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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전능한 사랑의 표 (요 1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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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중학교에 들어간 한 아이의 수학 점수가 항상 바닥이었습니다. 엄마는 과외도 시켜보고 학원도 보내봤지만 전혀 나아지지가 않았습니다. 아이가 종교를 가지면 좀 나아질까 하는 기대감에 엄마는 교단에서 운영하는 미션 스쿨로 학교를 옮겼습니다.
학교를 옮긴 첫날 집에 돌아온 아이는 인사도 하지 않고 곧장 방으로 들어가더니 공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밥먹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 이외에는 계속 공부만 했습니다. 엄마는 궁금했지만 공부하는 아이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냥 관망만 했습니다. 그러기를 몇일, 하루는 돌아와서 성적표를 거실에 놓더니 또 곧장 들어가서 공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엄마는 성적표를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수학이 100점이었던 것입니다.
엄마는 기쁨에 찬 얼굴로 아이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학교가 맘에 드니 수학을 100점 맞았더구나... 널 이렇게 만든 게 뭐니... 선생님이 좋은 분이시니...' 그러나 아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 책만 보았습니다. '엄마에게 말 좀 하려므나, 네가 정말 자랑스럽구나...' 그러자 아이는 굳은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교 현관에 더하기 표시를 봤어요...' '더하기...' 아이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예, 더하기 표시에 어떤 남자가 손과 발에 못박혀 매달려 있었어요. 엄마, 그 학교는 수학에 대해서는 장난이 아닌 것 같아요...'
재미있는 유우머입니다. 수학 못하는 자녀들을 둔 학부모들이 계시면 이제 자녀들을 꼭 미션 스쿨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정말 십자가는 수학적 기호로는 더하기 표시입니다. 거기에 기독교적인 메시지가 함뿍 담겨져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더한다는 것은 일치요 화해요 공존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화해(和解)입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불화투성이가 되어버린 혼돈과 어둠과 공허의 세상,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신, 인간과 자연... 이 부조화의 세계를 조화롭게 하기에 가장 절실한 것이 화해였습니다. 그러나 이 화해는 인간이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화해를 위해 인간이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연약하고 죄인이며 하나님과 원수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이루어낼 수 없는 이 화해를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을 통해 이루어내시는데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대적하는 인간들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일방적 사랑이 십자가요 그것을 통해서 이루어 내신 것이 바로 화해요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이 화해는 처지를 뒤바꿈으로서 가능했습니다. 인간을 높이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은 낮아지셨고 인간으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 하나님 자신은 죽음 속으로 들어섰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인간의 가장 비참한 자리인 죽음의 자리에 내려서고 그로 인해 인간을 가장 존귀한 하나님의 자리로 올라 앉힌 것이 바로 십자가인데 여기서 화해의 심오한 기적이 발생함으로서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이 종려주일 아침에 우리가 묵상해야할 첫 번째 주제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인된 인간을 의인으로 새롭게 창조하시는 작업의 중심에 있습니다. 이 새 창조는 타락이 시작되었던 곳 곧 인간에게서 시작되어야 하기에 주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던 것입니다.
