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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반석이 된 베드로 (마 16: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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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예수님의 12제자에 대해 살펴보겠다. 따라서 이 설교는 인물설교이므로 어떤 특정한 한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신약성경 전체를 살펴보면서 하겠다. 특별히 ‘레슬리 플린’이라는 사람이 지은 “열두사도”라는 책을 많이 참고해서 설교할 것이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베드로에 대해 살펴보겠다.

1. 사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베드로의 모습1) 예수님의 제자 중 수제자
그는 제자들 중에서 아마 나이도 가장 많고 리더쉽도 가장 있었던 것 같다. 그는 항상 다른 제자들보다 앞장서서 질문하고 성급히 대답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나 제자들을 이끌어 가는 맏형의 역할을 했다. 따라서 사복음서 모두 그를 제자의 명단에서 가장 앞에 기록하고 있다.
2) 매우 급한 성격의 사람
베드로는 원래 어부로서 거친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따라서 그는 건장했으며, 또한 대단히 열정적이었다. 사복음서 모두가 그를 거칠고 충동적이며 조급하고 지나치게 격렬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잠잠히 생각하고 있어야 할 때 말해 버리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깨어 있어야 할 때에는 잠을 자고, 조용히 있어야 할 때에는 행동한 사람이었다.
3) 용감한 사람
그는 예수님이 물위로 걷는 것을 보면서 따라서 물위로 걷기도 했다. 그리고 절대로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으며, 주님을 위해서는 목숨도 불사하겠다고 말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병사의 귀를 잘라버리기도 했다.
4) 베드로의 실수
복음서들은 베드로의 실수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는 여러 번 실수했다. 물위를 걷다가 의심하는 바람에 물에 빠져버리기도 했다(마 14:22-33).
그리고 예수님을 향해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는 위대한 고백을 한 이후 곧바로 예수님의 죽음을 만류하다가 예수님으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마 16:23).
또한 변화산에서 놀라운 경험을 했으면서도 거기서 초막을 짓자고 조르다가 야단을 맞았다(눅 9장).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다(마 26:69-75).
이외에도 성경은 베드로의 실수를 많이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베드로는 제자들 중에서 가장 실수가 많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2. 변화된 베드로
하지만 사도행전을 읽어 보라. 베드로는 최고의 사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예루살렘 교회 건설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그는 수많은 권능을 행했으며, 그의 설교를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다. 그의 맹활약은 사도행전 1-12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는 바울 못지 않게 엄청난 일을 했다. 바울이 이방인을 위한 사도였다면 그는 유대인을 위한 사도의 대표로서 큰 지위를 차지하였다.

3. 결 론
우리는 베드로의 변화된 모습을 보면서 어떤 성격적 결함을 가진 사람도 변화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게 된다. 또한 아무리 실수가 많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베드로를 기꺼이 용서하셨듯이 우리도 기꺼이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아무리 실수가 많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희망을 잃어서는 안된다.
성격적으로 결함이 있어서 낙심이 되는 사람들이여! 베드로를 변화시키신 주님이 여러분들도 변화시키실 것을 믿고 주님께 나아가라.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만나면 변화되며 회복된다.
기도할 때 베드로를 변화시키신 주님께서 우리도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하라.
성경:요 1:35-42
제목:결단의 사람, 전도의 사람 안드레

1. 안드레의 회심:결단의 사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안드레가 처음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는 장면이다. 안드레는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는데,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설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37절에 있는 두 제자 중 한 명은 안드레이다. 다른 한 명은 아마도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으로 추정된다. 안드레와 요한이 예수님을 좇자 예수님이 무엇을 구하느냐고 묻는다. 이때 그들은 “랍비여 어디계십니까”라고 되묻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계신 곳을 알아 놓았다가 나중에 찾아가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와보라고 하시자 가서 그날 주님과 함께 거했다.
마가복음 1:14-17에 보면, 안드레는 그날 예수님을 만난 후 집으로 돌아와서 베드로와 함께 고기잡는 일에 다시 열중하였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그곳에 나타나셔서 나를 따르라고 하시자 즉시 배와 그물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랐다.
초대교회의 문헌에 보면 안드레를 가리켜 “첫번째 부름을 받은 사람”(First-called)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안드레는 최초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된 사람이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안드레가 결단의 사람인 것을 보게 된다. 그는 처음 요한의 말을 듣고 그즉시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알고 믿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기를 따르라고 하시자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단했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결단이 필요하다. 주님이 하라고 하면 그냥 앞 뒤 안가리고 실천해 버리는 결단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말씀을 읽으면서 주님의 명령을 들었다면 즉시 실천에 옮기는 과감한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

