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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유다의 회복과 의의 승리 (욜 03: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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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로 저희 부부가 지난 2주간 동안 요한 웨슬리 탄생 300주년을 기념한 웨슬리 성지와 그동안 순례하지 못 했던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지역을 순례하는 은혜로운 시간들을 가지게 됨을 주님 앞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또한 이를 위하여 부족한 저의 부부의 건강과 안전함을 위해 기도해 주신 여러분들의 기도와 관심과 사랑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유다의 회복과 의의 승리라는 주제입니다. 16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친히 피난처가 되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영원한 산성이요 거처가 되겠다는 약속도 나옵니다. 앞에서 거듭 강조된 여호와의 날이란 사실 두렵고 떨린 날입니다. 그래서 16절 중반에 보면, 하늘과 땅이 진동하는 그런 무시무시한 날입니다. 하지만 그 날이 의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의 나리요 사랑의 실천의 날인 줄로 믿습니다.
17절에 가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 성산 시온에 거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인 줄 알리라 이제는 너희가 알리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너희들이 날 잘 모르는 것 같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은 전능하신 하나님, 그 분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존 칼빈은 안다고 하는 이 부분을 2가지로 설명을 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체험으로 아는 일이요 또 하나는 믿음으로 아는 일입니다. 우리 기독교를 체험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어느 종교보다도 체험이 많고 체험이 있어야 우리의 신앙이 강화됨은 사실입니다. 은사의 체험도 있어야 하고, 여러 가지 신앙에 관한 객관적인 사실들도 우리는 확인해야 합니다. 이런 일들을 돕기 위해서 창조과학회가 과학적인 시각으로 우리의 신앙에 큰 도움을 주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노아가 홍수 후 머물렀던 아라랏산의 방주 조각을 탄소측정 방법으로 연대를 측정해보니까 몇 천년 전의 나무 조각이 분명하여 그렇다고 하면 분명히 노아의 방주가 틀림이 없다든지, 고대 도시 유적을 발국하다가 당시의 기록속에서 성경의 인물들의 이름이 소개될때에 그래, 성경은 진실이고 역사적인 뒷받침이 분명해.... 하면서 우리의 믿음을 확정하는 일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중부연회 감리사 연수를 다녀온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지역도 수많은 고고학적인 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특히 우리는 갈대아우르에서 하란을 통해 가나안땅으로 들어왔던 아브라함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어느 시리아 지역에서는 아브라함 시대에 그 지역의 이름과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는 문서를 발견하여, 성서고고학적인 쾌거를 이루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이 증거될 때마다 기쁨이 있지요. 하지만 그런 과학적이고 체험적 의존은 분명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성경의 모든 것을 다 지식이나 발굴작업처럼 객관적인 경험을 가질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체험은 필요하지만 보다 더 귀중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도마에게 권면하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봄으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더욱 복 되도다’
사람들은 보는 것을 원합니다.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말은 이제 믿지않는 이들이 말하는 불신앙의 고전이 된지 오래입니다. 사람들은 체험을 원하고 객관적인 지식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은 차원이 달라요. 보아서 믿는 것도 좋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한 신뢰가 더욱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도마를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안다고 하는 것도 사실상 체험을 통해서 아는 것은 많치 않습니다. 이번에 성지순례를 하면서 부부들의 로맨스를 서로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그런데 어떤 분들은 만난 지 한 달 만에 혹은 석 달 만에 결혼한 분도 있었고, 어떤 분은 6년에서 8년씩 연애하다가 결혼한 분들도 있어요. 한 달보다는 석 달이 낫겠고, 석 달보다는 6년이 낫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을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니다.
어찌 보면 이 결혼생활은 참으로 신비한 거예요. 저희 부부는 지난 월요일날이 마침 결혼23주년이 되어 뜻하지 않게 성지 요르단에서 축하를 받았습니다. 주최측에서 어렵게 축하 케익까지 준비해주셔서 축하파티를 해 주셔서 아주 뜻 깊은 결혼기념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23년을 살았어도 아직 다 모릅니다. 아마도 평생을 살아도 다 모를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체험적인 삶으로 무엇을 알려고 하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말로서 실감이 될줄로 믿습니다.

