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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느 것이 쉽겠느냐 (막 0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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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도 그렇지만 옛날 예수 시대에도 사람들은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예수를 찾았다. 마가복음 1장은 예수가 병 고치는 일과 귀신 쫓아내는 일에 얼마나 탁월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사람들이 얼마나 그런 예수의 모습에 매혹되었나를 보여준다. 문둥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는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하며 예 수께로 몰려들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벌어지는 일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 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더욱더 예수께로 몰려오고, 그러나 예수는 그들을 피 하여 한적한 곳으로 숨어 다니시는 사태가 벌어졌다.

본문은, 이처럼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때, 가버나움의 어떤 집에 예수께서 나타나신 것으로 얘기를 시작한다.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그 집으로 몰려 왔으리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예수란 인물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도대체 어떤 인물이길래 문둥병을 고쳤단 말인가. 과연 귀신을쫓아냈다는 소문이 진실인가. 혹시 저희끼리 짜고 꾸며낸 일은 아닌 가.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 사람들은 이런 저런 제각각의 이유로 예수께서 계신 집으로 몰려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몰려든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말씀을 전하고 계셨다. 고 칠만한 특별한 병자가 없어서 그랬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몰려든 사 람들은 병을 고치는 예수는 보지 못하고 말씀을 전하는 예수 만 보았다. 물론 예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말씀의 내용이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는 못했을 것이다. 복음서 저자인 마가가 예수께서 전한 말씀을 기록하지 않은 것만 보아도 그렇다. 나중에 마가가 복 음서를 기록할 때, 마가의 기억에는 예수의 말씀은 별로 남아 있지 않았었다.

오직 그날 중풍병자를 고친 사건과 그로 인한 서기관들과의 다툼 만을 아주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그날 거기 모인 사람들은 예수에 대한 소문이 과연 틀림이 없구 나고 감탄할 만한 사건과 만나게 된다. 마가가 전하는 대로 사건의 자초지종 은 이렇다. 예수가 계신 곳 근처에 한 중풍병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이 병자도 바람결에 들려오는 예수의 소문을 들었을 터이다. 그리고 자신이야말 로 예수를 만나, 그 병으로부터 놓임을 받고 싶었을 것이다. 건강한 사람들이 야 호기심으로 예수를 찾는다지만 중풍병자는 그럴 수 없었다. 비록 예수에 대한 소문이 헛소문이라고 하더라도,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 으로 꼭 그를 만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자신은 누구의 도움이 없이는 꼼짝을 못하는 중풍병자인 것을.

그렇지만 이 중풍병자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우여곡절 끝에 예수 앞에 설 수 있었다. 그리고는 거짓말같이 자신의 중풍병으로부터 놓임을 받는다. 물론 이 사건을 중풍병자의 입장에서 살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어떻게 해서 예수의 은혜에 참여하게 되었는가, 그의 친구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등 의 내용을 추적해 보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내용들은 본 사건이 주고 자 하는 주된 메시지는 아니다. 이 사건은 한 불치병 환자가 예수를 만나 은 혜를 입었다는 내용을 전하자고 기록된 것은 아니다. 이 사건의 의미는 이것 으로 인해 예수와 서기관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는 데 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지금 예수의 주위에는 인산인해로 몰려든 무리가 있었다 . 물론 이들은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불치의 병을 고치는 예수 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 그리고 그들은 소원대로 기가 막힌 치료의 현장을 목 도했다. 그런데 왜 그 현장에 있었던 서기관들은 예수를 탄핵하며 들고 일어 났던가. 문제는 예수가 그 중풍병자를 향하여,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지 않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했다는 데 있다. 그러니 서기관들이 들 고 일어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죄 사함을 받다니. 말이 되는가. 하나님 한분 외에 누가 감히 사람의 죄를 사한단 말인가. 자기가 비록 불치의 병을 고치기로서니, 불경스럽게 어 찌 사람의 죄를 사한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있는가.

