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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승리하신 그리스도 (고전 15: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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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주간은 수난주간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날을 기억하며 주님의 사랑과 희생을 다시 한번 감사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주님은 우리가 우리의 죄 때문에 당해야 할 형벌을 자신의 몸으로 친히 대신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떠나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주님은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은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런데 그 죄는 마귀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마귀가 우리 조상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함으로 우리 모두는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죄와 사망의 원인인 마귀와 그의 세력을 멸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 주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마귀는 패배한 원수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패배한 것은 아니어서 마귀는 여전히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고 대적하게 하여 영원한 멸망에 빠뜨리게 하려고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이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1.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에덴 동산에서 마귀에게 속아서 범죄한 이후에 마귀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죄인은 죽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법에 따라 죽게 되자 죽기를 무서워한 인간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에게 종노릇하며 살았습니다. 히 2:14-17,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주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와 같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물리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주님은 마귀의 종이었던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마귀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려주시고 이 세상에 대한 통치권을 회복하신 후, 죄의 사슬에서 우리를 해방하셨던 것입니다. 마귀와 그의 종인 악한 자들은 주님을 모함하여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자기들이 승리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예정하신 구원의 계획을 성취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 2:15).
그런데 패배한 마귀는 아직도 우리들에게 거짓말을 하여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게 하려 합니다.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이 참으로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묻던 마귀는 지금도 죽은 자가 어떻게 살아나느냐하며 주님의 부활을 부인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오늘 본문 12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시고, 인간의 생명을 지으신 것을 믿으십니까 그럼,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실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은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한 일도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부활 사상은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저와 여러분은 천하에 어리석은 사람인 동시에 사기꾼입니다. 세상에 허황된 일을 진리라고 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초대교회 이후 모든 사도들과 전도자들과 신자들은 사기꾼이며, 기독교의 진리라는 것은 모두다 거짓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거짓말쟁이이며, 우리의 믿음과 교회도 모두가 다 거짓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스스로 죽으셨던 것이지 마귀의 계략에 넘어가 살해당한 것이 아닙니다. 사 53:10-12,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 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도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성경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시편 기자는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시16:10)라고 주님의 부활을 예언하였습니다. 또 주님도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반복하여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루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부활에는 많은 증인들이 있습니다. 고전 15:4-9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였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성경에 예언한 대로 다시 살아나셔서 게바, 즉 베드로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가 다 보았고, 그리고 500여명의 형제들에게도 보이셨고,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인 야고보과 모든 사도들이 보았고, 그리고 맨 나중에 자신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증거한 수많은 증인들은 믿을만한 사람들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24)고 말함으로 주님이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이 당연한 일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2. 우리도 죽음에서 부활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주님과 함께 우리도 부활할 것을 예고합니다. 바울은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고전15:20) 말합니다. 첫 열매란 많은 열매들이 뒤따라 익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첫 열매가 의미하는 것을 우리는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한번 상상해 봅시다. 봄은 꽃의 계절입니다. 어제도 고속도로에 얼마나 많은 개나리, 진달래, 배꽃, 복사꽃이 피었는지 모릅니다. 정말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우리 함께 복숭아나무가 한 그루를 상상해 봅시다. 만발한 복사꽃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지난 겨울의 그 매서운 추위를 다 잊게 해줍니다. 그러나 꽃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첫 열매는 아닙니다. 이제 시간이 지나면 그 밑에 열매가 매달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열매도 첫 열매라고 부르지도 않습니다. 열매가 익으려면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올 때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비바람을 견디고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그 열매가 익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첫 열매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수많은 열매들이 함께 매달려 익어가다가 드디어 맨 먼저 한 개의 열매가 잘 익어서 먹음직하게 되었을 때, 그것을 따서 입안에 넣으면 달고 새콤한 맛이 입안에 가득할 때, 그것을 첫 열매라고 부릅니다. 첫 열매는 곧 이어 익어서 수확하게된 수많은 열매가 뒤따라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뒤이어 우리 모두가 부활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을 확인하여 줍니다.

