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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자의 기쁨 (요 15: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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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가 자신의 신앙이 어느 정도의 수준에 와 있는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다시말해 과연 나의 신앙이 바로 서 있는 신앙인가 하는 사실을 분별 할 수 있도 록 해주는 기준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경에서 여러가지가 있겠습니다만 그 중에 하나가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무엇이 나를 기쁘게 하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즉, 무엇으로 내 마음이 기쁘며, 무엇으로 내 마음이 화평을 느끼며, 무엇으로 행 복해 하고 만족해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내가 기뻐하는 것이 오늘 읽은 본문에 나타나는 것들과 같은 사랑이라든가, 계명이라 든가, 친구라는 말씀들과 과 연 어느 정도 관계가 있는가 하는 점들을 정검해 보면 나의 신앙의 수준을 어느정 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게 있어서 무엇이 부족한 지를 분명히 알게 될 것입 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이 서 있는 위치를 정검하시고 더욱 분발하는 계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론> 여러분이 신자된 기쁨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로 초대받고 있다는 것입 니다. 그러므로 본문 14절의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나의 친구라는 말 씀이 오늘 본문의 핵심 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부르시고 초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가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감히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가 아니었는데 이제 그분의 친구로 초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기쁘게 되는 이유입니다.

11절에도 동일하게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친구가 아니신데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부르셔서 주님의 그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려 하시 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이요, 구원받은 신자의 삶의 내용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요14:27절을 보십시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평화와 평강을 허락하심으로 말미암아 근심 걱 정거리를 없애준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의 평안을 주심으로 세상 것과는 다른 차원의 평안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 지도 말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신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자신 감과 용기와 화평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이 평안 은 세상이 만들어 낼 수 있는 평안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평안이 어떻게 세상이 모방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평안의 기초 와 근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평안의 근거는 불확 실한 세상것 뿐인 반면에, 신자들이 갖고 있는 평안의 근거는 인간을 지으시고 평 안을 만드신 하나님으로 그 근거와 기초를 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그 기초와 근거가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근거와 기 초가 완전히 보장되고 있기때문에 그 무엇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완전무결한 평안 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쉬운 이야기이면서도 어려운 이 야기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서 가장 잘못 이해되고 있는 말중에 하나가 아마 `의리' 라는 말과 `요령'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즉, 무조건 자기 편이 되어 주는 것을 의리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고, 거저 슬 쩍 넘어가는 재주를 요령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는 요령이란 가장 경제적이고 가장 적절하게 실력을 발휘하여 부닥친 임무를 수행해 나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저 눈만 가리고 넘어갈 수 있으 면 요령 이라고 오해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의리란 정당한 이치에 따라 자기자신을 확보하는 처신입니다. 하지만 무조 건 누구의 편이 되거나 속박받는 관계로 생각하기 쉬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의 평안과 기쁨이라는 것도 세상적으로 생각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법과 근거와 자세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가치기준으로 생각하는 평안과 기쁨이란 흔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평안과 기 쁨이란 신분이 완전히 바뀌어진 다른 수준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신자들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친구로서 의리를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서 일 반적으로 오해하는 방식대로 의리를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즉 내 욕심과 내 사욕 에 무조건 편들어 주시는 것으로 예수님의 친구라는 단어가 쓰여지거나 그렇게 되 는 것을 축복이라고 그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의리리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친구로서 예수님의 수준 으로 우리를 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축복이란 예수님의 성품과 그 내용이 우리에게도 허락이 되었다는 뜻입니 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많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 여 돌아가셨다는 이 진리를 가지고 내 고집과 내 사욕을 채워달라고 얼마나 하나 님께 무리하게 요구하였으며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얼마나 아우성쳤는지 모릅 니다. 왜 우리가 참된 기쁨과 평안을 놓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의 욕심과 고집을 친구라는 미명하에 하나님께 응석부리고 떼를 쓰기 때문에 기쁨과 평안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로 부름을 받습니다. 그분의 평안을 가지기도 하며, 그분의 기쁨을 나누는 자로 초대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것들과 친구가 되거나 세상의 것들에 대하여 욕심을 내거나 경쟁하는 자리에 서지 않습니 다.

신앙 생활을 하다가 어려움을 겪으면 으례히 나오는 근본적인 변명은 이것입니다.

`목사님, 그렇게 살아 가지고는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합니다.' 이것을 마치 제 2의 신앙 고백인양 되뇌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은 신 자란 이 땅에서 영원무궁토록 잘먹고 잘살기 위하여 예수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 니다. 신자란 이 세상이 본향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정작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세상 에서 잘 사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 되어 있고, 이 세상 것을 소유하는 것이 자랑거 리요 힘이 되어 있는다는 것에 스스로 놀라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그 사실 을 까마득히 잊고 있다는 것이 더욱 무서운 점입니다.

