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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빌라도에게 심문 받으신 예수님 (눅 22:66-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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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어 떨어지기까지 기도로 투쟁하는 예수님과 가롯 유다의 배신으로 체포 당하시는 예수님, 그리고 베드로의 부인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사형 판결을 받으시는 사건입니다. 본문에는 죄 없으신 예수님이 사형 판결을 받게 되는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여 본 결과 전혀 죽일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여 결국 사형 판결을 내리고 맙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을 죽인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 그리고 헤롯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끌려 다니며 심문을 당하신, 성경을 이루어 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큰 은혜를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Ⅰ.공회에 끌려가신 예수님(22:66-69)

밤새도록 불법 심문을 당하신 예수님은 새벽이 되자 공회 앞으로 끌려갔습니다.
공회는-유대의 최고 재판소였습니다.
당시 로마는 유대인들에게 종교적인 자유와 어느 정도 자치권을 주었습니다.
공회는 유대인들의 최고의 권력 기관으로 <대심판소>라 불리웠습니다. 유대인들은 공회를 처음에는 원로원이라 불렀으나(행5:21) 헤롯 때부터 산헤드린이라 불렀습니다.
이 공회에서는 종교 문제를 최종적으로 결정했으며, 정치적으로 사법권과 행정권까지 행사했습니다.
이 공회는 주로 제사장 계통의 사두개인들이 중심이 되었고, 백성의 장로들과 바리새인의 학자들 등 70명의 공회원들로 구성이 되었습니다. 공회 의장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이 공회에서 사형 판결을 내릴 수 있으나 로마 총독의 인중이 있어야 행할 수 있습니다. 결의는 할 수 있으나 사형 집행 권리가 없으므로 빌라도에게 이 문제를 들고 나온 것입니다.
백성의 장로들과 대제사장, 서기관들은 날이 새자 공회를 소집했습니다. 공회를 소집해서 형식적인 절차를 밟아서 예수님을 처형하고자 했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백성의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 예수님을 공회에 끌어 들여 묻는 질문이 네가 그리스도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이거든 대답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내가 말할찌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할 것이니라”(27,28)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이미 죽일 궁리만 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대답을 해도 받아 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가 그리스도냐 묻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장차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의 권세 자이심을 밝히신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다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단7:13)
그런데, 거기다 대고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 승천하셔서 아버지의 우편에 계실 것과 장차 큰 권능으로 재림하여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확신하시고, 그런 <인자> 그런 <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일제히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고 물었습니다.(70)
예수님은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그리스도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지난 시간 54-62절에 하속들이 둘러서서 불을 쬐며 베드로에게 당신이 그와 함께 있었지, 당신도 분명히 그 당이지 했을 때, 베드로는 아니라, 아니라 부정을 3번씩이나 했습니다만, 이와 대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63-71절에 네가 그리스도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했을 때, “내가 그니라”(70)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우리가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그 입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하였습니다.

Ⅱ.사형 언도를 받으신 예수님(23:1-25)

