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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의 눈물 (요 1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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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파극 초창기의 삼류극을 연상시키는 제목이다. 그러나 결코 생존경쟁에 메 마른 현대인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고자 내건 제목만은 아니다. 다만 이처럼 전 무후무한 부흥을 구가하는 오늘 이 땅의 기독교를 향해 웃으실 수도 없고 기 뻐하실 수도 없는 상태로 눈물을 뿌리고 계시는 바로 지금의 예수의 초상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 글의 제목이 된 것이다.

소위 고린도전서 15장과 함께 성경의 대표적인 부활장으로 일컬어지는 본 문인 요한복음 11장. 본문에서 예수는 나사로를 무덤에서 일으켜 세우신다.

참으로 신나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유감없이 나타내신 죽은자의 부활 앞에서 예수는 왜 눈물을 뿌려야만 했을까.

충심으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도 있었고 (16절의 도마의 고백 ─ 우리도 주 와 함께 죽으러 가자), 참으로 당신을 사랑해서 향유를 당신께 붓고 머리털로 그 발을 씻기던 마리아도 있었고(2절),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 나님의 아들이신줄 확신하며 고백하는 자랑스런 마르다도 있었는데(27절), 어 찌하여 당신은 그들을 향하여 눈물밖에 내어 보일 수 없으셨는가. 순교를 각 오하고 따르는 저 믿음들, 내게 있는 모든 재물을 쏟아붓는 저 아름다운 신앙 의 행위들, 뿐만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계시가 아니면 절대로 알 수 없 는(마16:17) 멋진 신앙고백 앞에 예수는 왜, 어찌하여 청승스러운 울음을 울 고 계셨는가.

예수의 눈물이 그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향한 것이었다고 미리 단정하지 마 시길 바란다. 예수의 눈물은 본문에 등장하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을 향한 것이다. 스스로 믿는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철저한 믿음을 향한 눈물이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는 입으로 마지막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를 외치는 가증스러운 입 을 향한 눈물이다. 야고보사도의 한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 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 겠느뇨(약3:10-11)라는 지적대로 그럴수 없기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말을 할때 그것은 세상에서 자기식으로 살다가 이제는 자기 삶의 방식이 예수식으로, 하 나님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옳다. 그러나 거기에 문제 가 있다. 문제는 그것이 삶이 아니라 말이요, 生花가 아니라 造花라는 점이다 .

본문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비록 그들이 예수를 믿고 따르며, 마지막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도 알았지마는 예수의 지적은 그것이 그들의 삶이 아니라 말이라는 점이다. 자기식으로 세상을 살다가 자기식으로 예수를 믿는 것만 달라졌지 정작 바뀌고 없어져야할 자기식은 여전히 살아있음을 지적 한 것이다.

이러한 자기에 예수가 연결되어 있고, 교회가, 하나님이, 믿음이 결부되 어 있다고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 줄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오늘 예수는 눈물을 뿌리고 있다. 믿음이라는 말은, 그동안 누누히 강조해 왔지만 자기 가 아니라 예수라는 말이다.

그러면 본문에서 이러한 자기가 어떻게 투영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자.

21절: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 니하였겠나이다 32절에서는 마리아도 동일한 고백을 한다. 우리같으면 어떻게 말했을까. 자기 의 오라비가 병들어 누워 있는데 사람을 보내어 제발 와 주십사고 부탁했던 그 예수를, 오라비는 죽어 이미 무덤에 묻힌 다음에 만났다면 과연 무엇이라 고 했겠는가. 아니 그동안 자신들(마리아나 마르다)이 예수께 쏟았던 사랑이 나 정성을 생각한다면 과연 그 예수를 동리밖까지 나가서 맞기나 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문제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선(線)을 대는 ─ 소위 기도하는 ─ 모습을 자주 본다. 나사로가 병든것은 분명히 마리아나 마르다에 게 하나의 커다란 문제였다. 그러나 예수는 그러한 문제를 접하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계속 (즉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유하신다(6절). 이런 예수를 만 나서 처음 나온 말이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인데, 이정도면 얼마나 감정 을 자제하고 자기를 억제하고 하는 말인가.

믿음은 감정의 자제나 자기의 억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 장면에서는 예수께 대어드는것이 훨씬 더 인간적이다. 마르다나 마리아가 이렇게 직설적이지 못 한 이유는 그동안 쌓아왔던 예수와의 인간적인 관계나 얄미우면서도 그럴 수 없는 끈적끈적한 정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자기 억제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들어있지 않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더 지독한 원망이 들어 있다. 다만 그러한 원망이 분칠을 하고 덧입혀져서 나타났기 때문에 그 속을 모르면 오히려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다. 마치 욥이 자기에게 임한 그 모든 환란을 인하여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고(욥1:22) 그 후에 자기의 생일을 저주 하는 것(욥3:1)과 같다. 일반적으로 욥을 인내의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지마는 실상은 욥기의 대부분이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아우성의 발언이라는 것을 이 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여전히 자기식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우리 눈으로 얼핏보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과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 보이기 쉽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욥이 하나님을 믿는, 즉 하나 님이 자기를 지으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라는 점때문에 그렇다. 하나님과 자 기 사이에 자기의 생일이 끼어 있는 점을 욥은 십분 활용했던 것이다. 마치 東을 치고자 하면서 西에다 대고 아우성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마찬가지로 마르다나 마리아도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가 목적이요 의미인 삶 을 산것이 아니라 그 예수로 말미암아 내게 주어지는 어떠한 유익 ─ 여기서 는 나사로의 병고침 ─ 이 목적이 된,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 유익을 위 한 수단으로 전락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러한 그들의 삶에 인간적인 겸손 과 체면등이 겹쳐서 자기들의 유익에 도움이 되지 못했던 예수에 대하여 맞대 놓고 비난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다못해 내놓은 고백이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이다.