2. 전도자 안드레:한 사람을 귀중히 여긴 사람
안드레는 많은 사람을 전도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한 사람의 영혼을 귀중히 여기면서 꾸준히 전도한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형제 베드로를 전도했다. 성경 자체만을 가지고는 베드로가 형인지 안드레가 형인지 모른다. 하여튼 안드레는 베드로를 전도한 사람이다.
하루에 3,000명을 전도한 베드로가 있기 위해서는 그를 전도한 안드레가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베드로 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누구든지 안드레 같은 사람은 될 수 있다. 여러분들은 언제 어디서나 꾸준히 전도하는 전도자가 되어야 한다.
성경에는 안드레에 관한 이야기가 그리 많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유세비우스라는 초대 역사가의 [교회 역사]라는 책과 다른 많은 고대 문헌들에는 안드레의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에베소와 러시아와 그리이스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다가 엑스 자형 십자가에 매달려서 순교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여러분들은 전도에 관심이 있는가 전도는 특별한 재능을 받은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전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누구를 전도했으며, 또한 누구를 전도하려고 준비하고 있는가 이것이 없다면 그는 병든 신자이다.
적 용
안드레는 한 마디로 “결단의 사람이며 전도의 사람”이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인가 우리는 반드시 안드레와 같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대해 즉각적으로 결단해야 하며, 또한 주님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 시간 기도할 때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면서 기도하자.
“나로 하여금 주님을 철저히 따르는 자가 되게 하시고, 또한 전도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성경:마 20:20-28
제목:최초의 순교자 야고보

1. 야고보의 성장배경
야고보는 세베데의 아들이었으며 사도 요한의 친형제였다. 그는 베드로나 안드레와 마찬가지로 고기를 잡던 어부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나를 따라 오너라”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제자가 되었다. 예수님은 고기를 잡던 어부를 택하셔서 사람을 낚는 제자로 변화시키셨다. 잡힌 고기는 죽는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위하여 잡힌 사람은 그분 안에서 살게 된다.

2. 내밀관계를 맺은 사람
야고보는 제자가 된 이후에 예수님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예수님은 내밀관계에 있었던 세 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 예수님은 비록 12명의 제자를 택하셔서 모두 사랑하셨지만 세명의 제자와 특별한 시간들을 많이 보내셨다. 그들의 이름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었다.
내밀관계의 세 제자들은 다른 제자들이 보고 듣지 못한 일들을 보고 듣는 특권을 얻었다. 그들은 죽은 야이로의 시체가 살아나는 장면을 보았으며, 변화산상에서 변화되신 주님을 보았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피방울로 바뀌도록 기도하시던 주님을 지켜보기도 했다(막 5:37, 9:2, 14:33).
아마도 주님은 야고보를 위대한 가능성을 소유한 사람으로 생각하신 것 같다. 그의 생애에 대해 복음서가 그리 자세히 말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야고보는 아마도 많은 활약을 했을 것이다. 결국 사도행전 12:1-2을 볼 때 그는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음을 알게 된다.

3. 야고보의 성격
이제 야고보가 어떤 사람인지를 살펴보자. 복음서를 통해서 야고보의 두 가지 면을 말씀드리고 교훈을 찾고자 한다.1) 매우 급한 성격을 가진 사람
야고보는 매우 급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형제 요한도 급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가복음 3:17에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보아너게”라는 별명을 지어 주셨다. 그 뜻은 “우뢰의 아들”이다. 우레의 아들이란 천둥과 벼락의 아들이란 말이다.
그들의 성격은 매우 급했고 불 같았다. 쉽게 흥분하고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곧바로 반응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성격은 누가복음 9장에 잘 나타나 있다. 예수님이 어느날 사마리아 지방에서 잠시 쉴려고 하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거부하자 옆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불로 그들을 멸망 시켜 버리자고 간구했다.
레슬리 플린은 야고보를 가리켜 “복수심 가득한 열정의 사람”이라고 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이런 사람 없는가 누가 자기를 공격하거나 모욕적인 언사를 하면 곧바로 공격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용서와 이해, 그리고 양보를 모르는 사람. 그런 사람은 마치 야고보와 같은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은 자기의 복수심 가득한 열정이 사라지도록 철저하게 노력해야 한다.
2) 높아지기를 원하는 사람
복음서를 보면 야고보는 제법 부유한 생활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는 삯군을 데리고 어부의 일을 했다(막 1:19-20). 그리고 요한은 대제사장을 알고 있었는데(요 18:15), 이는 그의 아버지 세배데가 제법 유명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따라서 그의 형제인 야고보도 아버지 덕분에 제법 부유하고 유명하게 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에 보면 야고보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찾아 와서 자기의 두 아들을 높은 자리에 앉혀 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제자들의 마음 속에는 모두 이런 마음이 있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고 그러면 자기들이 정치적인 요직에 앉게 될텐데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가 그들의 관심 거리였다.
이때 예수님은 26절 이하의 말씀을 하신다. 말씀의 요지는 철저한 겸손이다. 우리 사람들은 언제나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한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싶어하고 대접받고 싶어한다. 좋은 옷을 입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싫어하신다. 결국 높아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가장 낮아질 것이다.
결정적으로 예수님은 인자가 온 목적을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삶의 방향의 전환을 촉구하신다. 인자는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오셨고, 사람들에게 자기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결 론
우리는 야고보의 생애를 통해서 무엇을 배워야 하겠는가1) 우리는 먼저 성격에 있어서 좀 차분하고 온화해야 함을 배운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 ‘온유의 열매’가 있다. 우리는 온유하고 화평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 그리고 우리는 겸손한 사람이 되기를 배워야 한다. 자기 목숨을 바치기까지 겸손하셨던 예수님처럼. 결국 높아지기를 원했던 야고보는 자기의 목숨을 바칠 정도로 낮아졌다.
성경:요 13:34-35
제목:사랑의 제자 요한