이런 우리의 구원과 부활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고전 15:21-26에 따르면 죽음을 이기고 승리한 첫 번째는 바로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즉 재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 즉 부활할 신자들과 하늘로 들리움을 받는 휴거되는 신자들입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살전 4:13-18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 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그리고 마지막에 우리 주님께서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칠 때가 옵니다. 그때에 맨 마지막으로 멸망 받을 원수가 바로 사망입니다. 그때에 사단과 죄와 사망이 다시는 없게 될 것입니다.

3. 맨 나중에 멸망될 원수는 사망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망은 우리의 원수요,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그 사망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인간이 원래 창조될 때에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도록 지어졌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사는 사람이 죽을 수 없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영생하도록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 이 세상에 어두움과 폭력과 미움과 혼란이 생겼고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죽게 되었습니다. 사망이 우리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죽음이란 모든 것을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원수란 우리를 해치고 못쓰게 만들고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죽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피조물을 못쓰게 만듭니다. 여러분은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라도 죽으면 어떤 모습으로 변하는지 아십니다. 잘생긴 멋진 남자도 죽음 앞에서는 추하고 더럽기 짝이 없이 변화됩니다. 사망이 오는 곳에는 아름다운 나무도 쓰러지고 아름다운 자연도 손상됩니다. 여러분은 무덤에 가 보셨습니까 송장이 모여있는 곳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어떤 죽음도 아름다운 죽음이란 없습니다. 사망은 눈물과 한숨과 고통과 슬픔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사망은 그 자체가 어두움이요, 절망입니다.

이와 같이 사망은 우리의 원수입니다. 죽음은 우리가 바라고 사랑하는 모든 것을 빼앗아갑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아 갑니다. 가장 친한 친구나, 사랑하는 부모 형제도 빼앗아 갑니다. 심지어 우리 품에 있는 자녀라도, 아무리 애원해도 빼앗아 갑니다. 죽음은 남편과 아내를 갈라놓아 가정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죽기를 싫어하고 살려고 애를 쓰며, 생존을 위하여 치열한 투쟁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고자 하는 것은 본능입니다. 그러므로 살기를 구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빼앗는 것, 살인은 자연계에서 가장 큰 죄악입니다. 죽음은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갑니다
눈에서 빛을, 귀에서 청각을, 입술에서 말을, 머리에서 사고하는 능력을, 그리고 모든 쾌락과 기쁨과 즐거움을 빼앗아 가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까지 단절합니다. 그래서 사망은 우리의 원수입니다.
또한 사망은 모든 사람에게 원수가 됩니다. 죽음에서 면제될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은 젊은이와 노인을 구별하지도 않습니다. 선한 자와 악한 자,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지위가 높은 자와 천한 자를 구별하지도 않습니다. 진실로 모든 살아있는 자의 원수입니다. 그러나 그 사망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이치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습니다.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는 권세자라 할지라도, 아무리 용감한 용사라도, 아무리 현명한 학자라도,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라도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는 말씀에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음을 피해 갈 곳도 없습니다. 백두산 꼭대기로 가도, 탄광의 깊은 갱도 속으로도 피할 수 없습니다. 우주 공간으로 도망가도, 깊은 바다 속으로 숨어도 죽음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오셔서 그 사망을 멸망시키셨습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1:10).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살리셔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지상사역을 통하여 당신이 인간의 생명을 지배하시는 분임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들어가 그 딸을 보고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마 9:24)고 말씀하셨을 때에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비웃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달리다굼, 아이야, 일어나라!고 외치셨을 때, 주님은 생명을 지배하시는 분임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또 나인성 문밖에서 만난 과부의 독자가 죽어서 나가는 장례행렬을 보시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 7:14)고 명하시자 그 청년은 곧 일어났고 주님은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보내셨습니다. 사망의 권세는 자기 먹이를 주님께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또 나사로가 죽어 이미 무덤에 묻히고 그 시체가 썩어서 냄새가 날 때에 주님은 나사로야, 나오너라(요 11:43)고 외치셨고, 사망은 주님에게 항복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에 의해서 사망의 속박은 풀어지고 율법의 포로들은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그 이후에 일어난 크나큰 승리의 전조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는 이제 사망의 저주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죄를 다 대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죽음을 맞이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나는 부활이여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이제 사망이란 없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이 되었습니다.