서기관들의 의심은 당연했고, 비록 예수의 능력이 하늘에 닿아 있다고 하더라 도, 예수를 탄핵하는 것이 서기관 된 자의 도리며 의무였다. 이제 예수가 병 을 고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둘째 문제였다. 인간으로서 인간의 죄를 사하겠 다는 예수의 언동은 신성 모독이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나 다 름 없었다. 이럴 때 성경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는 서기관이 나서 지 않는다면 그는 필시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비겁한 지식인이 되고 말 것 이다. 비록 대중의 바람이 예수에게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의 그릇된 인식에 대하여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상황이 이렇게 발전하리라는 것을 예상치 못했단 말인가. 아 니다. 예수는 어쩌면 일부러 상황을 이렇게 꾸며 갔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 다. 성경에 대한 서기관들의 지식을 익히 알고 있었던 예수께서, 자신이 중풍 병자를 향하여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했을 때, 서기관들이 자신을 탄 핵하고 나오리라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다. 예수는 서기관들의 반응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필지의 사실이었다. 그런데 왜 예수는 중풍 병자를 향하여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시는가. 그냥 일어나 걸어 가라고 하였으면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권능과 그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목소리가 하나로 어우러졌을 텐데, 왜 예수는 사람들 의 수준을 생각지 않고 죄 사함 운운하여 서기관들의 반발을 사는가. 그 들의 반발을 사서 득 볼 게 무에 있다고 그렇게 사려 깊지 않은 언동을 하셨 는가.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병고침에만 집중되어 있 었다는 점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육신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려 십자가를 지고 대속의 죽음을 죽 기 위하여 오셨다. 예수가 사람들의 병을 고친 것은 그 병이 상징하는 죄에 대한 해방이라는 메시지였다. 병으로부터 놓여나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상징 하는 자신의 사역을 염두에 두고 예수는 병을 고쳤던 것인데, 사람들의 관심 은 병고침 그 자체에 집약되고 있었다. 예수로서는 당연히 이러한 흐름에 제 동을 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예수의 이러한 의 미를 깨달으라고 요구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에게, 자신의 의미가 결코 육신의 병고침이 아니라는 것을 못박아 두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본질적인 이유는 죄사함에 대한 당시 신학자들의 생각에 있 다. 당시 서기관들의 생각은, 성경 본문에 나타난 대로, 인간의 죄사함은 오 직 하나님에게 달려있다는 것이었다. 독자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신가. 과연 인간의 죄 사함은 하나님 만의 영역인가. 인간은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없는 가. 당시의 서기관들은 인간이 인간의 죄를 사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 한 일이었다. 그런데 감히 인간이 인간의 죄를 사한다는 발언을 하다니. 그러 나 예수는 이들의 이러한 생각이 틀렸음을 지적한다. 예수의 말씀을 보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 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서기관들의 그러한 수군거림을 본 예수께서 서기관들에게 하신 반문이다. 예 수의 질문에 대답해 보자. 어느 것이 쉽겠는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지금 우리 입장에서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이 더 쉬울 것같 이 보이지만, 예수의 능력과 당시의 종교적인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당연히 후 자가 쉽다. 예수께서 죄 사함 운운하지 않고, 그냥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셨다 면 사람들은 감탄에 감탄을 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의 죄 사함 운운에는 이런 감탄을 발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기관들의 속삭임이 더 마음에 와 닿았을 것이다. 그리고 서기관들의 지적대로 예수의 참람함에 마음 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될 것을 모를 리 없는 예수의 입장에서 본다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은 대단한 용기가 필 요한 말이었고, 어떤 면에서 그것은 당장에 예수의 목숨을 요구할지도 모르는 그런 발언이었다.

예수의 그 다음 말씀이 그것을 입증한다.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 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이런 의문문은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다.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것 아니냐는 반문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일어 나 걸어가라는 말이 쉽지 않느냐. 유대인이라면, 그게 누가 되었든, 인간으로 서 죄 사함 운운하면 천길만길 뛰리라는 것을 모를 사람이 있겠느냐. 그럼에 도 불구하고, 그런 유대인들이 인산인해로 모인 자리에서 죄 사함 운운한 다는 것. 이는 곧 자기 목을 내놓는 일과 다름 없는 일 아니겠느냐.

그러나.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을 하는 뜻은 지 금 서기관을 비롯한 유대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데 있다. 예수는 유대인 들의 잘못된 생각 ─ 사람들의 죄는 오직 하나님 만이 사하신다는 ─ 을 고치 기 위하여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가장 입에 담기 어려운 말씀을 하셨다.

너희들은 사람들의 죄를 하나님이 사한다고 생각하느냐. 천만의 말씀이다.

땅에서는,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이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 나는 이 중 풍병자를 통하여 이 점을 너희들에게 알려주려고 한다. 죄 사하는 권세는 하 나님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에게 주어진 권세이다.

당시로서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같은 선언이다.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하다니.

말도 안되는일이며, 신성모독도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 르면서 예수의 이러한 발언은 더 이상 기독교인들에게 충격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탄은 예수의 발언 가운데 나오는 인자를 예수에게만 국한시키 는 전술을 구사했고, 그것은 훌륭히 성공했기 때문이다. 즉 예수는 충분히 그 럴 수 있다는 말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죄를 사하 실 수 있지만, 그냥 보통의 사람들은 그게 말이나 되는가고.