몇 년 전 어느 조사에 따르면, 미국에서 요한(John)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약 600만명 정도된다고 한다. 그리고 사도들의 이름 중에서 야고보라는 이름이 약 300만명으로 요한 다음으로 많고, 그 다음이 도마로 약 200만명이고, 베드로는 약 33만명 정도라고 한다. 그 정도로 요한이라는 이름은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요한이란 이름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뜻은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이다. 그 뜻도 좋지만 아마도 사람들이 자녀들에게 요한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사도 요한의 좋은 이미지의 영향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1. 원래의 요한:급하고, 야심많고, 편협한 사람
요한은 지난 주에 다루었던 야고보의 형제로서 원래 가버나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다. 그는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으로부터 ‘보아너게’, 즉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만큼 요한은 성격이 급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이 왕위에 오르면, 자기는 그 옆 자리에 앉으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또한 그는 도량이 매우 적은 사람이었다. 막 9:38-40(눅 9:49-50)의 기사는, 요한이 원래 얼마나 편협한 사람이었는지를 잘 나타내 준다.
어느 마을에서 설교하던 중 요한은 한 무리의 군중들을 보게 되었다. 도대체 그곳에서 무슨 소동이 벌어졌는가를 보기 위해 그는 군중 속을 헤치고 들어갔다. 거기에는 귀신들린 한 소년이 온 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요한은 그 사람을 꾸짖었던 사실을 예수님에게 보고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칭찬대신 그의 편협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우리 중 변화되기 전의 요한처럼 편협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자기의 생각만이 옳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문제이다. 신앙이나 취미 생활이나 삶의 방식에 있어서도 자신은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2. 변화된 요한:주님이 사랑하시던 제자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이 성격 급하고 야심많고 속좁은 제자가 엄청나게 변화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변화가 너무 크므로 한때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요한복음은 요한이 기록한 것이 분명하지만, 요한 서신과 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요한과 서신서의 요한이 너무나 크게 변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이라는 이름이 붙은 모든 책은 다 요한이 기록한 것이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비롯해서 요한 1,2,3서와 요한 계시록 등 다섯권의 성경을 기록하였다. 그런데 이 다섯권은 모두 매우 중요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것은 ‘사랑’이다. 요한복음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가장 중요한 구절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는 복음서와 서신서에서 주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 13:34-35은 얼마나 우리의 양심을 자극하는 말씀인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다. 요한은 그의 책에서 무려 50회 이상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언제나 자신을 말할 때 자신의 이름 대신 “주께서 사랑하신 제자”라는 독특한 명칭을 사용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사랑을 노래하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요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랑의 의무와 책임을 느끼게 된다. 요일 3:1에는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라고 기록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입었다. 이제 우리는 그 사랑을 갚아야 한다. 어떻게 갚는가 요한처럼 그것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드러내야 한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성경:요 6:1-15
제목:현실적인 사람 빌립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의 제자 빌립 외에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성경을 가르쳐 준 집사 빌립이 나온다. 혼돈하지 말기를 바란다.
빌립은 베드로와 안드레와 같은 고향인 벳세대 사람이다. 빌립은 유대인으로서 매우 자유분방한 집안 출신의 사람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당시 빌립이라는 이름은 헬라의 유명한 대왕인 알렉산더 왕의 아버지 이름이었다. 유대인들은 보수적이기 때문에 외국식의 이름을 짓지 않는다. 따라서 빌립이란 이름을 지은 것을 보아서 그의 집안은 매우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한 집안으로 생각된다.
빌립에 대한 자료는 요한복음에만 있다. 따라서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빌립에 대한 자료를 검토하면서 그의 성격을 살펴보겠다.

