면 용서받은 강도같이 곧 용서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을 죽이며 강도 짓을 하다 잡힌 사람에게까지 용서받지 못할 죄인도 구원을 얻었는데, 그렇다면 나 같은 죄인도 구원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확신을 보여준 십자가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다는 말입니다. 단지 성령을 훼방한 죄 외에는 어떤 죄도 다 사함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 십자가가 오른편 강도의 십자가입니다.

3. 셋째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을 대신해 죽은 속죄(贖罪)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십자가의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후부터 십자가는 이제 흉악한 죄인을 죽이는 형틀이 아니라 의(義)를 위한 희생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주의 십자가가 아니라 존경과 영광과 찬양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수치와 부끄러움의 상징이었던 십자가가 희생, 봉사, 사랑의 상징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모든 십자가는 사람의 병을 치료하는 병원과, 희생 봉사 활동을 하는 적십자사의 활동이 모두 십자가를 달고 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번에 드린 희생 제물로서의 십자가입니다. 모든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죽으신 십자가입니다. 이 주님의 십자가는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놓은 감격의 십자가입니다. 로마서 10: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에 이름을 확인시켜 준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고 운명하였습니다.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것이겠습니까 죄의 세력을 다 이기고 승리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불의한 총검의 세력을 사랑의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서 우리는 ① 그의 사랑의 완성을 보게 되었고, ② 순종의 제물로서의 사명 완수를 보게 되었고, ③ 죄인의 구속 사역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죄의 값인 사망의 대가를 온전히 지불하고 우리를 해방시키었음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지신 십자가를 쳐다 볼 때,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주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말과 이론이 아니라, 희생 제물이 되어 줌으로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다가 죽을 죄인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또 다른 사랑을 낳게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이름 없이 그야말로 빛도 없이 음지에서 묵묵히 희생하는 많은 봉사자들이 어디에서 나오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작 왓쯔(Isaac Watts;1674-1748)는 찬송가 141장에서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라고 눈물의 찬송 시를 써 내려갔습니다.
이제 아무리 포악한 죄인이라도 저 십자가를 볼 때 마음이 녹아집니다. 아무리 패륜아들도 저 주님의 십자가를 대할 때 눈물로 되돌아서게 됩니다. 제아무리 술주정뱅이도, 그리고 탕자들도 저 십자가 앞에서 결단하고 새 사람이 되어집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는 <패배>의 십자가가 아니라 <승리>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이제 주님의 십자가는 사람을 죽이는 형틀이 아니라 살리는 요람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저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감격의 목이 메는 죄인들이 얼마나 많이 돌아오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진 세 십자가에서 우리는 각각 다른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일 주님의 십자가가 가운데 세워지지 아니했더라면 나 같은 죄인이 어디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 모두 오늘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한 주간 동안 묵상하면서 새로운 주님과의 사랑을 이어나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 모두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만 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는 양 살아가는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기도문: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죽어 마땅한 우리들을 위하여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의 십자가에 달리게 하사 이제 우리의 죄를 완전히 도말하여 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다시 새로운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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