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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 부활의 의미 (눅 2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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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무언가 이해 시키고 증거해야 할 때에 강한 부정으로 증언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에도 가끔 강한 부정으로 긍정을 설명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도 강한 부정으로 부활을 증언을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가운데 있을 것이요.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전 15:17-19)
그 이유는 부활의 진실을 오해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강하게 증언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의 부활에 대해 의문을 갖는 현대의 많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어떻게 죽은 자가 부활할 수 있겠느냐는 강한 의문을 제기 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어린아이와 같은 질문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많은 오해에서 비롯한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의문이 풀린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과학적으로 증명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그들의 오해가 풀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무엇을 오해했습니까
그들의 오해는 예수님의 부활이 일어나던 그 새벽부터 이미 시작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비롯하여 4복음서는 모두 예수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안식 후 첫 날 새벽에 여인들이 무덤에 찾아가는 데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보면 안식 후 첫날 새벽, 그러니까 주일 새벽에 여인들이 미리 준비해 놓은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갔습니다. 무덤에 도착해 보니 무덤을 막아놓았던 돌이 굴려 옮겨져 있었습니다.
그 때는 안식일이 지난 첫날 새벽이었고, 또 여인들이 무덤 속에 들어가 확인했을 때, 이미 거기에는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으니 실제 예수님의 부활은 주일 새벽이 아니라 이 보다는 훨씬 더 이른 한 밤중이었는지 모릅니다. 어쨌든 예수의 시체가 사라져 버린 그 현장에서 여인들이 근심하면서 서성거리고 있을 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 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 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잘 생각해 보라.
이것이 그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의 말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 내고 무덤에서 황급히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모든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무덤에서 세마포만 확인하고는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면 오해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오해는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가지고 주일날 새벽 미명에 그 무덤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그들은 무덤으로 향하면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줄 것인가 라고 걱정했습니다. 여인들이 이미 향품을 준비해 두었었다는 것이나, 그들이 무덤으로 가면서 주고받은 말을 살펴볼 때 여인들의 마음 속에는 예수는 죽었다.고 단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예수가 살아나셨을 것이라는 믿음은 조금도 보여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혹시 평소에 하신 말씀대로 살아나셨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가서 한번 확인해 보자.라는 믿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는 이제 죽은 자'로 간주한 것입니다. 그래서 미리 향품을 준비하고 안식일만 끝나면 곧장 달려가서 시체에 바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 후 첫날 새벽에 그들이 무덤으로 향한 것은 시체를 보러 갔지 부활한 주님을 만나러 간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시체를 보고 향료를 바르고 마지막 그의 비참한 주검에라도 위로하기 위해서 갔던 것입니다.
여기에 그들의 오해가 있습니다.
무슨 오해냐 하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으러 죽은 자가 있는 무덤에 간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해(Nonsense)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죽은 후에 무덤으로 죽은 자를 찾아가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 계신 하나님을 무덤으로 찾으러 간다는 것, 이것은 틀림없는 오해(Nonsense)였던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있는 대로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에게 두 찬란한 옷을 입은 사람이 하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그 때 그것을 보는 순간 저는 우리가 가진 신앙적 자세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많은 것을 오해하며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오해는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믿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실제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느끼고 사는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게 했던 것입니다.
바로 인간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을 여기에서 보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윤리적 종교가 아닙니다. 도덕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성현의 가르침을 보존하고 기억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금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고 그와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이 역사적으로 예수의 실체를 추구하는데 하나님은 역사적 기록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인 인물을 생각하듯 하나님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지금 살아 계십니다.
지금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역사적 기억 속에서 찾는다는 것이 오해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기 전에 제자들에게 여러 번에 걸쳐서 자기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여러가지 증거가 있는데 몇 가지를 보십시다.
우선 마태복음 16:21에 보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는 살아날 것이라는 예고를 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예고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란 예수님의 물음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바로 그 말씀에 연이어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베드로는 '주님에게는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인간의 믿음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목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이 부활을 예고하신 말씀은 변화산 사건으로 곧장 이어집니다.
인자가 예루살렘에서 장로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제삼 일에 살아날 것이라고 예고를 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변화산 위로 올라가셨습니다. 거기에서 주님은 완전히 변화한 모습으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나타나셔서 장차 영광을 받으실 그 부활 이후의 정경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주님의 부활이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치밀하게 진행되어진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부활을 예고하는 증거들을 볼 수 있는데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기 직전에 행하신 몇 가지 중요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1장 38절 이하에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사건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유하신 곳에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자기들의 오빠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황급하게 연락했습니다. 두 누이의 심정은 지금 죽어 가는 오빠를 살리기 위해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이 소리를 듣고서도 이틀을 더 유하시고 천천히 베다니로 향하셨습니다. 나흘 뒤에 베다니에 나타나신 주님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리고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이 나사로의 사건을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나사로는 예수님이 살렸으나 다시 죽었습니다. 나사로가 부활의 첫 열매는 아닙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어느 한 사람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역사를 베풂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부활하고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 기별을 받고서도 주님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셨는데 그 말이 바로 그리스도가 부활의 주님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예표였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할 필요가 강력하게 제기됩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마가복음 12:27절에 보면 실제 바리새인들의 부활에 대한 질문에 답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이런 말씀은 성경 여러 곳에 등장합니다.
누가복음 20:38에 보면: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마태복음 22:32에도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은 이처럼 당신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며 자신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오해는 예수님을 역사적 인물로, 또는 한 시대의 사건적 존재로 이해하는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 살아 계셔서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과거 속에서의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데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잊어버리고 사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산 자의 하나님이란 진리에서 예수님의 부활의 때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먼 옛날의 지나간 일이나 장차 우리 몸이 죽으면 부활해서 일어날 먼 미래의 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고, 또한 미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은 몸의 부활을 포함한 모든 정의의 부활까지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게 된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생각해 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묻는 예수님의 물음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그 뜻이 바로 죽음과 삶 전체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임을 이제는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산 자를 죽음 자 가운에서 찾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맙시다.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닌 산 자의 하나님임을 확신하고 그 분이 이 세상 전체의 역사를 주관하셔서 생명으로 인도하게 되기를 기도하며 그와 함께 부활의 영광을 맛보는 신앙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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