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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식일2 (신 05: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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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의 첫째 개념은 창조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되었다는 것을 메세지화 하는데 있다. 즉 엿새동안 천지를 하나님이 홀로 지으신 것을 메세지화 하기 위하여 제 칠일째 되는 날은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안식일이 어떤 날인가를 생활로서 상징화 하는 것은 구약시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책임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안식 후 첫날 주일을 지키고 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던 것이 왜 주일을 지키는 것이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주일을 지키는 것과의 연관과 차이는 무엇인가
구약 자체에서 이미 안식일에 관해서 조금 태도를 달리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가 읽는 본문이다.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대표적인 안식일 개념에 있어서는 ‘창조’라는 메세지 하나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다음의 성경 구절에서는 조금 달리 나온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5)”
여기에서 안식을을 지키도록 명하신 이유는 ‘너희가 종되었던 애굽에서 나로 말미암아, 내가 힘과 능력으로 구원해 내었기 때문에 너희 보고 안식을을 지키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창조에 관한 이야기는 없고 구원에 관한 말씀만이 촛점이 되고 있다. 따라서 안식일의 개념 속에 창조에 관한 개념이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구원에 관한 개념도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살펴보자.
구약적 의미에서의 안식일 개념은 창조 이외의 의미가 들어갈 여유가 없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신명기에서 엄한 명령으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요구하시면서 그 의미를 구원과 직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출애굽 사건이 영적으로 구원에 관한 큰 상징이라는 것은 신자들은 다 알고 있다. 그것은 죄로 말미암아 마귀의 종 되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그 메세지를 상징화한 것으로 실제로 있었던 출애굽 사건 속에서 상징화 되어 있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다.
‘나는 너희를 종 되었던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니라 나는 너희를 구원해 낸 여호와니라’ 이 말씀은 구약 전체에 걸쳐서 끊임없이 하나님이 자신을 설명하시는데 사용하시는 말씀이다. 안식일 마저도 출애굽 사건과 연결해서 지키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안식일이라는 개념을 좀 더 깊이 살펴 보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우선 안식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예표 한다’ 이렇게 결론을 내려놓고 이제 그 증거들을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안식일은 첫째 개념에 있어서는 창조에 관한 메세지이다. 좀 더 큰 의미로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예표하고 있다. 그러면 주일은 무엇을 예표하고 있는 것일까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이미 안식일 대신에 주일에 모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굉장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니 그가 오실 일을 예표하고 예언하고 있던 것들은 본체가 오심으로 사라진 것이다. 예수님이 오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초림을 예표 하던 그 예표가 없어지고 만다. 그러나 아직 남아 있는 것, 그것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이다. 그 예표가 이제는 주일이 되었다. 그래서 안식일 아닌 주일에 모인다. 이렇게 결론을 내려놓고 성경의 증거들을 살펴보자.
“너는 고운 가루를 취하여 떡 열 둘을 굽되 매 덩이를 에바 십분 이로 하여 여
호와 앞 순결한 상 위에 두 줄로 한 줄에 여섯씩 진설하고 너는 또 정결한 유
향을 그 매 줄 위에 두어 기념물로 여호와께 화제를 삼을 것이며 항상 매 안
식일에 이 떡을 여호와 앞에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 이 떡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리고 그들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 그에게 돌리는 것으로서 지극히 거룩
함이니라 이는 영원한 규례니라(레 24:5-9)”
성전에 들어가면 뜰이 있고 안에 들어가면 첫번째 방에 진설병을 놓는 곧 진열해 놓는 떡을 두는 상이 있고 촛대가 있다. 그 안의 지성소는 휘장으로 가려져 있고 일년에 꼭 한번만 그것도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다. 그곳은 속죄제를 위해서 죄를 가지고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그 안에 법궤가 있고 법궤 위에 시은소가 있다. 그런데 그 휘장 바로 앞에 둘로 나누어진 첫번째 방에 들어가면 바로 상이 있고 그 위에 떨 열 두개를 늘어 놓게 되어 있다. 매 안식일마다 그 떡을 바꾸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떡은 아론과 제사장들만 먹도록 되어 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
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요 6:47-51)”
구약의 모든 제사법과 성막의 모든 조직과 구조는 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사역을 상징하기 위하여 있는 것들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사 영원한 제사를 드린 후에는 제사 제도가 없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징이기 때문이다. 속죄제들이 모두 상징이다. 예수님께서 그 상징의 본체로서 오셨기 때문에 상징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매 안식일마다 늘어 놓는 그 떡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기 위하여 구약에 그 규례가 정해졌던 것이다. 예수께서 장차 오셔서 어떻게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일을 하실 것인가를 구약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예표를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우리가 이 문제를 살펴 보면서 놀라는 것은 안식일이 이미 ‘끝난 날’로서가 아니라 ‘시작하는 날’로 돌변한다는 것이다. 창조라는 개념에서 안식을 추적하면 엿새동안 천지를 만드는 것이 완전히 끝나고 다음에는 쉬는 일밖에 남지 않았음을 보게 된다. 그것이 제 칠일이었고 안식일이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연결시켜 보면 이 칠일은 창조가 갖는 질서에서 마지막 날이었던 ‘안식’에 촛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안식일이 새삼스럽게 하나의 구속이라는 사건을 위하여 새로운 출발을 해야 된다는 것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들고 보시니 좋았다. 엿새동안 하실 일을 다 하셨다. 더 이상 손댈 곳이 없었다. 그것이 안식일이 갖는 가장 큰 의미였다. 남은 것이 있다면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누리며 생육하고 번성하고 즐기는 일밖에 없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인간은 범죄하여 타락했다. 그렇게 됨으로써 천지창조로서 할 일이 다 끝나게 된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 하시기 위한 재창조의 사역을 시작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쉬어야 되었던 안식일이 새로운 일의 준비기간으로 출동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날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속하실 그 일의 출발로서 새로운 시작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완성을 지금 우리가 기다리고 있다. 이런 일들이 나타나고 있는 성경을 살펴보자.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