도마와 같은 우리의 모습들, 무엇이든지 보아야 하고, 만져야 하고, 느껴야 하는 그런 모습에서 주님을 말씀합니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더 복되다. ‘제자들이 우리가 주님을 보았어,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어’ 라고 말할 때에 ‘나는 못 믿겠어. 당신들이 나와 같은 제자이지만, 당신들이 나와 함께 한솥밥을 먹은 제자공동체이지만, 그러나 내 눈으로 보기 전에, 내 손으로 만지기 전에는 당신들의 말을 못 믿겠다’ 라고 하는 말은 상당히 실망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이 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 지금 이 시대에 가장 필요로 하는 덕목이 무엇입니까 신뢰 아니겠어요 정치도 그렇고, 경제도 그렇고 믿을 사람이 없다는 거지요. 온통 불신의 사회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불신의 늪에서 모두가 허우적거리는 것 같습니다. 체험은 한계가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주님은 ‘너희가 이제는 나를 알리라’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이제는 너희들이 알기를 원하고, 알아야만 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거룩하리니....’ 사실 예루살렘의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이방인들이 와서 돼지를 잡고, 이방인들이 와서 더러운 피를 흘렸습니다. 이방인들이 그들의 구둣발로 온 성전을 더럽혔습니다. 어찌 그런 일이 그럴 수 있느냐 이 거룩한 예루살렘을 더럽힌 것은 이방이 와서 온갖 못 된 짓을 해서 더럽혀졌느냐 그렇지요. 외형적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그 동기를 누가 만들었느냐 예루살렘을 거룩하게 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하고 그 성전은 더럽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환경도 중요하지만, 바로 우리 자신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예루살렘을 우리가 유지하고, 거룩한 예루살렘이 되도록 우리의 생명을 다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10장 32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시온과 예루살렘은 포도원 망대 같이 원두막의 상징막 같이 겨우 남아 있도다’
여러분, 여름에 추수가 끝난 원두막 한 마디로 썰렁한 원두막의 모습, 마치 예루살렘의 모습이 그렇게 황량한 벌판에 서 있는 원두막 같은 그런 모습이라는 거예요. 거기엔 따뜻함도 없고, 사람들의 왕래도 없고, 어떤 그 분위기가 화기애애한 그런 분위기도 없는 거지요. 쓸쓸하기 짝이 없는, 그냥 원두막의 상징막 같이 겨우 남아있는 시온과 예루살렘 대단히 중요한 표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써 시온을 회복하지 못하고 영적인 예루살렘을 회복하지 못하는 삶에는 결국 땅의 예루살렘이 원두막의 상징막처럼 그렇게 쓸쓸히 남아있을 수 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시온은 당연히 영적인 시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정으로 예루살렘을 사랑할 때 진정으로 예루살렘을 사모할 때 시온이 회복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영적인 회복이 전제될 때에 시온과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그들의 가시적 삶의 거처도 회복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회복의 내용이 18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 날에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모든 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 물이 흘러나온다는 거예요. 사막을 다니면서 느끼는 것은 왜 사막이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막과 그렇지 않은 곳에 차이는 무엇일까 하고 생각을 합니다.
이스라엘과 주변지역을 다니면서 늘 느끼고 도전받는 것은 똑같은 황량한 광야요, 사막지역에서 왜 이 나라는 푸르고 유럽으로 가장 많이 꽃과 과일을 수출할 수 있는 반면에, 똑같은 땅을 가진 주변 나라는 자기들의 식량도 자급자족하지 못하는 어려움에 처해 있을까 어떤 나라는 국민소득이 1만5천-2만달러를 넘어가는데, 어떤 나라는 국민소득이 2천불이 안 되어서 쩔쩔 맬까 그런 의문이 듭니다. 바로 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도를 보면 똑같은데, 선을 쭉 그어서 국경을 그었어요. 국경 이쪽과 저쪽은 너무나도 다릅니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은 천국과 지옥을 보고 있는 것 같아요. 무슨 차이일까
물을 공급해서 그 물로 땅을 비옥하게 해, 그 물로 땅에 곡식들이 자라나게, 집 주변에 잔디가 자라고, 수목이 울창하게 그래서 사람들이 바라볼 때에 여기가 낙원이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다고 하셨을 때, 거기에 아브라함이 도착했을 때에는 바람만 불고, 뙤약볕만 내리쬐는 분명한 광야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스라엘을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물입니다. 똑같은 나라는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처럼 어마어마한 몇 나라의 국경을 통과할 만큼 강이 도도히 흐르고 있지만, 거기 강 주변에 흐르는 곳만 겨우 사용할 뿐 주변은 광야요, 사막으로 버려져 있습니다.
