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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식일3 (레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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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지킴으로 창조의 완전성을 증명하는 것이 안식일의 첫번째 메세지이다. 신명기 5장에서는 이것이 구원과 연결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시는 구속사역에 관한 상징들이 안식일 속에 들어 있음을 보게 된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즉 하나님께서 아직도 일하신다. 창조가 아닌 재창조가 남아 있다.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실 일이 남아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제 칠일이 쉬는 날이 되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을 지키게 되었다.
칠일이 창조를 상징하는 데는 더 없이 좋은 날이었지만 죄악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속사역 때문에 칠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안식 후 첫날 부활하시는 것으로 그 할 일을 끝내신다. 안식 후 첫날, 우리가 지금 지키는 이 주일은 그래서 제 칠일에 하실 일을 끝냈다는 표시를 받는다. 칠일에 할 일을 끝내고 팔일에 할 일만 남았다. 그 일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역도 다 완성하셨고 그 일을 역사적으로 끝내실 일만 남았다. 그것은 ‘재림’이다.
그래서 주일을 지키면서도 안식일에 지켰던 것들 중에서 그냥 흡수해야 되는 상징적인 규례가 있고,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 중 하나가 제사제도이다. 구속에 관한 메세지는 이제 더 이상 메세지가 아니다. 왜냐하면 구속에 관한 일들은 다 끝나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식일이 초림을 예표하고 지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주께서 초림하셔서 하셔야 했던 구속사역을 다 완성하셨고 이제 다시 오신다는 것을 주일로 압축시키는 문제에 있어서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도 영적 상태에서는 오지 않은 셈이다. 그래서 그 구속에 관한 메세지를 그대로 받아야 하는 부분이 있다. 즉 구원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셔야 한다. 안식일에 우리가 일을 하지 말아야 하는 두 가지 상징 중에 두번째 것인 ‘구원문제’ 즉, 구원에 관한 한 인간이 협력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만 하신다”는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예표한 것 속에 있었던 그 메세지가 지금도 그냥 살아 있다.
우리가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듯, 우리가 주일에 일을 안하는 것은 구원은 인간의 노력에 달려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여기에 주일을 지키는 것과 안식을을 지키는 것에 있어 일관성을 가지는 면이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주일은 주일답게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가 잘 예표된 곳이 오늘 본문이다.
“피부에 색점이 희나 우묵하지 아니하고 그 털이 희지 아니하면 제사장은 그
환자를 칠 일 동안 금고할 것이며 칠일만에 제사장이 그를 진찰할 것이니(레
13:4-5)”
문둥병의 문제는 칠일 단위로 되어 있다. 칠일 동안 보고 문둥병자 여부를 확인하고 치료 여부도 칠일이라는 기간을 두고 하도록 했다. 그 이유를 다음의 말씀이 설명해 준다.
“제사장은 진찰할지니 피부에 흰 점이 돋고 털이 희어지고 거기 난육이 생겼으
면 이는 그의 피부의 오랜 문둥병이라 제사장이 부정하다 진단할 것이요 그가
이미 부정하였은즉 금고하지는 않을 것이며 제사장의 보기에 문둥병이 그 피
부에 크게 발하였으되 그 환자의 머리부터 발까지 퍼졌거든 그가 진찰할 것이
요 문둥병이 과연 그 전신에 퍼졌으면 그 환자를 정하다 할지니 다 희어진 자
인즉 정하거니와 아무 때든지 그에게 난육이 발생하면 그는 부정한즉 제사장
이 난육을 보고 그를 부정하다 진단할지니 그 난육은 부정한 것인즉 이는 문
둥병이며(레 13:10-15)”
이상은 문둥병을 확인하는 방법이다. 문둥병은 격리 수용하도록 되어 있다. 14장에서 정결케 하는 방법이 나오고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문둥병자의 정결케 되는 날의 규례는 이
러하다(레 14:1-2)”
“칠 일 만에 그 모든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제 팔 일에 그는 흠 없는 어린 수
양 둘과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하나와 또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삼에 기
름 섞은 소제물과 기름 한 록을 취할 것이요(레 14:9-10)”
문둥병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그가 정하게 되었는가 안되었는가 확인을 요청하면 칠일동안 격리해 놓고 관찰한다. 깨끗해진 것이 확인되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려서 “그는 깨끗하다”라는 선고를 받는 것이다. 원래 성경에서는 숫자에 관한 상징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7을 쓰지 8이라는 숫자를 쓰지 않는다. 8이라는 숫자는 7을 이해하지 않고는 동원되어서는 안되는 숫자이다. 7이라는 숫자는 또한 그 앞에 ‘창조’라는 개념으로 가면 6이라는 숫자가 있고 7이 부록으로 붙는다.
원래 ‘창조의 개념’에서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나 하나님이 엿새동안을 일을 하고 칠일만에 쉬었다’ 이어서 천국 달력은 해마다 바뀔 필요가 없는 것이다. 엿새 후에 모든 날들은 영원토록 제 7일이다.
여기 레위기 14장에 들어와서 보면 숫자가 6단위로 끊겨서 7일이 남는 것이 아니라 7단위로 끊겨서 8일이 남는 것을 볼 수 있다. 7단위로 끊어진다는 것은 6단위로 끊기고, 7일이 쉬는 날이었을 때는 일을 ‘6일’까지 하는 것이고, 7단위로 끊어지면 ‘7일까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8일은 일을 하는 날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문둥병이 치료되면 제사장에게 신고를 한다. 그러면 제사장은 데려다 놓고 칠일 동안 살핀다. 본래 창조의 개념에서 본다면 6일동안만 보아야 한다. 창조의 단위는 6일이 그 단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7일동안 본다. 그러므로 8일은 일하는 날이 아니다. 8일은 7일동안 한 것을 선포하고 ‘도장찍는 날’인 것이다. 이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7일’이라는 단위를 끊으시고 ‘8일’을 완성하신 날로 삼으신 것이다. ‘창조’가 아니라 ‘재창조’의 단위가 된 것이다. 7일, 그리고 제 8일을 우리가 섬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구원’을 이야기 할 때는 ‘창조의 개념’인 6일 다음에 오는 7일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7일을 한 단위로 끊어서 8일을 택한다. 대표적인 예가 레위기 12장이다.