화해는 오로지 사랑으로서만이 가능합니다. 십자가는 화해를 도모한 다함없는 사랑이었는데 이 사랑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유대인들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을 하루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나누십니다. 유월절은 우리가 아는대로 구원과 관계된 날이요 또한 희생과 관계된 날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설주에 발라진 희생양의 피로 인해 죽음의 신이 건너뛴 그 날을 기리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가 바로 유월절입니다. 그 전날 밤에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나누시면서 또 하나의 출애굽과 희생을 암시하시며 제자들에게 뭔가를 당부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본문 속에서 세 인물에 초점을 맞추면서 우리로 저들을 주목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 세 인물이란 바로 예수님과 시몬 베드로와 가룟 유다입니다. 본문의 초점은 이 세 인물에 맞춰지고 있는데 그렇다면 요한이 이 세 인물을 언급하면서 저들을 통해 각기 상징적으로 증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이 세상에는 흔히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사랑하는 사람'이고, 둘째는 '사랑을 받지도 않고 주지도 않으려는 사람'이고, 셋째는 '사랑을 받고도 배신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 세 종류의 인간상이 차례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먼저 주님은 '사랑하는 사람'의 전형입니다. 1절에 보면 주님은 '저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끝까지 사랑했다'는 말은 아무 것도 모르는 자, 형편없는 자, 사랑 받을 가치조차 없는 자들을 완벽하게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이게 진정한 사랑의 모습입니다. 무한한 사랑이란 한계가 없는 사랑입니다. 인간적 사랑, 인간적 우정들은 곧 한계에 부딪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채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전능입니다. 전능한 사랑이란 끝까지 가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전능함은 바로 죽음입니다. 끝까지 가는 사랑이란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죽는 겁니다. 죽지않고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내가 죽어야 진정으로 남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살아있어서는 결코 온전한 사랑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교부 크리소스톰은 이 본문을 주석하면서 '예수님께서 어느 제자부터 씻겼을까'라는 상상력 풍부한 질문을 던지면서 '가룟 유다부터 씻겼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가장 사랑하기 어려운 자를 먼저 사랑해야 전체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법'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 자세로 사랑을 베풀면 모두를 사랑할 수가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랑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의 말처럼 주님은 사랑할 대상을 찾아서가 아니라 사랑의 대상을 창조하면서 인간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아주셨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이 장면은 민망스런 장면입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나서서 주님의 발을 먼저 씻겨드려야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서로 네가 크냐, 내가 크냐는 자리 다툼에만 온갖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질투나 경쟁심리에 사로잡히게 되면 이성을 잃고 눈이 어두워져 마땅히 해야할 일, 보아야할 일을 가누지를 못하게 됩니다.
제자들이 유월절 잔치 음식을 먹으러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꼭 발을 씻어야 했지만 저들은 그 더러운 발로 그냥 방에 들어섭니다. 누구도 서로 섬기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무더운 지방에서 샌들을 신고 걸어 먼지투성이가 되어 버린 발을 씻지 않고 13명이나 되는 이들이 한 방에 들어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떠했겠습니까 그 열 두 사람 중에는 그 어느 누구도 주님의 발을 씻겨주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었습니다.
내일이면 이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분입니다. 이제 곧 이 만찬이 끝나면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민망하여 죽게되었다'고 탄식하실 분이십니다. 일생일대에 가장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의 순간을 눈앞에 두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런 그분께 명색이 제자라는 자들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의연하게 겉옷을 벗어 자신의 지위를 포기하고 종과 같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겉옷을 벗는 것은 사회적인 온갖 특권과 신분을 벗어던지는 것을 뜻하고 발을 씻는 것은 노예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의 이러한 행동은 사랑에 대한 모든 인간적인 표상들을 깨뜨리는 그 유례가 없는 실로 충격적인 행위였습니다. 발은 인체에 있어 가장 더럽고 수치스러운 부분으로 여겨졌습니다. 지금도 중동지방에서는 '실례합니다'라는 말없이 발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례한 일로 여깁니다. 거리를 걸어다닌 사람들의 발은 언제나 먼지와 오물로 더러워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가장 비천한 하인이라든가 노예들이 집안 사람이나 손님들의 발을 씻는 일을 맡아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친히 그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주님의 행동에 놀라 그저 멍하니 쳐다만 볼 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얼 배우게 됩니까 인격이 바로 된 사람은 내게 괴로운 일이 있더라도 먼저 상대방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 기분, 내 환경이 그대로 내 언행에 반영됩니다. 그래서 괜히 신경질을 부리고 짜증을 냅니다. 남이 어떻게 되든 상관치 아니하고 자기 화풀이를 남에게 쏟아놓습니다. 인격이 성숙치 못한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타인의 성숙을 위해 자기 자신을 주려는 의지입니다. 상대방이 부족하고 허물투성이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제자들은 주님께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세상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연합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자들입니다. 허물이 많은 자들입니다. 죄에 물들어 있는 자들입니다. 완전하지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런 저들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럼 주님의 이러한 사랑이 어찌 가능할까요 1절에 보면 주님은 '당신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주님이 돌아가실 때가 아셨다는 말이 1절과 3절에 거듭 반복되고 있습니다. 