요단강이라고 해도 건기에는 무릎도 차지 않는 그러한 강입니다. 우기에만 좀 넓게 강이 흐를 뿐이지, 건기에는 그냥 건너갈 수 있는 그런 작은 강에 물을 잘 사용하는 것이지요. 보통 보면 물을 수도로 끌어들여서 가정마다 집 위에 탱크로 마련해 놓고 그리고 수도로 사용합니다. 일단 수도로 사용한 물은 다시 다른 하수도관을 통해서 산 위로 또 끌고 올라가요. 거기에 큰 정화시스템이 있는데 거기서 가정에서 사용한 수돗물을 다 정화해서 가정으로 내려 보냅니다. 그래서 가정에선 두개의 수도 파이프가 있습니다.
다시 정화된 수돗물은 주변의 변기용이나 허드렛물을 사용하는 그리고 주변의 곡식들과, 주변의 나무들에게 물을 주는 것으로 사용합니다. 한 방울의 물도 거저 버리는 법이 없습니다. 적은 물이지만, 몇 번을 거듭 정화해서 아껴 쓰면서 나무를 만드는 사람들과 넘치는 강물이 세계를 흘러가지만, 그러나 그 환경은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차이, 바로 물을 어떻게 다스리느냐 하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아, 그 나라도 새마을운동하고, 그 나라에서 그런 관개시설에 대한 기술만 알려주면 되겠구나’ 그 사람들도 그 정도는 알고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왜 물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물리적으로 이 쪽에서 이 쪽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이 그들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18절에 약속된 이 놀라운 말씀은 바로 그들의 시내에 물이 흐르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샘이 흘러나와서 물이 흘러 넘친다고 하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아니하시면 복이 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생애에서 복이라고 하는 개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 그 소득, 그 재물, 그 영광, 그 명예가 복일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골짜기마다 물을 주시겠다고 하는 얘기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메마른 황무지에 새로운 생명을 주시겠다는 거예요. 그들에게 있어서 물은 생명입니다. 이제 시온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과거에 원수들의 공격이 목표였지만, 이제 시온은 역사적이나 어떤 지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 새 예루살렘의 의미를 가지고 에스겔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여호와산마라고 이름 부친 하나님의 보좌가 계신 곳이 우리의 시온이요, 예루살렘이 되야할 줄로 믿습니다. 거기에서 물이 흘러넘친다.
여러분의 기업이 하나님이 축복하신 기업이 되셔서 거기에서 샘이 넘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하나님이 계신 곳이 되어서 거기에서 샘이 흘러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이 나라가 하나님이 거하신 곳, 하나님이 계시기에 조금도 불편하지 않는 그런 거룩한 땅이 되어져서, 이 나라에서 샘이 넘쳐서 우리 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주의 사랑과 은혜를 나눌 수 있는 복된 국가, 복된 민족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레바논을 가보니까 강원도만한 그런 작은 땅덩어리인데, 그 중간에 태백산맥처럼 큰 레바논 산맥이 가로질러 있어요. 왼편으로는 지중해요, 오른편으로는 시리아입니다. 해발 3,000m가 넘는 산이 뼈대처럼 그 나라의 중간을 지나가고 있어요. 그 산을 넘는데 그 골짜기들이 위험천만하고, 그 낭떠러지가 심한지 아찔아찔해요. 강원도 골짜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구동성으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 높은 골짜기를 갈 때마다 그 산골짜기 비탈에 집을 지어놓고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안내하시는 집사님의 설명을 들으니까 그들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이라는 거예요. 회교도의 핍박을 피해서 물 조차 얻기 불편한 산골짜기 계곡에서 집을 짓고 산다는 거예요.
