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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원히 불러야 할 노래 (골 02: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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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요일 영락교회 원로목사이신 한경직목사님께서 98세, 우리 나라 나이 100세에서 한 살 모자라는 99세의 일기로 하나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세상을 떠난다고 하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가 될 수 없는 불변의 진리요, 특별히 한목사님께서는 장수하셨다는 면에서도 복되다 싶은데..... 그래도 그렇게 귀한 분이 우리 곁에 계시지 않은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그 귀한 분 데려 가셨으니 우리 민족 가운데 한목사님 같으신 분을 또 허락해 주십시오.' 하는 마음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애써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족하지만 선배님께서 남기신 그 발자취를 열심히 좇아야 하겠다는 마음에 다짐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한목사님의 기사가 여러 일간지에 특집 보도되고 있는데 그 중에 몇 구절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모 일간지는 기사를 이렇게 썼습니다. 한국교회의 거목 한경직목사.그러나 그의 빈소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통곡이 없었다. 온갖 수식어를 다 동원해도 별반 문제될 것이 없는 한목사의 인생에 왜 통곡이 없을까. 기자는 그 해답을 금방 얻을 수 있었다. 빈소를 찾은 성도들은 한목사가 아흔 여덟의 인생여정을 마치고 하나님의 품에 안겼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인간적인 서운한 마음에 잠시 눈시울을 붉힐 뿐이었다. 성철스님이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을 때 그를 따르던 분들의 통곡소리와 대조적인 부분입니다.
그리고 종교부 차장이 쓴 부활절에 관한 단상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죽음은 사람에게 엄청난 두려움을 안겨준다. 또 우리의 삶을 허무와 불순종으로 몰고 간다.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이 세상에서의 삶이 우리의 전부이거나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한 줄기 생명의 빛이 우리에게 비쳐 새로운 삶의 능력이 자리잡게 됐다.
새로운 생명에 대한 커다란 희망이 생긴 것이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유일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바로 그것이다.
생명은 나눔으로써 더욱 그 생명력을 발휘한다. 흔히 사해와 갈릴리 호수로 설명되는 생명과 무생명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받아들이기만 하고 나눠주지 않는 생명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나누고 흘려보낼 때 풍부한 생명을 소유하는 원칙을 갈릴리 호수에서 본다. 19일 소천하신 한경직 목사님의 삶도 바로 그러했다. 오직 믿음으로 목자의 표본을, 나눔과 섬김으로 청빈을 실천해 오늘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그 분에게는 누구보다도 부활에 대한 소망이 강렬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를 배웁니다. 부활은 육신적 죽음을 달리 이해 하게 한다는 것과 부활을 확신하는 사람의 삶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주일을 맞이했습니다. 한목사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의 자리에 다른 어느 것도 자리할 수 없습니다. 오직 부활만이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부활 하나를 바라보고 이 세상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투자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 자신도 부활이 없다면 당장 목회자의 길을 버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서 말씀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오늘 부활절 아침 여러분 모두에게 이 부활의 소망이 어느 소망보다도 가장 강렬한 소망으로 일생을 가득 메우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 삶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위엣 것을 찾으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 10년 목회하면서 여러분들의 장례를 인도했습니다. 특별히 하관예배를 인도하면서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평균연령이라는 것이 있잖습니까 수를 다하시고 세상을 떠나셔도 유족들에게는 슬프고 슬픈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면 유족들만 아니라 모든 조문객들의 마음도 슬픔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장례를 집례 할 때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하관예배를 드릴 때마다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기가 인생의 마지막이요, 여기가 인생의 전부라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가 사람이라구요.

여러분! 우리 먼저 간 성도님들께서 수를 다하시고 세상을 떠나셨건, 그렇지 못한 채 소천하셨건 부활을 확신한다면 몇 년을 살았느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무덤의 자리는 인생의 종지부를 찍는 자리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부활의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에게는 인생의 종지부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하관예배를 인도하면서 상상해 보기도 합니다. 거기에 묻히고 있는 우리의 형제요, 자매 되시는 그 분들이 천사처럼 빛나는 힌 옷을 입고 무덤을 열고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새 몸을 입고 부활하시는 것을 상상해 봅니다. 영광스러운 모습니다. 죽음이 생명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부활은 모든 죽음을 생명으로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기에 현재의 삶이 내용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위엣 것을 찾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2절부터 4절까지의 말씀을 보십시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
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그리스도인들은 위엣 것을 생각합니다. 영광을 바라봅니다, 주님의 영광에 동참할 소망이 있기에 땅엣 것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부활을 확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내용과 목적을 달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룩한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확신하고 소망하는 사람들은 자유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골로새서 2장 20절 이하를 보십시오.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세상에는 사람을 얽매는 중요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초등학문과 의문입니다. 초등학문은 세상에서 얻은 지혜와 지식을 말하고 의문은 율법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것들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뿌리가 여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의 뿌리가 여기에 있다면 우리는 이것을 열심히 좇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에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골 2:6-7)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세상에는 망하는 것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죽음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망하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 있는 사람들은 이미 흥하는 삶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어두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에게는 어두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빛이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기에 그리스동인에게는 어두움이 물러갑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생각들이 지워지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를 하게 되고 소망을 붙잡습니다.

어느 책에서 읽은 얘기입니다. 1939년 미국에서 경제 대공항이 일어났을 때입니다. 우리 나라가 지금도 IMF 관리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 정도가 아닙니다. 그때 어떤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40평생을 제제소에서 일했습니다. 그래서 할 줄 아는 일이라곤 그것뿐입니다.