이것이 자기식이다. 때문에 부활도 예수식 부활이 아니라 자기식 부활이 다. 자기식 부활은 24절의 마지막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아는 것이요 예수 식 부활은 25절의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니의 부활이다. 이러한 마지막날 부활에 다시 살 줄을 믿는 믿음은 언제나 오늘의 부활을 놓칠 수밖에 없다.

오늘의 부활이 아니라는 말은 믿음이 삶이 아니라 관념이요 말이라는 뜻이다.

마지막날 부활을 철저히 믿었기 때문에, 지금 다시 살 수 있다는 말은 믿을 수 없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예수를 대적하는 불행을 자초하게 된다. 39절의 말씀이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 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차라리 마르다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는 고백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고 넘어 가겠지마는 이렇게 이율배반적인 이야기를 거침없이 하고 있는 마르다를 향하여 어찌 눈물을 흘 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부활이라는 것을 미래의 어떤 시점에 일어날 역사적 사건으로 생각하면서 동시에 예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사실을 믿는다고 외 치는 오늘날 이 땅의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예수가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겠 는가.

예수의 눈물은, 삶이 되고 생명이 되어야 할 믿음이 말로만 끝나고 관념으로 만 제껴놓은 이 땅의 모든 신자들을 향한 절규요 통곡이다. 인간성은 죽 고 신의 성품(벧후1:4)에 참여하는 자를 만드시겠다는 당신의 뜻에 反하여 더 럽고 추한 나의 이 인간성을 개조해 나가야한다는 모든 人本主義的 예수와 믿 음이라는 미명하에 열심과 충성의 행위를 걸쳐놓은 모든 律法主義的 예수 그 리고 세기말적인 윤리 도덕의 타락 현상을 성경을 빌어 질타하고 있는 모든 윤리, 도덕적인 예수를 향한 통분과 아픔의 눈물이다.

이 땅위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 자매 여러분! 사도신경을 믿고 고백하는 그것이 믿음인 줄 행여라도 착각하지 마시길 바란 다. 그것은 삶이 안되면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뿐만아니 라 집을 바치고 시간을 바치고 나의 모든 것을 드리는 신앙의 행위를 했다고 그것이 삶인 줄 꿈에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란다. 삶이란 삶에 대한 의식(意識 )이 없는 경우의 삶을 지칭하는 말이다. 숨을 쉬는것, 잠을 자는것, 세수를 하고 밥을 먹는것, 화장실에 가는것등이 우리들의 삶이다. 신앙이 삶이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 중의 하나가 믿음이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는 말이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하는 말 속에 이미 그들의 주는 그들의 삶이 아니었 다는 고백이 들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은 주님편이고 (비 록 오라비의 사건으로 조금 서운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인간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아픔이 바로 오늘 주제인 당신의 눈물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나라는 생명적 개체가 멸망으로 가지 않고 영생 불멸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다는 말 이고 그를 소유하는 자는 그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고전2:16). 즉 구원 받았 다는 말은 본문의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소유하여 그 마음으로 부터 나오는 아픔과 사랑과 애통의 눈물이 흐르는 삶을 산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직도 우리는 예수께서 향하여 울고 계시는 그 대상에 불과하 다. 그러면서 그 울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역시 자기식으로 해석 하여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36절)하고 있는 유대인들에 불과하 다. 아니, 여기서 한술 더 떠서 구원 받은 사람이 얼굴에 기쁨이 없고 어찌 저런 눈물이…를 외치는 어리석음만 없어도 다행으로 여겨야할지 모르겠다 .

예수의 울음을 울고 있는가 필자는 더 드릴 말씀이 없다.

마리아의 울음을 울고 있는가(33절)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할 일이 아니라 자 신의 살아있음을, 신앙이 삶이 아니라 말로만 그치고 있음에 슬퍼해야 한다.

예수의 십자가를 뒤따라가며 예수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기 전에 먼저 너 희와 너희자녀를 위하여 울라(눅23:28)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예수를 믿어 이제 웃고 계시는가 구원받은 감격에 충성하고 계시는가 예수 께서 당신때문에 울고 계신다. 슬퍼하며 울고, 웃음을 애통으로, 즐거움을 근 심으로 바꾸라(약4:9-). 왜냐하면 웃음과 즐거움, 곧 그것이 덫이요 함정이기 때문이다 (롬11:8-10).

아직 예수를 안 믿는가 못 믿겠는가 솔직한 고백이다. 그냥 살라. 항상 배 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할 바에야(딤후3:7) 시작도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보지 못한 부활을 믿기 보다는 보이는 오늘이 더 중요한 것이 현 실이다. 믿는다는 이름만 걸어놓고, 살기는 여전히 자기가 살 바에야 솔 직하게 못 믿겠다고 고백하고 자기식으로 사는 것이 훨씬 더 인간적이다.

그런 면에서 필자는 하나님을 믿느니 차라리 내 주먹을 믿으라는 사람을 존경한다. 왜냐하면 적어도 예수로 하여금 눈물 흘리게하는 아픔의 대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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