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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 문 둥병자냐! 한 문 둥 병자냐!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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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다가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에 있는 어느 한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예수님의 소식을 들은 열 문둥병자가 달려와서 병고쳐 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문둥병을 고쳐주셨는데 주님께 돌아와서 감사하는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열 사람이 다 고침을 받지 않았느냐 그 아홉 사람은 어디로 가고 너만 혼자 와서 감사드리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열 문둥 병자를 살펴보면 몇 가지 공통점과 상이한 점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을 상고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열 문둥이
인류역사 이래로 아직까지 해결을 보지 못한 병이 있다면 나병[문둥병]일 것이다. 요즘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암이니 에이즈니 하는 병이 있기는 하나 나병[문둥병]은 발견된 지 그토록 오래이면서도 아직 완치를 못하고 있다.
성경대로라면 이는 불치의 병 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징계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번 걸리기만 하면 한 평생을 이 병과 싸우다 이 병으로 죽어야한다. 한번 걸리기만 하면 한 평생을 산 속이나 외딴 섬 같은데 따로 격리되어 살아야 한다.
오늘 본문에도 열 문둥이가 등장하는데 이들이 살고 있는 장소가 강조되고 있음이 그것이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인 사마리아와 갈릴리 접경 지역에 있었다.
[먼저 열 문둥병자의 공통점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1)첫째로 그들은 모두 다 문둥병 자였다는 사실이다
유유상종(유유상종)의 원리에 의해서 그들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족과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버림을 당하고 세상에서도 버림을 당하여 격리수용을 당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소름끼치는 병에 걸려서 온몸에서 진물이 흐르고 손가락과 발가락은 뭉그러져 떨어져나가 죽음 일보직전에 놓여 불행하고도 비참한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지애를 발휘하여 다같이 예수님께 고침 받기 위해서 같이 목숨을 걸고 예수님께로 찾아 온 것입니다 그 당시 율법에 의하면 사람을 만나기 위해 동네에 내려오면 돌로 쳐죽여도 되었고 사람이 지날 갈 때는 입술로 손으로 가리고 머리는 풀고 멀리 떨어져서 부정하다. 부정하다 큰 소리로 외쳐야만 했습니다
2)둘째로 그들은 생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살기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다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비극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지만 결코 그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피나는 노력을 쏟았던 것입니다. 요사히 조금만 어려우면 자살하고 낙심하는 자가 많은데 이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인생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예수님께로 찾아 나온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인생을 포기하는 사람을 도와주지 않으시지만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생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보려고 피나는 노력을 하는 사람을 도와주십니다.
3)셋째로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달려나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모든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신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도 예수님께 달려가 간구하면 우리의 병을 고쳐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께 달려나오게 된 것입니다.
비록 제대로 걸을 수 없는 병든 몸이었지만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한 사람이 쓰러지면 다른 사람이 일으켜 부축해 주고 상부상조하면서 예수님을 향해 달려나와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이구동성으로 부르짖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일으키리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는 말씀을 믿고 예수님게 부르짖은 것입니다.(약5:13-1

8.요14:14)
4)넷째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부르짖자 예수님께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문둥병을 고치신 다음에 깨끗한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문둥병을 앓고 있는 그 몸을 제사 장에세 가서 보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사장에게 그 몸을 보이려고 달려가다가 그 몸이 나은 것입니다 믿고 순종하며 나아갈 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조건 믿고 순종하면 됩니다
열 문둥이가 다 깨끗함을 받았는데, 그 중에 이방인 사마리아 한 사람만 하나님께 감사하고 아홉 사람은 감사가 없었습니다.
2,돌아온 한 문둥이
열 명의 문둥이가 어디서 들었는지 예수께서 자기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지나는 것을 알았다. 열 명의 문둥이가 예수의 지나가심을 보고 큰 소리로 외쳤다.
예수 선생이여 우리를 긍휼이 여기소서하며 부르짖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간청하는 요구에 응답을 하시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예수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열 문둥이는 제사장에게로 길을 떠났다
그런데 얼마를 가다가 보니 저들의 몸이 깨끗함을 입은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고 가다가 이런 축복을 받은 것이다.
얼마나 좋아 을 까 서로 서로 얼굴을 만져 보았을 것이다. 자기가 자기의 몸을 꼬집어도 보았을 것이다. 덩실덩실 춤도 추었을 것이다.
15-16절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제사장에게로 가던 걸음을 돌이켜 주님을 향하여 달려 왔다.
물론 문둥병에서 고침을 받았으니 자기 몸을 보여 주어야 할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나 제사장에게 자기 부모들에게 친척들에게 식구가 있었다면 처자식들에게 어서 달려가고 싶엇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 한 문둥이는 먼저 예수님께로 달려 왔다. 감사하기 위해서 였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였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큰 소리로 외쳤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의 문둥병을 고쳐 주셨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열 명의 문둥이 중에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다시 돌아 왔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다. 사례했다.