빌라도는 관저가 가이사랴에 있었지만 유월절을 맞이해서 유대, 사마리아 각 처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몰려 와서 이 기간 중에 반란과 폭동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에 치안을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와 있었습니다. 헤롯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사형 판결을 내린 공회 사람들이 예수님을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끌고 왔습니다. 빌라도는 유다 지방의 제 5대 총독이었습니다. 그는 성격이 완고하며, 무자비하고, 고집이 센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이 때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수행하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을 예수님 당신이 친히 하시니까 더 이상 어찌 증인을 요구하리요 “신성모독” 죄로 예수님을 사형할 것을 결정하고 빌라도에게 승인을 얻고자 했습니다. 이제 빌라도의 승인만 얻으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공회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했다고 신성모독 죄로, 즉 자기들의 종교적인 문제로 꼭 처형을 해야 하는데 로마는 종교적인 문제에 관심이 없으므로 이 종교 지도자들은 빌라도 총독에게 고발을 할 때는 2절을 보십시오.
정치적인 문제로 바꾸어 고발을 합니다. 거짓 고발을 합니다.
첫째는 백성을 미혹했다는 것이요,
둘째는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요,
셋째는 왕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로마로서는 식민지 국가들이 선동이나 반란만 일으키지 않는 것을 가장 좋아합니다. 이것을 안 종교 지도자들은 종교적인 문제를 정치적으로 걸었습니다. 백성을 미혹해서, 반란이나 일으키고, 세금을 바치지 말라는 반로마주의자라는 것이요, 또 왕이라는 것이라고 고발을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예수님은 백성을 미혹한 일이 없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라고 하시면서 세금을 바치도록 했습니다. 또, 예수님이 정치적인 왕이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전부 거짓 것으로 고소를 했습니다.
재판을 맡게 된 빌라도는 종교적으로 관심이 전혀 없으니까 정치적으로만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빌라도는 예수님이 과연 정치적으로 위험한 인물인가 심문을 해 보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했습니다.
요한 복음에 보면 좀더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에게 넘기 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
예수님은 자신이 유대인의 왕은 왕이나 이 세상에 속한 정치적인 왕이 아니심을 분명히 밝히시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고 조사해 보고 아무리 심문을 해 보아도 죄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3번이나(23:4, 14, 22) 죄를 찾지 못했다, 죄가 없다고 말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유대인들의 고소 내용을 하나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대제사장들이 사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을 알았습니다.(막·15:10)
그래서 예수님은 죄가 없다(4)고 단언을 하자 무리들은 더욱 굳세게 “저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 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케 하나이다” 고 큰 소리로 외치며 고발을 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띄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종교 문제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습니다.(요18:29-31) 그래서 빌라도는 발뺌을 하려고 관할 구역을 내세우면서 예수님을 헤롯에게 보냈습니다.
한편, 헤롯은 예수님을 보고 심히 기뻐했습니다. 그 이유인 즉,
① 자기가 목베어 죽인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여 심히 두려워한 나머지 자기 눈으로 예수님을 보고자 했습니다.(9;7,9)
② 또,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 기회가 생겼다고 좋아했습니다.
③ 헤롯은 진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호기심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예수님 당신을 알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헤롯이 여러 말로 물으나 예수님은 아무 말도 대답지 않았습니다.
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더 열을 올리며 고소하나 예수님에게서 죽일 만한 죄를 찾지를 못했습니다.
헤롯은 무죄한 세례 요한을 죽이고 오랫동안 양심에 가책을 받고 시달려 왔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묻는 말에 아무런 대답이 없으니 화가 나서 군병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며 희롱을 하고, 조롱하며 빛난 옷을 입혀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보냈습니다.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는 서로가 친구가 되어 ‘당신 권세로 해결해 보시오’하며 서로 존경하는 것 같이 당일에 친구 같이 되었습니다
다시 예수님을 인계 받은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권원들과 백성을 불러모으고 예수님의 무죄를 밝혔습니다. 너희가 이 사람을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고 하여 내게 끌어 왔으나 자세히 심문하여 보니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는 죄를 찾지 못하였고,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저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다고 했습니다.(16)
이렇게 하여 유대인들에게 얼마만큼의 만족을 주고 빌라도 자신은 민심(民心)을 얻고자 했습니다. 빌라도 입장에서 보아서 종교 지도자들과 무리들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무시하다가는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또, 종교 지도자들이 자기의 비리를 로마 가이사 황제에게 알려 자기를 해고시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 없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코자 했습니다.
빌라도는 재판관으로서 바르게 재판하고 죄 없으신 예수님을 석방해야 하는데 타협안을 내놓은 것이 때려 놓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안 백성들은 일제히 소리 질러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소서”하였습니다.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을 하여 옥에 갇힌 자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재판하는 문제에 개입되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① 처음에는 이 문제를 공회에서 해결하도록 했습니다.(요18;31)
② 그것이 안되자 헤롯에게 넘기고자 했습니다.(7)
③ 마태 복음 27:19절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라고 전하였습니다. 하여튼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것을 알고 아내의 권유도 있고 해서 석방을 하려고 했습니다.
