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십자가를 내리자 (요 03:12-15)

첨부 1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이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존재할 수가 없다. 십자가는 기독교가 출발하는 시발점이며 결국은 돌아가야 할 종착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그 십자가를내리자는 글을 쓰려고 한다. 교회의 꼭대기를 치장하고 거룩한 강대상의 뒷면을 장식하는 나무로 만든 십자가는 이제 교회에서 사라져야 한다. 콘스탄틴 황제의 승리와 기독교의 공인 이래 기독교회의 상징물이 되어온 예수의 십자가는, 그것이 아무리 우리 죄를 구속하는 표라고 하더라도, 이제 교회에서 물러나야 한다.

사람들은 살인하지 말라든지 간음하지 말라는 따위의 계명들에 대하여는, 요즈음이 율법시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는 계명인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든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혹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이나를 막론하고 아무런 형상도 만들지 말라는 계명에 대하여는 무감각하고 무관심하다. 십자가는 땅에 있는 것의 형상이 아니던가. 예수가 속죄의 제사를 드린 후에는 십계명을 어겨도 되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살인해도 괜찮고 간음해도 괜찮은가. 살인은 해서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십자가라는 나무 형상은 왜 만들어 걸어 놓는가. 여기 분명한 모순과 자가당착이 숨어 있다.

물론 기독교인들이 십자가를 교회당에 걸고 목걸이로 만들어 목에 걸고 다니는 것은 그것을 우상으로 생각하여 그러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죄에서 건져준 예수의 사랑이 고맙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가 너무나 감격스러워 어떻게 해서든지 그 사랑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또한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감사의 표시로 그런 형상을 만들었다는 것은 틀림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십자가라는 것이 나무로 만든, 땅 위의 형상이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고, 그 어떤 형상이라도 만들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도 너무나 분명하기에 우리는 십자가를 내려 놓아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며, 자신이 크리스챤이라는 표를 내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는 그런 십자가를 목에 걸지 않더라도 가능하며 자신이 크리스챤이라는 표시 역시 목에 걸린 십자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그렇게 교회 안팎에 걸어 놓는 것이 아니며, 신자들의 목에 걸려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의 삶에 있어야 하는 것이며 몸에 새겨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이던가.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진정한 감사는 말이 아니고 돈이 아니라 우리의 달라진 삶이다. 우리의 삶이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전과는 다른 삶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감사며 찬양이다. 그러나 이 말에는 여러가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나의 삶이 이전과 달라졌다고 말할 것인가. 우리는 흔히 도덕적인 타락에서 대오각성하는 것을 변화한 삶의 전형인 것처럼 얘기들 한다. 그래서 흔히 등장하는 예화 가운데 하나는 전과 몇 범의 깡패가 회개하고 예수 믿어 이제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간증이다. 예수 믿기 전에는 걸핏하면 화를 내던 사람이 이제는 웬만한 일에는 화를 내지 않는 온유한 사람이 된 것을 예수 믿어 변화된 삶이라고 생각한다. 이전에는 교통법규도 잘 지키지 않았는데 크리스챤임을 나타내는 물고기 표시를 차 뒤꽁무니에 달고부터는 교통법규를 잘 지킨다는 얘기도 변화된 삶의 한 전형으로 얘기된다.

그러나 이런 모든 얘기는 성경이 말하는 삶의 변화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깡패가 주먹질을 버린 것이 나쁜 것이라는 얘기가 아니고 도로교통법을 어기며 운전하는 것이 좋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그런 것들은 성경이말하는 삶의 변화는 아니란 말이고, 따라서 그런 증표를 들고서 예수의 십자가에 동참했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화해야 한다는 말인가.

여기서 구약의 모델을 생각해 보자. 구약에서는 예수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사건이 크게 두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죽음의 사자가 자기들의 문지방을 넘지 않은 사건이고, 또 하나는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께서 친히 지적하시는 대로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든 사건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가나안을 향하여 가고 있을 때, 그들은 우리가 잘 아는대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대적하여 자기들을 애굽 땅에서 종살이나 하며 살도록 내어버려 둘 일이지 괜히 가나안으로 불러내어 이 고생을 시킨다고 투덜거렸었다. 하나님은 이들의 원망과 불평을 참지 않으시고 불뱀을 보내어 그들 모두를 광야에서 멸망시키려고 하셨다. 그러나 모세의 기도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멸을 면하고 다시 가나안을 향해 가게 되는데 여기서 등장되는 것이 놋뱀이다.

불뱀에 물려서 죽어가던 사람들이 놋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살아난 사건은 신약에서 그대로 예수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모형이 된다. 그래서 예전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도 예수의 십자가를 쳐다보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물론 옳은 가르침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놋뱀을 쳐다보고 나음을 입은 것처럼 우리도 확실히 예수의 십자가를 쳐다보기만 하면 나음을 얻는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다. 놋뱀을 쳐다보고 나음을 입은 사람들이 변한 것은 무엇이며,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구원 얻은 사람들이 변한 것은 무엇인가 전자의경우, 사람들의 성품이 온화해졌는가. 아니면 이웃끼리 사이좋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었는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인간적인 성품이 바뀌지 않았다.