주님이 끝까지 저들을 사랑하신 동력은 마지막을 생각하는 마음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촛불이 꺼지기 전에 더욱 밝게 빛나지 않습니까 주님은 당신의 남은 때가 얼마 되지 않은 줄 아시고 사랑의 불꽃을 유감없이 태우십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최후로 무엇을 하느냐는 그가 평소에 무엇을 위하여 살았느냐에 좌우됩니다. 사랑하면서 살아온 사람이라면 더욱 간절히 사랑할 것이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것으로 살아온 사람이라면 더욱 탐욕의 눈망울을 굴릴 것입니다. 주님은 전자였고 가룟 유다는 후자였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마지막 날'은 원칙상 그날이 '오늘'입니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날마다 오늘을 '마지막 날'로 여기고 살아야 합니다. 이를 일컬어 종말론적 삶의 태도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도 주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되 끝까지, 온전하게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다'라고 생각하고 이웃을 대해 보십시오. 사랑할 수 있고, 인내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임을 주님은 이 성만찬의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일깨워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 인생 유형, '사랑받지도 사랑하지도 않을 인생'을 살펴보십시다. 베드로는 사랑을 받지도 않고 주지도 않겠다는 사람의 전형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발을 씻어주시겠다는 주님의 행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이때 주님은 '당신의 사랑을 받는 경험이 없으면 결코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그 사랑을 보여 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체험만큼 행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제자가 되는 구체적인 길은 그분의 사랑을 받는 것이요 그리해서 그분으로부터 내가 어떠한 사랑과 섬김을 받았는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랑을 받은 자임을 깨우쳐 겸손히 사랑할 자를 만드십니다. 사랑받은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일생 동안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입었다는 마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자는 진정한 사랑의 가치개념을 좀처럼 갖지를 못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받을 때만이 우리는 그 받은 바 사랑으로 자기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걸 알고 계신데 반해 베드로는 너무도 모르는 게 많습니다. 사랑의 중심점은 이해입니다. 이해하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하면 사랑할 수 없는 겁니다. 우리가 왜 상대방을 사랑하질 못하는 겁니까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나중에사 비로소 주님의 사랑이 겸손의 극치였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벧전5:5절에 보면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권면합니다. 나중에사 그 주님이 허리에 질끈 동여맨 수건이 겸손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겸손이 겸비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일 수 없습니다. 고자세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마치 베풀 듯이, 선심이라도 쓰는 듯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주고 고통을 줍니다. 겸손이 없는 사랑은 자기도 피곤하고 남도 피하게 합니다. 그러기에 그런 사랑은 끝까지 가는 사랑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어떤 사람들은 권리만을 가지고 있는 주인이고 어떤 사람들은 의무만을 가지고 있는 종인 상태가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여기는 자였습니다. 즉 그는 불평등한 사회를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주는 것을 용납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런 베드로는 향해서 주님은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이제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엉겁결에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에 승복하지만 여전히 그는 주님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지를 못합니다. 받지도 않고 주지도 않겠다는 이 계산적 모습을 주님은 기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주고 받는 모습을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그 다음 세 번째 인물인 가룟 유다는 '사랑을 받고도 배신하는 사람의 전형'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와 유다를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실패를 극명하게 대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가룟 유다는 인생의 성패 그리고 인생의 명암이 엇갈리는 하나의 사표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유다는 일말의 동정을 사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본문 2절에도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마귀가 그런 생각을 유다에게 심어주었지만 그에게 스승을 팔아넘기려는 생각이 자라서 열매를 맺을만큼 기름진 토양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로 하여금 마귀가 넣어준 생각을 자라게 한 토양이 무엇이었을까요 마음밭이 옥토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이건 유다가 책임져야할 부분입니다. 그 생각을 떨쳐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와와 똑같은 전철을 밟고 맙니다. 그는 주님의 사랑을 배신으로 갚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은전 30에 원수의 손에 넘겨주고 맙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조차도 다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신임하던 제자의 배신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가장 믿었던 제자 중의 하나로부터 버림받는 주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그러나 3절에 보면 주님은 그것을 다른 차원에서 소화해 버립니다. 그건 주님께 단순히 제자의 배반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셨다고 했습니다. 개인에 대한 원망보다 섭리적 차원에서 모든 것을 소화하십니다. 그러기에 저를 끝까지 사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앎은 2중적 앎입니다. 하나는 현실적 인식이요 하나는 섭리적 인식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현실적 인식은 있으나 섭리적 인식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현실적 인식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섭리적 인식에 약합니다. 내 주장이 너무 강해서 하나님의 뜻이 서질 못하고 내 입장을 절대화하다보니 하나님이 설 자리를 빼앗아버립니다. 거기에 참사랑은 체험되지 않습니다.
