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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웬말인가 날 위하여 (사 5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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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카렌다는 오늘부터서 한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 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간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습니 까 이사야 53장은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장입니다. 본문 말씀 중심해서 세 가지 내용을 묵상하며 은혜를 사모코자합니다.

첫째, 왜 멸시인가 본문 3절입니다. 그는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그런데 아직도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서 싫어 버린 바 되고 멸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왜 이 모양입니까 우선 불신앙 때문입니다. 1절에 보면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했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예수님을 증거했고 사도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1절에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했는데 여기 여호와의 팔은 하나님의 이적적인 능력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수없이 나타났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에도 아말렉과 의 전쟁 때,

5.18, IMF때에도 나타났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여전히 사람들로부터 버림 을 받고 멸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볼 수 있는 눈이 없고 들을 수 있는 귀 가 없고 믿을 수 있는 마음이 닫혀있기 때문입니다. 또하나 우리의 편견 때문입니다. 본 문 2절에 보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 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예수님의 탄생을 보십시오.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 뉴욕에서 나신 것 아닙니다. 유대땅 작은 고을 게다가 말구유에서 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장하실 때 왕궁에서 모세처럼 성장하신 것 아니고 화려한 옷을 입고 자란 솔로몬처럼 성장한 것도 아닙니다. 가난한 목수의 집안에서 가난을 먹고 노동을 하면서 성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 고 공중의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고 하셨습니다. 예 수님은 외모로도 특별한 것 없었습니다. 모세는 태어날 때부터서 준수하였고 다윗은 얼굴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났다 했는데 예수님은 이사야의 말대로 풍채가 없고 매력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대학은커녕 초등학교 졸업장 하나도 없었습니다. 본문에 마치 사람 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했는데 이러한 표현 은 당시에 있었던 문둥병자들에 적합한 표현입니다. 유대인들은 문둥병자가 나타나면 저마 다 얼굴을 가리웠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이러한 병자 취급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멸시를 당하고 있었습니까 우리의 불신앙 때문이요, 우리의 잘못된 편견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무엇입니까 물론 연한 순 같은 종교입니다. 그러나 순 없 이 거목되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까.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고난 없이 부활은 있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고함치는 소리가 무엇이었습니까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세요 그러나 그랬던 유대인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예수 님 품으로 돌아오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무엇입니까 마치 요셉이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 싫어 버린 바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들어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삼으신 것과 같고 사 울에게서 배척을 당한 다윗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 같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교회의 상징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좇으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 고 좇으라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외형을 봅니다. 옷, 풍채, 재물, 학력, 권세, 출 세를 봅니다. 그러나 바울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십자가 외에 다른 것 자랑할 것이 없다 했습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려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고난주간에 고난 당하신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 그 의미가 어디 있겠습니까.

둘째, 왜 침묵인가 본문 7절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의 침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힘이 없어 침묵하는 것은 슬픈 일이고 말할 줄 몰라 입을 다문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힘도 있고 말할 능력도 있는데 침묵한다면 웅변 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다는 금언을 새겨볼만합니다. 행동보다 말을 앞세우는 성도가 있습 니다. 실천보다 이론이 번지르한 성도가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잠13:3이 교훈합니다.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존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고 했습니다. 본문 7절은 어린양 예수님의 침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죽음 앞에서의 침묵입니다.

예수님께서 말할 줄 몰라서 침묵하셨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세도 있었고 능력도 있 었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병든 자를 고치셨고 죽은 자를 살리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 앞에서 이사야의 말대로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 린양처럼 침묵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이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하시느라 침묵을 지키셨다는 말입니다.

