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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련의 기쁨 (약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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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 교회도 그렇겠습니다만, 특별히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 신앙을 어떻게 생활 속에 정착시키느냐입니다. 주일과 평일 의 생활, 교회 와 가정, 직장이나 사회 생활이 어떻게 신앙 생활과 연결되어야 할 것인가 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과제이며, 많은 사람들을 고민하고 염려하게 만드는 주된 요인입니다.

우리는 전도할 때, 아, 예수 믿는 사람도 별볼일 없더군요라 는 말 을 종종 듣습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제 가 얼마 전에 저희 집 지붕을 수리했는데,그 일을 맡은 사람이 교회 집사 였습니다. 그런데 일을 다 마치고 보니까,돈은 남보다 더 많이 받고 일은 엉망으로 해 놓은 것이었어요. 그러니 목사님,저보고 예수 믿으라고 하지 마시고, 그런 사람 빨리 회개시켜 변화되게 만드세요. 저 같은 사람은 정 직하게 사니까 예수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직장 동료 중에 예수 믿는 사람이 있는데 별 수 없습디다. 속도 좁고 앞 뒤가 콱 막혔습니다. 우리네들은 술 자리 한번 같이 하고 나면 다 통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게 안 돼요. 생활이 이중적입니다. 말만 잘하지요.

우리 나라 인구의 25%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왜 이 나라가 이 모양입니까? 강남을 좀 보세요. 강남에 교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데 강남 처럼 부패한 지역이 없지 않습니까? 이러한 반응들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경각심을 불러일으키 고 도 전을 줍니다. 물론 그들의 말이 다 옳은 것도 아니고 반박 할 여지도 있지 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참 부끄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앙의 생활화」가 얼마나 절실한가를 실감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자연스럽게 신앙화되어 있다면, 구태여 예수 믿으라고 말하지 않아도, 예수를 들먹이지 않아도, 기도한답시고 눈 감고 있지 않아도, 우리의 삶이 신앙적이라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눈 에 비치고 느껴질 수 있도록 그렇게 참 자연스러운 신앙을 소 유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일이나 평일이 다름없고, 교회와 가정이 나 사회 생활이 모두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일 수 없겠습니까? 우리 문화, 태 도, 사고 방식, 우리가 하는 말, 이런 것들이 우리 의 신앙을 드러낸다 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가슴에 십자가 목걸이를 하지 않았더라도 그리스도 인임을 나타낼 수 있다면, 자연히 전도가 될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자동차 범퍼에 스티커 붙이기를 좋아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꼭 스티커를 만들어 차에 붙입니다. 예 를 들면 GOD IS MY CO-PILOT라는 스티커를 부착 하고 다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와 같이 운전하신다는 의미 를 담고 있습니다. 신앙적인 문 구입니다.

그런데 그런 차가 교통 사고를 내면 무슨 꼴입니까? 또 빨간 신호등을 무 시하고 주행하다 교통 경찰한테 적발되었을 땐 어떻겠습니까? 시련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

신앙의 생활화는 우리 믿는 사람에게 주어진 중대한 과제입니다. 지금까지 갖고 있던 우리의 사고 방식과 생활 방식과 태도와 모습 이 신앙으로 완전 히 변화되서 구태여 신앙이란 말을 하지 않아 도 신앙인의 아름다운 모 습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일상 생활 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신앙이 생활 속에서 가장 잘 나타날 때가 언제이겠습니까? 야고보 사도의 말씀(1:1-8)에 따르면, 믿는 사람들이 시련을 당했을 때, 그 신앙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삶 은 시련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잉태되는 순간부터 그 생명 이 태어나기까지는 어머니가 열 달 동 안 얼마나 호된 시련을 겪습니까! 그리고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에 도 어머니는 죽을 고비를 넘깁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기는 울기부터 합니다. 왜 이런 인생에 날 태어나게 했느냐 고 항의나 하듯이 말입니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깔깔 웃으면서 아! 인 생이 재미있구나. 이렇게 좋은 세상에 태어나다니… 하면 얼마나 좋겠 습니까?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아담이 낳은 첫아들은 웃으면서 태어 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죄가 세상에 들어와 인간이 타락하므로 인 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시련과 고통 가운데서 평 생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죽 을 때도 고통스럽게 죽는 경우가 많으며, 남은 가족들에게는 슬픔을 안겨 줍니다. 빈부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인생은 시련에서 시작해서 시련으로 끝납니다.