그러나 이런 말은 옛날 서기관들의 논리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하나님 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다는 말과 예수 만이 인간의 죄를 사하신다는 논리.

무엇이 다른가.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 신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있는가. 천주교에서 말하는 고해성사라는 것도 신부가 신자의 죄를 직접 사해주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대신 빌어줄 뿐이다. 설령 신부가 신자들의 죄를 직접 사해준다는 개념이 있다고 하더라도 , 여기서의 신부는 예수의 대리인이라는 성격을 지닐 뿐이다. 그러니까 신부 자신이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신자들의 죄를 사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말 이다. 신부는 오직 예수의 죄 사함이 신자들에게 전해지는 통로의 역할을 한 다.

그러나 개신교에는 이 정도의 내용도 없다. 우리의 죄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만이 사하신다. 신자들은 이 문제에 전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성직자라는 목회자도 마찬가지이다. 그 어느 목사도 자신이 신자들의 죄를 사해 준다는 말은 하지 못한다. 만일 오늘날 어떤 목사가 자기네 교회에 나온 한 죄인을 향하여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한다면, 이건 옛날 서기관들 이 예수를 향하여, 참람하다고 했던 것 이상으로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신성의 영역과 세속의 영역을 나누고자 한다. 구약 시대부터 죄 사함의 문제는 분명히 신성의 영역이었다. 그러므로 세속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죄를 사하는 일에 개입할 수 없는 것이 다. 서기관들이 본 예수는 세속에 사는 인간으로서, 감히 신성의 영역을 넘보 며, 하나님같은 행동을 하려는 참람한 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 인들은 예수를 향하여 참람 운운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예수가 말씀하신 그 내용을 이해해서는 아니다. 예수라는 사람의 아들을 너무 쉽게 하나 님의 아들 즉 신성의 영역으로 편입시키기 때문이다. 다시말하면 예수를 의 미하는 사람의 아들과 우리 일반 신자를 지칭하는 사람의 아들은 본 질적으로 그 내용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당연히 사람의 죄를 사하실 수 있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의 아들이 사람의 죄를 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은 옛날, 예수를 향하여 참람하다고 수군대던 서기관들과 본질적으로 그 궤를 같이 한다. 사람들 중에서는 예수만 사람들의 죄를 사할 수 있다 는 말이나, 하나님만 죄를 사하실 수 있다는 주장이나 그 내용은 동일하 다. 그러니까 예수를 높이고 예수의 능력을 감사하는 발언이나, 예수를 참람 하다고 매도하는 발언이나 그 속내용은 얼마든지 동일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둘은 인간들의 죄사함이라는 문제를 하나님이나 예수, 즉 신성의 영역에 국한시킨다는 동질성을 가진다.

예수가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내용은 자신이 사람들의 죄를 사할 수 있 는 능력의 사람, 신성의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까지 오직 신성의 영 역에 국한되는 것으로 알았던 죄 사함의 권세가 오히려 사람의 아들에게 주어 졌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죄를 하나님께로 끌고가지 말고, 죄인을 본 사람이 그 사람의 죄를 사해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 속에 나타난 기독교는 이 죄 사함의 권세를 다시 신성의 영역으로 돌려보내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다. 그것도 예수의 신성을 찬양하는 미명으로. 그래서 예수는 자 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오늘날 기독교 가운데서 우상이 되어 있다.

그러면 기독교는 왜 사람의 아들에게 주어진 죄 사하는 권세를, 하나님의 아 들 예수에게 국한시키고, 종당에는 다시금 신성의 영역으로 돌려보내고 말았 던가.

이유는 간단하다. 죄 사하는 권세가 말로만 권세이지, 실상은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고, 자신이 친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대속의 삶을 살아야 함을 의 미하기 때문이다. 천주교의 초기 역사에서는 이 죄 사하는 권세를 실제로 권세로만 알아, 이 권세를 이용하여 죄를 사해 주는 대가로 세상의 부와 명 예를 챙기기도 했다. 면죄부 사건이 그것이며, 면죄부라는 어처구니 없는 일 이 생기기 전에도 내부적으로는 계속 그래 왔었던 일이다. 그래서 교황권 은 사도 베드로가 받았던 천국의 열쇠를 계승하며, 이 천국의 열쇠는 땅 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아주 막강한 권세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권세가 얼마나 막강하냐는 것은 사실 별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 권세를 사용하는 사람의 자의성이 문제이다. 어쩌다 일찌감치 예수 만나서 그에게 충성한 대가로 조자룡이 헌칼 쓰듯 휘둘러 대는 권세라면 그것은 세상 의 집권자들이 자랑하는 권세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사람들이 죄 사하는 권 세가 인자에게 주어졌다는 예수의 말에 그럴 수가 있느냐고 반문하게 되 는 것도, 따지고 보면 권세라는 말이 가지는 부정적 속성 때문이다. 인간 세계에서 권세라는 것은 항상 그 권세를 지닌 사람들의 자의에 놀아나고, 인 간치고 어느 정도 그런 자의성이 없는 존재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 이다.