[예수님 찾아온 사마리아 문둥이의 감사를 생각하여 보자].1)첫째로 자기의 깨끝하여진 것이 예수님의 은혜요 축복이요 능력인 줄 알았다.(고전15:10.시116:12)
우연히 나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때가 되어서 나은 것이라 하지 않았다. 다 썩어 뭉그러진 환자를 희고 깨끗하게 하여 주신 것이 주님의 능력이요 은혜인 줄 알고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여러분! 겉 사람이 깨끗하다고 나는 문둥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겉으로는 깨끗한 채 하면서도 썩어진 곳을 감추는 문둥병 환자처럼 영적으로 썩어져 가는 문둥병 환가가 아닌가 애통과 절망 속에서 허덕이며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 줄 것인가 하고 고민하며 살지 않았는가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그 누가 나의 슬픔 알까 >
오늘 우리는 나의 생명 나의 건강 나의 재산 나의 자녀 나의 가정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요 주님의 축복인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의 희생의 보혈로 사망의 몸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사의 동기는 우리 주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당하신 사실에 대한 감격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부요 하시던 예수님 날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고, 날 존귀하게 하시려고 스스로 비 천한 몸을 입으시고 말구유 위에 누우시고, 최후에 그 머리에 가시관을 쓰심은 죄악으로 가득한 머리를 깨끗케 하시며 우리를 고치시려고 손발과 옆구리에 창과 못에 찔리시며 물과 피를 다 쏟으셨다.
우리 주님의 이러한 고난으로 우리가 오늘 구원을 입었는데, 그의 구속으로 오늘 내가 존재하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가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는가
눅7:47 에는 사함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 하느니라는 말씀이 있다. 예수님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부으며 자기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던 여인의 헌신적인 모습은 < 사죄 > 가 동기였다.
2)둘째로 인정과 환경을 초월하는 감사를 드렸다.
고침 받은 문둥이는 얼마나 고향이 그립고 처자가 그리웠겠는가 지금까지 오래 격리되었던 생활을 생각하면 속히 고향으로 달려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 문둥이는 그것을 억제하고 먼저 이 사마리아 문둥이는 그것을 억제하고 먼저 예수님께로 달려왔다. 인간이 자기의 형편에만 치중하면 집으로 달아난 9명의 문둥이와 다를 것이 없다.
영국의 청교도 시인 존 밀턴은 44 세에 장님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육안을 어둡게 하고 주님만을 보도록 신령한 눈을 주신 것을 감사하게 되었다.
사르밧 과부는 흉년에 자기의 독자와 함께 먹을 최후의 양식을 전부 하나님의 사람을 위하여 드렸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주셨다. 가난한 과부는 자기가 먹고 살아갈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 부자에게는 엽전 두 렙돈은 매우 작은 것이나 그녀에게는 생활비 전부였던 것이다.
누구든지 인간의 사정과 환경을 고려하면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감사할 수도 없다. 10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 앞에 진정한 감사를 드리는 사마리아 문둥이 같은 한 사람인가 생각해 보자.
3)셋째로 마음과 물질과 행동으로 감사하였다.
달아난 9 사람들이 생각조차 안 하였겠는가 남은 한 사람이 마음속에 있는 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었는데 반하여 9 사람은 행동이 없었다. 구원을 얻고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그런데 그것을 감사로 나타내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여러분들은 그것을 행함으로 보이시기 바란다.
미국에서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 무수한 고생 끝에 백화점 욍이 되고, 재무부 정관이 되고 미국의 10대 재벌이 되고 YMCA 창설자가 된 [존 와나 메이커가] 100 만 $ (9억원)의 예배당을 짓고 낙성식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주일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 애들이 줄을 서서 추수감사 예물을 제단에 바치는데 나는 너무 가난하여서 빈손으로 온 것이 너무 괴로워 주일학교 시간이 끝나자마자 벽독을 굽는 아버지에게 가서 그 이야기를 하면서 벽돌이라도 한 수레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목사 관을 찾아갔습니다. 당시 잠버드목사는 내게 손을 얹고 축복기도를 하여 주셨습니다. 그로부터 30 년이 지난 오늘 나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단독으로 100 만 달라의 예배당을 짓게 되니 이 큰 은혜를 어떻게 말로 다 하겠습니까
감사는 몸으로, 물질로, 행동으로 해야 한다. 그래야 실제적인 복을 받는다. 청교도들은 미국에 건너가서 한번 잘 살아보겠다고 간 것이 아니었다. 잘 믿어 보려고 한 것이었다. 미 대륙에 건너가서 황무지를 개척하고 첫 농사를 지을 때까지 6개월 동안 굶주림 속에서 초근 묵 피 하면서 첫 농사를 지어 1/3 을 떼어 바치면서 감사를 드린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3,돌아오지 않은 아흡 문둥이
이렇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은 문둥이가 문둥병에서 고침을 받는 그 이상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사례하기 위하여 예수님께 돌아온 한 문둥이처럼 살고 있는가 아니면 아흡 문둥이처럼 살고 있는가 일 것이다.