그러나 놀랍게도 지금 레바논의 기독교인들은 약 40%가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대한민국이 20%-25%가 되는 세계 제일의 기독교인들을 갖고 있는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얼마나 부끄럽던지 몰라요. 그 나라는 지금 국가적으로는 회교가 국교 같은 그런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살벌한 이슬람국가에서 기독교가 40%를 차지해요. 이스라엘에 관계된 흔적이 있으면 입국조차 거절되는, 그렇게 이스라엘과는 철천지 원수로 지내는 시리아도 놀랍게도 기독교인이 약 6% 정도라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희가 성지로 출발하기 며칠 전에,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에 이스라엘의 미사일 공격으로 인해 전쟁의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고, 시리아를 순례하는 중에는 이스라엘 가자지구에서 미국의 외교관 차량에 탄 외교관과 CIA 정보요원이 폭탄테러로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TV를 켜면 온통 테러사건 뉴스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위기 속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는 것이 예사로울 수는 없는 일이지요.
우리가 성도는 환난과 핍박 중에도 신앙을 지켰다고 하는 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기가 환경이 어렵습니까 여러분 주의 일 하기가 환경이 따라주지 않습니까 나는 주의 일 하고 싶은데, 나는 충성하고 싶은데, 환경이 따라주지 않아요. 그렇게 생각이 되십니까 이슬람이 어떤 나라인 줄 아십니까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그들의 성경-코란을 선택하지 않으면 죽음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슬람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무원을 비롯해서 모든 공직에서 그들이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기껏할 수 있는 것은 자영업밖에 없습니다. 생활의 기득권은 모두 포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주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것은 생활의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된다고 하는 것은 세상에서 줄 수 있는 모든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거예요. 그래도 주님을 믿겠느냐 그래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느냐고 하였을 때, 여러분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 같은 좋은 환경에서 예수 믿기가 어렵다고 하는 말은 사실은 중동의 성지순례를 하면서 할 수 없다라고 결론을 가졌어요. 우리는 결코 신앙생활을 하기에 어렵다는 말을 평생 무덤에 갈 때까지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물론 사람은 상대적입니다. 자신의 경험한 것 중에서 비교하기 때문에 자신의 경험이 가장 어렵거나 힘들 수 있지만, 그러나 자기만의 경험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살지 못했을 때 예루살렘은 황폐해 지고, 유다민족은 갈갈이 찢겨 나갔어요. 그들이 가장 소중히 여겼던 성소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의 발에 짓밟히고 말았어요. 하지만 그 이방인들을 원망할 이유가 없어요. 그들이 예루살렘을 그렇게 만든 것은 결국 자업자득입니다.
이번에 시리아에 바알백이라고 하는 도시를 방문했는데 시리아와 레바논 국경에 있는 도시입니다. 너무 규모가 커요. 세계문화유산 1호라고 하는 그 그리스의 파르테논신전을 우리는 크다고 생각을 하지만, 이 바알백이라고 하는 신전을 가 보니까 바알 신전이 있고, 그 위에 로마시대에 쥬피터신전을 세워 놨는데 그 규모가 상상을 초월해요. 그 신전의 아래뜰만 해도 축구운동장만 해요. 그런데 돌 무게만 해도 무려 1,000톤이 되는 돌이 있어요. 상상을 초월합니다. 여러분, 1,000톤이라고 하면 상상이 잘 안 되시죠 길이가 한 10m정도, 폭이 한 4-5m정도 되는 그 어마어마한 그 돌덩어리들, 그게 하나입니다. 그런 것들을 갔다가신전의 기초를 놓고, 그리고 높이를 세웠는데, 상상할 수가 없어요.