그들의 변화는 다른 것이 아니다. 오직 죽어가다가 살아난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를 불러내어 데리고 가고자 하는 목적지인 가나안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싫든 좋든 그들은 가나안으로 가는 삶을 살았다. 예수의 십자가 역시 이와 동일하다. 우리의 성품을 바꾸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인격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꾸게 한다. 가나안으로 가느냐 애굽에 머무느냐를 결정한 것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라면, 광야에서 놋뱀을 든 사건은 우리가 애굽을 빠져나와 가나안으로 가다가 광야에서 원망과 불평과 간음으로 망하느냐 아니면 계속 가나안으로 가느냐를 가름하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두 사건 모두 가나안으로 가는 삶이 없다면 만사 헛 일이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서 장자가 죽는 재앙을 피하는 신앙의 체험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너지 않고, 애굽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간증하고 돌아다녔다면,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광야에서의 놋뱀 역시 마찬가지이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다가 놋뱀을 쳐다 보고 살아났다면 가나안을 향하여 직행하는 것이 살아난 의미이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삶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인간적인 인격이 변화하는 것을, 홍해를 건너는 삶인 줄 착각하고, 죽을 죄에서 건져 주심을 감사하여 하나님께 찬양하고 앉아 있는 것을, 가나안을 향해 가는 삶인 줄 오해한다.

그러면 무엇이 가나안으로 가는 삶인가. 우선은 가나안에 상대되는 애굽을 버리는 삶이다. 여기서 애굽은 당연히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세상을 상징한다. 자유가 뭔지 모르지만 그런 사치스런 단어는 내 앞에서 꺼내지 말아라. 나는 처자식 먹여 살리기에도 바쁜 몸. 누군 자유롭고 싶지 않아서 매여 사는 줄 아느냐. 가나안인지 자유의 땅인지는 너나 실컷 가라. 나는 여기서 벽돌이나 구워 처자식 먹여 살리는 게 급선무이다. 우리가 어디에 매여 누구에게 종노릇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문제가 정리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광야에 나가서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문제가 되었고 급기야는 원망과 불평을 토로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 가나안은 먹고 마시는 문제가 아니다. 자유의 문제이고 사랑의 문제이다. 가나안은 굶더라도 자유가 좋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고, 자유로우므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사랑을 노래하는 무대이다. 그러나 이 자유라든지 사랑이라든지 하는 개념 역시 쉽게 이해되지 않는 내용들이어서 얘기는 자칫 고양이가 제 꼬리 잡고 빙빙도는 꼴이 되기 쉽다. 여하튼 가나안은 천국의 모형으로, 애굽이 빵을 먹고 사는 세상이라면 가나안은 말씀을 먹고 사는 곳이며, 애굽이 에덴 동산을 쫓겨난 아담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경작하는 삶이라면 가나안은 에덴 동산에 살던 아담이 에덴동산을 경작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의 십자가는 애굽과 가나안의 경계선에 위치하여 애굽을 버리고 가나안으로 가는 사람들에게 능력이 되고 은혜가 된다. 그렇다면 더욱더 예수의 십자가를 높이고 기려서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이 글의 제목은 「십자가를 내리자」인가.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사람들이 가나안으로 가지 않기 때문이다. 즉 예수의 십자가가 그 본래의 의미대로 살아 있지 않다는 말이다.

콘스탄틴 황제의 승리 이래, 수치와 고난과 버려짐의 상징이었던 십자가는 승리와 정복과 다스림의 상징으로 변해 버렸다. 오늘날 기독교가 간직하고 있는 십자가는 예수의 십자가가 아니라 콘스탄틴 황제의 십자가이며, 따라서 자신을 주어 형제를 살리는 대속의 십자가가 아니고, 형제의 것을 빼앗음으로 능력있는 자가 되는 세상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된 권세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 공인은 기독교의 타락과 의미 상실의 출발점이지 결코 진정한 기독교인을 만들어 내게 된 사건은 아니다. 세상이 십자가라는 가면을 뒤집어 쓰고, 트로이의 목마처럼 행세하게 된 출발점이 바로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이다.

예수의 십자가가 그 본연의 의미를 다하였다면 우리는 애굽을 떠나 가나안에 도달했던지 아니면 적어도 그 과정 중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기 같은 죄인이 가나안으로 갈 수 있게 된 것을 감사만 하고 있지 실제로 가지는 않고 있다. 불뱀에 물려 죽게 된 것을 놋뱀을 들어 살려 놓았더니 인간들은 가라는 가나안으로는 가지 않고 그 놋뱀을 향하여 분향하고있는 것이다. 왜 그랬겠는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놋뱀을 들어 죽을 죄인을 살려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에서이다.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왕하18:3-4) 이스라엘 자손이 놋뱀을 향하여 분향한 것이 우상을 섬기고 싶은 마음에서였겠는가.

