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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옛 사람과 새 사람 (고후 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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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앙 생활 가운데 타락한 사람의 본성은 우리 안에 남아 있어서 거듭난 새 사람과 늘 갈등을 일으킨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
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
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8-20)”
인간이라는 존재는 본능적으로 죄를 좋아한다. 죄는 인간들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다. 요한복음 8:44에서는 자연인을 가리켜 마귀의 자식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는 것은 혈통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원리와 본질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우리 조상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닮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날 때부터 죄인이 되고 사탄의 휘하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죄의 원리 속에서 우리는 사탄의 종이 된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영은 죽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진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므로 사람이 생령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영적인 생기에 의해서만 인간은 원래 인간의 모습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명과 진리가 호흡될 영이 죽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인류는 생물학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하나님과의 교류가 단절되었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못 듣는 것이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의 아버지라고 우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육신적으로 따지면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를 따라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것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혈육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살아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담의 후손으로 타락한 자연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이 소생하여야 한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거듭나는 반열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영적인 교류가 불가능한 존재임을 잊고 있다. 그래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교양만 있으면 죄인이라는 것을 부정한다. 그래서 불신자들보다 훨씬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신자들을 볼 때 우리는 속상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윤리 도덕적으로 아무리 훌륭해도 영적으로 죽은 자요 신자들은 아무리 못 났어도 영적으로 살아있는 자이다. 교회 안에는 어린 아이처럼 영적으로 어려서 난처하게 만드는 사람이 꼭 있기 마련이다. 교회에서는 이들을 위해 서로 용납하고 기다려야 한다. 그들도 거듭난 자요, 예수의 생명이 그 안에 있기에 당연히 자라가게 될 것이다.
사탄이 하와를 유혹할 때 하나님의 통치권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줄 것을 약속했다. 사탄은 하나님이 인간이 하나님처럼 될까봐 두려워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다고 유혹했다. 인간이 하나님의 휘하에서 생활하는 것이 싫어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뛰쳐나온 결과는 죄의 노예가 되었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결코 신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처음에 인간이 범죄한 것과 자신이 피조물임을 망각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인간은 죄의 노예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계속 신이 되려고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탄은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케 하여 인간을 자신의 종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주인은 이제 사탄과 죄이며 우리는 그의 종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 스스로가 사탄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점이다.
사탄은 우리들이 모르게 우리의 모든 것을 조종해서 그의 뜻대로 우리를 움직이게 만든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살고 있다고 속고 있는 것이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
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
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
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6-20)”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
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
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 5:19-21)”
위 말씀들을 보면 육체가 하는 일은 오직 악 뿐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인데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휘하에 가서 육체를 따라 행할 때는 오직 악만 행할 뿐이다. 성경이 육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사탄이 우리를 자기 마음대로 휘둘러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는 장소로 사용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바치면 육체란 하나님께서 그의 통치하시는 원리들과 모습들이 나타나는 곳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출생부터 타락한 자연인으로 출생하기 때문에 육체가 이미 사탄의 통치권 아래 있는 가운데 태어난다. 출생 때부터 사탄이 우리의 마음을 장악해서 그의 통치권이 나타나는 육체를 따라 살게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중생했어도 우리 속에는 사탄의 통치 하에 있던 습관이 계속 남아 있어 자주 그 습관을 좇아 행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을 성경에서는 ‘육체를 따라’ 또는 ‘구습을 좇아’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더러 자신이 너무 악하기 때문에 좀 더 깨끗해진 다음에 하나님 앞에 나온다고 말하는 이들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사탄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수단이다. 신앙 생활에 있어 모든 결론은 늘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으로 귀결되어야지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요일 5:19)”
이 세상은 모두 사탄의 통치와 그의 악한 원리와 구조 안에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모든 인류는 그에 의해서 명령받고, 그의 권세 아래 있고, 그의 통치 아래서 종노릇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이 세상이 악하고 부패했으므로 그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재림하실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해야 될 일은 이런 악한 세대에서 사탄의 휘하에 있는 영혼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내는 싸움이지 그 통치와 원리와 방법을 바꾸는 일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어찌 되든지 상관없이 예수 믿는 사람들만 천국에 가면 그만이냐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이럴 때 우리는 빛과 소금처럼 묵묵히 정당하게 살면 되는 것이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요 17:9)”
예수님은 세상에서 뽑아내어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신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
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 15:18-19)”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
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
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
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
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세상이란 사탄이 다스리는 원리와 방법들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곳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 생활을 보면 지금까지 언급한 ‘죄’ ‘육체와 세상’이라는 부분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서 금욕주의를 지향하게 되었다. 그러나 육체라는 것은 금욕주의를 지향하므로 그 속에 나쁜 것을 억누를 수 있지 않다. 사탄이 그 휘하에 우리를 장악해서 그의 원리들이 그대로 사용되고, 또 그것이 표출되고 있는 우리를 표현할 때 언제나 ‘육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사탄이 우리로 하여금 그의 원리와 방법대로 살아가게 하는 한 우리는 어떤 그럴듯한 행동으로도 그것을 벗어날 수는 없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
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 8:5-7)”
성경은 이와같이 육체와 영을 자꾸 대조시키고 있다. 결국 육체라는 것은 하나님 없는 인간, 그래서 죄를 지울 수밖에 없고, 죄 아래 있고 신분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육체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이 만든 종교들이 성경이 요구하는 신앙과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 것이다.
시체를 살아나게 하는 것이 기독교지 시체를 아름답게 치장하는 것이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가 요구하는 신앙이 일반 종교들과 어떻게 다른지 요한복음 4장의 표현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신령이란 영이 소생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불가능하다. 대개 다른 종교에서 보면 이 모든 것이 치성에 관한 문제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전혀 다르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
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전 2:14)”
육에 속한 사람들은 신앙이 불가능한 것이다. 사탄이 우리로 하여금 넘어지게 하는 가장 큰 내용은 우리의 신앙 생활을, 우리 육체를 어떻게 단장할 것인가로 관심을 모으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본질은 어떠한가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
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
보다 나으니(삼상 15:22)”
신앙의 본질은 보답 쪽으로 가지 않는다. 우리 신앙 생활이 왜 실패했는가를 생각해 보자. 내가 나를 누구의 통치권에 맡기느냐 하는 문제를 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사탄의 구습을 좇는 한은 성공할 방법이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종되었던 때를 오히려 그리워 하기도 했다. 우리에게도 늘 이것이 습관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 믿기 이전과 다른 점은 우리 속에 갈등이 생긴다는 점이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 갈등이 우리 죽을 때까지의 싸움인 것이다. 중생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갈등도 없다. 우리 속에 지금도 그들과 동일한 생각이 나오지만 우리는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저들은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우리에게는 양쪽에서 명령이 온다.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이 오고, 동시에 죄를 좇아 살던 구습을 따라 살라고 하는 명령이 오는 것이다. 이 둘 중의 하나를 우리는 선택하여야 한다. ‘신자가 되라’는 것은 ‘신자답게 살라’는 것이다.
우리가 신자가 되었다고 해서 옛 습관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제 죄를 따라 사는 옛 사람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사는 새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후자 쪽을 선택하고 우리 자신을 거기에 굴복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
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
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
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옛날에 내가 나의 주인이었을 때는 사탄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자로서 내가 존재했으나 이제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에는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인이라는 것을 확인케 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성을 요구하시지 않으신다. 순종을 요구하신다. 정성과 순종의 차이는 자신의 무가치함에 대한 싸움이다. 자신이 얼마나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무가치한가를 아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요 출발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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