여기서 요14:27절에 나타난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할 때 앞 뒤 말씀을 잘 연결시켜 보십시오. 그러면 그 뜻이 무엇인지 분명해질 것입니다.

요14:26절을 보십시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 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또한, 요14:28절을 보시면;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 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말하자면 `평안을 끼친다'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 라는 이 축복과 이 약속들을 앞 뒤 문장과 연결해서 보면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 의 사역과 그 존재와 연결되어서 떨어지는 결론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께서 이 보이는 물질계와 피조된 세상을 주관하고 다스리는 것은 하나의 현상에 불과한 것이요, 그 배후에 섭리하시고 간섭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손길이 우선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 세상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에 이 세상 보다 더 중요 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되면 우왕좌왕 하지 않고 평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 로 이런 차원에서의 평안을 우리 신자에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에 대해서 그토록 자신이 없고 불안과 초조와 덜컹 내려앉는 심장병을 가지는 것은 아직 신앙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고,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이 좋은 사람인 것같으나 가만히 잘 살펴보면 어떤 때는 신앙의 ABC 에서부터(기초) 막혀 있는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참으로 안타 까운 일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기쁨을 놓치고, 평안을 놓치고 있으면서 큰 일들을 하고있다 하여 괜챦은 신자라고 여기며 하나님이 내 편이라는 공허한 신 앙을 고백 하고 있다면 이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들의 삶을 이 기쁨과 평안의 말씀들을 근거로 하여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시16:8-9절에 가보면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담대함과 자랑과 기쁨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 니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 히 거하리니 기쁨과 감사는 늘 하나님께서 나와 어떤 관계 속에 있느냐 하는 것과 연결되어서 나타나는 법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내 앞에 모시며 내 우편에 앉히셔서 나의 모 든 것을 보장하시고인도하시고 지키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에 굳게 설때에 신자는 기 쁨과 감사와 찬송과 자랑과 용기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시51:11-12절에서는 그것을 역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은 다윗이 범죄하 고 난 다음에 지은 시입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다윗은 범죄하고 나자 하나님과의 관계가 흐려지고 방해를 받았습니다. 죄는 자신 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균열이 생기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담을 쌓고 만 것입니다. 그러자 곧 다윗은 기쁨이 사라졌으며, 처참하고 비 참한 자리에 떨어져 영적인 외로움과 불안을 호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행16:19-26절을 보면 바울과 실라가 전도 여행에서 잡혀 매맞고 감옥에 갇힌 장면 이 나옵니다.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 갔다가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이 유대인 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 라 이 기록은 참으로 놀라운 기록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복음과 진리와 하나님의 사 랑과 구원의 은총에 관한 말씀들을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방인들에게 전했습 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잡아다가 때리고 욕 보이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당한 일에 애하여 실망하거나 낙심하거나 억울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연히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일에 대하여 얼마나 기쁨이 사무쳤는지 기도하다가 말고 찬미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노래를 한다는 것은 더 이상 무엇으로 설명할 수 없을 때 입니다. 사람이 사랑에 사랑에 빠지면 시인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냥 하는 말과 설명으로는 표현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매맞고 갇힌 것이 무엇이 기뻐서 찬송을 했겠나 생각 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찬송이 할수 없어서 한 찬송이 아니라 얼마나 마음속 깊은 곳의 넘쳐나는 폭팔력을 가진 감동이었으면 그 찬송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응답이 옥터가 움직이며 지진이 난 것으로 나타났겠습니까 그 기쁨과 찬송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얽매어 놓을 수 없고 방해할 수 없는 기쁨으로 신자들에게 허락된 것입니다.