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
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
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예수께
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요 5:10-17)”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는 이 말씀은 대단히 놀라운 대목이다. 원래 안식일을 지키라는 첫째 의미가 무엇이었는가 ‘천지를 창조하고 할 일을 끝냈다. 그러니 쉬어라’였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아직도 일하신다’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아직도 안식일의 개념을 다 모른다. 지금은 놀 때가 아니다’는 뜻이다. 그런데 무슨 일을 과연 하실까 다시 창조하신다. 창조는 창조이되 일종의 재창조를 하신다. 우주에 관한 창조가 아니라 심령에 관한 창조이다. 그 일을 하러 오셨다. 주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그 마지막 말씀이 무엇인가 ‘다 이루었다’이다.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오신 것이다. 일 때문에 오셨고 쉴 틈이 없으셨다. 그리고 왜 하필 안식일에 논쟁이 벌어지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에 일을 하셨다면 우리도 주일에 일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하여 나를 떠날 때에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내 성소의 직분을 지켰은즉 그들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수종을 들되 내 앞에
서서 기름과 피를 내게 드릴지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들이 내 성소
에 들어오며 또 내 상에 가까이 나아와 내게 수종들어 나의 맡긴 직분을 지키
되 그들이 안 뜰 문에 들어올 때에나 안뜰 문과 전 안에서 수종들 때에는 양
털 옷을 입지 말고 가는 베 옷을 입을 것이니 가는 베 관을 머리에 쓰며 가는
베 바지를 입고 땀 나게 하는 것으로 허리를 동이지 말 것이며 그들이 바깥
뜰 백성에게로 나갈 때에는 수종드는 옷을 벗어 거룩한 방에 두고 다른 옷을
입을지니 이는 그 옷으로 백성을 거룩케 할까 함이니라 그들은 또 머리털을
밀지도 말며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도 말고 그 머리털을 깎기만 할 것이며(겔
44:15-20)”
제사 제도 중에서 그들이 입는 옷과 그들의 띠는 땀나는 것으로 해서는 안된다. 가능한한 세마포로 하라고 했다. 세마포는 가느다란 실로 직조가 되어 매우 시원한 옷이다. 땀이 나면 안되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왜 세마포를 입었으며 땀이 나면 안될까 ‘땀’은 아담에게 준 하나님의 벌이기 때문이다. “네 이마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으리라”고 하셨다. ‘땀을 흘리지 않고’ 밥을 먹는 자는 다 신앙적이지 않다. ‘땀이 난다’는 것은 자기의 수고로 자기의 결과를 얻는 방법을 말한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하는 일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할 일에 관한 형상들이다. 제사 드리는 일이다. 신약적으로 말하면 구원에 관한 일이다. 그런데 구원에 관한 일에 ‘땀을 내서는 안된다’라고 하신다. 즉 구원은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안식일이 주일로 슬쩍 바뀌어 들어 온다. 앞서서 결론을 말한 것과 같이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사건을 예표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오셔서 할 일을 다하고 가셨다. 이제 남은 것은 주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을 지킨다. 그런 의미에서 주일은 초림이 완성되었다는 것과 그것을 완성시킨 분이 초림만 완성시킬 뿐만 아니라 재림하셔서 모든 것을 완성하실 것을 기다리는 날이다. 그래서 안식일과 주일이 연결되는 것 중에 공통되는 것 하나가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식일에 가졌던 첫째 메세지가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셨다. 너희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너희는 누릴 것 밖에 없다’ 그 메세지로서 일을 안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셨다면 주일도 동일하게 일을 하지 말 것을 요구하신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의 댓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져 선물로 주신 것이다. 이 메세지를 위해서 오늘도 우리는 주일에 ‘죽어라’ 놀아야 한다. 일을 안 하는 것이 일차적인 메세지인 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더러 주일에 어떤 일을 해도 되느냐 하는 질문을 받는다. 일을 가지고 가부를 묻느니 보다는 누구를 위한 일인가를 물어야 한다. 주일날에는 구원과 연결되는 일을 해야 한다. 주일에는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일은 절대 금하고 구원과 관련된 일을 함으로 주일이 갖는 메세지를 증거하야 한다. 주일의 뜻을 깊이 깨닫고 그 메세지를 생활화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 하신 그 구원에 대하여 감격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것을 메세지화하라는 생활의 규범에 대하여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어떻게 해석해서라도 법망을 피해서 나 하나 편하려고 여기 저기를 뜯어보고 있는가, 그 마음을 돌아보는데 이 말씀이 시금석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능한 한 세상 일에서 손을 뗌으로 주일을 창조와 구원에 관한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 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세주 되심을 우리가 ‘하루’라는 구별된 날과 생활의 모습으로 표현해야 될 사람임을 마음에 알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신자된 마땅한 책임이며 도리인 것이다. 그 구원 얻은 감격이 우리를 그 생활로까지 인도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너무 하나님을 홀대하고 있는 것이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 앞에서 내가 받은 구원과 그분의 명령을 긴장하여 지키는 자세도 필요한 줄로 아는 결심을 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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