1. 빌립은 매우 계산적인 사람이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6장에는 예수님께서 보릿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인 사건이 나온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사람은 성인 남자만 5,000명이었다. 따라서 여자와 어린 아이까지 합하면 아마 10,000명쯤 되었을 것이다.
여러분들에게 묻겠다. 10,000명 정도의 사람이 식사를 하기 위해 필요한 음식이 얼마나 되겠는가 아마 선뜻 계산이 안될 것이다. 그러나 빌립은 200데나리온 어치의 떡이 있어도 조금 모자랄 것이라고 대답했다.
5절에서, 예수님은 빌립에게 어디서 떡을 살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그렇게 물으신 것은 6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빌립을 시험하고자, 즉 테스트 하고자 하신 것이다. 그런데 빌립은 어디서 사는지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고 얼마나 필요한지를 대답했다. 이처럼 빌립은 계산적인 사람이었다.

2. 빌립은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요한복음 14장에는 빌립에 관한 또다른 기사가 나온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통해서 믿음의 눈을 가진 가진 자들은 영이신 하나님을 보았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이때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지금 영적인 봄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그런데 빌립은 현실적인 봄에 대해서 말한다. 자기의 육신의 눈으로 뭔가를 봐야 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빌립과 같은 사람이다.

3. 교 훈
우리는 빌립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무엇을 깨닫을 수 있는가 아직 변화되지 못한 빌립은 지극히 계산에 밝았고, 현실 세계, 즉 눈에 보이는 세계에만 관심을 가졌다.
성도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빌립과 같다. 그들은 삶 속에서 너무 인간적이고 계산적이다. 하나님의 역사와 기적을 배제하고 논리와 현상만을 따진다. 자기의 머리에 납득이 가야 믿고 납득이 가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
빌립과 같은 사람은 매우 합리적인 사람이며, 논리적인 사람이다. 합리성과 논리성은 좋은 것이지만 반드시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 사람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가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의 기적과 역사를 기대하자. 때로 하나님의 초월적인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오늘도 현실과 인간의 머리를 초월하는 신앙을 가지자.
성경:요 1:45-51
제목:간사가 없는 나다나엘

나다나엘이라는 이름은 요한복음에만 나온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바돌로매라는 이름이 나온다. 그러나 이 두 이름은 한 사람을 가리킨다. 어느 것이 본명이고 어느 것이 별명인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편의상 나다나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겠다.
나다나엘은 빌립의 친구였다. 어느날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증거했고 이후로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믿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본문에 나와 있는 나다나엘의 두 성품을 살펴보자.

1. 솔직한 사람.
나다나엘은 매우 솔직한 사람이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만났다고 했을 때 나다나엘은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46절에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나사렛이라는 작고 초라한 동네에서 무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가 태어나겠느냐고 그의 생각을 그대로 말한 것이다. 이 구절만 볼 때, 나다나엘은 회의론자이며 편견론자이다. 그는 의심과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후 빌립의 강권(“와 보라”)에 의해 예수님께로 나아갔을 때,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어떻게 평가하시는가 47절을 보면,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가리켜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평가한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그는 진실한 사람이요, 솔직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 완전히 변한다. 49절에서, 그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한다.
특히 여기서 “간사”라는 단어는 물고기를 낚기 위해 사용되는 미끼를 쓸 때 사용되던 단어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간사”라는 단어의 정의는 자기의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의 인격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다나엘이 회의론자이긴 하나 매우 정직한 회의론자였으며, 예수님의 지적대로 가식과 외식이 전혀 없는 순수하고 솔직한 사람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어떤 복선을 깔고 말하지 않고, 생각하는 그대로를 말했다. 이러한 나다나엘의 자세는 어찌보면 매우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처럼 보인다. 현대와 같은 복잡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에는 더욱 그렇게 비칠 것이다.
우리의 생각에 지혜로운 사람, 현명한 사람이라면 자기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말하기 보다는 상황에 맞추어서 바꾸어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다나엘은 솔직하고 투명한 사람이어서 있는 그대로를 꾸밈과 가감없이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결국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물론 솔직하다는 것이 기분 나쁘다고 그냥 그대로 자기의 심경을 내뱉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럴 때는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 솔직하다는 것은 자기의 아픔과 약점을 숨기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는 것이다. 정직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란다.

2. 말씀과 기도의 사람.
48절에서,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무화과나무는 매우 크고 넓은 나무이다. 사막 기후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높이가 약 4미터이고 가지의 길이가 7미터 정도되는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좋아했다. 그들은 거기서 쉬면서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나다나엘 역시 무화과나무 아래서 말씀읽고 기도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학자들은 흥미로운 추측을 한다. 예수님이 51절에서 사닥다리 환상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데, 아마도 나다나엘이 창세기 28장에 있는 야곱의 환상을 읽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 이야기도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아무튼 나다나엘은 성경읽고 기도하는 중에 예수님의 눈에 띄어 그의 제자가 되었다.

