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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 살아 나셨다 (눅 2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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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감격과 기쁨이 넘치는 날입니다.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살아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 미명에 죽으신 예수님의 몸에 기름을 바르기 위해서 여인들이 무덤을 향해서 갔습니다. 이상하게도 무덤을 막아 놓았던 돌문이 열려 있습니다. 당황한 여인들 곁에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보다 다른 점이 여기 있습니다. 다른 종교는 그 교주의 무덤이 있는데, 예수님도 무덤이 있기는 하나 열린 무덤이요, 빈 무덤입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몸에 바르기 위해서 기름을 가지고 가면서 걱정했던 것이 누가 돌문을 열어 주겠는가였습니다. 이것은 누가 죽음을 이길 것인가하는 염려인 것입니다. 이런 걱정과 염려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따르던 사람들의 물음인 것입니다. 또는 인간의 행복을 가로막고 있는 죽음의 돌문을 누가 옮겨 놓을 수 있습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철학이나 인간이 만든 종교나 어떤 사상이 죽음과 삶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시도해 보았으나 결국은 모두 비참하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늘 아침에 무거운 돌문을 여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인간이 지금까지 극복하지 못했던 가장 큰 원수인 죽음을 극복하신 것입니다.
괴테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득세하였다고 하더라도 죽은 후에 다시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까지는 처량한 나그네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처량하다는 말은 너무나 연약하다, 마음에는 간절한데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우리 인간이 모두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됨으로 우리도 이 땅의 생활이 끝난 후에 다시금 부활할 것을 확신하게 한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가 다시 살리겠느냐하는 의문은 욥 이래 인간의 끊임없는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이 깊은 인간의 요구에 대한 가장 분명하고도 확실한 대답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사니 너희도 또한 살리라고 했습니다.
사망의 가시는 이 세상 어느 것보다 무섭고 아픈 가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망의 가시로 말미암아 수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잃고 흘린 눈물, 자녀가 부모를 잃은 슬픔 때문에 뿌린 눈물, 형제가 자매를 위해서, 자매가 형제를 위해서, 남편을 잃은 미망인이 흘린 눈물 등을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을 고해의 생활이요, 눈물의 바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 주일은 이 모든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사망에서 승리를 약속하시고 주님이 먼저 보여 주신 것입니다.
주님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요한복음11:25-26)라고 했습니다. 자녀를 잃은 부모님들, 부모를 잃은 자녀들, 남편을 먼저 보낸 미망인들, 아내를 먼저 보낸 남편들은 오늘 아침 눈물을 거두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아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말씀이요, 산 증거입니다.
야곱이 아들들에게 속아서 요셉이 죽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 아들 때문에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러 해 후에 난데없이 황금마차가 애굽으로부터 야곱을 영접하기 위해 왔습니다. 야곱이 마차를 타고 애굽에 갔더니 죽은 줄로 알았던 요셉이 그곳에서 총리 대신으로 있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언젠가는 하늘나라에서 황금 마차가 올 것이고, 그 마차를 타고 가면 먼저 가신 부모님, 남편, 아내, 자식들과 피차 기쁜 낯으로 얼굴을 대하게 될 것입니다. 이 소망을 확신 있게 가지는 아침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1. 예수님의 부활은 의와 진리가 최후의 승리를 거둔 기쁜 사건입니다.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은 바리새인, 사두개인, 제사장들의 간계와 음모로 죄도 없으신 예수님이 로마 병정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불의와 죄악과 권력의 대표자들이었습니다. 그런 무리들에 의하여 의와 진리와 사랑의 화신인 예수님께서 희생을 당하신 것입니다. 정의와 진리는 십자가에 처참하게 처형되고, 불의와 악은 일시에 개가를 불렀습니다. 선은 무덤에 묻히고 악은 예루살렘 대로를 활보하게 되었습니다. 암흑이 온 세계를 덮었습니다. 당시에 권력을 잡은 자들이 승리하는 것같이 보여졌습니다. 승리의 감격을 가진 이들에게도 큰 걱정이 한가지 있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이 삼일만에 부활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빌라도에게 가서 제자들이 예수님 시체를 훔쳐 가고 난 후에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소문을 내면 백성들이 크게 동요할 터이니 예수님의 무덤을 삼일만 굳게 지키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하고 돌로 무덤을 막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물량적인 힘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막아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물량적인 힘을 물리치시고 살아나심으로 의의 승리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진리를 돈으로 막아보려고 하고 의를 돈으로 사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물질의 힘보다 더 강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군사적으로 또는 물질의 풍요로 정의를 막을 수 없다는 역사적 교훈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정의와 진리가 물질의 힘에 가리워 지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의와 진리는 물질의 힘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런 교훈을 강하게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돌로 무덤을 막고 거기다 가이사의 권력을 표시하는 인봉을 하고, 군사들이 지켰습니다. 만약에 돌을 움직이면 가이사의 권력에 반항하는 것이 됩니다. 인봉했다는 것은 가이사의 권력을 이용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막아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가이사의 막강한 권력을 밀어 제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권력보다 강함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이 사람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는 있으나 사람의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죽음 후의 부활은 막아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정의와 진리의 힘은 어떤 권력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인 이 아침에 우리에게 주는 놀라운 교훈입니다. 예를 들면 지구가 돌지 못하도록 밧줄을 높은 산꼭대기에 매고 4억의 인구가 모두 매달려 당긴다고 해도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로마 병정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지킴으로 부활을 막아 보려는 행동은 무모한 짓이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짓입니다.