“여호와게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여인이 잉태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칠일 동안 부정하리니 곧 경도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제 팔일에는 그 아이의 양피를 벨 것이요(레 12:1-2)”
할례는 8일에 행하도록 하셨다. 8일에 할례를 행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7일이라는 날짜가 가지는 의미를 바탕으로 해서 8일이라는 날짜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창조의 날이라면 6이라는 숫자를 도입해서 6일까지 있었던 것의 결론으로 7일을 가져야 한다. 칠일은 엿새동안 하나님이 일하신 것을 우리에게 준 날이다. 엿새동안 일한 것의 결과이다. 8일째 ‘할례를 행하라’는 것은 칠일 동안 일한 것의 결과이어야 한다. 엿새 가지고 되지 않는 일 하나가 더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창조’라는 일만으로 ‘결과’라 할 수 없는 일, 하루를 더 해야만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것이 제 7일이 필요했던 일인 것이다.
안식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상징한다는 것과 얼마나 일치하는가! 어린 아이의 양피를 베는 것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사람이라는 메세지를 그 할례를 받게 하는 부모가 고백하는 행위인 것이다.
갓난 아이들이 유아세례를 받는다. 그것은 부모의 신앙고백이다. ‘갓 태어난 이 아이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필요한 자입니다’라는 고백인 것이다. 어린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부모 자신이 인간을 보는 눈, 인생을 보는 신앙적 차원에서의 안목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 중에 얼마나 많이 안식일과 충돌하는지 모른다.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십 팔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
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
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
광을 돌리는지라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내어 무리
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
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하거늘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
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
러운 일을 기뻐하니라(눅 13:10-17)”
이 말씀만큼 우리에게 신앙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말씀도 없을 것이다. 율법주의가 무엇인지도 배울 수 있다. 십 팔년동안 병마에 시달린 여인을 고쳐 주었더니 왜 안식일에 이 일을 하였는가 시비를 거는 것이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왜 잘못인가” 반문하셨다.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에 대하여 안식일에 ‘일을 한다’는 메세지와 ‘선을 행한다’는 메세지를 생각해 보자.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밖에 갖고 있지 않는 것이다. ‘안식일을 범하면 죄다’라는 이 차원과 선을 행한다는 것, 죄를 안 짓는 것과 악한 일을 안하는 것과 어느 것이 더 센 것인가 선을 행한 것이 더 세다. 도적질을 안하는 것과 자선을 베푸는 것은 자선을 베푸는 것이 몇백 배 나은 것이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개념이 일을 안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것과 하나님이 좋아하실 일을 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죄를 범치 않는다’는 차원에 그쳐 버렸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연결하면 ‘선을 행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원치 않는 일을 안하는 것’이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의외로 우리를 속박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차원에서 ‘하나님이 죄를 가장 싫어 하신다’라는 것이 분명히 정답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여기서 조심할 내용이 마가복음 2장 23절에 기록되고 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쌔 그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
르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
할 일을 하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핍절되
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
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한 자들에
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
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
니라(막 2:23-28)”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뜻이 있다. “너희가 도대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분명히 죄를 싫어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 있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것은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다. ‘죄를 싫어하는 것’과 ‘죄인을 구원하는 것’과를 혼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죄는 그 모양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죄인 아닌 죄인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누가 보내셨는가를 생각하여야 한다. 하나님이 보내셨다. 죄인을 미워하시는 것과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는 구별해야 한다. 안식일을 안식일답게 메세지화하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그날 한 심령을 구원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골프치러 나갈 수도 있다. 그것은 사람 앞에서 변명할 문제는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문제이다.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허물을 야
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며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
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
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
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
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
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
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
였도다(사 58:1-7)”
금식의 뜻이 무엇인가 “밥 안먹는 것이 아니다.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원리다.” 금식이란 원리는 ‘내 힘의 원천은 식물에 있지 않다’라는 신앙고백이라는 단 한 가지 원리이다. ‘내 힘의 원천은 하나님에게 있다. 나는 먹는 것으로 내 목적과 즐거움을 삼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으로 내 목적을 삼는다’가 금식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하여 하시는 말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지 않다.’ 모든 기독교의 내용은 이렇다. 그것이 하나님의 전 목적이다. 우리를 구원하사 하나님 앞에 끌고 오시려고 하는 것이다. 적극적 차원에서 주일을 지켜야 한다. 예수님은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벌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권한이 있으신 분이다. 죄에 대하여 분노하신다면 그분만큼 분노하셔서 마땅한 분도 없다. 그분도 죄를 정죄치 않으셨는데 우리가 무슨 권한으로 남의 죄를 정죄하는가 그리고 그분이 죄를 정죄치 않는 것이 죄와 타협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오늘 우리에게 형집행을 연기하시고 아직도 재림치 아니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안타까운 마음을 안다면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태도는 훨씬 달라질 것이다. 더욱 경건해질 것이며 더욱 적극적이 될 것이다. 지킬 것은 지키고 그리고 힘을 내야 한다. 우리의 삶이 이 은혜와 안타까움을 갖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케 되기 위하여 부름 받은 인생인줄 아는 것이 주일을 지키는 태도에서부터 나타나야 된다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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