④ 이렇게 석방하려고 내 놓은 절충안이 “때려서 놓겠다”한 것인데 이것도 좌절이 되었습니다.
무리들이 이렇게 힘있게 요구할 수 있게 된 것은 빌라도가 헛점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빌라도가 재판관으로서 분명하게 무죄이니 석방하겠다고 선포하면 감히 이런 요구를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 무리를 두려워하여 때려 놓겠다 했기 때문에 무리들이 그의 약점을 물고 늘어진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빌라도는 다시 예수님을 놓고자 하여 저희에게 말하매 무리들은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하며 소리 질렀습니다. 빌라도는 그래도 양심의 가책이 되어 3번째 말했습니다.(4,14)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그러나 무리들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짐승과 같았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 지라” 결국 무리들의 소리가 빌라도의 양심의 소리를 이겼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한 무리들은 대제사장과 종교 지도자들로 부터 충동질을 받은 무리들입니다.(15:11)
이 무리들 중에는 며칠 전만 해도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던 이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정치적으로 유대 왕국을 다시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을 시켜 줄 왕으로 기대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 총독 앞에 꿇어앉아 심문을 받는 초라한 예수님을 보고 실망을 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없애 버리라고 소리를 쳤는지도 모릅니다.
결국 빌라도는 저희의 구하는 대로 하기로 언도하고 말았습니다.
저희의 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넘겨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빌라도의 문제가 무엇인가 알아봐야 합니다.
빌라도는 냉철한 판단력은 있었으나 진리를 실천할 용기와 신념이 없었습니다.
그는 진리대로 살기보다 자기의 신변 안정을 위해 살다 보니 천추만대 저주의 대상이 되고 수천 수억 만 기독교인의 입에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죽으시고” 라는 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이기심 때문에 진리를 버리고, 로마의 공의를 저버리고, 그리스도를 저버렸습니다. 현실적으로 손해 보지 않으려 하다가 결국 자기의 영혼이 파멸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사형 판결을 내리며 손을 씻으며 책임을 회피하고자 했습니다.(마27:24) 그러나 그는 역사적인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얼마 있지 않아 자살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제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5) 하셨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저자는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를 놓아주고 예수를 넘겨주었다고 했습니다. 반역 살인자를 놓아주고 구세주에게 사형 언도를 내린 것을 대조하며 강조하고 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마땅히 십자가에 죽어야 할 바라바와 모든 인간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지신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왜 죽으시게 되었습니까 종교 지도자들은 시기심 때문에 살인마처럼 끈질기게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또, 헤롯은 예수님을 석방시킬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호기심을 채울 수 없게 되자 예수님을 업신여기며 희롱하였습니다. 무리들은 영적 무지와 일시적인 감정과 타락한 본성대로 생명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빌라도는 이기심 대문에 예수님이 죄 없는 것을 알면서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 주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죽음은 유대인들이 죄와 이방인들의 죄, 종교 지도자들의 죄와 영적으로 무지몽매한 백성들의 죄, 이기적인 지성인들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바로 바라바와 같은 인간들이 저주받고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주님께서 대신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심지어 교회 생활을 상당히 오래 한 분들 가운데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분들은 자기는 예수님을 죽일 만큼 큰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비교적 의롭게 살아왔다는 자만심 때문에 자신의 참모습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종교 지도자들과 같이 시기심에 시달립니다. 또 빌라도와 같이 머리를 굴리며 진리를 외면하고 이기심을 채웁니다. 쥐꼬리만큼 아는 말씀으로 자기 죄를 변명하며 합리화하려 합니다. 자기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진리를 헌신짝처럼 버립니다. 또 무리들과 같이 타락한 본성을 쫓아 은밀히 죄의 쾌락을 즐깁니다. 정욕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면서도 겉으로는 거룩한 체합니다. 헤롯과 같이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 출세와 허영심의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열심히 자기 광을 낼 만한 곳을 찾아다닙니다. 이런 모든 죄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하는 죄악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죄 때문에 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의 성취요, 죄인들을 구속하시려는 섭리요,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의 죄를 그 몸에 담당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요3:14,15)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으심으로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갈3:13) 죄 없이 십자가에 달리 사 주홍같이 붉은 우리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여 주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두 번 세 번 심문을 해도 죄가 없었습니다. 헤롯이 심문을 해도 예수님은 죄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 예언을 이루려고 성경대로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십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형 선고를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죄악을 인함입니다. 또 이것은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죄를 스스로 짊어지신 것입니다.
다같이 이사야 53:4-6절을 읽겠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199

5.

7. 16.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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