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영생을 얻는 길 (눅 18:15-30)

첨부 1


지난 주일에는 기도를 드리는 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배웠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영생을 얻는 길을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축복하신 사건과 다른 하나는 부자 청년의 영생에 관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영생을 얻는 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영생을 얻는 진리를 깨닫고 영생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하나님의 나라와 어린이(15-17)

유대인의 어머니들은 자기 자녀들을 유명한 랍비에게 데리고 와서 축복을 받게 하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자기 아이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 기도를 해 줄 것을 기대하고 데리고 나왔습니다.(15, 막10:36)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가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식을 가진 부모는 자기 자식이 축복을 받아 귀하고 예쁘고 잘되기를 바라는 것은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나머지 어린 자식을 가진 어머니는 거짓말을 밥먹듯 한답니다. 이제 걸음마를 배워서 이 어린이가 겨우 몇 발자국만 걸어다니기 시작하면 그 어머니가 하는 말이 우리 아기는 ‘안 가는데 없다’고 합니다. 또, 겨우 엄마, 아빠라고 배워서 몇 마디 말을 하게 되면 자랑하기를 ‘못하는 말이 없다’고 합니다. 자식이 귀하고 자랑스러워서 수다를 떱니다. 이런 거기다 데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린아이들을 꾸짖었습니다.(15) 자기 자식에게 축복을 받게 하겠다고 데리고 나오는데 못 오도록 막았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번거롭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꾸짖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철없는 아이들은 잠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고 장난을 치고, 소리를 지릅니다. 시끄럽다고 야단을 치면 ‘메롱! 메롱!’ 하며 오히려 어른을 놀립니다. 아마 아이들은 예수님 다리에 매달리기도 하고 옷을 당기며 서로 먼저 머리를 만지며 축복해 달라고 머리를 내밀며 박치기까지도 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마 이런 관경을 보고 매일매일 일하시느라 피곤한 예수님이 좀 쉬실 수 있도록 보호하기 위해서 어린아이들을 꾸짖어 내 좇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하셨습니다. 불러서 오게 하셨습니다. ‘이리 오너라’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자꾸 막으니까 마가복음 10:14절에는 “예수께서 분히 여겨”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영접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 때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이 아이들을 축복해 주셨을 때는 예루살렘에 마지막 여행을 하시고 계신 때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어린아이들에게 해 주신 축복은 마지막 작별의 축복이었습니다. 보세요. 우리 주님은 마지막까지 사랑하시며 축복을 해 주신 좋으신 주님이십니다.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이때 축복을 받은 아이 가운데 하나가 성 익나티우스(Ignatus)였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들이 머리 만져 주심을 바라고 나오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16b) 하셨습니다.
이런 자란 예수님께 나아 온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단지 예수님의 사랑과 축복만을 믿고 나아 온 자들입니다. 이들은 조금도 의심도 없이 진심으로 예수님이 만져 주실 것을 믿고 서로 먼저 다투어 머리를 내밀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자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인의 성경에는 “막지 말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하셨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17)
여기서 어린아이와 같이 ‘받든다’는 말은 어린아이와 같이 영접한다(receive), 어린아이들처럼 말씀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단순하게 영접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아주 단순하게 믿고 받아 드립니다.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좋아서 어쩔 줄 모릅니다. 또 무서운 지옥에 대해서 말하면 인상을 쓰고 무서워서 벌벌 떱니다. 어린아이들의 생활은 온통 신뢰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자고, 먹고, 입고하는 것은 전혀 염려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당연히 밥도 주고 가장 좋은 옷도 해 입혀 주고, 공부도 시켜 주고, 잠도 재워 주고, 학교 갔다 돌아오면 반갑게 맞아 줄 것을 확신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얼마나 부모를 믿는지 안 해주면 도리어 그게 부모의 도리라고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합기도 합니다. 자녀들과 여행을 하면 당연히 아버지가 차비를 내고, 만사를 잘 아니까 무사히 목적지까지 데려다 줄 것을 믿고 즐겁게 여행을 합니다. 어머니 앞에 있는 어린아이는 항상 즐겁고, 걱정이 없습니다. 마냥 즐겁습니다. 어린아이들의 부모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입니다.
우리도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도가 이와 같아야 된다고 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3:14,15) 하면 어린아이들은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 드립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예수님이 뱀처럼 나무 위에 달리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뱀을 처다 보고 독이 빠지고 병이 낫고, 죽어 가던 사람이 살아났는데, 우리도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뱀처럼 달리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하면 어린아이들은 그대로 받아 드립니다. 그대로 믿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그가 우리 죄 때문에 채찍을 맞고, 찔리고, 상하시고, 부끄러운 수치를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심판이 없습니다.(요5:24)
어린아이들에게 이 말씀을 증거 하면 어린아이들은 순수해서 그대로 다 말씀을 영접합니다. 그 말씀을 그대로 다 신뢰하고 받아 드립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자의 것입니다. 또 어린아이들은 겸손히 배우는 마음(teachable mind)이 있습니다. 자기 생각이 있더라도 잘 설명을 해 주면 금방 자기 생각을 버리고 말씀을 받아 드립니다. 그리고 신뢰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처럼 겸손하고 진실하며 단순하게 믿고 나오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도 자기 생각을 고집 하는 사람, 항상 의심하고 불신하는 사람, 진실하지 못한 사람, 교만하여 배우기를 싫어하는 사람,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동 번역에는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맞아 드리지 않으면 결단코 거기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7) 하였습니다.
가끔 성경 공부를 오랫동안 해도 도무지 변화가 없는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이 분들은 항상 얼굴에 근심이 있고 초조하고 기쁨이 없습니다. 불안합니다. 근심과 걱정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분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분들은 단순하게 말씀을 받아 드리지 않습니다. 말씀을 의지하는 믿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어린아이 같이 순진하게 말씀을 받아 드리고 믿어서 “이렇게 쉬운 구원을!” 하며 말씀을 받아 드리는 순간 얼마나 기뻐하는지 “이대로 죽어도 좋다”라고 합니다.
요8:32절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했습니다
어떤 부인이 자리에만 앉으면 나는 믿음이 없어요. 잘 못 믿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을 합니다. 하루는 목사님을 만나서 “목사님! 나는 믿음이 없어서요. 어떻게 하면 잘 믿을 수 있나요”하자 목사님의 대답이 “그렇게 믿으려고 애쓰는데 그렇게 안 믿어지고 못 믿을 그 분이 누구입니까 누구길래 그렇게 못 믿습니까” 하자 그 대답을 들은 부인은 다음부터 잘 못 믿겠다는 말을 다시는 하지 않더랍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어린아이들과 같이 순진한 마음을 가져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식에 있지 않으며 권위에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가 부모를 신뢰하고 믿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 드리는데(영접하는데) 주어지는 것입니다.(요3:15 참조)
Ⅱ.하나님의 나라와 재물(18-27)