3. 적 용
우리는 나다나엘에 관한 짧은 기사를 읽으면서,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다.1) 솔직한 사람이 되자. 어떤 의도를 가지고 사람들을 속이지 말자. 자기의 약점을 scnf시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속이지 말자.
2) 말씀과 기도의 사람이 되자.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말씀과 기도의 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신앙고백을 분석해 보면, 그가 성경을 많이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다나엘은 말씀과 기도의 시간에 예수님의 눈에 띄었다. 우리도 말씀과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겠다.
성경:요 20:24-29
제목:실증주의자 도마

성경에는 도마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어디 출신이며, 어떤 성격의 사람이었는지를 자세히 알 수 없다. 단지 본문 24절에서 요한은 그의 이름을 두 가지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는 “디두모”이고, 다른 하나는 “도마”이다. 하지만 이 두 이름은 같은 뜻이다. 도마는 아람어이며, 디두모는 헬라어로서, 둘 다 “쌍둥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도마가 쌍둥이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외에 도마와 관련된 자료는 요한복음에만 세 번 나온다. 이 세 곳을 살펴보면서 도마가 어떤 사람이며, 그를 통해서 우리가 무슨 교훈을 받을 수 있는지 살펴보겠다.

1. 용감한 사람(요 11:1-16)
사람들의 핍박을 피해 베뢰아에 머물고 있던 예수님에게 어느날 나사로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이에 예수님은 이틀 후에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로 가려고 한다. 예수님이 중병에 걸린 나사로에게 즉시 가시지 않고 이틀을 기다린 후에 가신 것은 나사로가 완전히 죽기를 의도적으로 기다리시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선생님을 죽이려 하므로 그리로 가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때 도마가 갑자기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한다. 도마는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실 수 있다는 것을 믿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위험한 지역으로 가시는 예수님과 함께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 기사를 통해 도마가 매우 용감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실증주의자(요 14:1-7)
예수님은 요한복음 13-16장에 걸쳐 그의 마지막 설교를 한다. 자신이 이제 십자가 위에서 죽을 것이라고 말하자 제자들의 마음은 슬퍼졌고 비통해졌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요한복음 14:1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라는 말씀을 하신다.
그러면서 자신이 가는 것은 그냥 무의미하게 가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처소를 예비하기 위해 가는 것”이라고 설명하신다. 그리고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라고 하신다.
이때 도마가 말하기를,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라고 한다. 도마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용감하게 자신의 의심을 그대로 표현했다. 아마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이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은 모르면서도 그냥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도마는 특이했다. 그는 뭔가 확실히 알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3. 정직한 회의론자(요 20:24-29)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다른 제자들의 증거를 믿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예수님을 보고, 손가락을 그의 못자국에 넣어 봐야 믿겠다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도마에 대해서 어떤 점을 알 수 있는가 도마는 확실한 증거를 포착해야만 믿는 사람이었다. 그는 맹목적으로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결 론
많은 사람이 도마를 단지 “의심많은 사람으로서 불신의 모델”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도마에 대한 그러한 평가는 정당하지 않다. 도마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긴 했으나 무조건 안믿으려고 의심했다기 보다는 확실히 믿으려고 의심한 사람이었다.
27절에서,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자신을 만져보라고 했을 때 도마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그는 예수님을 향하여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신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고백이다.
저는 도마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도마는 막무가내로 안 믿겠다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확실히 믿기 위해 정직한 의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확실히 믿지도 못하면서 확실히 믿는척한다. 믿음에 대한 아무런 증거도 없고 체계도 없으면서, 그냥 무지막지하게 믿으려고 한다.
그런 자세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런 사람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고, 모레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아서 어려움이 오면 금방 쓰러진다. 우리는 냉철한 지성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런 지성 위에서 뜨거운 감정을 가져야 한다.
내가 믿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고 확실한 답을 언제나 소유하자. 벧전 3:15은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고 기록한다. 참으로 의미있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성경:눅 5:27-32
제목: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아간 마태

마태의 원래 직업은 세리, 즉 세금을 걷는 사람이었다. 당시 세리라는 직업은 유대인들로부터 매우 멸시받는 직업이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세리는 로마의 앞잡이였고 이스라엘의 반역자였다. 그들은 세금을 걷어서 로마에 바치는 자들이었다. 민족 정신이 투철한 유대인들로서는 로마에 충성하는 세리를 매국노로 생각했으며 매우 가증스럽게 여겼다.
둘째, 세리는 부정직했다. 그들은 지나치게 많은 세금을 착취해서 일정한 금액을 로마에 바친 후 나머지는 자기가 소유했다. 때문에 이스라엘의 일반 시민들은 너무 많은 세금 때문에 어려운 생활을 했으나 대부분의 세리들은 아주 호화스러운 생활을 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리를 창기와 같은 수준의 천박한 죄인으로 취급했다. 세리는 법정에서 증언할 자격이 부여되지 않았으며, 성전에 출입할 수도 없었고, 성전에 헌금을 내는 일도 거부되었다.

