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신자의 비밀 (고후 04:7-12)

첨부 1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숙을 기대하고 스스로에게 달라진 변화를 기대한다. 신앙이 성숙하면 죄에 대한 유혹과 욕심을 끊고 살아갈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어디에서도 신자가 성숙하여 어떤 수준에 도달하면 그가 더 이상 ‘사람 아닌 사람’이 되어 죄를 안짓게 된다고 말한 곳이 없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진리라는 보배를 갖고 있는 것과 그 보배를 싸고 있는 질그릇이 변화한다는 것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질그릇이 변화했다는 것이 아니라 질그릇 안에 보배를 가졌다는 말이다. 질그릇 자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우리가 잘 되고, 죄를 더 이상 짓지 않으며, 거룩해지고 완벽해지는 것이 하나님에게 도움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완벽해짐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똑같음으로써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이야기 하는데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이 차이가 너무 크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가장 큰 차이점은 그들의 인생의 목표가 다르다는 데 있다. 일반 사람들은 그의 목표를 자기를 치장하는데 두고 산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질그릇 때문에 살지 않는다. 질그릇 자체가 치장되고 영광을 입고 자랑스러워지기 위해서 살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 믿는 사람들을 질그릇에서 금은 그릇으로 변화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지 않는다. 질그릇 안에 보배를 주셔서 그 보배 때문에 견디고 있는 것으로 영광을 나타내신다. 때로는 그 보배에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무너지는 생활을 감수하게도 하신다.
“형제들아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이 말씀은 어떤 육체라도 질그릇을 자랑하게 될까봐 주신 말씀이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질그릇)를 축복하지 않으신다. 그 안에 보석을 넣어 주실 뿐이다. ‘이 사람이 가진 질그릇이 내가 가진 질그릇보다 훨씬 못한데도 왜 좌절하지 않고, 떳떳하게 사는가’라는 의심을 세상 사람들이 일으키기를 원하신다. 질그릇 차원에서의 승리나, 남을 압도하는 것으로의 영광은 기독교인에게는 거의 없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예수 믿는다는 것은 그가 가진 보배 때문에 사는 것이다. ‘우리’라는 질그릇이 파괴되고 실패되는 것으로 무너지지 않는 보배를 갖고 있다는 것이 첫번째 증명의 목표이며 그 다음의 목표는 적극적인 것으로 이제는 질그릇을 ‘파괴하는 삶’을 살라는 요구이다. 첫번째가 세상이 우리 질그릇을 파괴하는데도 불구하고 좌절하지 않음으로써 질그릇 말고도 다른 것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며, 두번째는 신앙적인 적극성으로서 질그릇을 스스로 파괴하는 생활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 5:16-18)”
그리고 19절부터 ‘육체의 열매’가 나오고, 22절부터 ‘성령의 열매’가 나온다. 그리고 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리스도 예수 안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으니 이제 우리는 ‘육체에 대한 유혹이 없고 죄에 대한 동기도 우리 안에 없어야 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16절을 보라.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이는 ‘육체의 욕심을 이룰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선언받는 신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신자들이 육체를 좇을 수 있고 육체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말씀하는 것이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 자이다. 그러나 아직도 죄를 지을 본성이 그대로 있는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났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죄를 지을 수 있다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예수 안믿는 사람은 좋은 일을 행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가장 큰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한다. 고급스런 차원에 있는 신자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질그릇에 차이를 두고 싶어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요구하는 것은 질그릇 자체가 다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신자란 누가 어느만큼 질그릇을 의지하지 않고 보배를 의지하느냐의 싸움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변화는 그가 자기를 주인으로 삼는 것을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나의 주인을 삼는 일을 어느만큼 했느냐의 차이를 말한다. 그의 질그릇이 변한 것이 아니다. 그가 어느만큼 가치의 기준과 중점을 보배로 옮겼는가의 이야기이다.
의사가 어느만큼 실력이 있는가를 알려면 얼마나 치명적인 환자가 그 병원에 찾아오는가를 보면 된다. 교회란 바로 그런 환자들이 모인 집단이다. ‘인간이 무엇이며 죄가 무엇인지를 아는 자’가 찾아오는 곳이다. 우리의 삶은 성공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패로 점철되기도 한다. 내가 가진 내 질그릇이 부서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있는 보배 때문에 사는 삶이며, 동시에 질그릇이 깨어짐으로 말미암아 안에 있는 보배가 제 3자에게 더 많이 보여지는 삶이 신자의 삶이다. 내가 가진 질그릇이 깨어진 것이 보배가 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삶이다. 그리고 적극적 차원에서도 질그릇에서 어떻게 나의 전 주권을 보배로 옮기느냐의 싸움을 나타내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다. 그리고 어느만큼 주권을 이양하는가 하는 것은 성숙한 수준이라고 한다. 우리가 기대하는 신앙생활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신자의 생애는 질그릇이 겪어야 하는 모든 풍상을 겪으면서 동시에 보배를 가진 것으로 말미암은 자랑과 가치와 의미로서 우리의 인생의 보람을 증명해 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신자의 생활인 것이다. 성공을 요구하고 계시지 않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8)”
세상에서 부술 수 있는 것은 질그릇 뿐이다. 그리고 우리의 질그릇은 부서질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질그릇을 치장하기 위하여 살 수 는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오른 뺨을 때리거든 왼 뺨도 돌려 대라”고 하였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이 삶이 질그릇 안에 있는 보배를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삶을 하나님이 요구하신다.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가장 큰 병이 있다면 하나님을 믿으면서 세상을 의지해서 사는 사람들보다 더 훌륭한 질그릇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믿는 오해이다. 그러나 내가 요구하는 인생에 하나님이 도움을 주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구하신 목적을 위하여 우리가 부름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길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좇는 길이다. 신자가 가진 가장 굵은 신앙의 기초가 있다면 누가 대장이냐 하는 문제이다. 바로 하나님이 대장이다. 신자의 생활이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일 때문에 주어진 배역이다. 사는 것이 사명이다. 우리의 가정, 직장, 모두의 인생이 그리고 이 시대와 이 국가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무대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길로 걷게 하심으로써 옆에 있는 이웃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일이 있어서 맡긴 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축복받은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명으로 요구되어 있다. 나에게 주어진 길, 인생을 하나님 앞에 정말 바칠 수 있어야 한다. 그때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오늘 나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그 놀라운 기적과 능력과 영광과 감격들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