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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눅 22:3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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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는 마지막 만찬을 드시면서 제자들에게 섬기는 자세와 자신을 알지 못하는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 가롯 유다의 배반으로 체포당하시는 사건입니다. 본문에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 기도로 투쟁하시는 예수님과 조는 제자들의 모습이 대조되어 나옵니다. 본문을 통해 기도로 피나는 투쟁을 하시는 예수님의 믿음을 배우고 담대하게 사명의 십자가를 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감람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39-45)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을 잡수실 때 제자들이 서로 누가 예수님의 좌우 편에 앉을까 자리다툼하는 것을 보시고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하시고 자신을 모르는 베드로를 향해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이런 일이 있은 후 예수님은 습관을 쫓아 나가사 감람산 기슭에 가시매 제자들도 쫓았습니다.(39)
습관을 쫓아갔다는 말은 기도하는 습관을 쫓아 가셨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도하는 생애였습니다.
복음 역사 초기에는 새벽 미명에 일어나사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막1:35)
또, 마지막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와서도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 가서 기도하시며 영육간 쉼을 얻으셨습니다.(21:37)
감람산은 올리브가 많아서 올리브산, 감람산 그렇게 부르는데 겟세마네 동산을 말합니다.(마26:36)
예수님은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기도로서 영적인 힘을 덧입고 그 맡기신 일을 감당하셨습니다. 오늘도 본문에 무거운 십자가를 앞에 두고 당황하시지 않고 이 문제를 안고 습관을 쫓아 나가사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분주한 도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규칙적인 기도 생활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또, 습관적으로 기도할 장소를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요한 새벽 미명이나, 밤늦게 남들이 잠자는 시간에 일어나 한적한 곳에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 바쁜 생활 속에서도 남들이 잡담하는 점심시간, 잠시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할 수 있고 또 자동차를 몰고가면서 마음 속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습관을 쫓아 기도할 때 날마다 새힘을 덧입고 담대히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요사이 새벽에 많은 성도들이 새벽기도를 하는 생활을 볼 때 큰 힘을 얻습니다. 바라기는 이 새벽기도 생활이 예수님처럼 습관이 되고 체질화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습관을 쫓아 기도하던 동산에 올라 오셔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부탁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40)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앞에 두고 사단은 제자들을 밀 까부르듯이 시험하고 있었습니다. 사단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자들을 시험하여 넘어뜨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31,32) 그리고 이제는 제자들도 깨어서 기도로 마귀와 싸우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제가 신앙하기에 성도가 기도하고 일하면 시험에 들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무슨 일을 할 때 먼저 기도하고 하면 죄를 지을 수 없고 시험에도 들지 않습니다. 마음에 시험을 받아 죄를 지으려고 하다가도 먼저 기도하면 이깁니다. 기도하고는 그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으니까 시험에 빠지고 죄를 짓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죄를 지으려고 하는 것 “그것”을 하나님 앞에 들고 나아가서 기도해 보세요. 시험에 드는지.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에 시험에 들고 큰 사고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이렇게 당부하시는 말씀을 영접치 않고 졸다가 기도하지 않다가 남의 귀를 베어 버리고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부인을 했던 것입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하실 것을 명령하신 후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약 10m 정도 더 나아가 서서 기도하셨습니다.
마태와 마가 복음에는 “조금 나아가사”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8 제자들은 산기슭에 남기시고 따로 세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앞으로 나가시며 예수님은 다시 그들 세 제자들보다 조금 더 돌 던질 만큼 나아 가셔서 기도하신 것을 밝히십니다.(마26:36-39) 지금도 성지에 가면 겟세마네 동산에 기념 교회당이 있고 그 기념 교회당 내부에는 이 때의 기도하신 장소라는 큰 반석이 보존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길거리에 서서 기도를 하였습니다.(눅18:9, 마6:5) 때로 예수님도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복종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철저히 복종하고자 하는 자세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을 위해 기도하셨습니까
42절을 보십시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기도에는 두 가지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다. 1)첫째,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예수님은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잔”이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잔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나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저주와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갈3;13)
이 잔은 죄 없으신 예수님께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잔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사랑하는 제자의 배반을 당해야 합니다. 동족의 버림을 받으셔야 합니다. 이방인에게 넘기어져서 많은 채찍을 맞으셔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무서운 죽음의 고통을 당하셔야 합니다.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을 받고 수치를 당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히 버림을 받으셔야 합니다.(막15:34)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가지신 인간이십니다.