바알을 섬기던 신전이 그 자리에 있었어요. 두로와 시돈, 그리고 블레셋 지역에 바알을 섬기던 신전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영적으로 도전을 받았던 우상이 바알입니다. 지금도 그 지역에서는 바알이라는 말이 통용되는데,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농사를 짓는데, 하늘에서 비가 와야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말을 바알이라고 지금도 쓰고 있다고 그래요. 바알신이라는 것은 농사의 신이었습니다. 농사를 짓는데 바알신을 섬기지 않으면 그들에게 햇빛과 물을 주지 않기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어서 바알신에게 제사를 드려야 농사가 되었다고 그들은 생각했어요. 그들은 바알신전을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로 세워놨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서,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 살기 위해서 이웃나라 바알신을 섬기는 풍습을 도입했습니다. 마치 미국이나 일본에서 첨단 과학기술을 도입하는 것처럼 그들은 살기 위해서 바알신을 드려왔습니다.
여러분들이 무슨 이야기 할 때, 가장 강력한 설득력을 갖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해야만 우리집이 살기 때문에, 이렇게 해야만 내가 살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거지요. 그러면 그것이 불법이고, 그것이 잘 못된 것이라도 배우자와 가족들과 친구들이 이해해 줍니다. 그래, 넌 그렇게 밖에는 할 수 없었겠구나. 그렇지 않고서는 결코 살 수 없었겠구나. 다 이해한다.
이스라엘 살기 위해서 바알신을 드려왔어요. 그 이방과 이스라엘의 경계가 북쪽 이스라엘과 그 시리아, 레바논지역 당시의 바알신이 가장 극심하던 곳, 바알신전이 가장 큰 규모로 있던 그 지역과 이스라엘의 경계가 바로 갈멜산 있는 지역입니다. 저는 이 번에 그 숙제를 풀었어요. 왜 엘리야가 갈멜산에 가서 바알과 아세라의 850의 선지자가 엘리야가 하필이면 그 산에 올라가서 대결을 벌였을까 제가 여러차례 성지를 순례했지만, 그리고 갈멜산을 올라가 봤지만 그 숙제를 풀지 못했는데, 이번에 풀었어요.
갈멜산은 이스라엘과 레바논, 시리아, 그 당시에 앗시리아, 앗수르 그 이전에 여러사람들이 이방에 바알 우상의 가장 중심적인 도시가 내려다 보이는 곳입니다. 엘리야는 그 갈멜산을 바알과 대결하는 장소로 선택을 했어요. 어떻게 말하면, 그 갈멜산은 바알신을 섬기는 홈그라운드 같은 거예요. 그 주변에 어마어마한 바알신전이 있고, 바알 섬기는 아합왕과 이세벨을 중심으로 한 모든 사람들이 팀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말로 하면, 호랑이굴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 위에서 엘리야는 참 신이 누구인지, 살아계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회복될 때,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가 바탕이 될 때, 20절의 말씀처럼 유다는 영원히 있겠고, 예루살렘은 대대로 있을 줄로 믿습니다. 문제는 환경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이 황폐해 진 것도, 성전이 짓밟힌 것도, 이방인들의 군대가 강하거나, 그들의 신이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사람들에 신앙적 타락과 하나님을 떠난 그들의 영적인 연약함 때문이었다는 거지요.
그것이 회복되고, 하나님을 바로 알기 시작할 때, 믿음으로 알아가기 시작할 때 하나님 이제 제가 하나님을 압니다. 이제 하나님을 알 것 같아요. 하나님 아시지요 나도 하나님을 압니다. 저는 영적인 교통이 일어나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심딤골짜기까지 새 힘이 넘칠 줄로 축복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은혜와 사랑이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들의 모든 삶 속에 함께 하셔서 우리의 영적인 회복을 통해서 유다와 예루살렘이 회복되고, 믿음의 삶들을 통해서 의의 최후 승리가 선포되는 그 날까지 믿음 지키며 주님과 함께 동행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싯딤골짜기까지 여호와의 전에서 샘이 흘러나와 넘치리라고 약속하시는 말씀을 의지합니다. 