1. 예수님의 자비로운 부르심.
그런데 예수님이 그러한 죄인인 세리 마태를 자신의 제자로 삼았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라는 수치스런 말을 들으면서도 마태를 부르셨다.
예수님의 부르심에는 차별이 없다. 사람들은 부자를 좋아하고 잘난 사람과 함께 있기를 좋아한다. 물론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죄인의 친구이며 가난하고 소외받은 사람들의 위로자이다.
여러분들은 지금 자신이 도저히 가망이 없는 죄인이라고 생각하는가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소외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무능력하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런 사람에 대해서 예수님은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도무지 가망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 사회적으로 무시당하는 사람들, 철저하게 병들고 나약한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내가 그들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기억하고 위로를 받으시기 바란다.

2. 마태의 헌신
예수님이 마태를 부르자 마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다. 마태는 부자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재산을 모두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태는 무엇이 진정 가치있는 일인지를 알았다.
29절에서, 마태는 자신을 부르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큰 잔치를 벌였다. 그 잔치에는 예수님과 제자들과 동료 세리들과 다른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그는 자신을 제자로 삼아주신 예수님이 너무나 감사했다. 이전의 모든 것을 버린 것이 결코 아까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즐거운 일이었다. 그래서 잔치를 벌인 것이다. 그날은 마태에게 있어서 최고의 날이었다.
여러분들은 마태와 같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는 것을 참으로 즐거워할 수 있겠는가 과거 순교자들은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도 조금도 아까와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뭔가 희생하고 버리는 것을 아까와하는 경향이 있다.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린 후 오히려 즐거워하며 잔치를 벌일 수 있어야 한다.

3. 마태의 업적
마태는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당시 로마는 아무나 세리로 뽑지 않았다. 세리가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3-4개 언어는 할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수학이나 경제학에도 밝아야 했다. 로마는 매우 총명하고 학식있는 사람을 세리로 임명했다.
마태는 자신의 총명한 머리를 활용하여 마태복음을 기록하였다. 마태는 과거에 자신의 머리를 돈버는 일에 사용했으나,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마태복음을 기록하는 거룩한 일에 사용했다.
마태복음은 굉장히 조직적이며, 숫자적인 면에서도 발전되어 있다. 그것은 마태의 훌륭한 머리 때문이다.

4. 결 론
마태에 관한 말씀을 상고하면서, 우리는 죄인을 부르시는 자비로우신 주님께 감사하자. 그리고 마태와 같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야 하며, 그것을 진심으로 즐거워하자. 그리고 이전의 재능으로 주님을 위한 선한 일을 하자.
성경:마 10:1-4
제목:작은 야고보와 다대오

오늘은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아홉 번째와 열 번째 사람인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에 대해 살펴보겠다.
오늘 우리가 두 명의 제자를 살펴보는 이유는 두 사람 다 성경에 기록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해서 우리는 사실 거의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다. 물론 초대교회의 문헌에 그들의 이름과 업적이 약간 언급되어 있긴 하지만 그것을 설교의 주된 자료로 사용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들의 생애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드릴 수가 없다.

1.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성경에는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세 명의 다른 사람이 언급되어 있다. 이들을 잘 구분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1)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그는 요한의 형제였으며, 요한과 더불어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2)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그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되어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고 야고보서를 기록하였다.
3) 작은 야고보:그는 오늘 우리가 다루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제자이다. 마가복음 15:40절에서, 야고보는 “작은 야고보”라는 명칭으로 언급되어 있다. 여기서 작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 않다. 다만 단어 자체는 ‘열등함’, ‘부족함’을 의미한다.
하여튼 야고보는 다른 사람에 비해서 어딘가 열등한 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비록 복음서에 그의 아버지 알패오와 어머니에 대한 언급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2. 다대오
두 번째로 다대오에 대해 살펴보자. 성경에는 이 사람의 이름이 세 가지가 있다. 그것은 ‘다대오’, ‘유다’, 그리고 ‘레바이오’이다. 고대 문헌에 보면, 제롬이라는 사람은 그를 ‘트리노미누스’라고 불렀다. 그 뜻은 ‘세 가지의 이름을 가진 자’라는 뜻이다. 그의 증언은 성경과 일치한다.
우리말 성경에는 그의 이름이 두 가지로 나온다. 그것은 다대오와 유다이다. 오늘 본문에는 다대오라고 되어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 유다라고 기록한다. 그리고 이때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우리가 다루는 유다와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를 구분하기 위해서 그를 “가룟인 아닌 유다”라고 부른다. 또한 어떤 번역에는 마태복음 10:3의 다대오라는 이름 대신에 ‘레바이오’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세 가지의 이름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유다, 다대오, 그리고 레바이오이다.
그의 활동은 신약성경에 딱 한 번 나온다. 그곳은 요한복음 14:22인데, 예수님과의 대화의 장면이다.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에게만 당신의 메시야되심을 나타내지 말고 세상에도 나타내달라는 뜻이다. 우리는 여기서 유다가 선교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에 대한 자료는 이외에 더 이상 없다.