사람들은 출세하고 부자가 되면 행복하리라고 생각을 하지만 그렇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부자이며 젊은 나이에 출세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 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했습니다.
① 이 사람은 관원이었습니다. 관원이란 예루살렘의 공회원이거나, 지방 회당의 관원 이였을 것입니다. 관원이 되려면 30세가 넘어야 합니다.
② 이 사람을 마태는 젊은 청년 이였다고 했습니다.(마19:22)
③ 또, 부자였다고 했습니다.(마19:22) 본문에는 큰 부자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관원이 되었습니다. 또, 젊어서 돈을 많이 벌어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젊어서 많은 재물을 모으고 사회적인 지위와 명성을 얻었습니다.
④ 또, 내가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켜 왔나이다(21) 한 것을 보면 그는 일찍부터 종교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간음도, 살인도, 도적질도, 거짓 증거도 하지 않고 또 부모 공경도 잘했습니다.
⑤ 그러므로 그는 도덕적으로도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니고데모 같이 모든 축복을 갖춘 사람을 방불케 합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안식일도 철저히 지키고 십일조도 내고 율법을 지키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기쁨이 없었습니다.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니고데모 마냥 밤에 예수님을 찾아오지 않았지만 이런 답답한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을 찾아 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였습니다.
유대의 모든 종교적인 문서에는 어느 곳을 찾아보아도 어떠한 랍비에 대해서도 “선한 선생”이라고 부르고 있는 기록은 없습니다. 랍비들은 언제나 “율법 외에는 선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관원이 예수님께 선한 선생님이라고 한 것은 아첨이라기 보다 예수님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함과 동시에 그의 답답한 소원을 들어주실 수 있다는데 존경을 표시한 것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 당신 자신이 선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관원의 생각을 하나님께 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확실히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예수님이 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모릅니다. 그런데도 선한 선생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 관원 자신도 선한 사람이요, 인간도 선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은 것을 볼 때, 자기의 선한 행위로 영생을 얻으려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사람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음을 발견하시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해서 그 관원의 생각을 하나님께 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대게 인간적으로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들을 보면 자기의 노력과 성실로 선을 행하고 착한 일을 많이 해서 그 선을 쌓는 대가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천만에 말씀입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율법의 행위로 의로와 질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롬3:20)
사도 바울도 자기가 아무리 율법을 지키고 선을 행해 보려고 노력을 해 보고 힘을 써 보아도 힘을 쓸 수록 더 죄 아래로 사로잡혀 가고, 선을 행하는가 하면 어느덧 죄를 범하고 죄 아래로 끌려 가는 것을 보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절규를 했습니다.(롬7:24,25) 바울은 자기의 노력으로나 선행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연약한 자임을 깨닫고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영접하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마틴 루터도 무릎에 피가 나도록 교황청 계단을 입을 맞추며 오르락내리락해도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결국 그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1:17) 오직 믿음으로 영생 얻음을 깨닫고 종교개혁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가 무엇을 하는 to do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내가 무엇이 되는 to be에 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되는데 영생이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그에게 무엇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하시자, 이 청년은 기다리기나 한 듯이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카니나(R. Chanina)가 죽을 때, 죽음의 천사에게 내게 율법 책을 가져와 거기 기록한 것 중에서 내가 미쳐 실행치 못한 것이 있나 보아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여기 이 관원은 다 지켰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만 여섯 살부터 율법을 암송시키고, 신앙 교육을 시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려서부터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며 모법적으로 자라났습니다. 그는 간음도 하지 않고, 살인도 하지 않았고, 도적질도 하지 않았고, 거짓 증거도 하지 않았고, 부모 공경도 잘한 것 갔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했습니다. 