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예화 크리스천의 직업의식

첨부 1


다음 글은 한양대학교 교수이며 소설가인 현 길언 님의 '크리스천의 직업의식 (직업에 귀천없는 하나님나라)' 이라는 제목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아뭏든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기독인 들의 귀한 지침이 되었으면 합니다.
큰교회 교인들일수록 서로 교제하면서도 피차의 직업을 묻기가 어렵다.
세상적인 시각에서 상대방이 괜찮은 직업이나 지위를 갖고 있다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을 때는 피차 어색해진다.
또한 대학입학 시험을 치를 때는 지원대학을 묻거나 합격자 발표를 할 즈음에 합격 여부를 묻는 일은 퍽 절친한 사이가 아니면 같은 교회 교인이면서도 망설여진다. 모두 좋은 직장을 원하고 소위 좋은 대학을 바라기는 교인들도 안 믿는 사람과 다름이 없다.
어떤 교회 대학부에서는 회원 피차 서로 재학하는 학교를 내놓고 말하는 것을 꺼리기도 하는데 , 그러기에 소위 일류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일수록 그러한 점에서는 처신에 조심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아예 대학부라는 부서 명칭을 청년부로 바꿔버려, 나이에 따라 1부.2부로 나누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왜냐면 대학에 다니든 안다니든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일 것이다.
우리가 얼핏 생각하기에 이러한 현상은 세상적인 가치를 초월하여 모두 평등한 입장에서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해 바람직한 것처럼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좀더 욕심내고 바라는 것은, 오히려 세상의 가치나 판단에 얽매어서 자기가 속한 대학이나 직업을 겉으로 드러내지않고 초월한 척하기보다 전부 드러내놓고 서고 교제하는 일인 것이다.
예를 들면, 전문학교를 다니든 서울대학을 다니든 대학 다닐 나이에 판금공이나 미장공으로 산업전선에서 일하든지, 또는 재벌 기업의 회장이나 리어카 행상꾼이나 회사의 수위나 장관이나 시청의 미화부원이나간에 , 모두 자신의 일터와 처지를 드러내놓고 피차 서로 알고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생활할 수 있는 교회라야 하나님의 문화가 실현되는 공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 피차 자기 처지를 숨기며 서로 아는 것이 어색할까 ?
그렇게 해서 어떻게 피차 사랑할 수 있을까.
상대를 알지 못하고는 사랑할 수 없다. 그것은 크리스천들이 아직도 직업에 대해서만은 봉건적 직업의식을 벗어버리지 못했고, 그래서 여전히 세상가치에 얽매어 있으며, 하나님 나라 문화에 대한 생각이 얕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이해나 관심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세상적인 축복과 하나님의 축복을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오늘의사회는 어떤 특수한 직종에서 일하는 사람에 의해서, 어떤 특정한 몇몇 슈퍼스타에 의해서 운영되어지지 않는다.
여러 계층 사람들이 모여 각각 다른 일을 하면서 서로 연합하여 살아갈때 바람직한 공동체 사회가 가능하게된다.
대통령 일이 중요한 것처럼 구청 미화부원 일도 소중하다.
오히려 대통령보다는 그들 일이 더욱 필요할 때도 있다.
빵을 만드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밀 농사 짓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한채의 집을 지어본 사람이면 분명히 깨달을 것이다. 집을 짓는데는 우선 자금이 필요하고 그 다음에는 기술이 필요하다. 설계와 시공에 따른 여러 가지 공정은 훌륭한 집을 짓는 데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자금과 기술이 풍부하고 훌륭하다고 해서 좋은 건물이 지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에 못지않게 벽돌공이나 미장 일꾼의 성실함이 소중한것은 물론이고, 마지막 정원 마무리 공사를 하는 막일꾼 역시 훌륭한 건물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재료만 해도 그렇다.
값비싼 대리석도 필요하지마는 길에 뒹구는 돌멩이 하나의 몫도 결코 가볍게 넘기지 못한다. 오히려 대리석보다 더 요긴할 수도 있다.
집을 짓는 사람의 입장에서 집을 짓는 데 필요한 재료들을 그 값으로만 판단할 수는 없다. 만약 건축주가 재료들을 구입한 그 값에 비례해서 그 각각 재료들을 처리한다면 그 건물은 별 볼일없게 지어질 것이다.
건물짓는데 참여하는 사람들이나 쓰여지는 재료들은 각각 차이가 있더라도 건물을 만드는 데 있어서 제 각각의 몫을 충분히 감당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평등한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천국비유 중에 달란트 비유를 잘 알고 있다. 주인이 길 떠나면서 종들에게 나누어준 달란트의 양은 수량적인 의미로만 이해하지 말고 변별적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복을 받는 길은 받은 만큼 남기는 데 있다. 주인은 결코 두 달란트 받은 자에게 다섯 달란트 남기기를 원하지 않앗다. 각각 달란트는 다르게 받았지만 받을 복이다르지는 않다. 결국 주인은 평등하게 나누어주었다.
적고 많음을 생각한 것은 인간의 욕심에 찌들린 종들이다.
한 기업을 운영하는 데 모두 회장이나 사장이 될 수만은 없다.
한 국가에서도 국회의원이나 장관만이 나라 일을 다 감당하지 못한다.
그리스도는 몸이고, 세상 사람들은 모두 지체들이다.
인체중에서 제일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은 우문이다. 심장의 일을 손톱이 할 수 없음과 같이 손톱의 몫을 심장이 감당할 수 없다.
쓸모 없을 것같은 손톱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필요해서 만들어놓았다.
눈썹하나 쓸모없게 만들지 않았다.
우리들 일의 몫은 각각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 그것의 가치를 수직적으로 가늠할 수 없다. 그것을 인간의 욕망이나 관심으로 가늠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멀다. 그 가늠의 잣대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가치이기에 그것은 곧 우상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못마땅한 사람들은 아마 재물이나 능력, 지위를 적게 가진 사람보다는 많이 가진 사람일 것이다.
예수님 시대에는 한 달란트 가진 그러나 크리스천들은 인간의 노력으로 실현하지 못하는이 사회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그 나라에서는 실현될 것이라고 믿는다. 거기서는 죄에서 자유롭고 선한 통치자 앞에서 인간은 평둥하게 될 것 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자유는 하나님 은혜로 죄에서 구원받았다는 믿음으로 얻을 수 있지만 평등은 어떻게 확보 될 수 있을까.
이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나와 타인이 감당하는 일에 대한 평등한 인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또한 그것은 곧 크리스천의 세계관으로 삶의 목표와 방법에 직결되어야 만이 이 세상에서 평등한 사회를 위해 우리들은 노력을 경주할 수 있다. 이러한 직업에 대한 의식은 재 직업과 타인의 직업에 대해 소중하고 의미있게 인식할 때 자신이 거짓된 세상 욕망에서 헤어날 수 있으며 , 진정한 교회 공동체인 하나님 문화를 이룸에 한몫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복음화의 구체적인 실상이기도 하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