바로 그 내용이 오늘 본문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2절). 여러 가지 시험이라 했습니다. 나는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 니까, 하나님을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니까…나에게 는 시련이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시련은 사람을 차별 하지 않 습니다. 때와 장소도 가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생활화된 증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아무 어려움 이 없고 인생이 마냥 평안하기만 하고 즐겁기만 한 데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 예배 시간이나 기도원 집회, 열띤 부흥회에서 나타나는 것 도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 시련 의 파도가 칠 때, 폭풍이 불 때, 생각 지 않은 일이 생길 때, 우리의 신앙이 생활화되었는지 아닌지가 나타납니 다. 이는 시련이 예고 없이 수시로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상사, 의식주, 건강, 입시, 취업, 결혼, 자녀 교육, 인간 관계, 고부간 의 갈등과 같은 여러 개인적인 문제로 인해 시련당할 수도 있고, 국가 경제나 정치 문제로도 어려움에 처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靈的)인 시험 으로도 고통당합니다. 우리가 이러 한 시련을 겪을 때, 우리가 갖고 있던 신앙의 모습이 표출됩니다. 신앙의 멋과 아름다움과 힘이, 신앙의 인격이 나타납니다. 시 련을 이겨 내고 대처하는 자세로 우리 신앙의 생활화된 정 도를 감 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련당할 때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2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것은 보통 사람과는 전혀 다른 반응입니다. 신앙으로 연단되지 않은 사람 들의 경우 시련이 닥치면,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낙심하고 울고 짜증 내고 싸우고 분을 내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예 수 믿는 사람들은 정상적으 로 살지 않고 정상을 초월해서 사는 사 람들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시련을 당할 때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우리는 2절 말씀에서 시험을 만나면 기쁘게 여기라는 해답을 얻습니 다. 시련을 당하는데 기뻐하라니 도대체 말이나 되는 소 리입니까? 그 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기쁘게 여기라 는 말을 다르게 번역하면 다시 없는 기쁨으로 여기라는 뜻입니다. 기쁨 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입니다. 시련이 나에게 큰 도움이 되며, 이 시련으로 더욱 성장하게 되리 라는 발전적인 입장입니다. 시련으로 하나님 의 은혜와 복과 사랑이 넘치리라는 믿음을 갖는 것이 신앙의 생활화를 도모 하는 신앙인들 에게서 발견되는 모습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시련을 긍정적 으로, 희망적으로, 발전적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련이 닥칠 때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고 「사도신경」으 로 고백 하기 때문입니다. 그 신앙 고백의 진위(眞僞)는 우리가 시험을 만날 때, 정말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섭리와 계획과 능력 과 은혜를 의지하는지를 보 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험을 기 쁘게 여기는지의 여부로 신앙의 생활 화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시련을 기뻐해야 하는 이유

우리가 왜 시련을 기뻐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다음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시련은 신앙의 성숙을 도모합니다.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는 너희의 믿음의 시련이라고 되어 있는 구절 을 영어로 말하면 the testing of your faith입 니다. 당신의 믿음을 시험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 험은 그리스도인들을 낙 망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통해서 성장하라는 도전의 기회입니다.

시련을 통해서 믿음의 능력을 체험 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에게 시련을 주시 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러므로 우리는 시험을 만나도 온전히 기뻐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시련은 인내를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려운 시련을 통하여 당신의 믿음을 시험하시고, 그 시험에 승리할 때까지 인내하도록 훈련시키십니다. 그럼으로써 우 리는 성숙한 인 격을 가진 신앙인이 됩니다.

4절의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인내를 완성하 라는 말입니다. 왜 인내를 완성해야 합니까? 인내는 성령 의 열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인내는 거저 얻는 것이 아닙니다 . 내가 참는다고 참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인내는 온전히 하나님 의 능력으로, 성령님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인 누구에게나 이루어지 는 덕목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 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신 사람은 누구 든 인내를 온 전히 이룰 수 있습니다. 시련을 통해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 리의 인내를 완성할 때, 인격의 성숙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인격이 성숙 해지면 4절 하반절의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과 같 이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 결국 성숙한 사람들이 됩니다. 인내가 우리에게 주는 복이 이런 것입니다.

셋째로, 시련은 신앙 상태를 파악할 수 있게 합니다. 평상시에는 알 수 없던 신앙의 참 모습을 시련이 닥쳤을 때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얼 마나 간절하게 주님을 의지하는지, 그 리고 주님의 능력을 믿고 그분의 뜻 대로 살려고 하는 신앙이 있는 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련은 좋은 것입니다. 우리 는 시련을 긍정적인 자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시련 을 기쁘게 여 길 줄 알아야 합니다.

넷째로, 시련은 하나님의 지혜를 얻게 합니다. 우리가 유한하고 부족한 점 투성이고 연약한 존재인 인간임을 자각 할 때, 시련은 우리에게 큰 짐 이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 우 리의 약함을 고백하고 지혜를 구하면, 하 나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하 게 됩니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 님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하여 사는 삶이 그리 스도인의 생활입니다.

5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 고 꾸짖 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 을 때, 하나님께 매달리면 하나님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다고 하는 그 순간에, 우리의 약함을 인 정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우리 에게 임합니다. 그 래서 우리는 시련이 와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신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는 어떤 시련이 나 어려움이나 곤란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지혜를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 능력과 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마 당 신은 혼자 모든 일을 처 리했을 때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스스 로를 자랑스럽게 여겼을 것입니 다. 그러나 궁지에 몰리고 도움이 필요할 때 하나님의 지혜를 경험함으로써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다섯째로, 시련은 기도 응답을 체험하게 합니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 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 을 반영합니다. 우리가 믿고 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이러한 체험으로 우리의 신앙은 더 발전하고, 우리 의 인격은 더 성장합니다. 믿음으로 구할 때 하 나님의 지혜를 받 아 누리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인생은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시련의 연속입니다. 시련은 그리스 도인이나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 찾아옵니다. 예고도 없이 수시로 부딪치게 되는 시련 가운데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생활에서 배어 나오는 신앙의 향기를 뿜어야 합니다. 시련을 두려워하지 아 니하고 희망적이며 적극적이 고 긍정적인 자세로 대처해 나갈 때, 신앙이 성숙할 것이고, 인내를 배울 것이고 신앙의 참 모습을 발견할 것이며, 하 나님의 지혜를 얻을 것이고 기도의 응답을 체험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복 된 신앙의 생활화가 날마다 당신의 삶 가운데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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