이렇게 그 기쁨이 갖는 엄청난 의미를 파악했다면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그 기쁨을 어떻게 소유해야 되겠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놀라운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안 이상 무조건 `기쁨을 주옵소서! 축복을 주옵소 서!' 하면서 강청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나의 친구라!'는 말씀 가운데서 그 방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과 사랑이 라는 성품적인 차원에서 그의 친구가 되는 것만이 이 놀라운 기쁨을 소유하는 길임 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라는 것이 단지 거짓말하지 않으며, 살인하지 않으며, 거짓증거하지 않으며, 계명을 지키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는 것입니다. 그보다 훨씬 깊은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고전13:4-5절의 사랑에 관한 내용들이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 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하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사랑이란 동정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당신의 사랑에 초대하는 그 사랑이란 율법적인 차원에서의 명령으로써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 하는 수준으로써 우리를 초대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이란 주님의 그 성품에까지 우리가 가야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란 우리가 주님의 그 초대하시는 놀라운 축복의 자리에 나아 가기에 우리 자신이 얼마나 불가능한가 하는 사 실을 알면 저절로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 곧 기도입니다. 우리로서는 도무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랑을 구하고 믿 음을 구합니다. 분명히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고 또한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이 기에 그러나, 이것을 우리의 실력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기에 기도가 허락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늘 자신을 위한 기도가 먼저 앞 설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부끄런운 일이 아닙니 다. 우리는 기도를 하고 또 하 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쉽게되는 야기기는 아닙니다만 사랑이란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상대방 을 얽어 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너무도 놀라운 것입니다. `나는 할 만큼 했는데 상대방은 아니더 라. 상대방도 반응이 있어야지 나만 사랑하면 뭘하겠는가'하는 말은 주님께서 말 씀하시는 사랑과는 거리가 멉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주님께서 일컫는 그런 사랑을 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셔야 됩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그 사랑에 빠지면 그 마음의 평안 을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바로 이같은 사랑에 우리가 부름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도 살펴본 바와같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쁨을 약속하시면서 사랑을 계명이라는 이름으로 허락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 사랑을 계명이라고 말씀 하셨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죄는 습관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우리의 신앙의 수준이 괜챦아져서 마음에서 사랑이 저절로 우러 나오는 때를 기다렸다가는 죽는 날까지 제대로 사랑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단 습관 을 들이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육체가 나약하고 쉽게 죄에 노출 되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거룩한 일도 일단 규칙을 정하게 되면 법을 지키는 것같 이 시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처음에는 책임감과 의무감 같은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방법으로 시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란 한번 지으면 또 짖기가 쉬워 지는 무서운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지으면 지을수록 자꾸 커지고 깊어지며 죄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사라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짓말을 하 면 버릇이 되고 사기도 치면 버릇이 되고 더러운 말을 하면 버릇이 되는 것처럼 나 중에는 그 죄가 본인에게는 죄 같지도 않아 보이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고쳐 내 야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처음에는 `..해서는 안됩니다' 하는 식의 밖으로 부터의 책임감을 지워 윤리와 도덕을 지키는 일에 힘써는 것에서 시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요즘 세상이 점점 더 악해지니까 우리 신자들은 어지간한 수준에 있는 것으로 만 으로도 꽤 괜챦아 보이는 것입니다. TV를 볼때마다 놀라는 것은 거의 다 벗고 나오 는 광경입니다. 그런데 더욱더 놀라운 것은 그것이 습관이 되어 이제는 그것에 별 저항감이 없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병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헤 어 스타일이나 화장하는 것이나 옷을 입는 것들이 아름다움을 벗어나서 조금은 미 친 지경에 가 있음을 우리 자신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말도 그렇습니다. 꽤 파괴적 이고 음란한 뜻이 담긴 말들을 신자들의 입에서 어지간히 하고 있다는 것을 경계해 야 합니다.

경건주의자자가 되고 경건을 가장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분 모두가 바로 그 러한 의미에서 죄를 멀리하는 습성을 들이도록 훈련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사랑을 하려고 애쓰지 않는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행동하 셔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직접 한번 실천해 보십시오. 그러면 기쁨 이 생길 것입니다. 노력해 보십시오. 그러면 점점 주님과 돈독해지는 것을 경험하 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루에도 몇번씩 흔들립니다. 밀물 같이 경건했다 가도 이내 썰물 같이 죄에 몇번씩 흔들리는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어온 경건을 붙잡아 두며, 죄는 점점 멀리하는 일을 의지적으로 습관을 붙여서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마음으로 이 경건을 연습하고 훈련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렇게 하지 않는 한 신앙 생활이란 참으로 진전하고 열매맺기가 어려운 것이기 때문 에 그렇게 힘쓰시기를 권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분명히 포도나무의 가지로 부름받고 있고 많은 열매를 맺으라는 요구를 받 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보람이요 자랑이라고 약속 받고 있습니다. 그 런데 그렇게 되어지기 위하여는 우리 자신이 애쓸 것이 있다고 성경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죄를 멀리하도록 애쓰십시오. 죄를 짓지 않고록 노력 하십시오. 그리고 성경이 요 구하는 일들을 힘 쓰셔야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그런 필요한 일들을 놓고서 기도 한 번 하는 것으로 자신이 변화 되리라고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시험 보는 날 아침에 교과서 한 번 훑어보는 것으로 성적이 잘 나오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이 있습 니까 마찬가지로 신앙 생활과 경건의 생활이 하루 저녁 무릎을 꿇는다고 해서 문 제가 풀릴 것이라고 여겨서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마음의 작정을 새롭게 하셔야 합니다. 말만 무성하고 비쩍 마르고 앙상한 가지만 엉성하게 서 있는 나무가 되지 않기로 작정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늘 경고하고 촉구합니다. `이 마음 이 완악하고 더디 믿는 자들이여, 이 어리석은 자들아!' 이같은 책망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힘써 노력하셔야 될 것입니다. 이제 돌이켜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참으로 복이 있도다!'라는 칭찬을 받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달리시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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