4. 그런데 우리의 육신은 아직도 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성도들이 죽습니까하고 묻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죽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이란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는 자는 영원히 주님과 함께 거하므로 죽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육신의 죽음, 즉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는 현상을 성경은 잠자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죽음은 잠자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표현으로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육신은 아직도 죽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구원을 얻었지만 육신은 아직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이 육체가 변화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전 15:50-54을 읽읍시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려면 이 육신으로는 안 됩니다. 썩지 아니할 새로운 몸을 입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에게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지만 믿는 사람들에게는 장래 받을 축복의 시작입니다. 사망은 사실 제련소의 용광로에 해당합니다. 죽음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의 육체는 축복과 영생을 누릴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우리가 하늘나라로 타고 올라가는 불의 마차인 것입니다. 주님이 죽음을 폐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사망에 이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사망을 이기시고 완전히 정복하셨습니다. 무덤은 더 이상 어둡고 침침하고 음산한 감옥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성도의 안식처로 바꾸어 버리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자신이 부활하신 것만큼 확실하게 우리 모든 성도들도 부활하여 영광의 몸을 입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부활로 사망을 정복하시고, 지금도 성령을 성도들의 마음과 육체에 보내심으로 계속하여 사망을 정복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이 눈앞에 와 있어도, 우리는 담대하게 찬송과 감사함으로 평화스럽게 잠이 듭니다. 사망은 더 이상 우리를 해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얽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에서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육신과 분리될 때, 우리는 황금문을 지나 영원토록 빛나는 주님을 만나 뵈러 가게 될 것입니다. 이 죽음은 기쁘고 즐거운 일이 될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죄의 짐과 근심과 고통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주님과 함께 화평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죽음은 아픔도, 고통도 아닙니다. 우리는 불안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 저녁에 자리에 누워 잠이 들면 내일 아침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며 눈을 뜨는 것과 같이, 이 땅에서 눈을 감으면 하늘에서 눈을 뜨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심지어는 신자들까지도 죽음을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흔히 보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사망이 아직까지 완전히 멸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사망은 이미 멸망하였고 지금도 멸망하여가고 있지만 아직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직도 사망이 지배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은 사망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재림하실 때, 그 사망은 완전히 멸망할 것입니다. 그때까지 살아남아 있는 사람들은 사망을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무덤 속에 있던 자들은 모두 살아나고 그때에 살아있던 하나님의 자녀들은 죽을 필요가 없이 영광스러운 부활체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다 썩어 흙으로 돌아가 버린 육신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느냐 의심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몸이 가루가 되고, 원자와 분자로 분리되어 우주 끝까지 날아가 있더라도 하나님은 그것들은 다시 모으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부활된 우리의 몸이 지금과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우리의 몸은 씨앗을 심으면 새싹이 나오듯이, 새로운 몸으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 새로운 몸은 전과 같이 연약하지도, 질병에 걸리지도, 죄에 물들지도 않은 몸일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그런 몸이 아니라, 이제 더 이상 죽음도 슬픔도, 눈물도 없이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죄와 연약함과 사망에서 완전히 해방된 몸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롬 6:9)는 말씀과 같이 우리들에게도 다시는 사망이라는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 14:19)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첫 번째 적은 사단입니다. 그 사단으로 인하여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은 사망을 가장 두려워하지만, 사망은 우리의 가장 나쁜 원수가 아닙니다. 더 큰 원수는 죄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기보다는 죽는 편이 천 배나 낫습니다. 사망으로 인한 두려움은 죄로 인한 고통이나 슬픔에 비하면 사소한 것입니다. 즉 사망은 죄의 결과일 뿐입니다. 그 죄가 사단으로부터 왔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오셔서 사단의 종 되었던 우리를 해방하셨음을 기억하고 다시는 사단의 종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사망은 맨 마지막에 멸망받을 원수입니다. 그러므로 이 원수는 끝까지 내버려두십시오. 지금 우리가 깨어 싸워야 할 상대는 사단과 그로 말미암은 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로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우리 대장 예수께서 이미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남아있는 사단의 졸개들은 우리를 유혹하여 죄에 빠뜨리려고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검을 들고 오늘도 사단의 권세와 투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수 마귀를 이길 수 있도록 도우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왜 사망이 맨 나중에까지 남아있게 됩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사망을 통하여 우리를 가르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성도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삶은 안개와 구름 같이 덧없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라는 노래를 아십니까 이곳은 우리의 본향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떠나야 하듯이 우리도 이 세상을 떠나야만 하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한 애착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또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의 죽음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과 전능하심과 통치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사망이 없다면 성도들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나타내어 보일 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을 주기 원합니다. 선물의 크기가 사랑의 크기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사랑이 없느니라는 말씀대로 우리가 하나님께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이 없습니다. 우리는 순교자들의 죽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의 증거들을 바라봅니다. 성도가 주님을 위해 죽는다면 그분께 가장 큰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인 동시에 자신에게도 큰 영광입니다.