샘이 넘치지 못했던 것은 환경 탓이 아니었음을 고백합니다. 싯딤 골짜기가 메말랐던 것은 지리적인 이유가 아니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 이제 깨닫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 속에 우리의 신앙의 고백을 담고 하나님을 향한 전폭적인 신뢰와 하나님을 알되 전적으로 믿음으로 신뢰하는 그 믿음 속에서 오늘 이 시대에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들 믿음의 길을 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8 전쟁을 준비하라
제목-전쟁을 준비하라
본문-요엘 3:9-15
최근, 이라크 전쟁으로 세계 질서가 미국 중심으로 재편되는 그런 중요한 시점에 전쟁복구사업, 이라크 현지의 치안유지 등의 문제가 국제사회의 큰 이슈로 떠올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사고 있습니다. 각 나라들도 이해득실을 따지면서 그들 나름대로의 정치력을 발휘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이 때에 우리나라도 미국으로부터 파병을 공식적으로 요청을 받고 있는 상태입니다. 미국은 우리나라가 약 3,000명에서 10,000명 정도 규모의 파병을 원하고, 그 병력의 수준도 특전사나 해병부대를 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국민의 여론도 찬반이 팽팽해서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그런 상황인데, 어제 한겨레신문 특집기사를 보니까 현재 국민들의 찬반양론 내용들을 자세히 소개해 놓았습니다. 파병 찬성론은 대개 우리가 이라크에 파병하면 먼저 한미동맹 관계가 강화되어서 한반도의 정치적 위협이 낮아진다는 것과 또한 우리나라의 대외신임도가 높아져서, 외국의 많은 기업들이 투자에 좀더 관심을 가질 것이고, 한국에 투자하고 있는 많은 고액주주들도 손을 떼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이라크 재건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국내 경제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며, 원유 수입 의존도가 무척 높은 우리로서는 안정적으로 원유를 공급받을 수 있다는 점 등이 강조되었습니다.
반면에 파병 반대론자들은, 경제적 이익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 막연한 추측에 불과한 것이며, 예를 들어 현대건설이 이라크 지역에서 엄청난 공사를 하고도 아직까지 후세인 정권에게서 공사대금을 받지 못했다는 것과 60세가 넘은 현대건설 사장이 부도위기를 막고자 미국까지 가서 수많은 관계자들에게 공사대금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눈물로 호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파병군인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날마다 현지 파병 미군들은 테러에 시달리고 있는데 통계에 의하면 일주일에 3명에서 6명이 사망을 하고 40명이 부상을 당하는 상황입니다. 이라크 주둔 미사령관 산체스 중장은 이라크 적들은 더 치명적이고 복잡하고 정교하게 테러를 감행하고 있다고 한탄하고 있음을 보아도 잘알 수 있습니다.
부시 미대통령이 이라크 전쟁이 끝났다고 선언한 이후 미군 약 90명이 테러로 사망을 했습니다. 그만큼 아직도 이라크는 파병군인들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없다라고 하는 말입니다. 또한 파병에 따르는 비용이 엄청나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놀랍게도 파병을 원하면서도 파병에 따르는 비용은 자국이 부담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약 3,000명이라고 하는 적은 숫자만 파병을 해도 연간 2,000억원 정도의 비용이 소요된다고 하는 놀라운 계산이 나왔습니다. 1만명 정도의 사단 규모가 파병된다면 그 규모는 엄청난 것으로서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만만치 않다는 주장입니다.