3. 교 훈
오늘 이 두 제자를 대하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들을 보면서 주님의 사역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한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성경뿐만 아니라 교회역사에는 주님을 위해서 큰 일을 하고 이름을 빛낸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그들을 존경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뿐만 아니라 이 땅에 아무런 이름이나 행적을 남기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조용히 살다가 죽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수고와 노력이 있었기에 주님의 나라가 더욱 확장되었음을 우리는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어린아이는 솔직하게 드러내고 싶어하지만 어른들은 은근히 드러내고 싶어한다. 그것을 “명예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조용히 숨어서 선을 행할 것을 요구하셨다. 이름을 드러내는 것은 결코 우리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주님이 알아서 하실 일이다. 우리의 할 일은 주님의 이름을 묵묵히 하고 그 이후의 영광은 오직 주님께 돌려 드리는 것뿐이다.
작은 야고보와 유다는 표시내지 않고 자신들의 소임을 다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목표는 명예가 아니라 충실함이었다. 선을 행한 후 자신을 칭찬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은 이미 상을 다 받아 버린 사람이다. 사람들 앞에서 칭찬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님의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선을 행하며 살자.
성경:행 1:12-14
제목:열심당 시몬

가나안 사람 시몬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성경의 자료는 거의 없다. 단지 마 10:4과 막 3:18에는 이 사람을 “가나안 사람 시몬”이라고 말하고 있고, 눅 6:15과 행 1:13절에는 이 사람을 “셀룟인 시몬”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 사람은 가나안 사람인 동시에, 셀룟 인이라는 사실만을 알 수 있다.

1. 셀룟인(열심당)이란 무엇인가
셀룟이라는 말은 열심당이라는 뜻이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에는 여러 종파가 있었다. 그것은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센파, 그리고 우리가 지금 다루는 열심당 등이다.
열심당은 신약과 구약의 중간기, 그러니까 주전 167년경에 마카비 형제라고 해서 외세의 침략에 대비해 민족을 지키려는 무리들이 있었는데, 그 무리들에게서 생긴 그룹이다.
그들은 한마디로 극단적인 민족주의자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침략하는 모든 외국 세력은 물론이고 자기 나라를 배신하는 자국민들까지도 무차별 죽이는 무서운 사람들이었다.
이 열심당에 가입하려면 국가에 대한 불타는 열정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바쳐가면서까지 조국을 위해 일하려는 헌신의 마음이 있어야 했다. 아무나 열심당에 가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몬에게 열심당이라는 말이 계속 붙여졌던 것은 그가 열심당과 계속 관계를 맺어 왔거나 아니면 열심당의 요소가 그에게 계속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2. 시몬이 주는 교훈
그런데 그렇게 과격한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과격한 사람이었지만, 성경은 그가 다른 제자들과 충돌했다거나 마찰을 일으켰다는 기사가 없다. 그리고 그가 민족해방이라는 정치적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는 기사도 없다.
우리는 여기서 무슨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1) 예수안에서 서로 화목될 수 있다.
잘 알다시피 시몬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제자 중에 있었다. 그 사람은 마태이다. 마태는 원래 로마를 위해서 세금을 걷던 이스라엘의 매국노였다. 그리고 원래의 시몬은 그런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마태와 시몬이 같이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을 매우 신기하게 생각한다. 이 두 사람이 아무런 마찰없이 동역자로서 지낼 수 있는 이유는 오직 예수님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원수와도 화목할 수 있다.
여러분들이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 사람과 어떻게 하면 화목할 수 있는가 바로 예수 안에 거하는 일이다. 예수님안에 붙어 있으면 원수도 용서할 수 있다.
2) 어디에다 열심을 사용해야 하는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시몬은 민족을 위해서 그의 뜨거운 열정을 사용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후 그는 복음을 위해서 그의 열정을 사용했다.
초대교회 당시의 문헌에 보면, 이 사람은 이집트와 영국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알려진다. 그는 영국에 최초로 복음이 들어가게 한 사람이었다. 역사상, 지나간 세기에 전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나라는 영국이었다. 그 영국에 최초로 복음을 전한 사람이 바로 시몬이다.
민족을 위해서 열정을 불태우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는 복음을 위해서 열정을 불태워야 한다. 시몬은 열정의 사람이었다. 그는 그의 열정을 처음에는 민족을 위해 사용했으나 나중에는 복음을 위해 사용했다. 여러분들의 에너지를 복음을 위해서 사용하시기 바란다.