② 사람들 앞에서의 침묵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밤 일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사람들이 마치 강도를 잡듯이 몽치 를 가지고 노끈과 칼을 가지고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왜 이러느냐 내가 무슨 일을 잘못했느냐. 너희가 어떻게 하려고 이러느냐. 일언반구의 항변하지 않았습니다. 뿐 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야바 법정으로 재판받기위해 끌려갔습니다. 이미 계획되고 조 작된 재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서도 침묵하셨습니다. 마26:57-68을 보면 거짓 증 인들이 떠들어댔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성전을 헐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대제사장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냐 그러나 63절을 보면 예 수님은 잠잠했다고 했습니다. 또 67절을 보면 그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었고 주먹으 로 예수님을 치고 손바닥으로 예수님을 때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마 27: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되 대답도 아니하신지라 했고 14절에 보면 한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사야는 이러한 예수님을 예언하면서 털 깎 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자존심만 약간 건 드려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존심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침묵하셨습니다. 감기몸살만 걸려도 끙끙 앓는 소리를 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 고통 앞에서도 침묵하셨습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예수님은 신경질을 내신 적이 없습니 다. 핏대를 올린 적이 없습니다. 그는 다투지 아니했고 거들먹거리지 아니했고 떠벌리지 아니했고 잠잠한 어린양같이 침묵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이렇게 하셨습니까 속죄의 완 성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너무도 엄청난 인류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질구레한 일로 입을 열지 아니했습니다. 간신들이 말이 많다는 속담이 있습니 다. 그러나 혁명가는 입이 무겁다는 금언도 있습니다. 입이 가벼운 사람들은 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큰 일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잔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교 회 안에는 두 종류의 성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입으로 떠들어대지만 행함이 없는 성도요, 또 하나는 말없이 묵묵하게 실천하는 성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이 고난주간에 괴로워 도 억울해도 입을 열지 아니했던 예수님의 침묵을 배우십시다. 그래서 이름 없이 빛도 없 이 감사하며 말없이 실천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왜 고난인가 본문 4절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 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교회의 꼭대기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 고난이 어떠했 습니까 우리 함께 갈보리산으로 올라가 보십시다. 갈보리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 난을 당한 표라 ♬ 갈보리산 위에 예수님을 못박은 십자가가 높이 서있습니다. 먼저 예수 님의 얼굴을 보십시오. 종이처럼 점점 창백해져갑니다.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입니다. 가 시에 찔린 이마에서 피가 주룩 주룩 흘러 내렸습니다. 손을 보십시오. 손바닥을 꿰뚫은 큰못이 예수님의 부드러운 살을 찢고 뼈를 뚫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육중한 몸이 늘어질수록 살이 점점 찢어지고 선지빛깔 붉은 피가 계속 흘러내렸습니다. 두 발을 보십시오. 역시 큰못으로 나무에까지 깊이 박히고 선혈이 줄줄이 흘러내렸습니다. 그 옆 구리를 보시렵니까. 무지한 로마 군병들이 날선 창으로 찌르고 예수님의 부드러운 가슴도 창으로 찔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고통을 한 시간 동안 겪은 것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이런 고통을 다섯 시간 여섯 시간 십자가 위에서 당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예수님의 절규가 무엇입니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 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으셨고 사랑하는 제자들로부터 버림을 받으셨고 자기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도 버림을 당하 시고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십자가 십자 가 무한 영광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은혜가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프랑스 한 성 당에 하루를 빼지 아니하고 찾아오는 성도가 있었습니다. 강대상 쪽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그냥 갑니다. 어느 날 예배당 사찰이 물었습니다. 왜 형제는 하루도 빠지지 아니하고 십 자가만 바라보고 갑니까 십자가만 바라만 보아도 은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웬 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 정말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 가도다 이제부터 예수로만 나의 보배 삼겠네♬ 이것이 우리의 노래요, 간증이어야 할 것입 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지금 무엇을 보려고 예배당에 나왔습니까 화려한 옷 입은 자입 니까 솔로몬의 궁정으로 가십시오. 해박한 지식인입니까 애굽이나 바벨론으로 가십시 오. 나의 주홍같이 붉은 죄, 먹장같이 검은 죄를 씻으실 분입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만 나야합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 오늘 고난주간의 첫날입니다. 우 리 함께 예수님 지신 십자가로 가까이 가까이 가보십시다.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시고 거기 흘린 보혈로 정케 하옵소서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로 우리의 더러운 죄 가 깨끗해 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가 어떠한 곳입니까 십자가가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오늘 교회의 기능이 새로워져야합니다. 불쌍한 인생들의 고통을 알고 함께 괴로워하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세상 때문에 찔려보고 세상을 위하여 상해보 고 가난한 자와 병든 자의 슬픔을 경험해 보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경험으로만은 부족합 니다. 지금 그러한 고난을 당하면서 신음하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고통 당하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때문에 기도하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음으로 그들이 평화를 누리고 우리가 대신 채찍에 맞음으로 죄인들이 나음을 입는 역사가 교회 안 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 도다고 했는데 여기 담당시키셨다는 말은 대변케 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의 모든 죄를 친히 짊어지시고 우리의 죄가 없음을 대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세상의 죄를 대신지고 용서해달라고 울부짖는 교회가 아쉽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전도입니다.

전도가 무엇입니까 나의 의와 나의 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불신자의 아픔과 고통을 대신 짊어지는 대속자의 자리에 서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러니까 전도는 이웃사랑, 형제사 랑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고통도 사랑입니다. 성도의 참 모습은 어떠해야 합니까 형 제의 아픔과 괴로움을 대신 짊어지고 대신 울어주고 대신 문제를 안고 가슴아파하면서 하나 님의 긍휼을 기다리는 것이 전도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4-6 절을 보면 '우리'라는 말이 무려 9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이 유는 '우리' 때문입니다. 말을 바꾸면 바로 '나' 때문입니다. 나의 허물 때문이고 죄악, 교만, 혈기 때문입니다. 나의 위선, 부정 때문입니다. 고난주간에 우리는 나 때문입니 다를 반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 굴욕, 멸시도 나 때문입니다. 천대도 십자가도 죽음도 다 나 때문입니다. 교회의 모든 부족이 나 때문이요, 성전 건축이 더딘 것도 나 때 문이라는 말입니다. 나 때문입니다. 생각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게 은혜입니다. 만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그렇다면 우리가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살아야 합 니까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 이러 한 생애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하다가 ♬ 우리의 남은 생애 가 십자가에 못박는 생애가 되어야합니다. 주님 지신 십자가에 동참하는 생애가 되어야합 니다. 주님 날 위하여 몸버렸건만 나는 주를 위하여 무엇을 드리나 묵상하면서 찬송하면 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한 주간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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