이러기에 주님의 사랑이 참으로 전능한 사랑인 것입니다. 배신도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가는 데 한 역할을 하는 겁니다. 배신당해보지 않고 어떻게 참사랑을 알 수 있습니까 사랑은 배신까지도 품는 겁니다. 이런 사랑을 주고 받을 때까지는 아무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후에는 알리라...' 참으로 은혜스러운 말씀입니다. 어렸을 때 어른들이 하는 말씀 중에 가장 듣기 싫은 말 중의 하나가 바로 '너도 늙어봐라' '너도 겪어 보면 알게 될 거다'라는 소리였습니다. 인간사나 사물의 간단한 이치도 연륜이 쌓여 스스로 겪어 보지 않고는 모른다는 소리였는데 왜 그 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었는지 모릅니다. 아마 노인네들보다 내가 더 많이 배웠다는 젊음의 오만과 미숙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주님께서 잡혀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남기신 유언 중에도 이런 말씀들이 들어있습니다. 16:12절의 '나는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라는 말씀도 그렇고 본문 7절의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깨달음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서두른다 해서 앞당길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얻고 싶어한다고 해서 얻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제자들의 길에는 모든 것을 서로 얼굴로 마주보듯 보게 될 깨달음의 '그날'을 향해 스승의 뒤를 따라 정진할 따름입니다.
무엇이든 너무 조급하게 생각지 말 일입니다. 사랑도 마치 농사처럼 부지런히 심어 놓으면 언젠가는 거둘 것입니다. 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어머님이 추운 겨울밤 컴컴한 문밖에서 딸을 기다립니다. 왜 이 추운 밤에 밖에 서 있느냐고 하니 딸이 아직 오질 않아 기다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추운데 들어가서 기다리시지, 밖에 서 계신다고 딸이 더 빨리 들어오는 것도 아니잖느냐고 했더니 그분 말씀이 '여기 서 있으면서 깨닫는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처녀 시절에 밤늦게 돌아다닐 적에 당신 어머니가 얼마나 걱정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나면서 그 때 일을 회상하며 뉘우치며 서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사랑은 이런 사랑이었습니다. 쉬이 이해못할 사랑입니다. 발씻음에 대한 베드로의 항의는 그것이 얼마나 심하게 자연인의 지각에 거슬리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자연인으로서는 이해되지 않고 전혀 그런 일을 원하지도 않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이 참사랑임을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증거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사랑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남을 돌보기보다는 자신이 무슨 보물이나 되는 듯이 귀하게 다루어지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그저 나 자신, 내 가족만 보물인 것처럼 행동하지 않습니까 그런 인식으로 어떻게 주님의 이러한 사랑이 이해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것들을 과감하게 파기하지 못하는 자는 아직 제자가 아닙니다. 남에게 아무런 대가도 기대치 않고 위안과 이해와 사랑을 주기 시작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성숙한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참된 성숙의 지표는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사랑을 줄 수 있는 능력입니다. 성 프란시스의 기도문 속에서 우리는 그런 제자의 흔적을 보게 됩니다. '오, 주님!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이해받고 사랑받기 보다 먼저 주는 것이 더 중요함을 알기 전에는 주님의 길을 따라갈 수 없음을 알고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과 그 희생을 생각하며 전능한 주님의 사랑을 몸에 새겨가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는 전능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드러난 아름다운 표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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