또,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또, 젊어서 공부를 많이 하여 관원이 된 출세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젊은 나이에 큰 부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적으로 볼 때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네가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엄청난 부자요, 모든 것을 갖춘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사람 이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보실 때도 꼭 한가지가 부족하다고 지적을 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물질에 대한 욕심이 많다고 지적하여 주셨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네가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모든 훌륭한 점을 칭찬해 주시고 한가지 부족한 것을 지적해 주시고 그에게 영생을 얻는 방향을 잡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큰 부자 인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고 돌아가 버렸습니다.(23)
그는 어릴 때부터 계명을 다 지키고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온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을 지키지 않은 자였습니다.(마22:37-40) 이것 한가지가 부족한 것입니다. 그의 곁에는 수 없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헐벗고, 굶주려 죽어 가고 있는데, 자기의 물질을 풀어서 이웃에 사랑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큰 부자였으나 가난한 자에겐 관심도 없고 자기 몸만 출세하고 자기 돈 버는 데만 관심을 쏟은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이 영생을 구하는 자에게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분명히 하늘에 보화가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으나(22) 예수님의 말씀을 그는 영접치 아니하고 심히 근심하고 돌아갔습니다. 보세요.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게 영접하기만 하면 얻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부자 청년은 심히 근심만 했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영접하거나 받아 드리지 못하므로 구원을 얻지 못했습니다.
감옥에 가는 것은 모든 범죄를 행해서가 아니고 한 가지 잘 못을 하므로 영창에 갑니다. 여기 관원은 한 가지 잘못을 하므로 지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심히 근심하는 부자 청년을 보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24,25) 하셨습니다. 우리도 가난하거나 호주머니에 돈이 없을 때는 기도 생활도 하고 영적인 생활을 하고 뭐든지 믿음으로 생각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재산이 좀 늘고, 주머니가 두툼해지면 새벽기도 생활도 하지 않고, 겸손한 맛도 없고, 목소리도 힘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재물을 의지하며 소망을 세상에 두며, 하나님 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고 돈 대문에 여러 가지 시험에 듭니다. 그래서 천국 가기가 어떻게 힘든지 당시 랍비들이 불가능한 어떤 일을 가리킬 때 “코끼리가 바늘 귀로 들어간다” 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도 당시 속담인 부자가 천국에 가기가 어떻게나 힘든지 낙타가 바늘 귀를 빠져나가는 것이 쉬웠으면 쉬웠지 부자가 천국에 가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디모데전서 6:9,10절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새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윤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주위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무리들이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궁금해하자 예수님의 대답이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27) 하셨습니다.
예루살렘 대성전에는 큰 대문이 있습니다 주일 낮 예배나, 공중 예배 때는 문을 활짝 열어 둡니다. 그러나 평일에는 큰 대문을 닫고 작은 샛문을 열어 둡니다. 이 작은 샛문을 ‘바늘 귀 문’이라고 합니다. 평일에 이 문을 통과하려면 낙타 등의 짐을 내리고 뻣뻣이 선 낙타를 주인이 엎드리게 해서 당겨 들이게 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예수님은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주인 되신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큰 부자라도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낙타처럼 순종하면 바늘 귀 문을 통해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Ⅲ.영생과 축복(28-30)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베드로는 자랑스럽게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28) 합니다. 베드로는 자기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아 제자의 삶을 살고 있다고 은근히 자랑을 하며 말을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이런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의 희생과 수고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부자 청년과 비교해 볼 때 참으로 훌륭합니다. “나를 따르라” 하시니까 배와 그물과 부친을 내버려두고 어린아이처럼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여러 배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영접하고 큰 축복을 금세와 내세에서 받을 수 있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199

5.

3. 26. 주일 낮 예배 설교.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