그러나 예수가 말하는 죄 사하는 권세는 인간 세상에서 흔히 쓰는 권세와 는 다르다.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 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9:18-23) 성경이 말하는 죄 사하는 권세는 피흘리는 권세이다. 예수가 인간들의 죄를 사하는 것도 그의 피흘림을 전제로 말하는 것이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죄 를 사하는 것도 우리의 피흘림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이 말은 여태까지는 신 성의 영역에 있던 사랑이 인간의 영역으로 내려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죄 사하는 권세, 이를 다른 말로 바꾸면 사랑하는 권세이다. 분명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권세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이 권세로는 돈도 생기지 않고, 건강도 생기지 않는다. 다만 친구를 위하여 자신의 피를 흘리고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줄 뿐이다.

그러니 인간들이 이런 권세를 좋아할 리 있겠는가. 권세라는 말에 혹하여 덤 벼들다가도 그 내용의 기막힘에 어마, 뜨거워라 백 보는 도망칠 것이다.

그러나 머리 좋은 사람들은 도망가는 와중에도 무지한 중생들 사기칠 궁리를 하게 마련. 그렇지, 십자가에 죽기는 예수만 죽는 거다. 그리고 예수는 우 리의 영웅이며 만대에 길이 빛나는 주님으로 만드는 거다. 그리고 우리는 예 수의 대리인이 되어 중생들에게 권세를 휘두르는 거다. 옆에서 보고 있던 사탄은 또 그냥 있겠는가. 열심히 그 머리를 빌려줄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사람들의 죄를 사할 수 있는가. 예수는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았는가. 그는 원래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으며, 하나님의 신성이 육신을 입어 나타나신 분 아니었던가. 그러니 그렇지 않은 세속의 인간들과는 당연히 구분되는 것. 예수의 죄 사함은 하나님의 그것과 동일하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죄를 사한다는 것은 그야 말로 참람이다.

그래서 신성의 영역이 육신의 세계에서 꽃을 피운 것은 예수 한 사람으로 끝 나고, 역사는 다시 깜깜한 어둠 속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가 한 중풍병자를 통하여 인류에게 주고자 했던 메시지는 우리가 여태 하나님의 소 유로만 알았던 죄 사하는 권세가 사람들의 영역으로 넘어왔다는 것이었다. 그 리고 모든 사람이 자신처럼 다른 사람의 죄를 지고 대속의 죽음을 죽을 수 있 는 사람들이 되기를 소원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가 그리는 그런 세계에 대해 원천적으로 거부하고 나섰다. 인간이 어찌 그럴 수 있느냐는 아주 종교 적인 이름으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고 예수를 섬긴다는 이름으로.

하지만 예수는 당신이 그리는 그러한 세계를 몸소 이루어 나갔다. 그리고 자 신이 십자가를 지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후, 부활하여 다시 제자들을 만난 다.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20:22-23) 이제 사람들의 죄를 사하는 권세는 제자들에게로 넘어 갔다. 예수의 제자라면 사람들의 죄를 사할 수 있어야 한다. 이건 능력의 문제이다. 예수의 제자는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예수의 제자이다. 그리고 이런 제자가 죄 인의 죄를 사해 주고 말고는 전적으로 제자의 권세이다. 그래야만 권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는 이 권세를 결코 자의적으로 행사하지 않는 다. 그건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하고, 하기 싫다고 안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건 마치 우리가 다른 사람을 만나 사랑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랑 이란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며, 원치 않는다고 피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운명이며 숙명이다. 예수의 십자가 역시 그의 숙명이었으며, 죄인을 향한 그의 사랑이었다.

죄 사함은 여전히 하나님이나 예수의 영역이라고 밀어 놓을 사람들은 그 생각 대로 살 일이다. 그러나 예수가 숨을 내쉬며 나누어 주시는 죄 사하는 권세를 받은 사람들은 그들대로, 사람들의 죄 사하는 삶을 살아갈 일이다. 예나 지 금이나 거룩한 사람들은 여전히 거룩하고, 더러운 사람들은 여전히 더러운 것 . 언제든지 사랑이란 개나 돼지의 것은 아니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만 사랑하는 것,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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