저는 오늘 이러한 국제정세를 예의주시하면서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너희는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물론 본문 9절에서 말하는 너희는 열국은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4절에서 이미 두로와 시돈, 그리고 블레셋을 열국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향해서 주님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전쟁을 준비하라’ 이 준비라고 하는 말의 본래적 의미는 선포하라는 의미가 본문에 더 가깝습니다. ‘너희는 전쟁을 선포하라....’ 모든 사람에게 전쟁의 시작을 알리고 용사, 무사, 그들을 격려하고 가까이 불러서 전쟁에 참여하게 하라. 즉 모든 인적자원들을 총동원하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10절에 보면 ‘너희는 보습을 펴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창을 만들라’라고 말합니다. 전쟁의 도구로 만들 수 있다면 농사의 도구까지 동원하라는 것입니다. 마치 1943년 이후 일본의 전쟁능력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모든 국민들, 심지어 한국인들의 숟가락, 젓가락까지도 금속으로 된 것이면 모두다 빼앗아 군사의 도구로 만들어 사용했던 그 때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이사야 2장 2절 이하에 보면 ‘그 날에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 것이며,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평화의 세계를 향한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은 반대로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칼을 만들라.... 그렇다면 열국들이 이렇게 전쟁을 준비하여 하나님의 백성들과 대항하여 싸워 이길 수 있느냐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11절 중반에 보면 ‘여호와여 주의 용사들로 그리로 내려오게 하옵소서’ 지금 열국들이 보습을 쳐서 낫을 쳐서 칼과 창을 만들고 그리고 용사들과 무사들을 격려해서 전쟁을 선포하고 이스라엘을 향해서 쳐들어 올 때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상황을 보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은 지금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전쟁을 하자는 거예요. 한 번 전쟁을 해 보자. 전쟁에서 이겨야 평화가 오고, 전쟁을 통하여 우리가 원하는 세계가 만들어 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지금은 호전적인 분위기가 세계 각처에서 힘을 얻고 있는 시기인것 같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사실 오늘 말씀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 해답이 11절 중반에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용사들로 그리로 내려오게 하옵소서’ 여기서 주의 용사들이란 하나님의 천군천사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불법을 행하는 자 마다 다 가두어 풀무에 던져 넣으리라. 그러나 의인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햇빛처럼 빛나리라 할렐루야!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 날에, 여호와의 날에, 심판의 날에 의인과 악인이 어떻게 되어질 것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은 풀무에 던져질 것이고, 의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해처럼 빛나리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러한 전쟁의 때에 하나님 앞에 제일 먼저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여 이 전쟁에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여 주시옵소서라는기도인줄로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기도하면 이 역사와 세계의 흐름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임할 줄로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역사의 주관자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이 역사의 방관자나 구경꾼이 아닙니다. 나라고 하는 개인을 비롯해서 우리의 가정, 우리의 삶, 그리고 나라와 민족 이 세계를 불꽃 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열국들은 전쟁을 준비하고, 용사와 무사를 동원하고, 보습과 낫을 쳐서 칼과 창을 만드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들에게 유익하다면 모든 것을 총동원하는 시대, 자국 이해를 위해서는 정치, 경제, 군사, 심지어는 종교까지도 동원하는 시대에 우리는 직면해 있습니다.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는, 석유 때문에 군사를 동원하는 전쟁, 즉 경제적인 논리에 군사적인 방법이 사용되는 불법 전쟁이라는 여론이 프랑스, 독일을 중심으로 해서 형성 되었지만, 막상 미국이 강력한 현대무기로 승리하고 나니까 그들의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제는 우리도 좀 끼워주었으면 하는 자세로 재건사업에 미국의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입니다. 세계 정치 질서의 중심에는 언제나 경제 즉 돈이 최고의 가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세계의 현실입니다.
지금 두로와 시돈, 블레셋으로 대변되는 열방, 그 열방들이 우리의 주변에도 그 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그렇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 때에 우리 성도들이 해야 할 모습은 무엇입니까 이러한 때에 우리가 해야할 가장 우선적인 자세는, 우리도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창을 만들자고 하는 것보다는, 먼저 여호와여 주의 용사들을 그리로 내려오게 하옵소서하는 영적 분별력과 주님을 행한 강력한 신뢰가 우선되어야 할줄로 믿습니다.
주의 용사들을 보내달라고 하는 이 말씀의 의미는 뭐예요 이 중요한 국가적 위기에서 제일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 할 자세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라는 거지요. 11절 이하는 기본입니다. 하나님이여, 성도 여러분 성숙한 성도가 내리는 마지막 결론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하나님, 이 삶의 어렵고 복잡한 이 상황에 주님께서 개입하여 주시옵소서인줄로 믿습니다.
사실 현대인들처럼 다른 사람의 간섭을 받기 싫어하는 사람들도 없어요. 어린이들도 두 말하면 잔소리라고 말하고, 세 마디하면 설교하지 말라고 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마지막 우리의 삶의 위기에서 구해야 할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직접적으로 간섭하시고 주장하여 달라는 간구이어야 합니다. 곧 너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고 하신 말씀의 실천적 결단인 것입니다.

