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십자가 앞에서 (사 59:1-4)

첨부 1


오늘 우리는 종려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종려주일은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 가셨을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흔들며 환영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주님은 왕처럼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지만 며칠이 못되어 죄인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고난절 동안의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도 조용하시고, 평안하시고, 침묵하시는 모습이셨습니다. 그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호산나를 부르면 환영할 때에도 주님은 별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주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거짓말 앞에서도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빌라도의 심문 앞에서도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 의해 붙잡혀 오고,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을 박았지만 그것은 이미 인간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어라고 하든지, 빌라도가 어떻게 묻든지,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든지 아무런 말씀도, 변명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인간의 죄를 지시는 대속 양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에 끝까지 순종하실 뿐이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죽음으로 온 인류에 구원의 길이 열리고 있는 것을 내다보시면서 고통과 수치의 맨 끝자락까지 남김없이 담당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고통과 고난의 길을 홀로 가시는 동안 그 주변에서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소란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구경나온 사람들, 동정하는 여인들, 비난하는 바리새인들, 집행하는 로마병정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끌벅적한 사람들 속에서 몇 사람의 특별한 모습과 행동은 우리의 마음에 큰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십자가 앞에서 보여준 이 분들의 믿음들을 눈여겨 보면서 이 고난절을 진실된 믿음으로 보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1. 구레네 시몬(21)
이 사람은 아마도 유월절 절기를 성전에서 지키려고 오래간만에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구경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있다가 갑자기 로마 병정에게 붙들리어 십자가를 대신 지고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못박히실 십자가를 끌고 가시던 예수님은 너무 지쳐있어서 더 이상 그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언덕을 오르실 수 없으셨습니다. 보다 못한 로마병정이 근처에 눈에 띄이는 사람중 하나를 끌어내어 대신 지게 하였는데 그 사람이 바로 구레네 사람 시몬이었습니다. 아마도 몹시 재수가 없어 했을 것입니다. 하고많은 일에 죽을 사람의 사형틀을 대신 지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창피하고 기분 상하는 일이었겠습니까!
그러나 고난 뒤에 축복이 있듯이, 좁은 길 뒤에 생명이 있듯이, 십자가 뒤에 부활이 있듯이, 이 구레네 사람은 이 한 번의 재수 없는 고난이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축복의 길이 되었습니다. 이 십자가를 대신 진 구레네 시몬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사람이 되었을 뿐 아니라 가장 가까이서 예수님의 최후를 보게 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예수님의 구원의 은총을 가장 먼저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구레네 시몬을 소개하면서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자세히 그를 알고 기록하였다는 것은 초대교회가 이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초대교회가 이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뜻인 것입니다. 로마서16:13의 말씀에 이를 뒷받침하는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주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이 말씀은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진 후에 그 스스로는 물론 그의 가족까지 모두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된 것을 짐작케 하는 구절입니다. 시몬은 고난의 길을 예수님과 함께 가는 동안 주님의 눈빛과, 숨결과 그 모습을 보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 죽음의 현장에서도 오히려 주님의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고 새 결심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그 가정까지도 구원하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때로 믿음은 죽음을 명령하는 것 같지만 그 길이 생명의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때로 믿음은 좁은 길을 가야 하지만 그 길이 축복의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뒤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시몬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는 점일 것입니다.

2. 백부장(39)
이 백부장도 구레네 시몬처럼 예수님의 죽음을 가장 가까이서 본 사람입니다. 백부장은 로마 장교입니다. 아마도 이 처형을 총 지휘하는 지휘관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교가 예수님의 죽음을 보면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고백하기를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한 것입니다. 어떻게 로마의 군인으로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전서1:18
십자가는 믿음이 없는 사람의 눈에는 조롱거리였지만 진실한 눈으로 예수를 바라본 사람들에게는 그 어떤 자리에 있든지, 그 누구에게든지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비록 예수님의 죽음의 현장이었지만 구레네 시몬도, 십자가를 감독하던 백부장에게도 이 구원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가장 가까이서 예수님의 눈을 바라보았을 때에 그 심령이 변화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는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가던 강도까지도 구원을 받지 않았습니까!
누구나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이나, 기적을 보고 ‘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처절한 죽음의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고백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예수님의 죽음을 보면서 ‘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백부장 뿐 아니라, 시몬도, 강도까지도 한결같이 예수님의 겉모양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혼을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참 모습에 감동된 것입니다.
시몬도, 백부장도, 강도도 가장 가까이서 예수님의 처절한 모습을 보았지만 주님을 향하여 믿음의 고백을 하는 것을 모면서 큰 감동을 받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화려한 겉모양에 현혹되는 우리들의 삶을 부끄럽게 하는 위대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성도 여러분, 깊은 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다만 겉으로 주여, 주여, 하는 신앙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에 감동하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되고,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되고, 예수님의 삶에 감동되고, 예수님의 은혜에 녹아져서, 그 분을 사랑하고, 그 분을 좋아하고, 그 분을 닮아 가고, 그 분에게 순종하고, 그 분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고난절은 예수님을 향하여 ‘잘 하셨습니다’ 박수를 치는 절기가 아니라, 예수님께 감동되고, 예수님의 은혜에 녹아지는 절기입니다.

3. 여인들(40-41)
십자가를 끝까지 지켜본 사람들은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여성들이 감성적이기 때문에 신앙에 열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리디 여린 여성들이 마음을 다져 먹으면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일을 해 내는 것입니다. 나약해 보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여성들의 용기는 남자들도 할 수 없는 일을 해 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는 죽기까지 따르겠다며 큰소리치던 제자들이나,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주여, 주여, 하며 따르던 사람들의 모습은 한 사람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고난의 십자가를 눈물을 흘리며 끝까지 따라가 지킨 사람들은 연약한 여성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이름까지 기록된 것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여성들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진실한 믿음이란 이렇게 고난에 참예할 줄 아는 믿음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빌립보서1:29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한결같이 예수님의 겉모습에 반하여 따라 다닌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못되어 저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성난 군중으로 변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저들은 예수님에게서 자신들이 원하는 메시야--인간적인 욕심을 채워주고, 억울한 형편을 단번에 복수해줄 수 있는 메시야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그런 분으로 알고 환영하였지만 자신들의 기대와 다른 예수님의 말씀과 모습에 대해서 실망하고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은 예수님의 뜻을 따르기 보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욕심을 채워주시기만을 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론 우리의 육신의 삶 속에서 부족한 것들을 채워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믿음은 내 욕심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내 뜻 버리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의 생각을 따르는 것입니다. 내 계획이 아니라 주님의 계획에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부터 고난절이 시작됩니다. 지금까지 사순절 기간을 경건하게 잘 보내셨습니다. 마지막 이 고난절을 더욱 경건하게 은혜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 고난절에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더욱 큰 믿음을 갖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진정으로 기도하는 믿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