산당이니 주상이니 아세라 목상이니 하는 것도 실제로 이스라엘 자손들의 머리 속에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 없이 만든 것들이었겠는가. 이래서 성경이 어렵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시도 자의적으로 우상을 섬긴 적이 없다. 하나님 보시기에 결과적으로 그들이 우상을 섬겼을 뿐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자기들 딴에는 성전을 건축하고 예수의 십자가 은혜에 감사하여 십자가로 아름답게 치장하고 십자가를 향하여 기도하지만, 성전은 히스기야가 제한 산당에 불과하고 십자가는 히스기야가 부숴버린 놋뱀 조각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벽돌로 지은 성전에는 계시지 않을 뿐더러(행7:48, 17:24), 십자가를 목에 걸고 벽에 걸어 감사를 표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미 신물이 나신지 오래이다. 어떻게 하나님이 벽돌 속에 거하시겠는가. 오직 하나님은 우리 속에 거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성전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들이 벽돌로 성전을 건축하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으로 비워드리고 싶지 않다는 반증이고, 따라서 벽돌 성전은 우상의 산당이 되는 것이다. 십자가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음을 선언한 바 있다(갈6:17). 예수의 흔적이 무엇이었겠는가. 사도 바울의 몸에 있었던 예수의 흔적이란 다름 아닌 예수의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삶은 이미 이전의 사울은 죽고 그리스도만 살아 있는 삶이었던 것이다. 바울의 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셨기에 바울 역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는 삶을 살 수 있었는데, 이것이 결국에는 돌아가야 할 기독교인의 종착지로서의 십자가이다.

사람들이 나무 십자가를 교회 꼭대기에 걸어 놓고, 목걸이를 하여 걸고 다니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은그 십자가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예수만 나무 십자가에 달리고 자기 자신은 거기에 편승하여 잘 먹고 잘 살겠다는 발상에 다름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에 하나된 삶이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나면 예수께서 본을 보이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게 된다. 당연히 이 십자가는 나의 몸에 지워지는 것이고 나의 몸을 죽이는 하나님의 저주이다. 하나님의 역설은 죄인에게는 은혜를 베풀고, 아들은 저주하신다는 사실이다. 십자가는 저주이다. 예수님의 표현대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음이다. 그러나 그렇게 버림받음이 영생의 길목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영생을 원하긴 하면서도 자신이 버림 받기는 원치 않는다.

그래서 예수는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 없이, 오늘날 모든 기독교인이 떠 받드는 기독교의 교주, 우상이 되어 있다. 겸손을 가장한, 우리가 어떻게 예수처럼 살 수 있는가라는 말 속에 숨겨진 본래의 뜻은 예수의 영광에는 동참할 수 있지만 예수의 십자가에는 동참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예수의 모든 것은 무조건 거룩하고 무조건 옳으시고 무조건 찬양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우리가 흉내낼 수도 없거니와 흉내내려고 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예수의 십자가 역시 우리의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교회당에 걸어 놓고 쳐다만 봐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뇌어야 한다.

오 주님, 이 미천한 것이 당신의 십자가를 쳐다 보나이다. 내 죄를 위하여 몸 버려 피흘리신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그리고는 다시 자기 자신의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가 사업을 하고 장가를 가고 집을 짓고 벽돌을 굽는다. 천국은 예수의 십자가 은혜로 가게 되어 있다. 우리는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지으며 열심히살면 되는 것이다. 다만 사고 팔 때 저울추를 속이지 않으며 집을 지을 때 최선을 다하여 튼튼히 지으면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우리가 예수의 제자된 도리 아니겠나.

모두가 꿈이다. 별주부전에 나오는 토끼가 자신은 간을 빼놓고 다닌다는 기발난 재치로 용왕을 속이고 사지를 벗어나는 것은 우리 모두 웃어줄 수 있는 얘기이지만,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거나 교회당에 걸어 놓고 다니다니, 이거야말로 토끼가 간을 빼놓고 다니는 것보다 더 넌센스이다. 우리 모두 교회당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내리고우리들의 목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버리자. 그것은 감사도 은혜도 아니고 다만 하나님이 그토록 만들지 말라고 경계하신 우상일 뿐이다.

밖에 있는 십자가를 부수어 버릴 때 비로소 우리는 십자가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교회당 꼭대기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내리지 않는 동안 우리는 십가가의 관념, 십자가의 이데올로기에 붙잡혀 있을 뿐이다. 절에 있는 불상이 우상인 줄만 알았지 십자가가 우상일 줄이야! 우상을 손에 쥐고 어떻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가겠으며, 예수가 살았던 삶을 살 수 있겠는가. 여호와 앞에 정직히 행한 히스기야처럼 우리도 십자가를 버리자. 그러면 십자가의 삶이 전개될 터이다.

이호식 글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