또한 성도들은 그들의 죽음을 통하여 고난이 끝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며 약속하신 상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성도의 삶은 고난과 핍박의 삶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만약 성도들이 죽지 않는다면 고난과 고통이 끝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주를 위하여 죽기를 원해야 합니다. 저도 그런 죽음을 간절히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생을 바쳐 주를 위하여 고난과 핍박과 멸시와 고통을 받지만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살다가 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일군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께서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라. 부활의 생명을 가진 우리는 살아도, 죽어도 주님만을 바라 볼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품속에서 잠이 들 때, 주님은 우리를 그와 같은 모습으로 부활시키실 것을 약속하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망을 멸망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으로 사망을 이기고 계십니다. 또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아직 남아있는 육신의 사망까지 영원히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그 사망의 세력이 아직 완전히 멸망되지는 않았지만, 이제 죄와 근심과 고통과 고난이 끝나고 주안에서 안식을 누릴 그날이 가까워오고 있음을 바라봅니다.
맨 마지막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입니다. 그 원수를 이기시고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 존귀와 영광과 권능과 능력과 위엄을 돌립시다. 세세무궁토록 그분을 찬양하며 우리에게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 그분께 감사합시다.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성찬식
찬송:141, 기도:성찬식을 시작하며.
성경:고전 11:23-27
성찬의 의미
① 성찬은 주의 죽으심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전 11:26). 우리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주님을 기념하는 의식으로 성찬식을 행한다.
② 성찬은 또한 세례와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을 상징한다.
롬 6:3-5,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 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③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것뿐만 아니라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우리의 영혼에 새로운 생명과 힘과 기쁨을 받는다.
④ 주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를 그에게 결속시킨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된 한 몸이다(고전 10:17). 성찬을 통하여 교회는 주님의 몸이며 우리는 그 지체임을 확인한다.
성찬식을 거행하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주목해야 한다.
(1)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죽음을 바라보며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랑을 깨닫게 한다.
(2) 성찬에 믿음으로 참여하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과 은혜의 약속과 구원의 복이 거룩한 선물로 주어졌다.
(3) 성찬에 참여한 사람들은 몸이 떡과 포도주로 양분을 공급받고 신선한 힘을 얻는 것처럼, 믿음으로 받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그 영혼에 더 풍성한 생명을 공급받을 것이다.
(4) 성찬은 참여하는 자마다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며, 왕으로 그에게 충성과 순종하는 삶을 서약한 동지요, 형제요, 한 몸의 지체임을 확인한다.
성찬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자
자기의 죄를 참으로 회개하고, 자기의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믿어서, 믿음을 굳게 하고, 참되고 거룩한 삶에서 자라가기를 원하는 사람.
성찬에 참여해서는 안 될 자.
스스로 자기 자신을 살펴보고, 자신의 영적 상태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을 때, 동료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가 깨진 사람, 회개하지 못한 죄를 가진 사람은 참여하지 말라. 주의 상을 더럽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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