3. 결 론1) 우리는 예수 안에서 모든 사람과 화목하게 지내야 하며,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
2) 우리는 복음을 위하여 우리의 열정과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성경:마 27:1-10
제목:배신자 가룟 유다
오늘은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마지막 열 두 번째 사람인 가룟 유다에 대해 살펴보겠다.
이 사람의 출신 지역은 가룟이라는 동네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룟 유다라고 그를 부른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갈릴리 출신인데, 유독 이 사람만 갈릴리가 아닌 다른 지역 출신이다.
그리고 유다라는 이름은 “찬양”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다라는 이름을 매우 좋아했으며, 또한 많은 사람들이 유다를 이름으로 지었다. 그러나 가룟 유다 이후 이스라엘 뿐 아니라 모든 인류는 유다라는 이름을 가장 좋지 않은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1. 가룟 유다를 옹호하는 사람들
성경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가룟 유다에 대해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가룟 유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좋게 평가한다.1) 가룟 유다는 하나님에 의해 배신이 예정된 자였기에 오히려 불쌍한 사람이다.
2) 가룟 유다 때문에 십자가의 구속이 있었으므로 우리는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
3)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왕위에 앉히려고 그를 팔았다. 즉, 예수님이 빨리 이스라엘의 왕위에 앉지 않았기 때문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압박 하려고 팔았다.
4) 가룟 유다는 결국 돈을 돌려 주고 회개하였으므로 천국에 갔다.
그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하면서 가룟 유다를 옹호하는 영화와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평가에 근거하여 그가 명백한 죄인이며, 따라서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 처해졌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2. 가룟 유다를 통한 교훈1) 위선자가 되지 말라.
그는 예수님의 공동체에서 회개를 맡았던 사람이다. 지금도 어느 단체에서나 돈관리를 맡는 사람은 아무나 쓰지 않는다. 믿을만하고 정직한 사람, 그러면서도 총명한 사람에게 돈관리를 맡긴다. 그러므로 유다가 돈관리를 맡았다는 것은 그가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임을 받았던 사람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요한복음 12:6에서 예수님은 그를 도적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겉다르고 속다른 사람이었다. 즉, 위선자였던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사람들 앞에서 비춰진 우리와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의 우리는 차이가 없는가
2) 공동체 내부에서 치명적인 적이 나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 전혀 관계없는 외부의 사람이 아니었다. 치명적인 적은 언제나 내부의 적이지 외부의 적은 아니다. 이단들은 언제나 기독교 내부에서 나온다. 성도들에게 상처를 주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사람은 언제나 교회의 중심인물이다.
기독교는 가룟 유다 이후로 언제나 공동체 내부에서 치명적인 적이 나온다는 진리를 가르쳐 왔다. 우리 각자는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 비록 가룟 유다와 같이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범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역사를 되돌아 볼 때 교회와 성도는 외부의 핍박 때문에 무너진 것이 아니라 내부의 이단과 배신자 때문에 무너졌다.
3) 범죄 이후 즉각적으로 회개하라.
사실 가룟 유다에게는 적어도 세 번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① 요한복음 13장-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예수님이 유다를 배신자로 지목하셨을 때.
② 누가복음 22장-겟세마네 동산에서 유다가 예수님에게 입을 맞추려고 했을 때 예수님이 나를 팔려고 하느냐고 확인하실 때.
③ (본문)마태복음 27장-예수님을 판 이후에 죄책감을 가지고 돈을 돌려 주었을 때.
어떤 사람들은 이 순간이 가룟 유다가 회개하는 순간이라고 말하지만 이 순간은 그가 회개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후회하는 순간이다. 후회와 회개는 다르다. 후회는 자신의 잘못에 죄책감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회개는 자신의 죄에 대해 깊은 슬픔을 가지는 동시에 구체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다.
가룟 유다는 후회했을 뿐 회개하지는 않았다. 성도 여러분들은 범죄 이후 즉각 회개하라. 완전히 방향을 바꾸고 적극적인 선을 행하는 것이 회개이다. 그래서 저는 회개란 순간이 아니라 과정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3. 결 론1) 위선자가 되지 말라.
2) 공동체 내부에서 치명적인 적이 나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3) 범죄 이후 즉각적으로 회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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