그런 시대에 이 분이 직장에서 쫓겨났습니다. 인플레이션이 심각했던 시대였는데 호주머니를 뒤져보니 250불 만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분은 이 돈으로 작은 여관을 하나 인수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는 생각하기를 망하는 것이 없다. 하나님께 맡기자. 단 하난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하나님의 뜻에 맞게 운영하자. 그래서 두 가지 운영 원칙을 세웠습니다. 첫째로 절대로 술을 팔지 말자. 둘째로 절대로 도박을 허용하지 말자.

가뜩이나 어려운 시대에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해도 돈이 벌릴까 말까인데 이래서 되겠느냐고 주변사람들이 만류합니다. 그러나 그는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혜 가운데 여관이 점점 발전하게 되었고 그것이 체인망이 되고 큰 호텔체인이 되었는데 그것이 홀리데인 인이 되었습니다.
부활이란 말이 영어로 몇가지가 있습니다. resurrection. revival, restoration입니다. resurrection은 부활로 번역되고 revival은 대개 부흥으로 번역되고 restoration은 대개 회복으로 번역됩니다만 다 의미가 통하는 말입니다. 영한 사전을 찾아보면 모두 부활이라는 말로도 번역합니다.
부활은 문자 그대로 부활입니다.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다시 사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죽음을 걷어 내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뿐 만 아닙니다. 부활은 우리의 좌절과 연약함과 부진함과 실패를 딛고 일어서게 하는 힘입니다. 회복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연약했습니다. 그들의 신분은 천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대부분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목격하고 그리고 부활은 확신하는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삶의 능력을 깨달았습니다. 죽음을 넘어서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어납니다. 죽음 앞에서도 일어납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연약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세상에 제 아무리 권세 있는 자라도 죽음 앞에 떨며 슬퍼하며 고통 가운데 세상을 마감하게 될 것이지만 그들은 세상을 떠나게 되는 그날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앞에서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할 것입니다. 이것이 부흥입니다. 이 확신에 찬 사람들은 로마의 권세도 엎을 수 있는 놀라운 부흥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무엇이 부흥입니까 사람이 그리스도의 진리 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무조건 사람이 많은 것이 부흥이 아니라 부활의 확신에 찬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세상의 초등학문과 의문, 즉 율법에 매여 살지 않고 부활을 소망하며 그리스도의 뜻을 좇는 사람들의 삶이 부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기도하고 땀흘리고 있습니다. 지난 고난 주일에 우리 성도님들이 이 지역의 이웃들에게 조그만 선물을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손에 선물을 들고나서서 이웃들에게 전달하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감사하고 기뻤는지 모릅니다. 어떤 분은 목사님! 너무너무 좋아요. 온 교회가 하나되어 이웃을 축복하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온 교회가 모처럼 한 마음 된 것 같고 또 한 마음 되어 이웃을 축복하니 정말 좋아요.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조그마한 선물을 받은 그 분들이 이 영광스러운 부활의 복에 참여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어떤 분들이 '이왕에 돌리는 것, 교회의 자세한 소식을 넣어서 전하자.' 그분들의 생각이 옳습니다. 평소라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절했습니다. 교회를 알리고 선전하는 좋은 일입니다. 교회의 성장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교회의 부흥은 교회를 알리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놀라운 소식을 알리는 것이요, 그 소식으로 이웃을 축복하는 것이다. 생각했습니다. 교회는 교회 자체를 알리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첫 열매 되신 주님의 역사를 알리는 곳입니다. 여러분 안에 그리고 우리 교회가 부활의 확신으로 넘쳐서 진정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은 회복입니다. 모든 죽음과 실패는 생명과 성공으로 회복됩니다. 악함과 추함은 선함과 아름다움으로 회복됩니다. 불의와 거짓은 정의 진리로 회복됩니다. 불완전과 두려움은 완전함과 담대함으로 회복됩니다. 불안과 걱정이 평안과 기쁨으로 회복됩니다.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보려고 갔습니다. 그때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습니다. 그리고는 여인들에 말합니다.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여인들은 무서움으로 떨었지만 금방 변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8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새 부활이란 엄청난 역사 앞에서 단순한 두려움이 경외로 바뀌고 기쁨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따라서 부활은 우리가 부를 영원한 노래입니다.

여러분 부활을 사모하십시오. 이 부분에 욕심 내셔도 됩니다. 부활의 능력을 덧입기 위하여 집중하셔야 합니다. 부활은 어떻게 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돈은 귀한 것입니다. 세상의 온갖 귀한 것들을 돈으로 가질 수 있습니다. 돈으로 생명을 연장시킬 수 도 잇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못삽니다. 천국은 살 수 없습니다. 세상의 권세가 지식이 소중하고 귀합니다. 그것으로 우리 삶을 윤택하고 편리하게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굴종시킬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얻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제가 예언하나 하겠습니다. 부활을 믿고 소망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성공합니다. 믿음에 집중력이 생깁니다. 사람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오늘 주신 말씀 다음에 보면 주옥 같은 말씀들이 계속되는 몇 절을 보겠습니다. 10절이하를 보십시오. (골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골 3:11)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골 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골 3: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골 3: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골 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고 쭉 넘어가서 23, 24절입니다.(골 3: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 3:24)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부활의 아침에 여러분 모두가 부활을 확신하고 간절히 소망하여 여러분에게 하나님 놀라운 권세와 능력이 여러분 사람 가운데 나타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하나 축복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부활의 소망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인다운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 여러분의 삶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의 삶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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