겨우 나이가 33세 밖에 되지 않은 청년입니다. 여러분, 이 나이에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체포당하고 사형을 받게 되었다면 그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사형 집행 시간이 한시간 한시간 바짝 바짝 다가올 때 두렵고 인간으로서 살고 싶은 욕망이 솟아올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십자가의 잔을 옮겨 주시옵소서” 하고 간절히 기도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는 용감하게 사약을 마시고 죽었는데 예수님은 왜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시는지 이해가 안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앞에 둔 한 인간으로서 가장 진실하게 고민하고 슬퍼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가식이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치 않습니다.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옮겨 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눈물과 통곡으로 자기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었다고 히브리서 5:7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런 기도를 드린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 함을 아시고 제자들에게도 여러 번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막상 이 십자가의 죽음이 눈 앞에 다가오자 예수님은 더욱 살고 싶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이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는가
반듯이 내가 이 저주스러운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하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만일 하나님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인간적인 소원을 진실하게 아뢰고 하나님의 뜻을 묻고 찾으셨습니다.
2)둘째,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은 자기의 소원을 진실하게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근본적으로 아버지의 소원대로 되기를 밑바닥에 깔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떼를 쓰는 기도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지고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제자의 배신을 받고 장로들에게 버림을 받고 채찍에 맞아 살이 찢기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치러야 할 고통이 얼마나 큰가를 다 아셨습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기꺼이 순종하고자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을 철저히 희생해서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요, 우리게 가르쳐 준 기도이겠습니다.
우리는 자기의 소원을 아뢰는 기도는 잘합니다. 주여! 주시옵소서. 주실 줄 믿습니다.
자기의 뜻과 소원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금식도 하고 철야도 하며 떼를 씁니다. 물론 이런 기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가 꼭 아셔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해서 더욱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간청을 해도 응답이 없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하였기 때문입니다.(약4:3)
이런 분들은 인간적인 욕심(human desire)을 버리고 하나님의 소원대로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소원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고자 간절히 기도하다 보니 생 땀이 났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결단을 내리려고 사투를 하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을 받아 드리고 순종하고자 결단의 기도를 간절히 기도할 때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이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의사입니다. 의학적으로도 이런 일은 가능하다고 합니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 열정적으로 기도를 하면 피하의 모세 혈관이 파열되어 피와 땀이 함께 스며 나오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고자 온 마음과 뜻, 신경을 쓰다 보니 땀이 흐르고 땀과 함께 땀방울이 핏방울 같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고자 하는 피나는 영적 투쟁이 있어야 합니다.
저와 잘 아는 친구는 5년을 별거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도, 사모님도 처음에는 전부 자기의 소원대로 기도를 했습니다. 자기의 뜻이 관철되기 위해 기도할 때는 매일 매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2년 전부터 서로가 <주여 나를 죽여 주시옵소서>라고 새벽기도 때며, 언제나 이 기도를 열심히 땀이 흐르도록 기도했는데 이제는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 속에는 순간 순간 돋아나는 인간적인 욕망이 있습니다. 이 돋아나는 싹들을 뜯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코자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에게 있는 식욕, 수면욕, 성욕, 물질욕, 명예욕 등 이 5욕은 인간의 기본 욕망입니다. 이러한 욕망은 항상 우리 마음 속에 꿈틀거립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마음에는 음란, 도적질,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흘기는 눈, 훼방, 교만, 광패가 가득하다고 했습니다.(막7;21)
이런 타락한 본성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힘쓰고 애써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힘쓰고 애써 땀흘려 기도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코자 하면 예수님이 도와주시는 줄 믿습니다.
다 같이 43절을 읽으십시다.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님께 나타나 돕더라”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간절히 기도하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로부터 도왔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에 들어가시면서 40일 금식 기도를 하실 때 하나님의 사자가 후원해 주셨습니다.(4:1,11)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베드로를 위해 예수님이 기도해 주셨습니다.(32) 오늘 본문에는 기도하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사자가 도와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간절히 기도하고 애를 쓰면 하나님의 사자가 도우실 것입니다.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시던 예수님이 여러분을 위해 기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뜻을 부인하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코자 땀이 나도록 기도하시자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사자의 도움을 입고 십자가의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와 보니 제자들은 슬픔을 인하여 잠이 들었습니다.(45)
어린 아이가 어른들의 꾸중을 듣고 베개를 끓어 안고 눈가에 눈물이 고인 채로 잠이 든 것 것같이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제자들이 슬픔을 인하여(exhausted from sorrow)란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은 만찬 석에서 이 유월절이 마지막이다, 이 유월절을 다시 먹지 못하리라(18)
빵을 찢어 주시며 이것은 내 몸이다(19)
포도주 잔을 주시며 이것은 내 피다(20)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21)
인자는 작정된 대로 간다, 십자가에 죽는다(22) 하니 근심이 되었고 그리고 누가 크냐 다툴 때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느니라” 하고 책망을 받고, 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리라고 하니 심히 근심이 되고 슬퍼서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이런 잠든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46절에 다시 한번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기도는 시험에 들지 않는 비방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으로 두 번 반복해서(40,46) 주시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실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Ⅱ.체로 당하신 예수님(47-65)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깨우고 계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47,48절을 보십시오.