예수님은 감사하기 위하여 되돌아 온 한 문둥이에게 물었다. 17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그 아 흡은 어디 있느냐 왜 너만 왔느냐가 아니다. 그 아 흡은 어디 있느냐 이다.
여기 돌아오지 않은 아흡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예수님은 그 아흡 명도 돌아와서 감사하기를 바라셨다.
[,왜 감사가 없었을까 같이 생각하고자 합니다.]1)첫째로 세상의 것이 은혜보다 앞섰기 때문에 감사가 없었습니다.
아홉 문둥이는 예수님께로부터 병을 고침 받았지만, 긴 병을 고침 받은 은혜보다도 고향에 처자식 재산이 앞섰기 때문에 감사가 없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입은 은혜를 앞세우지 못하고 세상의 것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2)둘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에 감사가 없었다.
아홉 문둥이가 병을 고침 받고 그 은혜를 곰 곰히 생각하고 헤아렸다면 틀림없이 감사가 있었을 텐데, 은혜를 헤아리지 않았기 때문에 감사가 없었습니다. 인생은 모든 일에 작은 은혜나 큰 은혜나 헤아리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3)셋째로 불행했던 때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아홉 문둥이는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때를 잊어버렸습니다.
물론 사람의 불행했던 때에 집착하거나 붙잡힐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은혜를 입고 성공하면 교만하지 말고, 불행했던 때를 기억하면서 현재 성공을 비교하면서 겸손히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4)넷째로 감사하면 자신에게 얼마나 유익이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감사가 없었습니다.
감사가 있는 사람에게는 은혜와 축복을 계속 감사하는 자에게 더 많은 것을 주십니다. 본문에 보세요.
이방인 한 사람이 고침을 받고 주님께 사례할 때에 어떤 은혜와 축복이 임했습니까 그것은 아홉 문둥이가 전혀 모르는 영혼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감사한자의 결과입니다.
그럼 왜 그 아흡은 돌아오지 않았을까
A.자기의 필요만 채웠으면 됐다고 생각했을까
자신이 구하던 일이 이루어졌으면 됐지,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고 생각한 것일까
B,병들었을 때 주님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을까
지금처럼 건강한데 왜 돌아가는가
C.길을 가다가 낳은 것이기에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제수가 좋아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을 굳혔을까 예수는 나에게 손도 대지를 안치 않았던가
D.자기들이 간절히 간청했던 것 자체를 대단한 것으로 생각했을까
내가 그렇게 간절하게 구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왜 일어날것인가
E.지금 이렇게 건강한 것이 너무도 좋아서 예수님을 잊은 것일까
F.만약 지금 예수께로 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이전에 내가 문 둥 병자였다는 것을 새삼 들어내는 결과가 아닌가 거지요, 문 둥 병신이요, 천대꾸러기요, 자기의 아픈 과거를 인정하고 공개한다는 점에서 자존심이 상했던 것일까
왜 돌아오지 않았을까
예수님께서는 기다리고 계셨는데 왜 돌아오지 않았을까 열 사람중 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께로 돌아 왔다. 진심으로 감사를 드렸다.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렸다.
왜 주님은 그 아흡 까지도 다 와서 사례하기를 기다렸을까 무슨 공치사를 받고자해서가 아니다. 무슨 댓 가가 필요했던 것도 아니다. 일로 자기를 들어내고 싶었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
주님은 돌아온 한 사람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다. 19절에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감사하는 그에게 믿음을 주시었다. 사례하는 그들에게 믿음을 더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더 낳은 삶을 주시고 싶었던 것이 주님의 미음이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이 두 부류 중에 한 사람일 것이다.
나는 돌아온 그 한 사람과 같은가
아니면 돌아오지 않은 그 아흡 사람과 같은가
부모 된 자 치고 자기의 자식을 자꾸 보고 싶어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식의 주머니 때문인가 아니지 않은가 무언가 주고 싶어서 또 주었는데도 더 주고 싶어서 자식이 잘 사는 것을 보고 싶어서인 것처럼 주님도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믿음 주고 싶어서 구원의 확신을 주고 싶어서 그 아 흡을 애타게 기다리셨던 것이다.
여러분 모두 주님께 사례하는 자가 되시고 또 더 큰 믿음의 축복 속에 살아가시길 바란다.
신자는 감사 조건을 찾아서 감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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