13절에서 말씀합니다.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여기서 너희는 하나님의 천군천사 주의 용사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당신의 용사들을 불러서 이제 그들을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낫을 쓰고, 그들을 위해서 심판의 도구를 쓰라는 거예요. 포도주와 모든 곡식들을 추수하기 위해서 농부에게 낫이 추수의 도구인 것처럼 하나님의 용사들, 심판의 용사들에게 심판의 도구로 하나님께서 지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많으며, 사람이 많으며, 어디 가나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표현됩니까 심판 받아야 할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죄악 속에서 헤메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하나님 뜻에 응답할 만한 사람이 많지 않아서 선지자들은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니면서 사람을 찾습니다. ‘지금 뭐하고 계시나요’ ‘내가 사람을 찾습니다’ 희랍에 어느 철학자도 그랬다고 그러지요. 그 분이 아마 성경을 읽은 것 같습니다.
자, 오늘 우리가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역설적으로 말씀하시는 내용, ‘전쟁을 선포하라’ 그 말은 결국 너희가 하나님 앞에서 물질과 인간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나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그들이 도전한다고 하면 결단코 심판을 면치 못하리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해야 할 우리의 삶의 모습은 바로 전쟁이 아니라 평화인 줄로 믿습니다. 인간의 무기에 많고 적음이 전쟁의 승패가 아니라는 것을 다윗은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그 어린 다윗, 그 청소년 다윗이 분명하게 말합니다. 전쟁은 칼과 창에 수훈에 있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은 말합니다. 어느 나라의 무기가, 어느 나라의 숫자가 더 많은가 이것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려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서 그 뜻을 우리의 뜻으로 삼는 일은 결코 쉽지 않지만 그러나 오늘 주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전쟁을 통한 평화가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먼저 진정으로 주의 말씀으로 회복되기를 원해서 그들의 삶이 변해질 때에 그들을 통해서 세상이 변화됨을, 그리고 이 세상에 수많은 국가들, 특별히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으로 대변되는 열국들에게도 전쟁을 통한 무기와 그들의 용사를 통한 그들의 의도는 결단코 성공할 수 없다고 하는 경고를 오늘 주님은 다시금 이 세상을 향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평안의 성도들에게 참으로 평안과 사랑의 삶, 친교와 하나됨의 삶을 위해서 좋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운동회라고 하는 것도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정의합니다. 약속된 전쟁이라, 운동회라고 하는 것이 약속된 전쟁이라 규칙이 있는 전쟁이라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권투라면 선수가 어퍼컷을 맞고 손이나 혹은 무릎이 땅에 닿으면 그것은 다운으로 치자. 세 번을 카운트 하거나 혹은 열 번을 카운트해서 일어나지 못하면 그것은 KO된 것으로 보자. 이런 약속과 법을 가지고 있는 전쟁이라는 거지요. 그러나 우리는 운동회를 전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늘 여러분들에게 나누는 말씀은 이 운동회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됨을 얻어보자는 거지요. 열심히 응원하면서, 열심히 격려하면서, 열심히 뛰면서 하나의 기쁨을 얻어보자는 것입니다.
오늘은 교회가 창립된 지 20주년이 되는 15번째 전교인초청운동회입니다. 우리 유치부부터 우리 장년에 이르기까지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모두가 다 한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 각박해서 네가 죽어야 내가 살고, 네가 져야 내가 이기는 이런 제로선 게임에 우리가 서있지는 않은지, 우리 평안의 공동체가 운동회를 통해서 윈-윈게임을 할 수 있는, 너도 기쁘고 나고 기쁘고, 너도 승리자요 나도 승리자가 되는 진정한 평안의 공동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우리에게 친교와 사랑의 기회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세상은 전쟁을 준비하고, 전쟁을 통해서만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선언하고, 설득하고, 그것이 힘을 얻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오히려 열국을 향해서 너희는 전쟁을 선포하라고 말씀을 합니다. 그러나 그 역설적인 말씀을 통해서 너희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무력으로 핍박할 때에, 거기에서 얼마나 큰 하나님의 심판을 임할 것인가를 주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그들은 풀무에 던져지리라. 하나님 아버지, 이러한 때일수록 더욱더 사랑과 은혜와 하나됨을 잃어버리지 아니하도록 주님 우리의 중심을 붙잡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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