한 무리가 오는데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 앞에 서서 와서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였습니다. 캄캄한 밤중이라 자기가 입맞추는 사람이 바로 예수라는 암호를 짜고 예수님께 가까이한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예수님은 “네가 스승을 파느냐”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가롯 유다를 스승을 팔아먹는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책망하시지 않았습니다.
“인자를 파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인자란 <의로운 재판장>을 의미합니다.
9:26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하였고, 또 22:69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들을 볼 때 가롯 유다는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심판장을 배반하고 은 30에 팔아 넘긴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팔아먹은 것이 아니라 은 30에 자기의 영혼을 마귀에게 팔아먹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때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49,50절을 보십시오.
좌우가 그 될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 하고 그 중에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 편 귀를 떨어 뜨렸습니다. 그는 베드로였습니다.(요18:10) 베드로는 기도로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감정과 혈기를 부리며 칼부림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검을 가진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하시며 검을 꽂으라고 하셨습니다.(마26:52) 그리고 강도를 잡으러 온 것처럼 검과 뭉치를 가지고 나온 관원들의 비겁함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구하여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하여 원수들을 물리치실 수도 있었습니다.(마26:53) 그러나 지금은 원수들의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며 스스로 잡히셨습니다.
원수들은 예수님을 잡아 어디로 끌고 갔습니까
54절을 보십시오.
예수를 잡아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멀찍이 뒤따라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 다른 제자들은 다 달아났습니다.(막14:50)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버려 두고 달아날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만큼 예수님을 존경하고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잡힐까 겁이 나서 예수님 가까이 따라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멀찍이 얼마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어정쩡하게 따라 갔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되시는가 그 결국을 보고자 했습니다.(마26:58) 그런데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워 놓고 앉아 구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슬그머니 그 가운데 끼어 앉았습니다. 혹시나 군인들에게 발각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졸이며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비자가 불빛을 향하여 앉은 베드로를 보고 주목하여 말했습니다.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자 너무나 놀란 베드로는 “이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 고 대답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죽어도 배반치 않겠다고 장담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한 여자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을 했습니다. 또,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베드로를 보고 또 말했습니다. “너도 그 당이라” 그러자 베드로가 “이 사람아 나는 아니라”고 하며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한 시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며 말했습니다.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그러나 베드로는 어떻게 대답을 했습니까 60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 베드로는 조금 전에 옥에도 함께 가고 죽는데도 함께 가겠다고 해 놓고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도 부인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이처럼 3번 주님을 부인하였을 때, 무슨 소리가 들렸습니까 60b절을 보십시오.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고 했습니다.
이상에서 베드로가 장담을 하고도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 근본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이 밀 까부르듯이 하니까 깨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또 오늘 닭 울기 전에 3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라고 예고하였습니다.(34)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성실하고 의리가 강했습니다. 충성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코 자기는 비겁하게 도망하거나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도로 준비하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사단의 시험에 빠졌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를 깨닫고 영적인 무장을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인간성만 믿고 있다가 사단에게 급소를 맞고 KO패 당한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밤새 심문을 당하시고 안마당을 지나서 공회로 끌려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동정 어린 눈빛으로 베드로를 돌아보셨습니다. 베드로의 연약함을 다 아시고 그를 용서하시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 때 베드로의 마음 속에 주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61,62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3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났습니다. 베드로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베드로는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자기가 얼마나 교만하고 자만심에 가득 차 있었는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처럼 교만하고 완악한 자기를 품어 주시고 변함없는 사랑으로 섬겨 주신 예수님의 사랑이 가슴에 부딪혀 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에 생생히 떠올랐을 것입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해 네 믿음이 덜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나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31,32) 베드로는 허물 많은 자기를 품어 주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감사하며 뜨거운 회개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이 크신 사랑으로 허물 많은 저와 여러분을 품어 주시고 계신 줄 믿습니다.
63-65절은 예수님께서 지키는 사람들에게 희롱 당하시고 능욕 당하시는 사건입니다.
결론. 오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놓고 피땀어린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섬기신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같이 십자가를 앞에 놓고 진실하게 투쟁하며 많은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하며 하나님께 맡기신 사명을 온전히 완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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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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