전능자의 하시는 일을 무능자인 인간이 막아 보려는 것은 마치 소똥벌레가 10톤 짜리 트럭의 질주를 막아 보려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은 이 땅 위에 언제나 진리와 의가 최후에 승리를 거둔다는 확신을 안겨 준 것입니다. 의와 진리는 어떤 권력이나 물량적인 힘으로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석가가 어느 곳을 지나는데 한 불자가 참사를 당하여 애곡 하다가 석가를 보고 애원하였습니다. 당신은 대 선생이시니 죽은 내 아들을 살려 주시오 애걸하는 모습을 안타까워하며 석가는 그 불자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삼대 동안 장사를 한번도 치르지 않은 집에 가서 백미 한 되를 구해 오면 아들을 살릴 수 있다는 말에 삼대 무상가를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에 삼대에 걸쳐 장례를 치르지 않은 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석가는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너 보아라 사(死)는 집집에 임하고 사람마다 당하는 일이니 너 홀로 애통할 것이 무엇 있냐 이 말을 들은 부인은 오랜 생각 끝에 무상한 인생사를 버리고 석가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나인 성을 지나실 때 과부의 아들이 죽은 장례 행렬이 지나는 것을 보고 그 외아들을 살려 주었습니다. 이것이 석가와 예수님이 다른 점입니다. 석가의 설법은 이론에 해당하고 그래서 죽은 자는 살릴 수 없다고 말하고, 예수님은 생명을 살려내는 권능을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석가는 가르치는 법을 가졌으나 생명의 주인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생을 주시는 생명의 주이십니다.

2. 예수님 부활은 실망한 자가 힘을 얻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실망한 자가 소망을 얻고 약한 자가 강하게 된 것입니다.
괴테는 그의 명작 파우스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파우스트가 세상의 모든 학문과 기술을 통달하고도 그 마음에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삶의 수수께끼를 해결치 못하게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생명을 끊으려는 순간 새벽 공기를 타고 멀리서 들려오는 성가대가 부르는 예수 다시 사셨네 부활의 찬송을 듣고 그는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얻어 재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잃고 고독하고 외롭게 지내던 막달라 마라아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 그의 슬픔과 고독이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는 슬픔 속에 살아서도 안되고, 외롭게 살아도 안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실망을 안고 실패를 거듭하던 고기잡이 어부 출신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은 새로운 용기를 불러 일으켜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불안과 허무 회의와 의심을 안고 엠마오로 가는 두 청년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힘과 소망을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바울 사도는 그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웨슬레는 담대히 복음을 전파해서 윤리와 도덕적으로 파탄에 빠져가던 영국을 건져내는데 일조를 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는 곳곳마다 불의의 세력은 사라지고 영국의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의 부활의 사건은 과거 2000년 전에 만의 일이 아니고, 지금도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필연적으로 만나야 할 사건입니다. 우리의 삶의 한 복판에 부활의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역사 한 복판에도 부활의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신탄진 지역 중심에 부활 복음이 능력 있게 전해져야 합니다.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부활의 소망이 넘치고 부활의 믿음이 확고해지며, 정의와 진리가 가리워진 곳에는 정의와 진리가 부활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힘있게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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